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성이 좋았던 송효주는 처음에는 조금 소심하게 굴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움직였다.“어머, 양 대표님, 안녕하세요!”송효주는 어렵사리 오늘 드디어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스타 코믹스 송효주입니다. 전에 얘기 나눈 적 있는데!”“아, 안녕하세요.”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송효주와 먼저 악수를 나눈 뒤 천천히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전에 얘기했던 [해당화] 작품 작가님이세요.”“아,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양 대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데요?”“아닐 거예요, 전 자주 외출하지 않아서요.”성유리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고 남자는 여전히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작품은 이미 봤어요. 각색하기 아주 좋던데요. 게다가 우리 진 대표도 읽고 나서 굉장히 흥미로워서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성유리는 원래도 상대가 송효주에게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게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말이 나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송효주는 오히려 신나서 말했다.“정말요? 그럼 진 대표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곧 남자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진 대표, 전에 관심 있게 봤던 만화책 작가가 이분이야. 참... 그러고 보니 이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저는 송효주라고 합니다!”송효주는 성유리를 흘끗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앞을 막아 나섰다.“아니, 내 말은...”“성유리 씨 맞죠?”양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이미 먼저 말을 꺼냈다.성유리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밀레니엄 픽처스는 진씨 가문의 시즌그룹 산하에 있는 회사다.진무열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시즌그룹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맡지 않았다.그러니 상대방이 말하는 진 대표는 아마도 진무열의 형이겠지.더 이상 피할
성유리는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진무혁은 웃기만 했다.“하긴,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이런 말을 했지.”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그의 대범한 태도에 비해 성유리가 지나치게 쏘아붙인 감이 없지 않았다.성유리도 이를 깨닫고 사과를 덧붙였다.“제가 너무 흥분했네요.”“괜찮아, 너도 네 평판이 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지. 내가 잘못했어.”진무혁의 말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의 말대로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멋졌다.저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네온사인과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사람의 기분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진무혁은 먼저 성유리의 반응을 살피며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말을 이어갔다.“사실 난 진무열과 성유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야.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진무열은 내 동생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내가 봤을 때 성유정은 아내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그의 말은 성유리에게 다소 의외였다.그전까지만 해도 이 바닥 사람들은 전부 성유정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물론 이를 위해 성유정이 들인 노력도 절대 작지 않았다.어쨌든 그 정도의 위선을 떠는 것도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성유정은 속셈이 너무 많아. 우리 집안 사정이 안 그래도 복잡한데 걔가 결혼해서 들어오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야. 난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해, 성유정이 네 동생인 건 알아. 험담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단지... 너랑 이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서.”진무혁은 미안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오히려 조금 전 진무혁의 말에 성유리는 마치 아군을 만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진무혁은 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네 작품 봤는데 아주 좋아. 로열티는 최대한 높게 책정해 줄 테니 시간 되면 대본 집필에도 참여해
성유리가 차창을 살며시 두드렸다.“사모님!”성유리가 몇 번이나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 기사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성유리도 차마 시정해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여긴 왜 오셨어요?”“대표님 출장 가셨어요.”오 기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해외 출장 가셨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돌아오실 텐데 초대장과 비행기 티켓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당황한 성유리가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에 지난번 박한빈이 건넸던 것과 똑같은 경매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지난번 성유리는 가면서 초대장을 시월 파크에 두고 갔는데 박한빈이 다시 보내줄 줄은 몰랐다.심지어 이번엔 양성 행 티켓까지 직접 예매해 주었다.“사모님?”성유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 기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고 그가 이상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안 받을래요.”“그래도... 사모님, 이건 대표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건데요.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누구한테 고개 숙이는 일 없는 분인데 이러시면...”“저랑 그 사람은 지금 단순히 거래 관계인데 이런 경매장에는 업계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그때 가서 일일이 해명하기 귀찮아요.”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오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괜히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오셨네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세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성유리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망설임 끝에 결국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말았다.성유리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지만 2초 정도 울리고 뚝 끊겨버렸다.마치 실수로 잘못 건 것처럼.성유리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오히려 진무혁 측에서 빠르게 연락이 왔고 그가 바라는 건 간단했다.이번 주말에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성유리가 거절하려는데 진무혁이 그녀가 뭘 망설이는지 아는 듯 재빨리 두 번
