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침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살짝 멈칫한 그가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서 성유리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의 눈빛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어디 가는 거야?”“집이요.”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입술을 꽉 다문 박한빈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달칵...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닫자 넓은 집 안에 곧 박한빈 혼자 남겨졌다.그리고 돌아서면서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성유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커프스단추는 아직 그녀의 가방 안에 있었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면서 버리려고 했지만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성유리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자기, 아직 안 잤지?”저쪽에서 송효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좋은 소식이 있어.”“안 잤어, 말해.”성유리가 커프스단추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지난번 네 책 영화로 제작될 것 같아! 밀레니엄 픽처스라고 알아? 엄청나게 큰 제작사야!”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은 소식이네. 그래서?”“쯧,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돈은 눈에도 안 차겠지만 그래도 큰 건이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판권 못 팔 일은 없어. 그러니 이번에 잘 협상해야 해!”“그래, 힘내.”“아니, 왜 나만 힘내? 그럼 너는?”“내가 판권은 다 그쪽에 맡겼잖아?”“음... 그렇긴 한데 네가 직접 협상에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성유리가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안 가.”“왜?”“이유는 없어. 협상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말아.”성유리의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송효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송효주가 황급히 외쳤다.“자기, 우리 같이 한번 만나보자, 응? 내가 이미 편집장님한테 너 데리고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네가 안 가면 난 할 말이 없
사교성이 좋았던 송효주는 처음에는 조금 소심하게 굴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움직였다.“어머, 양 대표님, 안녕하세요!”송효주는 어렵사리 오늘 드디어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스타 코믹스 송효주입니다. 전에 얘기 나눈 적 있는데!”“아, 안녕하세요.”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송효주와 먼저 악수를 나눈 뒤 천천히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전에 얘기했던 [해당화] 작품 작가님이세요.”“아,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양 대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데요?”“아닐 거예요, 전 자주 외출하지 않아서요.”성유리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고 남자는 여전히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작품은 이미 봤어요. 각색하기 아주 좋던데요. 게다가 우리 진 대표도 읽고 나서 굉장히 흥미로워서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성유리는 원래도 상대가 송효주에게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게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말이 나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송효주는 오히려 신나서 말했다.“정말요? 그럼 진 대표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곧 남자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진 대표, 전에 관심 있게 봤던 만화책 작가가 이분이야. 참... 그러고 보니 이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저는 송효주라고 합니다!”송효주는 성유리를 흘끗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앞을 막아 나섰다.“아니, 내 말은...”“성유리 씨 맞죠?”양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이미 먼저 말을 꺼냈다.성유리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밀레니엄 픽처스는 진씨 가문의 시즌그룹 산하에 있는 회사다.진무열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시즌그룹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맡지 않았다.그러니 상대방이 말하는 진 대표는 아마도 진무열의 형이겠지.더 이상 피할
성유리는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진무혁은 웃기만 했다.“하긴,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이런 말을 했지.”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그의 대범한 태도에 비해 성유리가 지나치게 쏘아붙인 감이 없지 않았다.성유리도 이를 깨닫고 사과를 덧붙였다.“제가 너무 흥분했네요.”“괜찮아, 너도 네 평판이 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지. 내가 잘못했어.”진무혁의 말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의 말대로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멋졌다.저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네온사인과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사람의 기분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진무혁은 먼저 성유리의 반응을 살피며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말을 이어갔다.“사실 난 진무열과 성유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야.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진무열은 내 동생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내가 봤을 때 성유정은 아내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그의 말은 성유리에게 다소 의외였다.그전까지만 해도 이 바닥 사람들은 전부 성유정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물론 이를 위해 성유정이 들인 노력도 절대 작지 않았다.어쨌든 그 정도의 위선을 떠는 것도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성유정은 속셈이 너무 많아. 우리 집안 사정이 안 그래도 복잡한데 걔가 결혼해서 들어오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야. 난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해, 성유정이 네 동생인 건 알아. 험담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단지... 너랑 이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서.”진무혁은 미안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오히려 조금 전 진무혁의 말에 성유리는 마치 아군을 만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진무혁은 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네 작품 봤는데 아주 좋아. 로열티는 최대한 높게 책정해 줄 테니 시간 되면 대본 집필에도 참여해
