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머리카락 깔았잖아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박한빈은 결국 약속 장소에 나왔다.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안녕하세요, 박 대표님.”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기억하시겠죠? 단예진이에요.”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해주었다.“그날 가면무도회에서 우리 춤도 췄었잖아요.”“예진 씨, 반갑습니다.”박한빈은 그날의 가면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간단히 악수했다.“그날 왜 갑자기 가셨나요?”단예진이 다시 물었다.“급한 일이 생겨서요.”“정말요?”단예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박한빈은 다소 불편해졌다.그 불편함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주는 어떤 느낌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박한빈은 영리한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지 않았지만 자기만 아는 듯이 굴면서 교묘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싫어했다.다행히 단예진은 그 주제를 더 파고들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그들은 같은 대학에 다녔었고 단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오래된 인연이 있어 대화 소재는 끊이지 않았다.비록 박한빈은 내심 지루했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단예진이 꺼낸 주제에 맞장구를 쳤다.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분위기는 한 번도 가라앉지 않았다.계산서가 나왔을 때, 단예진은 갑자기 두 장의 음악회 티켓을 박한빈 앞에 내밀었다.“아주머니께 들었는데 박 대표님이 음악회를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제게 표가 두 장 있어서요. 박 대표님,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단예진의 초대는 솔직하고 담백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유리가 생각났다.성유리와 단예진은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성유리는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약속을 먼저 잡는 법도 없었다.화가 났을 때조차 그녀는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성유리도 자신처럼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성유정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런데 전 왜 두 분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정보력이 부족하신 거겠죠.”단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말에 성유정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멍하니 멀리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한빈 오빠?”성유정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할 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먼저 가실래요?”그러나 단예진이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건넸다. 성유정은 그녀의 말에 당황했지만 그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단예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단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박한빈은 성유정을 남기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성유정은 그를 따라가려 했으나 단예진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유정 씨, 아직 뭐 볼일이 남았나요?”“한빈 오빠 만나러 갈 거예요. 그쪽이 뭔데 날 막아요?”“아참, 유정 씨가 무열 씨와 약혼한다는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단예진의 말에 성유정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단예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기세였다. 반면에 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한빈 오빠는 그쪽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성유정이 갑자기 말했다.“정말요?”“오빠는 시끄러운 여자를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난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함께 자랐어요. 그런 감정은 그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그런데 한빈 씨는 왜 유정 씨 언니와 결혼했을까요?”“그건... 아무튼 오빠는 성유리를 좋아하지 않아요.”“그렇겠죠. 아니었으면 이혼했겠어요? 안 그래요?”성유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유리 씨는 꽤 조용한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유정 씨는 한빈 씨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네요?”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유정은 더
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임정우를 한참 동안 바라본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정우 씨도 제 상황을 아시잖아요?”“알죠. 전에 몇 번 연회에서 본 적도 있잖아요?”“저 이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성유리가 덧붙였다.“네, 들었어요. 박한빈과 그렇게 결단력 있게 이혼하시다니, 존경스러워요.”성유리가 하는 말에 임정우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유리는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결국 성유리는 말했다.“저는 당분간 연애에 대해 생각할 마음이 없어요.”“그래요? 그럼 연애는 안 해도 돼요.”임정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친구로 시작해도 괜찮잖아요.”성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로 알게요? 갈까요, 이제?”임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성유리는 놀라며 두 발짝 물러났다.그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그래요? 제 손에 독이라도 있나요?”“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그래요? 무슨 일인데요?”“그냥 직업상 일 때문에요.”“직업이 있었어요? 어떤 일인데요? 아니면 그냥 핑계로 저 피하는 건가요?”성유리는 미소로 답했다.“그렇죠? 역시 핑계였네요.”임정우는 예상했다는 듯 시원하게 인정하며 말했다.“그러니까 저랑 나가는 게 별로라는 거죠?”“우린 맞지 않아요.”“서로 맞지 않다고요? 우리 아직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알아요?”“제가... 성격이 너무 어두워서요. 정우 씨가 안 좋아할 거예요.”“그래요? 근데 전 그냥 억눌린 것 같던데요?”임정우는 웃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그날 춤을 출 때처럼 조금 편하게 생각해요. 사실 유리 씨는 정말 매력이 넘쳐요.”성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그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임정우는 계속해서 말했다.“영화는 취소하죠. 대신 저녁 식사는 어때요? 제가 아주 재밌는 곳으로 데려갈게요. 스트레스 확 풀리는 곳이에요, 괜찮죠?”성
