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지 않았다.아주 어릴 적부터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박한빈은 누가 봐도 그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은 더더욱 그의 혐오감만 불러올 뿐이었다.성유리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듯 닦아냈다.박한빈은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서서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내가 사고 난 날 밤에 당신 어디 있었어요?”“뭐?”“내가 유산한 날 밤, 당신 어디 있었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고 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성유정 말로는 그날 밤에 자기 생일 선물 사주려고 경매장에 있었다고 하던데, 맞아요?”“예전부터 사달라고 한 거였고 네 이른... 그냥 사고였어.”박한빈이 말했다.이런 것도 해명이라면 해명인가?성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세상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몸까지 떨며 웃는 그녀는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결코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박한빈 씨, 그거 사고 아니에요.”그녀가 박한빈에게 말했다.“성유정이 날 계단에서 밀었어요.”그의 이마에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성유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하려던 말이 천천히 사라졌다.“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죠?”성유리가 물었다.“이미 지나간 일이야.”박한빈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지나간 일?”성유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박한빈 씨, 당신에겐 그저 한낱 생명 없는 핏덩어리일 뿐이죠? 하지만... 그건 내 아이예요. 박한빈 씨, 당신 돌아오고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아픈지 안 아픈지 물어본 적 있어요? 그리고 우리 결혼기념일엔 어디 있었어요? 내 생일에는 또 어디 있었는데요?”성유리가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2년 동안 머릿속에만 맴돌다가 이제야 출구를 찾은 듯 와르르 쏟아져나왔다.이젠 더 이상 의미는 없었지만.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
“성유리, 기억해.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렸어. 애초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순조로운 이혼이 가능했을 것 같아?”그 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박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말이 맞다.그녀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한 것을.예전에는 대를 이어줄 아내였고 지금은... 그저 욕구나 해소하는 도구일 뿐인걸.성유리의 이런 차분한 표정은 박한빈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며 곧바로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입 맞추었다.입술이 맞닿는 순간 성유리가 또다시 툭 눈물을 흘렸고 그 서늘한 느낌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의 잇새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게 하는 키스였다.성유리는 금세 불편함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성유리는 마치 모래밭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심지어 성유리는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약점이 잡히고 갑옷이 벗겨졌다.줄곧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성유리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박한빈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유리는 지난 2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의 분출구를 찾은 듯 온 힘을 동원해 그의 살을 콱 깨물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에게 보복당하고 만다.금성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알았는데 이날 밤 그녀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금성의 밤을 두 눈을 보게 되었다.짙은 어둠 속 번쩍이는 네온 불빛은 마치 칵테일을 부은 듯 몽환적이면서도 흐릿했다.나중에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공허한 방에 선명하게 울렸고 박한빈마저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성유리가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박한빈은 더 이상 행동을 이어가지 않고 손을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뭐 먹고 싶어?”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그냥 걸어 나갔다.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다시 돌아왔다.“밥 먹자.” 그가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쯤 되니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결국 그녀는 몸의 본능에 굴복했다.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적지 않은 음식을 시켰고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 도연제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담백했다.하지만 성유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옆에 놓인 케이크였다.다크 초콜릿에 붉은 체리가 놓여있는 케이크.성유리가 천천히 손을 말아쥐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에 앉았다.케이크가 놓인 자리는 그렇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개를 길들이는 데는 타고났네.’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선사하는 게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다가간 성유리는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케이크에 박한빈의 시선이 몇 번이고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입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잠깐.”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박한빈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자기
그 후 며칠 동안 박한빈은 다시 연락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매일 다른 디저트 가게에서 보내오는 케이크를 받았다.게다가 한 개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케이크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며 그녀가 케이크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성유리는 마지못해 케이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며칠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한테 뭐 보내지 마요.”“왜, 마음에 안 들어?”박한빈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말할 때도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좋아한다며? 그럼 매일 보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으라고.성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통화가 끊겨서 들리는 신호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휴대폰을 떼어내자 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기가 막혀 나오는 웃음이었다.성유리가 갈수록 성깔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인데 더 이상 그 앞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는 걸 수도.하지만 어쨌든 나름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말없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박한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전에 눈여겨보라고 하시던 안 작가님 그림 경매가 정해졌습니다. 이달 말 진성에서 열릴 예정이랍니다.”서훈은 이렇게 말하며 박한빈 바로 앞에 초대장을 내밀었고 박한빈은 짧게 대꾸했다.하지만 서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박한빈은 의아했다.“더 할 말 있어?”“저택에서 전화가 와서 대표님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며 내일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알았어.”박한빈이 대답하자 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그가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오늘 밤 시월 파크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전송 버튼을 누