성유리가 차창을 살며시 두드렸다.“사모님!”성유리가 몇 번이나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 기사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성유리도 차마 시정해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여긴 왜 오셨어요?”“대표님 출장 가셨어요.”오 기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해외 출장 가셨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돌아오실 텐데 초대장과 비행기 티켓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당황한 성유리가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에 지난번 박한빈이 건넸던 것과 똑같은 경매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지난번 성유리는 가면서 초대장을 시월 파크에 두고 갔는데 박한빈이 다시 보내줄 줄은 몰랐다.심지어 이번엔 양성 행 티켓까지 직접 예매해 주었다.“사모님?”성유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 기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고 그가 이상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안 받을래요.”“그래도... 사모님, 이건 대표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건데요.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누구한테 고개 숙이는 일 없는 분인데 이러시면...”“저랑 그 사람은 지금 단순히 거래 관계인데 이런 경매장에는 업계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그때 가서 일일이 해명하기 귀찮아요.”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오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괜히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오셨네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세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성유리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망설임 끝에 결국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말았다.성유리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지만 2초 정도 울리고 뚝 끊겨버렸다.마치 실수로 잘못 건 것처럼.성유리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오히려 진무혁 측에서 빠르게 연락이 왔고 그가 바라는 건 간단했다.이번 주말에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성유리가 거절하려는데 진무혁이 그녀가 뭘 망설이는지 아는 듯 재빨리 두 번
“대표님.”금성 공항에서 서훈은 남자의 불쾌한 표정에 눈치가 보이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방금 진성에서 보내온 데이터 보고서인데 한번 보시죠.”박한빈은 보고서를 훑어본 뒤 물었다.“그리고?”“뭐요?”“시장 가치 추정 이후에는? 어떤 각도로 시장 진입을 유도할 거래? 관련 분석 보고서와 언론 보도 계획은?”이 외에도 박한빈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어리둥절하던 서훈도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앞으로 나아가던 박한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모른다 쳐도 서 비서는 내 옆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이런 간단한 것도 몰라?”서훈은 이 보고서가 단지 인수를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차적으로 박한빈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했는데 그때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서훈은 이유를 몰랐다.이번 출장에서도 박한빈은 순탄하게 협상을 마친 덕분에 일찍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서훈은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죄송하다고만 했다.박한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훈에게 파일을 다시 던져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이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한빈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서훈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훈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운전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차 안에 있던 누구도 감히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서훈은 조수석에 앉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전 대표님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여기 초대자 명단입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훈이 건네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때마침 태블릿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는데 바로 동영상이었다.무시하려던 박한빈은 동영상에 멈춘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붉은 끈 드레스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는 그때 말했다.하늘이는 이날을 정말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꼭 하루 종일 시간을 내서 함께 있어 달라고.박한빈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하지만 지금,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걸까?“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그러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박한빈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하늘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박한빈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그토록 자신 있던 일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박한빈도 안다.하늘이를 엔젤 월드에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는 너무 바빴고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도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은 하늘이를 데려오고 싶었다.실버 포레스트, 그들의 집으로.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혼자 돌아오는 집, 텅 빈 공간,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단 하나만이 비어 있는 공간.그곳은 오직 하나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성유리는 이곳에 없다.그리고 만약 하늘이까지 없어진다면 박한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 박한빈의 행복이 그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갇히게 될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하늘이를 데려온 것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아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박한빈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커다란 식탁,단둘이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들려오는 것은 오직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뿐.박한빈은 새우를 까서 하늘이의 그릇에 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피해버렸다.그리고 담담히 말했다.“안 먹어요.”아이가 정말 새우를 싫어했었나?박한빈은 기억나지 않았다.그러나 분명 전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새우를 까주곤 했다.그렇다면 하늘이는 정말 새우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박한빈이 까준 것을 먹기 싫은 걸까?그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새우를 먹었다.그렇게
장성 그룹은 최근 금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몇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물론 해외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가 국제적으로 상을 받으며 명성을 쌓았다.그 결과, 마치 지화 그룹조차 그 빛에 가려지는 듯했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이 모든 것이 사씨 가문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을.그렇지 않고서야 유효정이 연정우에게 남긴 자금만으로 이 정도 성과를 이루기는 불가능했다.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사씨 가문이라 해도 박한빈에게는 눈엣가시일 뿐이었다.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 손을 쓸 수 있었다.하지만 에릭이 말한 것처럼 국내의 법과 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몇 달, 길게는 일 년도 걸릴 수 있었다.그런데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한 달.그것이 그의 인내심이 닿을 수 있는 한계였다.성유리의 소식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면 박한빈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차가 도착한 곳은 엔젤 월드.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하늘이는 뒷마당에 서 있었다.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그는 아이를 부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하늘이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은 한 마리 나비였다.그러나 그 나비는 이미 사마귀에게 붙잡혀 있었다.가만히 놔둔다면 나비는 이제 곧 먹혀버릴 운명이었다.“구해주고 싶어?”