성유리가 임정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도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예요!”…한편 박한빈은 시월파크 서재에 앉아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끊임없이 옆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가끔 메신저 알림이 뜨긴 했으나 박한빈은 한 번 흘끗 보고는 바로 무시했다.밤 11시가 넘자 드디어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박한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성유리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먼저 그의 침실로 갔다가 아무도 없자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시간이 2분 더 지나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아직도 일하고 있어요?”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온 듯 머리가 반쯤 젖은 상태였고 손가락은 불안하게 움츠러들어 있었다.“저녁에 메시지를 못 봤어요.”그녀가 말을 덧붙였다.“확인하자마자 바로 왔어요. 미안해요...”박한빈이 그녀를 내쫓지 않자 성유리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그러나 그녀는 선을 지키며 그의 컴퓨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에 멈춰 섰다.박한빈은 잠시 더 기다리더니 이내 성가신 듯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성유리는 그의 무릎 위로 넘어지듯 앉게 되었다.“어디 갔었어?”그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성유리를 피할 곳 없게 만들었다.“그냥... 밖에 좀 나갔어요.”“혼자?”“아니요, 친구랑요.”“어느 친구?”박한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지 성유리는 알 수
박한빈은 더 이상 성유리에게 그날 저녁 일에 관해 묻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이틀 후 임정우가 또다시 성유리에게 연락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성유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 일이 이렇게 단순하고 거침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임정우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노는 걸 좋아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다.어릴 때부터 금성에서 자랐고 그의 인맥은 넓었다.하지만 임정우는 화려한 클럽이나 고급 술집 같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언제나 오래된 골목이었다.어느 날은 맛집을 찾아다녔고 또 다른 날은 작은 소품을 사러 다녔다.이에 비해 박한빈도 같은 금성에서 자랐지만 그는 성유리를 한 번도 이런 곳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그들이 함께한 몇 번의 외식은 모두 고급스럽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만 이루어졌었다.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성유리가 그를 매운탕 집에 데려갔을 때였다.물론 그 매운탕도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고 끝났다.임정우는 그런 박한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에게는 그 바닥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냉정함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었다.임정우가 성유리에게 했던 말도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그저 친구가 되어 몇 번 만나면 서로를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성유리는 그를 만날 때마다 확실히 즐거웠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즐거움이었다.아무 걱정도, 신경 쓸 것도 없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행복이었다.물론 박한빈은 이들의 만남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리고 임정우를 만날 때면 성유리는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박한빈의 메시지에 더는 답을 미루지 않았다.오늘도 임정우는 성유리를 데리고 나왔다.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오락실에서 그는 아이들 틈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성유리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섰다.임정우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 인형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임정우는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즉시 눈치챘다.“무슨 일이에요?”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요?”“아무 일도 아니에요. 우리 그냥 가요.”임정우는 갑자기 초조해져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방금 누가 저를 치고 지나갔어요.”성유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임정우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누구예요?”“네?”“누가 그랬냐고요!”임정우는 말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때마침 방금 성유리를 건드렸던 그 남자가 또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며 뻔뻔하고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저 자식이에요?”임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하지만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정우는 이미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코에 주먹을 냅다 꽂아 넣었다.“야, 이 새끼야!”…“대표님, 그림이 이미 도착했습니다. 이건 검수 확인서입니다.”서훈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박한빈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까 사모님이 전화하셨는데 대표님이 안 작가님의 작품을 낙찰받으신 걸 알고 계신 듯합니다. 