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성유리도 따라 내려놓았다.“이제 가도 되죠?”성유리는 곧바로 그를 내보내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갑작스럽게 물었다.“왜 시월파크에 안 살고 여기서 지내?”“거긴 내 집이 아니잖아요.”성유리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박한빈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맞추고 난 후 말했다.“집을 너한테 넘겨줄 수도 있어.”“괜찮아요. 난 여기가 좋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미간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아직 더 할 말이 남았어요?”성유리가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깨끗한 수건 좀 줘.”말을 마치고 그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성유리는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 여긴 내 집이라고요!”“시월파크는 내 집인데 너도 거기서 씻고 자고 했잖아?”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박한빈은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을 둘러본 박한빈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곳에 욕조가 없는 건 당연했지만 박한빈은 여기에 샤워실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목욕하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세면대와 변기를 하나의 커튼으로 구분해 놓은 게 전부였다.“여긴 박 대표님 같은 분에게 안 어울려요.”성유리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박한빈은 성유리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표정을 본 그는 더욱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적응 안 되는 곳이긴 하네. 그래도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그리 나쁘진 않지.”“지금 뭐라고...”성유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확 끌어당겨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샤워기를 틀었다.차가운 물이 가열되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성유리의 머리카락과 옷을 흠뻑 적셨다.“뭐 하는 거야!”성유리는 버럭 소리쳤다.하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샤워기를 옆
박한빈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으려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내가 오늘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에게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슨... 소리예요?”“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박한빈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왜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였을 때조차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묻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녀보다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며칠 동안 마주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그런 부부 관계였으니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새삼 우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성유리에게 자신의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뭔가 불편했다.“어떻게 알았어요?”성유리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요?”“모른대. 하지만 어머니랑 할머니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박한빈은 말할수록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성유리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박한빈이 눈을 내리깔고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동정하는 거야?”“아니요...”성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한빈 씨를 동정할 자격이 있나요?”사실 그녀는 여전히 어젯밤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박한빈은 그걸 느낀 듯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지만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성유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완전히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 탓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겼다.“이제 그만해도 되겠지.”성유리는 그가 잡고 있던 수
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머리카락 깔았잖아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박한빈은 결국 약속 장소에 나왔다.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안녕하세요, 박 대표님.”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기억하시겠죠? 단예진이에요.”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해주었다.“그날 가면무도회에서 우리 춤도 췄었잖아요.”“예진 씨, 반갑습니다.”박한빈은 그날의 가면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간단히 악수했다.“그날 왜 갑자기 가셨나요?”단예진이 다시 물었다.“급한 일이 생겨서요.”“정말요?”단예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박한빈은 다소 불편해졌다.그 불편함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주는 어떤 느낌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박한빈은 영리한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지 않았지만 자기만 아는 듯이 굴면서 교묘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싫어했다.다행히 단예진은 그 주제를 더 파고들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그들은 같은 대학에 다녔었고 단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오래된 인연이 있어 대화 소재는 끊이지 않았다.비록 박한빈은 내심 지루했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단예진이 꺼낸 주제에 맞장구를 쳤다.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분위기는 한 번도 가라앉지 않았다.계산서가 나왔을 때, 단예진은 갑자기 두 장의 음악회 티켓을 박한빈 앞에 내밀었다.“아주머니께 들었는데 박 대표님이 음악회를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제게 표가 두 장 있어서요. 박 대표님,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단예진의 초대는 솔직하고 담백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유리가 생각났다.성유리와 단예진은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성유리는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약속을 먼저 잡는 법도 없었다.화가 났을 때조차 그녀는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성유리도 자신처럼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성유정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런데 전 왜 두 분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정보력이 부족하신 거겠죠.”단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말에 성유정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멍하니 멀리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한빈 오빠?”성유정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할 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먼저 가실래요?”그러나 단예진이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건넸다. 성유정은 그녀의 말에 당황했지만 그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단예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단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박한빈은 성유정을 남기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성유정은 그를 따라가려 했으나 단예진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유정 씨, 아직 뭐 볼일이 남았나요?”“한빈 오빠 만나러 갈 거예요. 그쪽이 뭔데 날 막아요?”“아참, 유정 씨가 무열 씨와 약혼한다는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단예진의 말에 성유정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단예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기세였다. 반면에 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한빈 오빠는 그쪽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성유정이 갑자기 말했다.“정말요?”“오빠는 시끄러운 여자를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난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함께 자랐어요. 그런 감정은 그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그런데 한빈 씨는 왜 유정 씨 언니와 결혼했을까요?”“그건... 아무튼 오빠는 성유리를 좋아하지 않아요.”“그렇겠죠. 아니었으면 이혼했겠어요? 안 그래요?”성유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유리 씨는 꽤 조용한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유정 씨는 한빈 씨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네요?”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유정은 더