박한빈이 하늘이에게 물으며 손을 뻗으려 하자 하늘이가 바로 대답했다.“아니요.”그 순간, 박한빈의 손이 멈췄다.“약육강식.”하늘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자연의 법칙이에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고개를 숙여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물론 하늘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언제나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그런데 지금 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그사이 나비의 날개는 찢겨 나가고 몸뚱이는 천천히 먹혀 사라졌다.그렇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홍지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곁에 있던 경비원을 쓱 쳐다보았다.사실 경비원은 막 홍지은을 제지하려던 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만삭이었다.둥글게 부푼 배가 눈에 띄었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문제가 생길까 봐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무리 홍지은이 잘못될까 두려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놔! 네가 뭔데? 당장 이 손 떼라고!!”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한 홍지은이 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그녀를 붙잡은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결국, 홍지은은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박한빈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홍지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다 갑자기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겠다! 그 계집애 죽었지? 그래, 아주 잘됐네. 원래부터 죽어 마땅한 년이었으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바라보았다.홍지은은 더욱 독하게 그를 저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어차피 이제 자신에겐 남은 것도 없었다.집도, 회사도, 공장도 모조리 압류당했다.심지어 남편마저 그녀를 재수 없는 존재라며 외면했다.모두가 그렇게 믿었다.홍지은이 성유리를 건드린 탓에 이런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박한빈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하지만 그녀는 억울했다.공장을 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도 자신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잃게 된 건 자신뿐이었다.그런데도 사람들에게는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그리고 박한빈과 성유리.그 둘이야말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다.홍지은의 눈에 분노와 원망이 서렸고 더욱 많은 독설을 퍼붓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박한빈의 눈을 마주친 순간, 마치 무언가가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숨이 막혀 손끝과 머리까지 싸늘히 식어갔다.그러나 박한빈은 아
“한빈아?”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김서영의 몸이 움찔했다.“무슨 일입니까?”박한빈이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잠시 망설이던 김서영이 입을 열었다.“한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우선 돌아가서 좀 쉬어. 하늘이는 내가 곁에서 봐줄게.”“그럴 필요 없습니다.”박한빈은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늘이에게 여기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그래도...”“먼저 돌아가세요.”박한빈은 김서영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김서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조용히 먼저 물었다.“성유리는 아직도 소식이 없어?”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으나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찾을 수 있어요.”“설령 찾지 못한다고 해도... 유리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예요.”성유리의 실종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사씨 저택 내 모든 감시 카메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만큼 이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게다가 성유리의 교통수단 이용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그 말은 즉, 누군가가 그녀를 데리고 사씨 저택을 빠져나간 후 바로 차에 태웠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분명 연정우가 미리 계획해 둔 것임이 분명했다.심지어 자신을 에릭의 문제로 떠나게 만든 것조차 그가 미리 계산한 수단일 가능성이 높았다.사씨 부부 두 사람 또한 혹시 이 일에 개입한 걸까?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박한빈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두 사람이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변화를 감지한 김서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한빈아?”그제야 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서영의 말을 듣고서야 박한빈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서인지 일어나는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와 그는 잠시 가만히 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하늘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이전에는 많이 회복된 상태였지만 재발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소한 감기나 열조차도 재발의 신호일 수 있었다.이런 하늘이의 상황을 잘 알기에 김서영은 초조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박한빈을 보자마자 늦게 온 걸 책망하려던 참이었으나 그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신, 낮은 목소리로 아들인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가서 하늘이 좀 봐.”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병실로 향했고 그 시각 하늘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며칠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살이 빠진 게 느껴졌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이 박한빈의 가슴을 죄어왔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에 앉아 나지막이 불렀다.“하늘아.”그제야 하늘이가 천천히 눈을 떴고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박한빈을 하늘이가 입을 열었다.“엄마는요?”박한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원래도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이 순간에는 아예 막혀버린 듯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 뒤엔 돌아올 거야.”결국 박한빈이는 하늘이한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런 서툰 거짓말로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하늘이가 믿을 리 없었다.하늘이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가... 저를 버린 거예요?”그 말을 꺼내자마자 하늘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커다란 물방울들이 베개 위로 떨어지며 금세 얼룩을 만들었다.아이의 눈물에 박한빈은 순간 당황했고 황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적어도, 단 하나의 거짓말이라도.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박한빈과는 달리 연정우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했다. 오히려 박한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문마저 섞여 있었다.그러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그걸 저한테 물어보는 게 맞으십니까? 유리는 당신 아내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유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게... 적절한 질문입니까?”연정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런 말을 다시 덧붙였다.“아니면 무슨 증거라도 있나요? 제가 유리를 데려갔다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연정우를 노려볼 뿐이었다.