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그제야 성유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계속해서 걷어차려던 다리를 거두었다.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었고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은 성유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당... 당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왜,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싫어?”박한빈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그의 손은 성유리의 턱을 꽉 쥐었다.아까 춤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과 조금 전 차였던 발길질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 듯 성유리의 뼈를 분질러 버리려는 듯한 힘이었다.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챈 뒤 무릎을 위로 들어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성유리 씨 인기가 참 많네.”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과거 그녀는 늘 얌전하고 조용했으며 딱 어떠한 순간에만 그토록 유혹적인 모습을 드러냈었고 박한빈은 그런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마치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 속았다기보다... 자신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박 대표님 눈에는 누가 다른 사람과 춤 두 번 추면 사교계의 꽃이 되나 봐요?”“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넌 신분이 다르잖아.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웃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내 신분은 뭐가 다른데요?”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가 말을 뱉는 동시에 무언가 떠올라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신분이 뭐가 다른데? 결국 다른 사람에게 험한 짓 당할뻔했다는 거잖아.지석민이 잡혀간 후 성유리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는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
“뭐 하는 거예요?”성유리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이거 놔요! 박한빈 씨, 이거 놓으라고!”쉬지 않고 발을 버둥거리자 하이힐이 벗겨졌고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에는 신발이 떨어져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성유리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내 성유리를 구석으로 몰아 가둬놓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단번에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췄다.그는 성유리가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고 입술을 대자마자 잇새를 가르고 혀끝을 밀어 넣었다.거침없이 헤집는 움직임에 성유리는 숨이 막혔지만 두 손마저 그에게 잡혀 있어 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이윽고 박한빈의 무릎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누구보다 성유리의 몸에 익숙했던 그의 거친 움직임은 성유리를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눈을 훤히 뜬 채 칼날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성유리를 더욱 굴욕적으로 만든 것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리며 허리 쪽에 힘이 풀렸다.당연히 이 반응을 박한빈도 감지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성유리의 어깨끈이 그의 손에 의해 내려가고 엘리베이터로 전해오는 에어컨 바람이 목선 사이로 파고들어 성유리의 몸은 더욱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띵-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재빨리 반응한 박한빈이 문이 열리는 순간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몸을 덮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 본인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다.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박한빈은 그들이 반응을 보이거나 자세히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성유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얌전한 모습이 박한빈은 마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날이 어두워지고 밖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녁 러시아워의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번잡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지화그룹 건물은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은 액자처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라이터를 손에 쥐고 거듭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한번 또 한 번...박한빈은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지금 떠오르는 건 그저 웃지 않던 얼굴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모습뿐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다.부자의 유대감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적어도 평범한 아버지였고 어머니와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다.그게 아니고서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까.처음 그에게 성유리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는 자신이 거짓말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똑딱이던 박한빈은 라이터를 책상 쪽으로 던지고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오 기사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박한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다가갔지만 박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오 기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액셀을 밟았고 곧바로 시월 파크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한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공허함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불을 켜고 보니 성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어젯밤 성유리가 자신을 물었기에 그는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은 욕실에서 끝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울면서 고개를 흔들며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숱한 말들을 뱉었던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적어도 여
최정민이 용기를 내 다가가 박한빈을 한번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박한빈을 불렀다. “박 대표님!” 이번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박한빈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결국 너도 네 허리춤을 못 지킨 거야?”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최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최정민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는... 저는 제 의지로 박세빈 씨와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가 저를 취하게 만든 뒤 호텔로 데려가서 입에 못 담을 그런 사진들을 찍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박 대표님,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최정민은 말하며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들은 얼굴을 타고 목으로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박한빈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도 없어요. 박 대표님 말고는 이 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지만 박한빈은 빠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최정민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박세빈이랑 얘기해 볼게.” 박한빈의 말에 최정민의 눈빛이 즉시 반짝였다. “정말?” “응.”“고마워! 아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정민은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그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생각난 듯 멈췄고 결국 허공에 붕 뜬 손을 가만히 내렸다. 최정민은 다시 한번 박한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다 지화 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박세빈은 이미 사직한 상태지만 그래도 손에 주식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한빈을 발견한 박세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오셨어요?” “자. 다들 오셨으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여긴 제 여자 친구인 최정민이라고 합니다.” 박한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민을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세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최정민 옆에 앉았다. “난 형이 형수님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박세빈이 고개를 돌려 최정민에게 물었다. “아직 형수님 못 보셨죠?”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대답했다.“봤어요.” “그래요?” 박세빈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병원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마 거기서 본 거겠죠?” “형수님 임신하셨잖아요. 형은 거의 매번 산부인과 검진 때 따라간다던데요?” “솔직히 우리 형 정도의 위치에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죠. 우리 주변 사람들 봤으면 알 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돈도 얼마 없으면서 바깥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정민은 왜 박세빈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개만 숙인 채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세빈은 처음엔 흥분해서 말하던 중이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최정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그의 표정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하는 얘기 듣기 싫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최정민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박세빈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안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겁니까? 당신 혹시 제가 가진 게 뭔지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최정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