그리고 요즘 별다른 일정이 있는지도 물으시더군요.”박한빈은 고개를 들고 서훈을 바라보았다.서훈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박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서훈은 그런 박한빈을 보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대표님, 이 그림은...”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서훈은 오랫동안 박한빈을 보좌해왔지만 이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임정우가 건넨 외투를 걸치고 손에 든 따뜻한 차를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임정우는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왔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우세를 점했는데 상대방이 많았던 탓에 곧 몇 명이 그를 둘러싸며 상황이 불리해졌다.성유리는 그를 도우려 했지만 임정우는 끝까지 그녀를 뒤로 막아섰다. 만약 오락실 직원들이 빠르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요. 전 괜찮으니까.”임정우는 경찰에게 진술하던 중에도 성유리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성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든 순간 마치 눈앞에 무언가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 듯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하얘졌고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임정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 성유리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얹혔다.“안녕하세요. 성유리 씨를 보석하러 왔습니다.”낯선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경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누구십니까?”남자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가 임정우가 잡고 있던 손에 멈췄다. 그 차가운 눈빛 속에 잠시 감정이 드러나는 듯했지만 곧 다시 평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저는... 성유리 씨 전남편입니다.”그 말에 경찰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다른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나와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안녕하십니까!”짧은 인사가 오간 뒤 박한빈은 보석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가자.”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그의 깊은 눈빛 속에는 성유리만이 알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겁이 났다.“먼저 가세요, 유리 씨. 전 괜찮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성유리는 말하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그러자 앞에 있던 소방원은 조용히 자신이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어서 건넸다.그녀는 소방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방독면을 건네받지 않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싫어요.”“만약 박한빈 씨가 안에 있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라면... 그냥 같이 갈래요.”성유리의 말에 소방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리야.”남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행여나 자신이 환청일까 봐 두려워 고개를 돌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성유리.”그가 성유리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치기 전까지는.그녀가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토록 찾았던 박한빈이 그곳에 서 있었다.그는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하얀 옷 위에 까만 자국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까만 자국이 아닌 핏자국이었다.평소 정갈한 모습과는 달리 한껏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급박했던 현장 상황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멍하니 박한빈을 바라보다 환각이 아님을 깨닫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당시 박한빈은 이미 다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성유리가 달려와 끌어안을 때, 그 힘에 배 위에 나 있던 상처 부위가 찢어져 버렸다.꽤 강한 고통이 느껴짐에도 박한빈은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성유리를 안아줬다.이미 그녀의 눈물은 박한빈의 셔츠를 다 적셨고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많이 무섭고 놀랐나 보네.’두 사람의 몸이 가까이 닿는 순간, 그들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걱정 많이 했어?”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그렇게 쉽게 안 죽어.”“난 방금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숙여보자 그녀는 이미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뭐지?’그가 손에 힘을 살짝 푸는 순간 성유리는 픽 쓰러져버렸다.깜짝 놀란 박한
불길은 멈출 기미가 없이 점점 활활 타올랐다.이곳의 건물들은 거의 다 붙어있는 형식이기에 어느 한 집에 화재가 발생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온 촌이 다 불타기도 했다.주위에 거주하던 촌민들은 이미 다 대피를 한 상태지만 불길이 제일 센 그 집에서는 아무도 도망 나오지 않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집 안에 있다고 확신했다.웬일인지 순간 성유리는 이 며칠 동안 박한빈과 발생했던 일들이 떠올랐다.마지막으로 본 건 승마장에 갈 때였다.박한빈이 애써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성유리는 계속 그의 말을 끊어버렸었다. 그때 그녀는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에.그래서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 또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이 말을 꺼낼 때마다 성유리는 조용히 하라고 심술을 썼다.승마장 이후로 박한빈과 대화를 나눈 건, 영상통화로 자신이 있는 곳에 오라고 할 때였다.성유리는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알고 있었고 박한빈이 은근슬쩍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성유리는 듣기 좋은 말 한마디도 없이 박한빈을 거절해 버렸다.