단단히 쥐어져 있던 박한빈의 두 손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좋아요. 연정우 씨.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하지만 연정우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박한빈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본 후, 입가에 얕은 미소를 띠며 주위의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다들 할 일 없으면 어서 돌아가서 업무들 보세요.”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금성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도시 전체를 뒤집어 찾는다면 성유리를 못 찾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그 대답이 또다시 들려오는 순간, 박한빈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아무런 흔적도 없이.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 CCTV에 찍힌 성유리의 손끝뿐.그 외에는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 어떤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처음엔 불안과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조차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어두운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뭔가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유리는 나를
박한빈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몸을 돌려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찾아.”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러자 류수미가 다급히 외쳤다.“박한빈 씨! 여긴 사씨 저택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무단 침입이라는 거 모르세요?”“제 아내가 당신들께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러 왔는데 실종됐습니다.”“그런데 제가 이곳을 수색하는 게 뭐가 문제죠?”“설마 저희가 유리를 숨겼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경찰 측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성유리 씨는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범인은 사씨 저택의 구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CCTV가 설치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성유리 씨를 데려갈 때 모든 감시를 피해 움직였습니다.”그들이 포착한 건 단 한 장의 장면이었다.카메라 구석에 스치듯 찍힌 아주 잠깐 드러난 손목 한 조각.성유리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축 늘어진 팔이 순간적으로 화면에 포착된 것이었다.고작 2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박한빈은 그 한순간을 보고도 확신했다.“이건 성유리가 맞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럼 지금 유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현재 차량 소유자를 추적 중입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바로 경찰과의 통화를 끝냈다.그리고 마치 한순간 힘이 빠진 풍선처럼 옆 벽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그 순간, 류수미의 날 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제 확실해졌죠? 유리는 여기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 태도에 류수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참다못한 그녀가 박한빈을 향해 다가와 뺨을
박한빈은 현재 도한시에 머물고 있었고 그 무렵 에릭은 막 보석으로 풀려난 참이었다.사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억울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었고 문제의 물건을 가져온 것도 그가 아니었다.정작 그걸 들고 온 사람은 죽었고 에릭과 함께 있던 사람들만 모조리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에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자신의 결백만 입증하면 이곳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할 수 없었다.문제는 박한빈이었다.그의 기본적인 사업들은 여전히 국내에 있었고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에게 미칠 영향은 치명적일 터였다.그래서 직접 금성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경찰 수사에 협조한 것이다.이곳 경찰이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준다면 박한빈을 음해하려던 언론 보도는 모두 허위 사실 유포가 될 테니까.박한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걸 알면서도 에릭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박한빈은 그를 쓱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휴대폰을 들고 화면 속의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에릭은 한국어를 말하기는 가능했지만 글자는 읽을 줄 몰랐다.그래서 박한빈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봐도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제야 에릭은 상황을 눈치챘다.“네 아내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에릭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설마 화난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나랑 같이 해외로 가는 게 어때? 여기는 제약이 너무 많잖아. 이런 것만 없었어도 너도 굳이 이렇게까지... 야, 내 말 듣고 있긴 해?”박한빈은 에릭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몇 초 더 기다려 봤지만 성유리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에릭이 뒤에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걱정스러운 마음에 박한빈의 미간이 점점 더 잔뜻 찌푸
비록 그때의 연정우는 단순한 ‘공범’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친척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정말로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들을 돕는 선택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무마하고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 거고.권력이라는 것은 중독성 강한 독과도 같아서 한 번 손을 대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그 자리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 그리고 성유리의 존재로 인해 연정우가 바라보게 된 대상은 박한빈이었다.더군다나 박한빈 때문에 한때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으니 연정우가 그를 증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심지어 성유리는 나중에 연정우가 자신에게 그렇게 집착한 것도 단순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박한빈을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업적인 수법과 벌이로는 박한빈을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만약 성유리와 함께한다면?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일종의 승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그래서였을까.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끝까지 자신과 함께 장례식에 가려 했던 이유는 그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박한빈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을 결국 자신이 가졌다는걸.성유리는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 연정우에게 말했다.그 말투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였다.감정이 배제된 그저 객관적인 관찰자 같은 어조로.“그러니까 네가 피해자라고 착각하지 마.”성유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어쩌면 넌... 단 한 번도 날 진짜로 좋아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 네가 좋아했던 건 박한빈을 이긴다는 그 감정이었을 뿐이야.”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가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정말... 너무하네.”그가 힘없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함께했던 사이였어. 심지어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