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79화

작가: 송진
“성유리, 기억해.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렸어. 애초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순조로운 이혼이 가능했을 것 같아?”

그 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박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

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한 것을.

예전에는 대를 이어줄 아내였고 지금은... 그저 욕구나 해소하는 도구일 뿐인걸.

성유리의 이런 차분한 표정은 박한빈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며 곧바로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입 맞추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성유리가 또다시 툭 눈물을 흘렸고 그 서늘한 느낌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의 잇새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

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게 하는 키스였다.

성유리는 금세 불편함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

성유리는 마치 모래밭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심지어 성유리는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약점이 잡히고 갑옷이 벗겨졌다.

줄곧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성유리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박한빈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성유리는 지난 2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의 분출구를 찾은 듯 온 힘을 동원해 그의 살을 콱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에게 보복당하고 만다.

금성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알았는데 이날 밤 그녀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금성의 밤을 두 눈을 보게 되었다.

짙은 어둠 속 번쩍이는 네온 불빛은 마치 칵테일을 부은 듯 몽환적이면서도 흐릿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0화

    그 소리는 조용하고 공허한 방에 선명하게 울렸고 박한빈마저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성유리가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박한빈은 더 이상 행동을 이어가지 않고 손을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뭐 먹고 싶어?”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그냥 걸어 나갔다.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다시 돌아왔다.“밥 먹자.” 그가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쯤 되니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결국 그녀는 몸의 본능에 굴복했다.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적지 않은 음식을 시켰고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 도연제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담백했다.하지만 성유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옆에 놓인 케이크였다.다크 초콜릿에 붉은 체리가 놓여있는 케이크.성유리가 천천히 손을 말아쥐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에 앉았다.케이크가 놓인 자리는 그렇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개를 길들이는 데는 타고났네.’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선사하는 게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다가간 성유리는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케이크에 박한빈의 시선이 몇 번이고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입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잠깐.”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박한빈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자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1화

    그 후 며칠 동안 박한빈은 다시 연락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매일 다른 디저트 가게에서 보내오는 케이크를 받았다.게다가 한 개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케이크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며 그녀가 케이크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성유리는 마지못해 케이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며칠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한테 뭐 보내지 마요.”“왜, 마음에 안 들어?”박한빈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말할 때도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좋아한다며? 그럼 매일 보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으라고.성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통화가 끊겨서 들리는 신호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휴대폰을 떼어내자 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기가 막혀 나오는 웃음이었다.성유리가 갈수록 성깔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인데 더 이상 그 앞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는 걸 수도.하지만 어쨌든 나름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말없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박한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전에 눈여겨보라고 하시던 안 작가님 그림 경매가 정해졌습니다. 이달 말 진성에서 열릴 예정이랍니다.”서훈은 이렇게 말하며 박한빈 바로 앞에 초대장을 내밀었고 박한빈은 짧게 대꾸했다.하지만 서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박한빈은 의아했다.“더 할 말 있어?”“저택에서 전화가 와서 대표님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며 내일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알았어.”박한빈이 대답하자 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그가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오늘 밤 시월 파크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전송 버튼을 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2화

    결국 성유리는 무작정 아무 매운탕 집이나 들어갔다.뜨겁고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은 누가 봐도 박한빈의 슈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박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그냥 단순히 그녀를 도구로 이용한다기엔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둘이 부부로 지낼 때도 두 사람이 밖에서 따로 외식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보석 따위를 사주긴 했어도 굳이 사람을 시켜 케이크를 보내준 적은 없었는데 박한빈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물론 성유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서둘러 차단해 버렸다.“이거 좋아해?”박한빈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자리에 도착하자 성유리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네.” 성유리가 답했다.“난 천성에서 자라서 매운 거 좋아해요.”하지만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엔 이런 것들을 못 먹게 했다.그들 눈에는 음식도 급이 나뉜 것 같았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나고 냄새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성씨 집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물론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사실 성유리도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단순히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그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에 성유리는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만 했다.“여기, 이거 봐.”박한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네며 말하자 성유리는 살짝 놀랐다.위에 적힌 이름을 보자 그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거... 뭐예요?”“경매, 가고 싶어?” 그가 묻자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 같이 가.”성유리가 손을 맞잡았다.“왜요?”“왜라니?”“왜 날 데리고 가는데요?”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3화