결국 성유리는 무작정 아무 매운탕 집이나 들어갔다.뜨겁고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은 누가 봐도 박한빈의 슈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박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그냥 단순히 그녀를 도구로 이용한다기엔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둘이 부부로 지낼 때도 두 사람이 밖에서 따로 외식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보석 따위를 사주긴 했어도 굳이 사람을 시켜 케이크를 보내준 적은 없었는데 박한빈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물론 성유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서둘러 차단해 버렸다.“이거 좋아해?”박한빈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자리에 도착하자 성유리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네.” 성유리가 답했다.“난 천성에서 자라서 매운 거 좋아해요.”하지만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엔 이런 것들을 못 먹게 했다.그들 눈에는 음식도 급이 나뉜 것 같았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나고 냄새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성씨 집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물론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사실 성유리도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단순히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그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에 성유리는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만 했다.“여기, 이거 봐.”박한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네며 말하자 성유리는 살짝 놀랐다.위에 적힌 이름을 보자 그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거... 뭐예요?”“경매, 가고 싶어?” 그가 묻자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 같이 가.”성유리가 손을 맞잡았다.“왜요?”“왜라니?”“왜 날 데리고 가는데요?”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난희는 기분이 좋은 듯 박한빈이 들어서자 옆 사람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신나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오셨어요.”집사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김난희를 바라봤다.곧 김난희가 잔뜩 들뜬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얼른 와서 봐.”“뭘 봐요?”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박한빈은 다가가서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보자마자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어갔다.“이것 좀 봐. 이건 설씨 집안 딸인데 지난번에...”“이런 건 왜 보고 있으세요?”박한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보긴, 내가 직접 손주며느리 고르려고 그러지. 방금 내가 말한...”“아직 그럴 생각 없어요.”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일단 좀 보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나보다가 약혼하면 되지. 이번엔 신중하게 천천히 해. 괜히 성유리 같은 애 만나지 말고, 하는 짓마다 재수 없게.”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여기서 성유리 얘기가 왜 나와요?”“내 말이 틀렸어? 걔 전에 양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어쩐지 그렇게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더니 역시 찔리는 게 있었어.”“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순간 가라앉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김난희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기분이 안 좋아?”“안 좋은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얘기 듣지 마시라고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음... 하긴. 그래도 유정이 녀석이 좋은 마음으로 매일 와서 나랑 얘기도 나눠주다가 실수로 나온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박한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짧게 대꾸했다.“너도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너랑 손주며느리 얘기하고 있잖아.”김난희는 태블릿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봐봐.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품행이 올바른 여자들만 골랐으니까 성유리 때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
이틀 뒤, 박한빈의 생일이었다.원래 생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준비한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당연히 파티에 오지 못했고 박한빈은 저녁에 시월 파크에 가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파티는 성공적이었고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대외적으로 공개된 파티가 아니었지만 몇몇 연예인들도 따라 들어왔다.박한빈의 이혼 소문이 퍼지자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늘어났다.밤새 박한빈은 옷에 뭐가 튄 것만 세 번이었다.마지막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쳐냈다.“박 대표님, 제가 좀 닦아드릴까요?”가슴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더없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곧게 쳐다봤지만 박한빈은 동요하지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됐다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고 서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그가 여자를 떨어뜨리자 박한빈이 지시했다.“난 먼저 갈 테니까 손님들은 네가 배웅해.”“지금 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운전기사를 부를게요...”“아니, 택시 타고 갈 거야.”박한빈은 차를 몰고 나가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서훈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여전히 번잡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문득 작년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그때도 어머니가 손수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자신과 성유리의 결혼 1주년 파티에 불참했던 탓에 성유리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도 무척 바빴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그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축하 인사나 선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밤 그는 성유리가 준비한 라이터를 선물로 받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미역국도