“대표님.”금성 공항에서 서훈은 남자의 불쾌한 표정에 눈치가 보이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방금 진성에서 보내온 데이터 보고서인데 한번 보시죠.”박한빈은 보고서를 훑어본 뒤 물었다.“그리고?”“뭐요?”“시장 가치 추정 이후에는? 어떤 각도로 시장 진입을 유도할 거래? 관련 분석 보고서와 언론 보도 계획은?”이 외에도 박한빈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어리둥절하던 서훈도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앞으로 나아가던 박한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모른다 쳐도 서 비서는 내 옆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이런 간단한 것도 몰라?”서훈은 이 보고서가 단지 인수를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차적으로 박한빈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했는데 그때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서훈은 이유를 몰랐다.이번 출장에서도 박한빈은 순탄하게 협상을 마친 덕분에 일찍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서훈은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죄송하다고만 했다.박한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훈에게 파일을 다시 던져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이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한빈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서훈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훈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운전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차 안에 있던 누구도 감히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서훈은 조수석에 앉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전 대표님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여기 초대자 명단입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훈이 건네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때마침 태블릿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는데 바로 동영상이었다.무시하려던 박한빈은 동영상에 멈춘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붉은 끈 드레스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성유리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으나 연정우는 바로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우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왜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어떻게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정말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그를 미워해야 한다!그런데 왜 성유리는 단 한 점의 미움의 감정도, 원망도 없는 것일까. 혹시 연정우는 미움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의 표정은 조금씩 사라졌고 안색도 매우 안 좋아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래서 그녀는 연정우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그럼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연정우는 그제야 그들이 어느새 병원 입구에 다 왔음을 알아챘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마치는 즉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제자리에 남겨진 연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괴이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유리의 모습이 연정우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떠나갔다.한편, 성유리는 곧바로 병실로 돌아왔고 이때 병실은 아주 조용헀다.류수미는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깎고 있었으며 사민혁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하지만 텔레비전의 소리는 너무도 작았기에 성유리는 단번에 그의 주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정우는 정말 좋은 애인 것 같아요”그러던 와중, 갑작스러운 류수미의 한 마디.그 한마디에 사민혁은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쳐다봤고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러나 류수미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했다.“만약 가능하다면... 하나가 돌아온다면 난 반드시 정우와 결혼시킬 거예요.”“왜 또 그런 말을
연정우는 성유리가 할 대답을 쭉 생각해 봤었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게다가 지금 성유리의 눈빛을 보니 일부러 연정우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사뭇 진지하고 진심인 것 같았다.‘정말 진지하게 나한테 묻네.’연정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우린 헤어지지 않았나? 게다가 우리 둘이 만날 때 나도 박한빈 씨랑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난 이 방면에선 깨끗해. 그래서 너한테 잘못한 적은 없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너 지금... 나를 돌려 까는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있다 이내 대답하려고 입을 뻥끗거렸다.그러나 연정우가 먼저 말했다.“나도 알아. 이런 일엔... 나도 확실히 문제가 좀 있었지. 근데 유리야, 네 생각엔 그때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그를 쳐다보다 되물었다.“그러니까 그때 넌 날 속이고 있었던 거네? 맞아?”“뭐?”“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아무것도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이 네가 가진 것들을 다 뺏어가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 말들... 다 거짓말이었어?”“아니야.”연정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아마 스스로도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정우는 다른 변명을 더 하려고 했다.그러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젠 알겠네.”“뭘... 알겠다는 거야?”“그때 네가 날 선택한 이유가 사실 그냥...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던 거란 걸.”성유리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당시 네 회사는 이미 절벽 끝까지 밀려났었지. 그래서 박한빈 씨와 겨룰 자격도, 그럴 실력도 없었고. 너는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를 선택한 거야. 그런 김에 나한테서 너에 대한 호감이나 죄책감도 얻고. 맞지?”“나중에 유효정 씨가 찾아왔을 땐 너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민혁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이제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님은...”“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이젠 괜찮다고.”대답하는 류수미의 태도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내내 정우가 있어서 별로 큰일도 안 생겼고.”“저도 딱히 한 건 없는걸요. 그래도 다행히 아버님께서 잘 이겨내셨어요. 근데 꼭 무리하면 안 되고 잘 휴식해야 한다고 했으니 명심하십시오.”“그래요. 정우 말이 맞아요.”류수미는 연정우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제가 그랬잖아요. 회사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저흰 이제 나이도 있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 하시려고요?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남겨줄 수도...”말하던 류수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봤다.