    그러나 김난희는 기분이 좋은 듯 박한빈이 들어서자 옆 사람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신나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오셨어요.”집사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김난희를 바라봤다.곧 김난희가 잔뜩 들뜬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얼른 와서 봐.”“뭘 봐요?”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박한빈은 다가가서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보자마자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어갔다.“이것 좀 봐. 이건 설씨 집안 딸인데 지난번에...”“이런 건 왜 보고 있으세요?”박한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보긴, 내가 직접 손주며느리 고르려고 그러지. 방금 내가 말한...”“아직 그럴 생각 없어요.”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일단 좀 보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나보다가 약혼하면 되지. 이번엔 신중하게 천천히 해. 괜히 성유리 같은 애 만나지 말고, 하는 짓마다 재수 없게.”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여기서 성유리 얘기가 왜 나와요?”“내 말이 틀렸어? 걔 전에 양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어쩐지 그렇게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더니 역시 찔리는 게 있었어.”“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순간 가라앉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김난희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기분이 안 좋아?”“안 좋은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얘기 듣지 마시라고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음... 하긴. 그래도 유정이 녀석이 좋은 마음으로 매일 와서 나랑 얘기도 나눠주다가 실수로 나온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박한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짧게 대꾸했다.“너도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너랑 손주며느리 얘기하고 있잖아.”김난희는 태블릿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봐봐.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품행이 올바른 여자들만 골랐으니까 성유리 때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4화

    이틀 뒤, 박한빈의 생일이었다.원래 생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준비한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당연히 파티에 오지 못했고 박한빈은 저녁에 시월 파크에 가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파티는 성공적이었고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대외적으로 공개된 파티가 아니었지만 몇몇 연예인들도 따라 들어왔다.박한빈의 이혼 소문이 퍼지자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늘어났다.밤새 박한빈은 옷에 뭐가 튄 것만 세 번이었다.마지막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쳐냈다.“박 대표님, 제가 좀 닦아드릴까요?”가슴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더없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곧게 쳐다봤지만 박한빈은 동요하지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됐다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고 서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그가 여자를 떨어뜨리자 박한빈이 지시했다.“난 먼저 갈 테니까 손님들은 네가 배웅해.”“지금 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운전기사를 부를게요...”“아니, 택시 타고 갈 거야.”박한빈은 차를 몰고 나가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서훈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여전히 번잡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문득 작년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그때도 어머니가 손수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자신과 성유리의 결혼 1주년 파티에 불참했던 탓에 성유리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도 무척 바빴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그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축하 인사나 선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밤 그는 성유리가 준비한 라이터를 선물로 받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미역국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5화

    다만 갈수록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방으로 바로 갈 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져 잠시 잠을 청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위를 덮친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성유리도 상대를 알아차리고 경직되었던 몸이 풀렸다.이를 감지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유리가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려는데 박한빈이 그런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감쳐물었다.그러자 샴페인의 과일 향이 성유리의 입안으로 옮겨졌다.다소 흥분한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고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빛이 꼭 깊은 밤 매복해 있는 맹수처럼 보여 성유리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몸을 들어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박한빈의 사납고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성유리는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박한빈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마지막 한 번을 침대에서 끝낸 뒤 박한빈은 성유리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여오며 물었다.“뭐 잊은 거 없어?”성유리는 온몸이 기진맥진한 데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렇게 되물었다.“뭐요?”“뭐일 것 같은데?”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풀었다.진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고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6화

    박한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침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살짝 멈칫한 그가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서 성유리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의 눈빛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어디 가는 거야?”“집이요.”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입술을 꽉 다문 박한빈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달칵...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닫자 넓은 집 안에 곧 박한빈 혼자 남겨졌다.그리고 돌아서면서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성유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커프스단추는 아직 그녀의 가방 안에 있었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면서 버리려고 했지만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성유리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자기, 아직 안 잤지?”저쪽에서 송효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좋은 소식이 있어.”“안 잤어, 말해.”성유리가 커프스단추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지난번 네 책 영화로 제작될 것 같아! 밀레니엄 픽처스라고 알아? 엄청나게 큰 제작사야!”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은 소식이네. 그래서?”“쯧,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돈은 눈에도 안 차겠지만 그래도 큰 건이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판권 못 팔 일은 없어. 그러니 이번에 잘 협상해야 해!”“그래, 힘내.”“아니, 왜 나만 힘내? 그럼 너는?”“내가 판권은 다 그쪽에 맡겼잖아?”“음... 그렇긴 한데 네가 직접 협상에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성유리가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안 가.”“왜?”“이유는 없어. 협상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말아.”성유리의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송효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송효주가 황급히 외쳤다.“자기, 우리 같이 한번 만나보자, 응? 내가 이미 편집장님한테 너 데리고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네가 안 가면 난 할 말이 없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7화