다만 갈수록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방으로 바로 갈 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져 잠시 잠을 청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위를 덮친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성유리도 상대를 알아차리고 경직되었던 몸이 풀렸다.이를 감지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유리가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려는데 박한빈이 그런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감쳐물었다.그러자 샴페인의 과일 향이 성유리의 입안으로 옮겨졌다.다소 흥분한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고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빛이 꼭 깊은 밤 매복해 있는 맹수처럼 보여 성유리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몸을 들어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박한빈의 사납고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성유리는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박한빈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마지막 한 번을 침대에서 끝낸 뒤 박한빈은 성유리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여오며 물었다.“뭐 잊은 거 없어?”성유리는 온몸이 기진맥진한 데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렇게 되물었다.“뭐요?”“뭐일 것 같은데?”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풀었다.진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고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 몇 근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의 술은 마셔야 해. 그런데 넌 뭘 했지?”“전 당신 아내잖아요. 저한테 그 정도 특권도 없나요?”성유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아내라는 단어도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다.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빛 속에 감춰지지 않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서연?”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지서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래전이라 성유리는 자신도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혹은,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어차피 지금은 박한빈과 예전의 일을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과거의 자신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으니까.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유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지금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순간, 날카로운 기억들이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성유리의 차분한 겉모습을 찢어버리고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벌써 성큼성큼 다가왔다.“정말 너 맞지? 아까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너였네.”여자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도 뉴스에서 너 자주 봤어! 다들 그러더라? 너 요즘 잘나간다고. 부자 남편 만나서 유복하게 산다며?”“원래 너 찾으려고 금성까지 갈까 했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갔어.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여자는 감격한 듯 팔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전에는 너랑 우리 단이가 같은 반 친구였잖아! 맞다, 그리고 너...”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 잘못 보셨네요.”그 말에 여자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어? 네 집 예전엔...”
성유리는 손끝에 힘을 잔뜩 줬다.하지만 박한빈의 팔 근육이 워낙 단단해서 자신이 아무리 힘을 줘도 제대로 꼬집히지도 않았다.이 사실을 깨닫자 성유리는 살짝 짜증이 났다.성유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곧장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 듯 말했다.“차라리 깨물어 볼래?”“됐어요.”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그렇지만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짜로 신경 쓰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일이 잘 안 풀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아까 감독이랑 이야기했다고 했지? 무슨 얘기였어?”“대본 관련해서...”“수정해야 돼?”박한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다른 작가들도 있으니까 너 혼자 할 필요 없잖아.”“제작사가 새로운 배우를 끼워 넣으려고 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추가해야 하는데...”성유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미 대본이 충분히 꽉 차 있어서 추가하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짜야 돼요. 그런데 감독은 일주일 안에 끝내라고 했어요.”“넌 그걸 동의한 거야?”“제가 싫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저쪽이 우리 영화 최대 투자사거든요 그래서 감독도 쉽게 거절할 수 없고요.”“음... 그럼 곧 최대 투자사가 바뀌겠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요?”“내가...”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성유리를 힐끔 바라봤다.그런데 성유리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성유리,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지?”“아니요? 전혀 아닌데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도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아야!”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손까지 휘저으며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살살 좀 하라고요!”성유리가 두 손으로 자신을 마구 밀쳐내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놓아주었다.“내가 제작사에 투자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이렇게 덫을 세우지 말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게다가 투자사에서 내건 조건도 까다로웠다.“주인공보다 비중은 적어야 하지만 캐릭터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합니다.”감독이 단순히 조건만 언급했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이미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성유리 작가님.”감독은 마치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원작자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겠죠? 어디에 캐릭터를 끼워 넣어야 자연스러울지.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당신이 맡아주세요.”감독의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나 감독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통보를 내렸다.