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던 성유리는 류수미의 말을 들은 어느 한순간, 두 주먹을 꽉 쥐었다.분위기가 얼어붙으려고 하던 그때, 연정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류수미도 얼른 대답해 줬다.“그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니? 돌아가서 푹 쉬어,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성유리는 연정우가 언제부터 사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졌는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들이 연정우를 보는 눈빛을 관찰하니 다들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세 사람의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유효정.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국내에선 아무도 유효정의 사망 소식을 신경 쓰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하기야 유씨 가문은 이미 타락한 상태고 그녀의 부모님 또한 세상을 떠났다.그러니 유효정의 사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유리야, 네가 나 좀 바래다줄래?”연정우가 묻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다시
“누가 아픈데요? 중요한 사람인가 보죠? 박한빈 씨가 야밤에 직접 병원에 다녀오는 걸 보면.”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뚫어져라 보며 계속 물었다.그 눈빛을 본 박한빈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이젠 유리한테도 대충 얼버무리면 안 될 것 같네.’이런 원인에서인지 박한빈은 가끔 다른 사람들이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그러나 그건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하지만 자신감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박한빈에게는 그런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 그냥 꽤 중요한 협업 파트너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나 봐. 상황이 되게 위급했다던데...”“근데 내가 갔을 땐 구조가 됐었어. 그래서 나도 오래 남지 않은 거고.”태연하게 말하는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하지만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아마 알지 않을까? 나도 모르겠는데.”박한빈은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다른 말을 꺼냈다.“지금까지 나를 기다린 게 고작 이런 걸 물어보려는 거였어?”성유리는 너무도 느긋한 박한빈의 태도에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으니까.”박한빈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먼저 자. 난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이번에 성유리는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렇지만 박한빈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잠이 안 와?”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박한빈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그럼 뭐라도 좀 할까?”성유리는 대답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을 꼭 끌어안았다.오랫동안 알고 지낸 두 사람이었기에 박한빈은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 수 있었고 지금 성유리가 할 기분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그저 말없이 성유리의 등을 토닥여줬고
돌아온 연정우는 박한빈과 눈을 맞추다 이내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도 아버님께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연정우 씨,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지?”박한빈은 연정우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리고 연정우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혐오와 경계의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박 대표님, 지금 그게...”연정우는 박한빈의 시선에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재산을 위해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죽은 친구의 부모는 잘 챙기십니다?”박한빈은 콧방귀를 끼며 계속 물었다.“그쪽 생각엔 제가 이걸 믿을 것 같습니까?”“사람을 죽인다고요? 박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요?”“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제일 잘 알 겁니다.”연정우는 말 없이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어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이제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하지만 전 이미 어머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아니면 지금 다시 전화해 볼까요? 제가 여기 남는 걸 동의하시는지 안 하시는지?”진지한 얼굴로 묻는 연정우를 박한빈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런데도 연정우는 미소 띤 얼굴로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박 대표님, 설마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여기 남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그 말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저랑 사하나 씨는 전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은요? 유리 때문에 사씨 가문 사람들을 챙기려는 겁니까? 설마 그 사람들이 당신을 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사하나 씨의 죽음은 이제 두 분이 받아들이고 괜찮아지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 믿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일은 잊고 싶어 한다는 걸요. 그러니까... 박
박한빈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하지만 응급실 앞에 서 있는 연정우를 보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췄고 표정을 굳혔다.류수미는 의자에 앉아 연정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마치 그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박 대표님, 오셨습니까?”연정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류수미에게 물었다.“사 회장님은 어떠십니까?”“의사들이 아직 구조 중이에요.”류수미는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요즘 안색이 말이 아니었고 아침에도 심장이 아프다고 했거든요. 월말에 건강검진 받으러 가기로 해서 그때까지 놔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괜찮으실 겁니다.”박한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연정우가 먼저 류수미에게 대답해 줬다.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오늘 네가 우리 보러 오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몰랐을 거야.”“별말씀을요. 저랑 사하나 씨는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두 분을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죠.”연정우는 마치 자상한 사람인 척하며 류수미를 달랬고 그 순간, 응급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환자분 생명에는 이제 위협이 없습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류수미는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사민혁의 아내인 류수미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지만 연정우가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괜찮다고 하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박한빈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아닙니다. 전 여기 남겠어요.”류수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박한빈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 연정우가 먼저 말