    사교성이 좋았던 송효주는 처음에는 조금 소심하게 굴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움직였다.“어머, 양 대표님, 안녕하세요!”송효주는 어렵사리 오늘 드디어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스타 코믹스 송효주입니다. 전에 얘기 나눈 적 있는데!”“아, 안녕하세요.”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송효주와 먼저 악수를 나눈 뒤 천천히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전에 얘기했던 [해당화] 작품 작가님이세요.”“아,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양 대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데요?”“아닐 거예요, 전 자주 외출하지 않아서요.”성유리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고 남자는 여전히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작품은 이미 봤어요. 각색하기 아주 좋던데요. 게다가 우리 진 대표도 읽고 나서 굉장히 흥미로워서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성유리는 원래도 상대가 송효주에게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게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말이 나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송효주는 오히려 신나서 말했다.“정말요? 그럼 진 대표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곧 남자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진 대표, 전에 관심 있게 봤던 만화책 작가가 이분이야. 참... 그러고 보니 이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저는 송효주라고 합니다!”송효주는 성유리를 흘끗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앞을 막아 나섰다.“아니, 내 말은...”“성유리 씨 맞죠?”양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이미 먼저 말을 꺼냈다.성유리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밀레니엄 픽처스는 진씨 가문의 시즌그룹 산하에 있는 회사다.진무열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시즌그룹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맡지 않았다.그러니 상대방이 말하는 진 대표는 아마도 진무열의 형이겠지.더 이상 피할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9화

    성유리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으나 연정우는 바로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우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왜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어떻게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정말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그를 미워해야 한다!그런데 왜 성유리는 단 한 점의 미움의 감정도, 원망도 없는 것일까. 혹시 연정우는 미움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의 표정은 조금씩 사라졌고 안색도 매우 안 좋아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래서 그녀는 연정우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그럼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연정우는 그제야 그들이 어느새 병원 입구에 다 왔음을 알아챘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마치는 즉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제자리에 남겨진 연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괴이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유리의 모습이 연정우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떠나갔다.한편, 성유리는 곧바로 병실로 돌아왔고 이때 병실은 아주 조용헀다.류수미는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깎고 있었으며 사민혁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하지만 텔레비전의 소리는 너무도 작았기에 성유리는 단번에 그의 주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정우는 정말 좋은 애인 것 같아요”그러던 와중, 갑작스러운 류수미의 한 마디.그 한마디에 사민혁은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쳐다봤고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러나 류수미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했다.“만약 가능하다면... 하나가 돌아온다면 난 반드시 정우와 결혼시킬 거예요.”“왜 또 그런 말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8화

    연정우는 성유리가 할 대답을 쭉 생각해 봤었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게다가 지금 성유리의 눈빛을 보니 일부러 연정우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사뭇 진지하고 진심인 것 같았다.‘정말 진지하게 나한테 묻네.’연정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우린 헤어지지 않았나? 게다가 우리 둘이 만날 때 나도 박한빈 씨랑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난 이 방면에선 깨끗해. 그래서 너한테 잘못한 적은 없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너 지금... 나를 돌려 까는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있다 이내 대답하려고 입을 뻥끗거렸다.그러나 연정우가 먼저 말했다.“나도 알아. 이런 일엔... 나도 확실히 문제가 좀 있었지. 근데 유리야, 네 생각엔 그때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그를 쳐다보다 되물었다.“그러니까 그때 넌 날 속이고 있었던 거네? 맞아?”“뭐?”“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아무것도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이 네가 가진 것들을 다 뺏어가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 말들... 다 거짓말이었어?”“아니야.”연정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아마 스스로도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정우는 다른 변명을 더 하려고 했다.그러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젠 알겠네.”“뭘... 알겠다는 거야?”“그때 네가 날 선택한 이유가 사실 그냥...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던 거란 걸.”성유리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당시 네 회사는 이미 절벽 끝까지 밀려났었지. 그래서 박한빈 씨와 겨룰 자격도, 그럴 실력도 없었고. 너는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를 선택한 거야. 그런 김에 나한테서 너에 대한 호감이나 죄책감도 얻고. 맞지?”“나중에 유효정 씨가 찾아왔을 땐 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7화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민혁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이제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님은...”“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이젠 괜찮다고.”대답하는 류수미의 태도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내내 정우가 있어서 별로 큰일도 안 생겼고.”“저도 딱히 한 건 없는걸요. 그래도 다행히 아버님께서 잘 이겨내셨어요. 근데 꼭 무리하면 안 되고 잘 휴식해야 한다고 했으니 명심하십시오.”“그래요. 정우 말이 맞아요.”류수미는 연정우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제가 그랬잖아요. 회사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저흰 이제 나이도 있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 하시려고요?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남겨줄 수도...”말하던 류수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봤다.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던 성유리는 류수미의 말을 들은 어느 한순간, 두 주먹을 꽉 쥐었다.분위기가 얼어붙으려고 하던 그때, 연정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류수미도 얼른 대답해 줬다.“그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니? 돌아가서 푹 쉬어,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성유리는 연정우가 언제부터 사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졌는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들이 연정우를 보는 눈빛을 관찰하니 다들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세 사람의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유효정.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국내에선 아무도 유효정의 사망 소식을 신경 쓰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하기야 유씨 가문은 이미 타락한 상태고 그녀의 부모님 또한 세상을 떠났다.그러니 유효정의 사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유리야, 네가 나 좀 바래다줄래?”연정우가 묻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다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6화