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임정우를 한참 동안 바라본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정우 씨도 제 상황을 아시잖아요?”“알죠. 전에 몇 번 연회에서 본 적도 있잖아요?”“저 이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성유리가 덧붙였다.“네, 들었어요. 박한빈과 그렇게 결단력 있게 이혼하시다니, 존경스러워요.”성유리가 하는 말에 임정우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유리는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결국 성유리는 말했다.“저는 당분간 연애에 대해 생각할 마음이 없어요.”“그래요? 그럼 연애는 안 해도 돼요.”임정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친구로 시작해도 괜찮잖아요.”성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로 알게요? 갈까요, 이제?”임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성유리는 놀라며 두 발짝 물러났다.그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그래요? 제 손에 독이라도 있나요?”“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그래요? 무슨 일인데요?”“그냥 직업상 일 때문에요.”“직업이 있었어요? 어떤 일인데요? 아니면 그냥 핑계로 저 피하는 건가요?”성유리는 미소로 답했다.“그렇죠? 역시 핑계였네요.”임정우는 예상했다는 듯 시원하게 인정하며 말했다.“그러니까 저랑 나가는 게 별로라는 거죠?”“우린 맞지 않아요.”“서로 맞지 않다고요? 우리 아직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알아요?”“제가... 성격이 너무 어두워서요. 정우 씨가 안 좋아할 거예요.”“그래요? 근데 전 그냥 억눌린 것 같던데요?”임정우는 웃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그날 춤을 출 때처럼 조금 편하게 생각해요. 사실 유리 씨는 정말 매력이 넘쳐요.”성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그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임정우는 계속해서 말했다.“영화는 취소하죠. 대신 저녁 식사는 어때요? 제가 아주 재밌는 곳으로 데려갈게요. 스트레스 확 풀리는 곳이에요, 괜찮죠?”성
성유리가 임정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도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예요!”…한편 박한빈은 시월파크 서재에 앉아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끊임없이 옆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가끔 메신저 알림이 뜨긴 했으나 박한빈은 한 번 흘끗 보고는 바로 무시했다.밤 11시가 넘자 드디어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박한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성유리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먼저 그의 침실로 갔다가 아무도 없자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시간이 2분 더 지나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아직도 일하고 있어요?”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온 듯 머리가 반쯤 젖은 상태였고 손가락은 불안하게 움츠러들어 있었다.“저녁에 메시지를 못 봤어요.”그녀가 말을 덧붙였다.“확인하자마자 바로 왔어요. 미안해요...”박한빈이 그녀를 내쫓지 않자 성유리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그러나 그녀는 선을 지키며 그의 컴퓨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에 멈춰 섰다.박한빈은 잠시 더 기다리더니 이내 성가신 듯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성유리는 그의 무릎 위로 넘어지듯 앉게 되었다.“어디 갔었어?”그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성유리를 피할 곳 없게 만들었다.“그냥... 밖에 좀 나갔어요.”“혼자?”“아니요, 친구랑요.”“어느 친구?”박한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지 성유리는 알 수
박한빈은 더 이상 성유리에게 그날 저녁 일에 관해 묻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이틀 후 임정우가 또다시 성유리에게 연락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성유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 일이 이렇게 단순하고 거침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임정우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노는 걸 좋아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다.어릴 때부터 금성에서 자랐고 그의 인맥은 넓었다.하지만 임정우는 화려한 클럽이나 고급 술집 같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언제나 오래된 골목이었다.어느 날은 맛집을 찾아다녔고 또 다른 날은 작은 소품을 사러 다녔다.이에 비해 박한빈도 같은 금성에서 자랐지만 그는 성유리를 한 번도 이런 곳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그들이 함께한 몇 번의 외식은 모두 고급스럽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만 이루어졌었다.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성유리가 그를 매운탕 집에 데려갔을 때였다.물론 그 매운탕도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고 끝났다.임정우는 그런 박한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에게는 그 바닥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냉정함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었다.임정우가 성유리에게 했던 말도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그저 친구가 되어 몇 번 만나면 서로를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성유리는 그를 만날 때마다 확실히 즐거웠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즐거움이었다.아무 걱정도, 신경 쓸 것도 없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행복이었다.물론 박한빈은 이들의 만남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리고 임정우를 만날 때면 성유리는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박한빈의 메시지에 더는 답을 미루지 않았다.오늘도 임정우는 성유리를 데리고 나왔다.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오락실에서 그는 아이들 틈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성유리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섰다.임정우는
최정민이 용기를 내 다가가 박한빈을 한번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박한빈을 불렀다. “박 대표님!” 이번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박한빈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결국 너도 네 허리춤을 못 지킨 거야?”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최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최정민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는... 저는 제 의지로 박세빈 씨와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가 저를 취하게 만든 뒤 호텔로 데려가서 입에 못 담을 그런 사진들을 찍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박 대표님,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최정민은 말하며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들은 얼굴을 타고 목으로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박한빈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도 없어요. 박 대표님 말고는 이 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지만 박한빈은 빠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최정민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박세빈이랑 얘기해 볼게.” 박한빈의 말에 최정민의 눈빛이 즉시 반짝였다. “정말?” “응.”“고마워! 아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정민은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그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생각난 듯 멈췄고 결국 허공에 붕 뜬 손을 가만히 내렸다. 최정민은 다시 한번 박한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다 지화 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박세빈은 이미 사직한 상태지만 그래도 손에 주식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한빈을 발견한 박세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오셨어요?” “자. 다들 오셨으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여긴 제 여자 친구인 최정민이라고 합니다.” 박한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민을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세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최정민 옆에 앉았다. “난 형이 형수님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박세빈이 고개를 돌려 최정민에게 물었다. “아직 형수님 못 보셨죠?”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대답했다.“봤어요.” “그래요?” 박세빈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병원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마 거기서 본 거겠죠?” “형수님 임신하셨잖아요. 형은 거의 매번 산부인과 검진 때 따라간다던데요?” “솔직히 우리 형 정도의 위치에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죠. 우리 주변 사람들 봤으면 알 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돈도 얼마 없으면서 바깥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정민은 왜 박세빈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개만 숙인 채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세빈은 처음엔 흥분해서 말하던 중이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최정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그의 표정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하는 얘기 듣기 싫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최정민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박세빈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안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겁니까? 당신 혹시 제가 가진 게 뭔지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최정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