“투자사에서 일주일 내로 수정된 대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준비하세요. 그리고 임 작가님이 성 작가님 작업에 맞춰 협조해 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캐스팅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나갔다.회의실에 남겨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임 작가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작가님,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세요?”성유리는 묻는 임 작가를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쩌죠? 겨우 일주일인데 이 대본을...”임 작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보자 예상대로 박한빈이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임 작가에게 말했다.“일단 먼저 돌아가세요. 통화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요.”“네, 알겠습니다.”상대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유리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 결국 조용히 짐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그제야 성유리는 전화를 받았다.“아직 회의실에 있어?”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는 살짝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첫 두 글자만 들어도 이미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곧 스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어조를 차분하게 바꿨다.“네.”“그런데 내가 보낸 메시지는 왜 안 봤어?”“감독님이랑 이야기 중이었어요.”“아... 그래?”그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했다.이제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거의 다 박한빈 때문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 이우빈이 식사 제안을 했을 때도 성유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순간적으로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잠시 고민하던 끝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그이도 시간 없을 거예요. 여기 온 것도... 원래 업무 때문에 온 거라서요.”“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네.”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상황을 넘겼다.그렇게 대화를 마쳤으면 떠날 법도 한데 이우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성유리는 원래 하려던 대본 수정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는 이우빈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더 할 얘기 있어요?”“아니, 없습니다.”“그럼...”“전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겁니다.”이우빈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작가님이 일하는 거 보는 게 꽤 재밌기도 해서요.”성유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갑자기 이우빈이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맞다, 재국 형님이 오후에 라이브 방송을 잡아놨는데 작가님도 같이하실래요?”“전 괜찮...”“이번 신작 영화 관련해서 팬들이랑 얘기할 건데 제가 대본을 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작가님은 확실히 알고 계시죠?”“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저 라이브 방송 안 할 거고요.”“그렇지만...”이우빈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성유리는 갑자기 몸이 굳었다.마치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우빈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실례합니다, 성유리 씨 계십니까?”낯선 목소리에 성유리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이우빈이 먼저 나서서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던 건 배달
성유리는 컵을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이우빈이 뭔가를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굳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점심도 안 드셨던데 뭐라도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매니저더러 시켜드리라고 할까요?”“괜찮아요. 전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요.”“그래도 굶으시면 안 됩니다. 밥은 꼭 챙겨 드셔야죠.”이우빈은 굴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면서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성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이거 보세요, 어제 유재국 형님이 드셨던 건데 꽤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죄송하지만 전... 감독님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 다이어트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천은 못 해 드리겠어요.”“아니,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그럼 그냥 시켜놓겠습니다.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니까요.”이우빈은 성유리가 거절할 틈도 없이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매니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뭔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남자는 성유리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이우빈 씨, 유재국 씨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오랜 시간 인기 스타로 활동해 온 이우빈이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매니저를 향해 손을 휙 내저었다.매니저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결국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자, 빨리 드셔보세요.”그리고 이우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음식을 성유리 앞에 밀어놓았다.워낙 적극적인 태도에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음식을 받아들었다.이우빈이 시킨 건 이 지역 특유의 비빔면이었다.고소한 참깨와 땅콩 소스가 올려져 있었는데 고추기름은 따로 곁들여져 있었다.“작
야시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옆에서 스피커로 광고를 틀어대는 덕분에 원래도 시끄러운 거리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붐비는 인파 속에서, 진한 삶의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박한빈에게는 그 말이 한 편의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나는 널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어젯밤의 냉전도, 오늘 하루 내내 품고 있던 답답함도, 사실은 성유리 때문이 아니었다.박한빈은 그저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뿐이다.뜻밖의 반응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그럼... 이제 화 안 난 거지?”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안 났어요.”사실 어젯밤 박한빈을 몰아붙이고 나서 성유리의 감정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온 건 그저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박한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러고는 성유리를 가만히 안아 올렸다.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심지어 길 건너편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허리를 숙이고 성유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이제 그는 알맞은 힘과 각도를 완벽히 익혔다. 그래서 아프지 않지만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포옹이었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박한빈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계속 구경 안 할 거예요?”“안 해.”그는 단호했다.성유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박한빈이 곧장 자신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의도를 깨달았다.“저 아직 다 못 먹었는데요?”당황한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곤 말을 얼버무렸다.“가서 마저 먹어.”“진짜 먹을 수 있게 해 줄 거예요?”성유리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자 이번엔 박한빈