    “누가 아픈데요? 중요한 사람인가 보죠? 박한빈 씨가 야밤에 직접 병원에 다녀오는 걸 보면.”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뚫어져라 보며 계속 물었다.그 눈빛을 본 박한빈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이젠 유리한테도 대충 얼버무리면 안 될 것 같네.’이런 원인에서인지 박한빈은 가끔 다른 사람들이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그러나 그건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하지만 자신감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박한빈에게는 그런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 그냥 꽤 중요한 협업 파트너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나 봐. 상황이 되게 위급했다던데...”“근데 내가 갔을 땐 구조가 됐었어. 그래서 나도 오래 남지 않은 거고.”태연하게 말하는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하지만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아마 알지 않을까? 나도 모르겠는데.”박한빈은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다른 말을 꺼냈다.“지금까지 나를 기다린 게 고작 이런 걸 물어보려는 거였어?”성유리는 너무도 느긋한 박한빈의 태도에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으니까.”박한빈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먼저 자. 난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이번에 성유리는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렇지만 박한빈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잠이 안 와?”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박한빈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그럼 뭐라도 좀 할까?”성유리는 대답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을 꼭 끌어안았다.오랫동안 알고 지낸 두 사람이었기에 박한빈은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 수 있었고 지금 성유리가 할 기분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그저 말없이 성유리의 등을 토닥여줬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5화

    돌아온 연정우는 박한빈과 눈을 맞추다 이내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도 아버님께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연정우 씨,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지?”박한빈은 연정우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리고 연정우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혐오와 경계의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박 대표님, 지금 그게...”연정우는 박한빈의 시선에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재산을 위해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죽은 친구의 부모는 잘 챙기십니다?”박한빈은 콧방귀를 끼며 계속 물었다.“그쪽 생각엔 제가 이걸 믿을 것 같습니까?”“사람을 죽인다고요? 박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요?”“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제일 잘 알 겁니다.”연정우는 말 없이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어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이제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하지만 전 이미 어머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아니면 지금 다시 전화해 볼까요? 제가 여기 남는 걸 동의하시는지 안 하시는지?”진지한 얼굴로 묻는 연정우를 박한빈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런데도 연정우는 미소 띤 얼굴로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박 대표님, 설마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여기 남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그 말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저랑 사하나 씨는 전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은요? 유리 때문에 사씨 가문 사람들을 챙기려는 겁니까? 설마 그 사람들이 당신을 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사하나 씨의 죽음은 이제 두 분이 받아들이고 괜찮아지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 믿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일은 잊고 싶어 한다는 걸요. 그러니까... 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4화

    박한빈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하지만 응급실 앞에 서 있는 연정우를 보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췄고 표정을 굳혔다.류수미는 의자에 앉아 연정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마치 그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박 대표님, 오셨습니까?”연정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류수미에게 물었다.“사 회장님은 어떠십니까?”“의사들이 아직 구조 중이에요.”류수미는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요즘 안색이 말이 아니었고 아침에도 심장이 아프다고 했거든요. 월말에 건강검진 받으러 가기로 해서 그때까지 놔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괜찮으실 겁니다.”박한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연정우가 먼저 류수미에게 대답해 줬다.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오늘 네가 우리 보러 오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몰랐을 거야.”“별말씀을요. 저랑 사하나 씨는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두 분을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죠.”연정우는 마치 자상한 사람인 척하며 류수미를 달랬고 그 순간, 응급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환자분 생명에는 이제 위협이 없습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류수미는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사민혁의 아내인 류수미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지만 연정우가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괜찮다고 하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박한빈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아닙니다. 전 여기 남겠어요.”류수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박한빈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 연정우가 먼저 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3화