그 순간, 울리는 박한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의 평화가 깨버렸다. 그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결국 몸을 일으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마지막엔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긴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한빈은 성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네.” 성유리는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치 방금 전의 따뜻한 순간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이번 키스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깊고 따뜻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든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려 손으로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두 사람 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스치며 남은 흔적을 지웠다. “이제 갈게.” 박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손을 쳐다봤다.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순간 귀 끝까지 빨개져 손을 급히 뗐다. 박한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성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나 기다리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요.” 성유리는 대답하며 박한빈의 시선은 피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성유리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준 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실외는 실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박한빈도 밖에 나서자마자 너무 추워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 실내의 온기가 그리워진 박한빈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뭔데?” 박한빈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유효정이 한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연정우라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던데요?” “뭐라고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하던 행동마저 멈췄다. 하지만 성유리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걔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성유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그냥 헛소리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유효정이야 아니면 연정우야?”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다소 불쾌해졌고 불만이 가득한지 인상도 일그러졌다. “아까 분명히 유효정 씨라고 했잖아요.” “하하.”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반응은 분명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박한빈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책임을 다 연정우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할 테니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박한빈이 계속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본 성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그걸 믿은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성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 데요?” 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녀가 무심하게 상관이 없다는 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
유효정의 말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정우는 그것을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유효정의 표정이 굳어졌고 연정우도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성유리는 더 머물지 않고 짧게 말을 해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유효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다시 달려들며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줄게. 이건...”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죠.” 성유리가 그녀의 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고 유효정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 태도는 유효정에게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친 듯한 허탈함을 안겨줬다. 그녀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보며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성유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부부 사이의 문제였고 유효정이 나설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성유리가 잘 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 내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성유리의 행복 뒤에는 박한빈이 든든한 “산”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만약 박한빈이 아니었다면 유효정은 성유리를 눈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그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유리가 자신에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느껴졌다. “갑시다.” 연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유효정에게 말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효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지금 심정이 어떠시냐고요?” 연정우는 미간을
새해가 오기 전, 성유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박한빈의 생일이었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근처의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생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맞춤 제작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에게 딱 맞는 옷을 사기로 했다. 남성복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반갑게 다가오며 물었다. “대표님 부인이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되었음을 느끼며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박 대표님께 선물하시려는 건가요? 새로 들어온 외투를 한번 보시는 건 어떠세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직원의 추천을 받다 보니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여러 가지를 고르게 되었다. 결제는 당연히 박한빈의 카드로 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매장을 나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 그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지만 성유리를 보자마자 먼저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다. “너... 쇼핑하러 온 거야?” “응.” “남성복을?” 연정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신경질적인 톤이 섞여 있었고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화해했구나.” 그러자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네. 어차피 결혼한 사이니까 잘 사는 게 맞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연정우의 얼굴에는 뚜렷한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요즘 어때? 지난번에...” “별거 아니야. 그냥 피부만 조금 다쳤을 뿐이야. 보기만 무섭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우 씨!”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유효정이 먼저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유효정의 힘에 성유리의 몸이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결국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려고 결심했다. “오늘 최 선생님 마주쳤어요?” “누구?” “최 선생이요.” 박한빈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최정민 씨요. 최 선생님.”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야,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확 빼냈다.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더욱 환하게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런 것 같네?” “아니에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박한빈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고 그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성유리의 얼굴을 감춰진 감정을 쑤셔내며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처음엔 애써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 이유 없어. 그냥 재미있어서.” 박한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성유리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그가 그녀가 진짜 화내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걔랑 무슨 사이가 되겠어?” “네가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난 걔가 누군지도 기억 못 했을 거야. 그런 애는 네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어.” ... 이 세상에는 이런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되는 법칙. 성유리와 최정민이 딱 그런 경우였다. 성유리는 이전에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 병원에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도 그녀의 존재를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