음식이 다 익자 아주머니는 건져 올린 재료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 그릇에 담고 매운 고추장과 참깨를 듬뿍 뿌려 버무렸다.성유리는 그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이내 아주머니가 음식을 내주자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어 박한빈에게 내밀었다.“한번 드셔볼래요?”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보던 박한빈은 입술을 달싹였다.몇 초 뒤,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천천히 입을 벌렸다.“맛있어요?”성유리가 기대에 잔뜩 찬 눈빛으로 물었다.음식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하지만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표정을 재빨리 고쳐 잡고 대답했다.“맛있네.”성유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도 한입 먹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에릭 일은... 내 잘못이었어.”갑작스러운 말에 성유리는 젓가락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때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조언해 줬어. 사실... 그냥 무책임했지.”박한빈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그래서 오늘 확실하게 이야기했어.”“뭐라고 했는데요?”“결혼을 왜 하려는 건지 제대로 생각해 보라고 했어.”박한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건 결국 에릭의 감정 문제잖아. 내가 너무 간섭하는 것도 안 좋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걔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거야.”“그래서 물어봤어. 이게 단순한 복수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아라 씨와 결혼하고 싶은 건지.”“만약 에릭이 진심이라면 최소한 앞으로 아라 씨와 그 사람의 가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테니까. 그렇다면 결혼이 꼭 나쁜 선택은 아닐 수도 있잖아.”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해?”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성유리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이.성유리는 그런 그를 한동안 바라보
이곳에 다시 온 건 사실 성유리에게도 몇 년 동안 처음 있은 일이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높이 솟은 빌딩들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들.그 풍경 속에서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기억이 엉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큰 변화가 찾아와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이 지역은 밤이 되면 산바람이 불어와 꽤 서늘했기에 매운맛과 강한 양념을 선호하는 문화는 여전했다.박한빈은 원래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지만 성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주 매운탕을 먹으러 다녔다.물론 그는 여전히 맑은 국물을 선택했지만 가끔은 매운 국물에도 도전하곤 했다.그렇지만 오늘 밤 성유리는 매운탕 집 대신 내비게이션을 따라 근처의 음식 거리로 향했다.사실 전국 어디든 이런 음식 거리에서 파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성유리는 불편해하는 박한빈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말했다.“이 음식 거리를 지나면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 예전에 제가 다녔던 학교고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꽉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가볼래?”그러다 문득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이 늦은 밤에 학교엔 누가 가요? 게다가... 전 못 가요.”“왜? 누가 널 보면 곤란해?”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람이 아니고....”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인지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래서 그는 몸을 숙이며 다시 물었다.“뭐라고?”성유리는 박한빈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다들 그러잖아요. 우리 학교는 원래 공동묘지였다고. 원한 맺힌 혼령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던데... 학교를 세운 뒤에도 밤이면 돌아다닌대요.”성유리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그 사람이 나보다 잘생겼어?”“그게 아니라...”“혹시 내 젊었을 때랑 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박한빈 씨 지금도 안 늙었어...”“그런데 왜 그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선택한 거지? 남자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성유리는 상황이 좀 꼬여버렸다고 느꼈다.어젯밤, 그들은 격렬한 말다툼을 한 데다가 심지어 따로 잠을 잤었다.그녀는 최소 며칠은 냉전 분위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왜 대답 안 해?”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캐스팅은 제가 관여하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쓴 남자 주인공이 꼭 박한빈 씨라고 말한 적도 없고요.”“그럼 네 그림이랑 내 사진을 한번 비교해 보면...”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성유리의 작품은 늘 공개되어 왔고 출판되거나 영상으로 각색될 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게 부끄러웠다.“그래요. 맞다고 합시다.”하지만 박한빈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쳐다보자 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서 어쩌라고요? 각색은 각색일 뿐이에요. 설마 배우가 돼서 직접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연기는 안 해. 하지만 네가 인정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성유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박한빈도 잠시 조용해졌다.이 대화는 이쯤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그렇지만 이제 그들 사이의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예를 들면 성유리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말도 안 하고 혼자 왔는지 같은 것.성유리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박한빈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입술을 다물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살짝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엄마, 왜 내 메시지 안 봤어?”수화기 너머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성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