    사실 박한빈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그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손에서 놀아나는 장난감 같았으니까.하지만 성유리가 그 ‘장난감’들을 놀기로 결정했으니 박한빈은 그녀에게 무대를 내어주기로 결심했다.‘장난감’들의 결말이 어떻든 박한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맹정태의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일부로 목소리를 깔고 멋져 보이려고 애쓴 맹정태의 음성 메시지를 듣자 박한빈은 화가 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연정우도 마찬가지다. 박한빈이 보기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와 만남을 가졌었다.그러니 박한빈은 연정우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매력이 존재할 거라고 여겼다.‘맹정태는 또 뭐야?’‘고작 저딴 놈도 유리한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가? 정말 우습군.’그래서 박한빈은 생각을 바꿨다. 성유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재밌는 ‘놀이’를 하기로.마침 그도 홍지은이라는 사람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기에 그들이 이 도시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박한빈 씨.”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금세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왜 그래?”“아직 저한테 말 안 해주셨어요. 제 핸드폰은 왜 보신 거예요?”“아, 스팸 전화가 와서 그거 받아주다가 우연히 본 거야.”“맹정태 씨 문자는 제일 밑에 있었고 제가 차단까지 했는데 우연히 보셨다고요?”박한빈은 차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리고 순간, 너무 똑똑한 여자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박한빈 씨 핸드폰도 주세요.”한참을 박한빈만 뚫어져라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그러자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박한빈의 핸드폰을 ‘탐험’하기 시작했다.박한빈의 핸드폰 속 문자 내용들은 거의 다 업무에 관한 것이었고 연락처에도 같은 업계 사람들뿐이었다.게다가 문자를 나눈 사람도 몇 없었다.“전에 미리 지우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물었다.“내가 뭘 지우는데?”박한빈은 오히려 웃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2화

    박한빈은 성유리가 건네는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물었다.“안 보세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급한 일 아니잖아. 일단 네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어.”“아, 제가 이미 공장 가서 검사해 봤어요. 지금 맹씨 가문 소유의 공장은 맹정태 씨 매형이 보고 있었어요. 직원은 500명 정도 있고 기간은 25일로 정했대요. 그리고... 만약 재료들이 충분하게 준비됐다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근데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효율이 좋지 않대요. 맹정태 씨 매형도 도박꾼이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요. 그래서 사실 공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료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짧은 시간 내에 필요로 하는 수량을 만들어내려면 그 사람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성유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고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로잡혀 멍해졌다.심지어 어느 한순간,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다.성유리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박한빈의 시선을 발견했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 듣고는 계세요?”“응. 듣고 있어.”박한빈은 그제야 대답하며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래서? 넌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지?”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손가락으로 성유리의 손바닥을 계속 만지작대고 있었다.그 탓에 간지러워진 성유리가 손을 빼내려 하자 박한빈은 힘을 더 세게 주며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맹정태 씨 매형 도박꾼이라고요! 사실 공장에 있던 재료들 다 그 사람이 가져다가 팔았어요. 혼자서 성 씨가 다른 도박꾼이니 만약 이 일이 맹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마어마한 후과를 치러야겠죠.”“그러니까 매형이라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꼭 찾아낼 거예요. 자기 때문에 텅 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1화

    홍지은은 떠나가려는 성유리를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봤고 그녀는 자신의 침을 챙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룸의 문이 스르르 닫힐 때, 성유리는 남아있는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그 시각 홍지은은 새로 생긴 자신의 팔찌를 감상하고 있었다.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성유리를 의심할 때와 180도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성유리는 홍지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필경 홍지은이 말한 것처럼 박한빈을 무너뜨리려는 성유리의 생각이 누구한테나 이상하게 들릴 테니까.제일 먼저 박한빈의 지금 위치와 수법으로 보자면 절대 감정만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론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한 마음이다.이런 상황에 그 아무도 성유리가 박한빈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담보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홍지은이 잔뜩 경계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성유리가 방금 한 행동들은 다... 홍지은이 자신을 철석같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만약 가능했다면 성유리는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홍지은을 속이기 싫었다.그러나 지금 홍지은에게 바로 지나간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한다면 그녀는 무조건 경계심과 의심을 버리지 않을 게 뻔했다.그래서 성유리가 찾은 변명이자 핑계가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어떻게 됐든... 일은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성유리가 맹정태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박한빈에게 가져다주려고 할 무렵, 캐톡으로 누군가가 성유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왔다.[안녕하십니까. 맹정태입니다.]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성유리는 친구신청을 수락했고 일 분도 채 안 되어 맹정태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보내왔다.[이번 일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성유리는 맹정태가 감사 인사를 하려고 특별히 친구 추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다.그러자 맹정태가 이내 또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과 박 대표님 사이 일은 홍지은에게서 들었습니다.][사모님의 과거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