지금은?성유리가 말해주고 싶어도... 박한빈이 못 들을지도 모른다.‘지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머리론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경찰들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을 통제한다는 것도.그러나 성유리는 본인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박한빈과의 일상들이 떠올랐고 다리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이건 몸의 본능이다.마치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애를 써도, 수백 번 박한빈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해도 결국 박한빈의 옆에 돌아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이런 감정은 성유리의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본능적인 마음이 되었다.화재로 인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성유리는 호흡마저 가빠졌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박한빈의 이름을 외쳤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하게도 없었다.이미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성유리는
“진병오 씨,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걸음을 멈춘 박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다 당신과 피와 살을 나눈 형제들이죠. 그들이 여기서 죽기를 바라지 않지 않습니까?”“그리고 다시 말해 당신 형이 당신 때문에 죽었는데 정말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진병오 씨가 죽으면 당신 형수의 삶은... 더 좋아지겠죠.”박세빈은 말하며 옆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휙 돌렸다.후자는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된 얼굴로 있었는데 마치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안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진병오는 이를 꽉 깨물고 있다 천천히 입을 뗐다.“나는 상관하지 말고 박한빈 이 인간부터 죽여!”그의 한 마디에 망설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한빈에게 달려들었다.결국, 박한빈은 앞에 있던 남자를 툭 차버린 뒤 의자 하나를 끌어당겼다.그리곤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사실 그는 오래전 담배를 끊은 상태였다.하지만 성유리가 선물로 준 라이터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라이터는 온전했다.박한빈이 라이터를 살짝 누르자 이내 파란 불이 나왔고 그의 행동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얼어붙었다.특히 박세빈.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그는 몇 초간 굳어있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얼른 저 사람 막아!”다리가 불편한 박세빈은 빨리 다가가 박한빈을 막기에 부족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박세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한빈은 눈앞에 있던 커튼에 불을 붙였고 문도 잠가버렸다.방안 구조를 틈틈이 관찰한 박한빈은 비록 장식이 다 새롭기는 했지만 나무판자들은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렇기에 이런 집은..,불이 한번 붙으면 통제하기가 어려웠다.박한빈이 굳이 다른 짓을 더 하지 않아도 불길은 마구 솟아 집을 통째로 삼켜버렸다....“불이야!”성유리가 촌 어구에 갓 도착했을 때, 이 목소리를 마침 들었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촌을 쳐다봤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그 목소리에 박한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그가 고개를 들 때, 사람들 틈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왜냐하면 모자 뒤에 숨겨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박한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당연하게도 몇 년 동안 강한 햇볕 아래에서 생활한 터라 그의 피부는 눈에 띠게 건조해졌고 목소리도 예전과는 달리 듣기 싫을 정도로 잠겨있었다.사람들이 박세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 박한빈의 시선은 그의 다리로 향했다.하지만 그는 박한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피식 웃더니 자신의 바지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드러난 건, 장애인들이 쓰는 가짜 다리 즉 의족이었다.“아, 안 죽었었구나.”박한빈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맞아요. 전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습니다. 실망이 크십니까?”박세빈은 여전히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자신에 의해 제압당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쟤가 바로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지시한 사람입니까?”“아마 아닐걸? 당신은 쟤랑 너무 어색해 보이는데.”“게다가 이때쯤이면 해외에 있어야 하지 않나?”뒤의 말들은 박한빈이 박세빈한테 하는 말이었다.“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여기에 나타날 수 있다는 건 누가 너를 돕고 있다는 증거겠지. 내가 한번 맞춰볼까? 그 사람 혹시... 연정우 씨야?”박한빈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세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역시 그 사람이 맞나보군. 근데 이제야 기사회생을 한 사람이 이런 멍청한 짓을 꾸며낼 리가 없을 거야. 그러니 너라는 패를 이용해 죄를 짓는 거겠지. 필경... 넌 정말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박세빈은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못 본 몇 년 사이에 형님은 더 똑똑해지셨습니다? 역시 이래서 박한빈 박한빈 하나 봅니다.”“사실 전 원래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다리는 부실