그 순간, 울리는 박한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의 평화가 깨버렸다. 그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결국 몸을 일으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마지막엔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긴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한빈은 성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네.” 성유리는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치 방금 전의 따뜻한 순간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이번 키스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깊고 따뜻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든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려 손으로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두 사람 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스치며 남은 흔적을 지웠다. “이제 갈게.” 박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손을 쳐다봤다.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순간 귀 끝까지 빨개져 손을 급히 뗐다. 박한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성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나 기다리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요.” 성유리는 대답하며 박한빈의 시선은 피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성유리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준 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실외는 실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박한빈도 밖에 나서자마자 너무 추워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 실내의 온기가 그리워진 박한빈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뭔데?” 박한빈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유효정이 한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연정우라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던데요?” “뭐라고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하던 행동마저 멈췄다. 하지만 성유리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걔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성유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그냥 헛소리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유효정이야 아니면 연정우야?”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다소 불쾌해졌고 불만이 가득한지 인상도 일그러졌다. “아까 분명히 유효정 씨라고 했잖아요.” “하하.”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반응은 분명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박한빈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책임을 다 연정우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할 테니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박한빈이 계속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본 성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그걸 믿은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성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 데요?” 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녀가 무심하게 상관이 없다는 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
유효정의 말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정우는 그것을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유효정의 표정이 굳어졌고 연정우도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성유리는 더 머물지 않고 짧게 말을 해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유효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다시 달려들며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줄게. 이건...”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죠.” 성유리가 그녀의 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고 유효정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 태도는 유효정에게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친 듯한 허탈함을 안겨줬다. 그녀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보며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성유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부부 사이의 문제였고 유효정이 나설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성유리가 잘 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 내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성유리의 행복 뒤에는 박한빈이 든든한 “산”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만약 박한빈이 아니었다면 유효정은 성유리를 눈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그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유리가 자신에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느껴졌다. “갑시다.” 연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유효정에게 말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효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지금 심정이 어떠시냐고요?” 연정우는 미간을
새해가 오기 전, 성유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박한빈의 생일이었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근처의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생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맞춤 제작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에게 딱 맞는 옷을 사기로 했다. 남성복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반갑게 다가오며 물었다. “대표님 부인이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되었음을 느끼며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박 대표님께 선물하시려는 건가요? 새로 들어온 외투를 한번 보시는 건 어떠세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직원의 추천을 받다 보니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여러 가지를 고르게 되었다. 결제는 당연히 박한빈의 카드로 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매장을 나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 그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지만 성유리를 보자마자 먼저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다. “너... 쇼핑하러 온 거야?” “응.” “남성복을?” 연정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신경질적인 톤이 섞여 있었고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화해했구나.” 그러자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네. 어차피 결혼한 사이니까 잘 사는 게 맞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연정우의 얼굴에는 뚜렷한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요즘 어때? 지난번에...” “별거 아니야. 그냥 피부만 조금 다쳤을 뿐이야. 보기만 무섭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우 씨!”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유효정이 먼저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유효정의 힘에 성유리의 몸이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결국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려고 결심했다. “오늘 최 선생님 마주쳤어요?” “누구?” “최 선생이요.” 박한빈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최정민 씨요. 최 선생님.”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야,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확 빼냈다.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더욱 환하게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런 것 같네?” “아니에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박한빈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고 그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성유리의 얼굴을 감춰진 감정을 쑤셔내며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처음엔 애써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 이유 없어. 그냥 재미있어서.” 박한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성유리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그가 그녀가 진짜 화내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걔랑 무슨 사이가 되겠어?” “네가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난 걔가 누군지도 기억 못 했을 거야. 그런 애는 네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어.” ... 이 세상에는 이런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되는 법칙. 성유리와 최정민이 딱 그런 경우였다. 성유리는 이전에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 병원에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도 그녀의 존재를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