사실 박한빈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그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손에서 놀아나는 장난감 같았으니까.하지만 성유리가 그 ‘장난감’들을 놀기로 결정했으니 박한빈은 그녀에게 무대를 내어주기로 결심했다.‘장난감’들의 결말이 어떻든 박한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맹정태의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일부로 목소리를 깔고 멋져 보이려고 애쓴 맹정태의 음성 메시지를 듣자 박한빈은 화가 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연정우도 마찬가지다. 박한빈이 보기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와 만남을 가졌었다.그러니 박한빈은 연정우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매력이 존재할 거라고 여겼다.‘맹정태는 또 뭐야?’‘고작 저딴 놈도 유리한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가? 정말 우습군.’그래서 박한빈은 생각을 바꿨다. 성유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재밌는 ‘놀이’를 하기로.마침 그도 홍지은이라는 사람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기에 그들이 이 도시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박한빈 씨.”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금세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왜 그래?”“아직 저한테 말 안 해주셨어요. 제 핸드폰은 왜 보신 거예요?”“아, 스팸 전화가 와서 그거 받아주다가 우연히 본 거야.”“맹정태 씨 문자는 제일 밑에 있었고 제가 차단까지 했는데 우연히 보셨다고요?”박한빈은 차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리고 순간, 너무 똑똑한 여자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박한빈 씨 핸드폰도 주세요.”한참을 박한빈만 뚫어져라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그러자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박한빈의 핸드폰을 ‘탐험’하기 시작했다.박한빈의 핸드폰 속 문자 내용들은 거의 다 업무에 관한 것이었고 연락처에도 같은 업계 사람들뿐이었다.게다가 문자를 나눈 사람도 몇 없었다.“전에 미리 지우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물었다.“내가 뭘 지우는데?”박한빈은 오히려 웃음
박한빈은 성유리가 건네는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물었다.“안 보세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급한 일 아니잖아. 일단 네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어.”“아, 제가 이미 공장 가서 검사해 봤어요. 지금 맹씨 가문 소유의 공장은 맹정태 씨 매형이 보고 있었어요. 직원은 500명 정도 있고 기간은 25일로 정했대요. 그리고... 만약 재료들이 충분하게 준비됐다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근데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효율이 좋지 않대요. 맹정태 씨 매형도 도박꾼이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요. 그래서 사실 공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료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짧은 시간 내에 필요로 하는 수량을 만들어내려면 그 사람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성유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고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로잡혀 멍해졌다.심지어 어느 한순간,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다.성유리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박한빈의 시선을 발견했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 듣고는 계세요?”“응. 듣고 있어.”박한빈은 그제야 대답하며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래서? 넌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지?”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손가락으로 성유리의 손바닥을 계속 만지작대고 있었다.그 탓에 간지러워진 성유리가 손을 빼내려 하자 박한빈은 힘을 더 세게 주며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맹정태 씨 매형 도박꾼이라고요! 사실 공장에 있던 재료들 다 그 사람이 가져다가 팔았어요. 혼자서 성 씨가 다른 도박꾼이니 만약 이 일이 맹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마어마한 후과를 치러야겠죠.”“그러니까 매형이라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꼭 찾아낼 거예요. 자기 때문에 텅 빈
홍지은은 떠나가려는 성유리를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봤고 그녀는 자신의 침을 챙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룸의 문이 스르르 닫힐 때, 성유리는 남아있는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그 시각 홍지은은 새로 생긴 자신의 팔찌를 감상하고 있었다.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성유리를 의심할 때와 180도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성유리는 홍지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필경 홍지은이 말한 것처럼 박한빈을 무너뜨리려는 성유리의 생각이 누구한테나 이상하게 들릴 테니까.제일 먼저 박한빈의 지금 위치와 수법으로 보자면 절대 감정만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론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한 마음이다.이런 상황에 그 아무도 성유리가 박한빈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담보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홍지은이 잔뜩 경계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성유리가 방금 한 행동들은 다... 홍지은이 자신을 철석같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만약 가능했다면 성유리는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홍지은을 속이기 싫었다.그러나 지금 홍지은에게 바로 지나간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한다면 그녀는 무조건 경계심과 의심을 버리지 않을 게 뻔했다.그래서 성유리가 찾은 변명이자 핑계가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어떻게 됐든... 일은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성유리가 맹정태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박한빈에게 가져다주려고 할 무렵, 캐톡으로 누군가가 성유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왔다.[안녕하십니까. 맹정태입니다.]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성유리는 친구신청을 수락했고 일 분도 채 안 되어 맹정태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보내왔다.[이번 일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성유리는 맹정태가 감사 인사를 하려고 특별히 친구 추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다.그러자 맹정태가 이내 또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과 박 대표님 사이 일은 홍지은에게서 들었습니다.][사모님의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