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날이 어두워지고 밖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녁 러시아워의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번잡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지화그룹 건물은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은 액자처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라이터를 손에 쥐고 거듭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한번 또 한 번...박한빈은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지금 떠오르는 건 그저 웃지 않던 얼굴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모습뿐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다.부자의 유대감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적어도 평범한 아버지였고 어머니와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다.그게 아니고서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까.처음 그에게 성유리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는 자신이 거짓말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똑딱이던 박한빈은 라이터를 책상 쪽으로 던지고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오 기사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박한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다가갔지만 박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오 기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액셀을 밟았고 곧바로 시월 파크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한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공허함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불을 켜고 보니 성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어젯밤 성유리가 자신을 물었기에 그는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은 욕실에서 끝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울면서 고개를 흔들며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숱한 말들을 뱉었던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적어도 여
박한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유혹을 받아왔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수였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은 들리는데 받는 사람이 없자 박한빈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일그러졌다.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는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박한빈의 차와 한눈에 봐도 돈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의 옷을 보며 여자는 결국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갔다.“성유리 씨랑은 무슨 관계예요? 친구? 근데 지금 그쪽 전화 받을 시간이 있겠어요?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왔다는 건 남자랑 데이트하러 간 것 같은데? 미리 알려주는데 그 여자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뒤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노는데, 내가 아침에 글쎄...”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차갑고 매서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녀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그녀도 나름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고 자부하며 지독하게 싸우는 양아치들도 본 적이 있지만 눈빛 하나로 이토록 강한 위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마치 그녀가 한 마디만 더하면 그가 정말로 죽일 것 같았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둔 뒤 곧바로 열쇠 전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기사가 와서 집주인이나 임대인인 걸 증명할 서류를 보여줘야 문을 열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하고 박한빈은 별말 없이 지니고 있던 모든 현금을 던져준 뒤 덤덤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열어.”기사는 이곳의 집 몇 채나 살 수 있는 그의 시계를 슬쩍 보고는 얼른 돈을 받고 문을 열었다.지난번에 성유리에게 잠금장치를 바꾸라고 충고했는데 그녀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느슨해진 열쇠 구멍은 기사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열 수 있었고 박한빈의 성의가 있으니 특별히 도어락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박한빈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그가 일을 마치자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닫아버렸다.문밖에 있던
박한빈은 휴대폰 화면을 먼저 흘깃 쳐다본 뒤 이렇게 물었다.“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왜 멋대로 열쇠를 바꿔요?”“대답부터 해.”박한빈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와 끝까지 따지고 들려다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친 뒤 마침내 말을 꺼냈다.“병원에요.”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그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오늘 오후에 엄마가 깨어났다고 하던데 내가 갔을 때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다시 깨어나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어요.”나지막한 성유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얼음장 같던 박한빈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이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전화는 왜 안 받아?”“무음으로 해놔서 못 봤어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물었다.“이제 들어가도 돼요?”그제야 박한빈은 몸을 옆으로 돌려 성유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성유리는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들고 있던 에코백을 내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박한빈도 모른다.그저 시월 파크에 혼자 있기 싫고 도연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한참을 차를 몰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나 배고파.”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네?”“뭐 좀 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식탁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비좁은 성유리 집에 고작 60센티미터 남짓한 식탁 앞에 앉으니 그는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성유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왜 아직도 먹을 것을 준비해 주지 않냐고 다그치는 눈빛이었다.성유리는 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비해 주는 도연제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쯤 되니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그와 다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뭐 먹고 싶어요? 배달시킬게요.”“배달 얼마나 걸리는데? 난 지금 바
박한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성유리도 따라 내려놓았다.“이제 가도 되죠?”성유리는 곧바로 그를 내보내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갑작스럽게 물었다.“왜 시월파크에 안 살고 여기서 지내?”“거긴 내 집이 아니잖아요.”성유리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박한빈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맞추고 난 후 말했다.“집을 너한테 넘겨줄 수도 있어.”“괜찮아요. 난 여기가 좋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미간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아직 더 할 말이 남았어요?”성유리가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깨끗한 수건 좀 줘.”말을 마치고 그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성유리는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 여긴 내 집이라고요!”“시월파크는 내 집인데 너도 거기서 씻고 자고 했잖아?”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박한빈은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을 둘러본 박한빈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곳에 욕조가 없는 건 당연했지만 박한빈은 여기에 샤워실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목욕하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세면대와 변기를 하나의 커튼으로 구분해 놓은 게 전부였다.“여긴 박 대표님 같은 분에게 안 어울려요.”성유리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박한빈은 성유리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표정을 본 그는 더욱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적응 안 되는 곳이긴 하네. 그래도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그리 나쁘진 않지.”“지금 뭐라고...”성유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확 끌어당겨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샤워기를 틀었다.차가운 물이 가열되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성유리의 머리카락과 옷을 흠뻑 적셨다.“뭐 하는 거야!”성유리는 버럭 소리쳤다.하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샤워기를 옆
박한빈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으려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내가 오늘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에게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슨... 소리예요?”“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박한빈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왜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였을 때조차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묻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녀보다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며칠 동안 마주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그런 부부 관계였으니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새삼 우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성유리에게 자신의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뭔가 불편했다.“어떻게 알았어요?”성유리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요?”“모른대. 하지만 어머니랑 할머니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박한빈은 말할수록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성유리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박한빈이 눈을 내리깔고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동정하는 거야?”“아니요...”성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한빈 씨를 동정할 자격이 있나요?”사실 그녀는 여전히 어젯밤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박한빈은 그걸 느낀 듯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지만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성유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완전히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 탓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겼다.“이제 그만해도 되겠지.”성유리는 그가 잡고 있던 수
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머리카락 깔았잖아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박한빈은 결국 약속 장소에 나왔다.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안녕하세요, 박 대표님.”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기억하시겠죠? 단예진이에요.”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해주었다.“그날 가면무도회에서 우리 춤도 췄었잖아요.”“예진 씨, 반갑습니다.”박한빈은 그날의 가면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간단히 악수했다.“그날 왜 갑자기 가셨나요?”단예진이 다시 물었다.“급한 일이 생겨서요.”“정말요?”단예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박한빈은 다소 불편해졌다.그 불편함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주는 어떤 느낌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박한빈은 영리한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지 않았지만 자기만 아는 듯이 굴면서 교묘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싫어했다.다행히 단예진은 그 주제를 더 파고들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그들은 같은 대학에 다녔었고 단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오래된 인연이 있어 대화 소재는 끊이지 않았다.비록 박한빈은 내심 지루했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단예진이 꺼낸 주제에 맞장구를 쳤다.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분위기는 한 번도 가라앉지 않았다.계산서가 나왔을 때, 단예진은 갑자기 두 장의 음악회 티켓을 박한빈 앞에 내밀었다.“아주머니께 들었는데 박 대표님이 음악회를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제게 표가 두 장 있어서요. 박 대표님,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단예진의 초대는 솔직하고 담백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유리가 생각났다.성유리와 단예진은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성유리는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약속을 먼저 잡는 법도 없었다.화가 났을 때조차 그녀는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성유리도 자신처럼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