“이렇게 오래 앉아계셨는데 배고프시죠?”여자는 억지로 준비한 음식을 박한빈의 손에 쥐여주며 계속 말했다.“얼른 이거라도 드세요!”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손을 뻗어 여자가 준비한 음식을 던져버렸다.“내 몸에 손대지 마.”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바닥이 떨어지는 소리에 밖에 있던 남자가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십니까?”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물었는데 어찌나 다정한지 모르고 보면 남편 같았다.하지만 여자는 당황해하며 자기 손을 빼내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면을 쏟아버려서...”여자의 말에 남자는 밑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발견하곤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리더니 박한빈을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이러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만 봤다.분명 남자가 서 있었고 밖에 그의 형제들도 어마무시한 도구들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박한빈의 기세에 놀란 듯 움츠러들었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큰일 났습니다! 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한 것 같아요.”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바로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경찰에 신고하라고 시켰습니까?”이 소식은 박한빈에게도 의외였기에 그도 지금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미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르던 비서 서훈이 이런 경거망동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게다가 박한빈이 지금 사람들에 의해 감금돼 있는 상황인데 경찰에 출동하면 더 위험해지지 않겠는가?그러니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서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박한빈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해 그를 죽이려는 셈이었을까?“시*!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어.”제일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박한빈을 죽일 듯 다가오는 그때, 박한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무릎을 강하게 찼다.꽤 센 힘에 남자가 바로 주저앉아
박한빈은 지금 마당을 마주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앞쪽의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마당에는 몇 사람이 괭이와 쇠망치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그들은 혹시라도 그가 도망칠까 봐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오히려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이 지키고 있지 않아도 애초에 뛰쳐나갈 생각이 없었다.왜냐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사실 이 보상금 처음부터 저한테 얘기하셨으면 안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뒤에서 당신들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그 말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당신 형의 죽음, 혹시 숨겨진 진실이 더 있는 건 아닙니까?”박한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희 형은 당신이 죽인 거잖아요. 당신 같은 파렴치한 개발업자들은 돈만 되면 뭐든 하는 놈들이잖아요! 안 그랬으면...”“그래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입막음 돈을 받았으니까.”박한빈이 남자의 말을 끊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만,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정해진 게 있는 법이죠. 당신이 가져서는 안 될 걸 억지로 가지려고 하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놓여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쾅.작은 소리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제 쪽에 있는 사람이 곧 돈을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 보세요.”박한빈은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 상대방에게는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이 상황에서 그가 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걸 장악하고
성유리는 다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하늘이는 조금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고 성유리의 시선이 닿자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엄마, 난 동생이 갖고 싶어. 근데 남동생 말고 여동생이었으면 좋겠어.”...결국, 성유리는 혼자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마침 꽃집이 보여 잠시 들러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 꽃을 들고 공항에서 서 있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내가 왜 박한빈 씨한테 꽃을 주려고 했지?’하지만 이미 꽃을 손에 든 상태였고 예쁜 꽃다발을 그냥 버리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들고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더 항공편이 도착했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오는 게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박한빈을 찾을 수 없었다.오랜 시간 기다린 성유리는 조금씩 지쳐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그래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그 숫자를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곧장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박 대표님 부인되시죠?”상대는 여자였다.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누구시죠?”“하하, 당신 남편이 지금 우리 쪽에 있어요. 그렇게 잘 나신 사장님이 겨우 백만으로 우리를 내쫓으려 하다니... 이거 저희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말해두는데 제 남편이 죽었어요. 이 일... 몇백만은 받아야 끝낼 수 있을 거예요!””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죠?”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온 성유리가 급히 물었다.“박한빈 씨는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걱정 마세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다만, 지금은 보낼 수 없다는 것뿐이죠.”“당장 돈을 들고 이곳으로 오세요. 저희는 오백만 원을 요구해요. 그것도 현금으로요. 알아들었어요?”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멍해 있던 성유리의 핸드폰에 곧이어 서훈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