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 기억해.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렸어. 애초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순조로운 이혼이 가능했을 것 같아?”그 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박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말이 맞다.그녀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한 것을.예전에는 대를 이어줄 아내였고 지금은... 그저 욕구나 해소하는 도구일 뿐인걸.성유리의 이런 차분한 표정은 박한빈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며 곧바로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입 맞추었다.입술이 맞닿는 순간 성유리가 또다시 툭 눈물을 흘렸고 그 서늘한 느낌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의 잇새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게 하는 키스였다.성유리는 금세 불편함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성유리는 마치 모래밭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심지어 성유리는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약점이 잡히고 갑옷이 벗겨졌다.줄곧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성유리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박한빈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유리는 지난 2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의 분출구를 찾은 듯 온 힘을 동원해 그의 살을 콱 깨물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에게 보복당하고 만다.금성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알았는데 이날 밤 그녀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금성의 밤을 두 눈을 보게 되었다.짙은 어둠 속 번쩍이는 네온 불빛은 마치 칵테일을 부은 듯 몽환적이면서도 흐릿했다.나중에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공허한 방에 선명하게 울렸고 박한빈마저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성유리가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박한빈은 더 이상 행동을 이어가지 않고 손을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뭐 먹고 싶어?”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그냥 걸어 나갔다.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다시 돌아왔다.“밥 먹자.” 그가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쯤 되니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결국 그녀는 몸의 본능에 굴복했다.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적지 않은 음식을 시켰고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 도연제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담백했다.하지만 성유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옆에 놓인 케이크였다.다크 초콜릿에 붉은 체리가 놓여있는 케이크.성유리가 천천히 손을 말아쥐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에 앉았다.케이크가 놓인 자리는 그렇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개를 길들이는 데는 타고났네.’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선사하는 게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다가간 성유리는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케이크에 박한빈의 시선이 몇 번이고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입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잠깐.”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박한빈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자기
그 후 며칠 동안 박한빈은 다시 연락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매일 다른 디저트 가게에서 보내오는 케이크를 받았다.게다가 한 개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케이크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며 그녀가 케이크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성유리는 마지못해 케이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며칠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한테 뭐 보내지 마요.”“왜, 마음에 안 들어?”박한빈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말할 때도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좋아한다며? 그럼 매일 보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으라고.성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통화가 끊겨서 들리는 신호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휴대폰을 떼어내자 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기가 막혀 나오는 웃음이었다.성유리가 갈수록 성깔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인데 더 이상 그 앞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는 걸 수도.하지만 어쨌든 나름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말없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박한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전에 눈여겨보라고 하시던 안 작가님 그림 경매가 정해졌습니다. 이달 말 진성에서 열릴 예정이랍니다.”서훈은 이렇게 말하며 박한빈 바로 앞에 초대장을 내밀었고 박한빈은 짧게 대꾸했다.하지만 서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박한빈은 의아했다.“더 할 말 있어?”“저택에서 전화가 와서 대표님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며 내일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알았어.”박한빈이 대답하자 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그가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오늘 밤 시월 파크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전송 버튼을 누
결국 성유리는 무작정 아무 매운탕 집이나 들어갔다.뜨겁고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은 누가 봐도 박한빈의 슈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박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그냥 단순히 그녀를 도구로 이용한다기엔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둘이 부부로 지낼 때도 두 사람이 밖에서 따로 외식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보석 따위를 사주긴 했어도 굳이 사람을 시켜 케이크를 보내준 적은 없었는데 박한빈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물론 성유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서둘러 차단해 버렸다.“이거 좋아해?”박한빈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자리에 도착하자 성유리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네.” 성유리가 답했다.“난 천성에서 자라서 매운 거 좋아해요.”하지만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엔 이런 것들을 못 먹게 했다.그들 눈에는 음식도 급이 나뉜 것 같았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나고 냄새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성씨 집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물론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사실 성유리도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단순히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그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에 성유리는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만 했다.“여기, 이거 봐.”박한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네며 말하자 성유리는 살짝 놀랐다.위에 적힌 이름을 보자 그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거... 뭐예요?”“경매, 가고 싶어?” 그가 묻자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 같이 가.”성유리가 손을 맞잡았다.“왜요?”“왜라니?”“왜 날 데리고 가는데요?”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난희는 기분이 좋은 듯 박한빈이 들어서자 옆 사람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신나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오셨어요.”집사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김난희를 바라봤다.곧 김난희가 잔뜩 들뜬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얼른 와서 봐.”“뭘 봐요?”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박한빈은 다가가서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보자마자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어갔다.“이것 좀 봐. 이건 설씨 집안 딸인데 지난번에...”“이런 건 왜 보고 있으세요?”박한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보긴, 내가 직접 손주며느리 고르려고 그러지. 방금 내가 말한...”“아직 그럴 생각 없어요.”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일단 좀 보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나보다가 약혼하면 되지. 이번엔 신중하게 천천히 해. 괜히 성유리 같은 애 만나지 말고, 하는 짓마다 재수 없게.”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여기서 성유리 얘기가 왜 나와요?”“내 말이 틀렸어? 걔 전에 양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어쩐지 그렇게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더니 역시 찔리는 게 있었어.”“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순간 가라앉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김난희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기분이 안 좋아?”“안 좋은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얘기 듣지 마시라고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음... 하긴. 그래도 유정이 녀석이 좋은 마음으로 매일 와서 나랑 얘기도 나눠주다가 실수로 나온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박한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짧게 대꾸했다.“너도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너랑 손주며느리 얘기하고 있잖아.”김난희는 태블릿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봐봐.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품행이 올바른 여자들만 골랐으니까 성유리 때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
이틀 뒤, 박한빈의 생일이었다.원래 생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준비한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당연히 파티에 오지 못했고 박한빈은 저녁에 시월 파크에 가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파티는 성공적이었고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대외적으로 공개된 파티가 아니었지만 몇몇 연예인들도 따라 들어왔다.박한빈의 이혼 소문이 퍼지자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늘어났다.밤새 박한빈은 옷에 뭐가 튄 것만 세 번이었다.마지막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쳐냈다.“박 대표님, 제가 좀 닦아드릴까요?”가슴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더없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곧게 쳐다봤지만 박한빈은 동요하지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됐다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고 서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그가 여자를 떨어뜨리자 박한빈이 지시했다.“난 먼저 갈 테니까 손님들은 네가 배웅해.”“지금 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운전기사를 부를게요...”“아니, 택시 타고 갈 거야.”박한빈은 차를 몰고 나가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서훈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여전히 번잡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문득 작년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그때도 어머니가 손수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자신과 성유리의 결혼 1주년 파티에 불참했던 탓에 성유리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도 무척 바빴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그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축하 인사나 선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밤 그는 성유리가 준비한 라이터를 선물로 받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미역국도
다만 갈수록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방으로 바로 갈 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져 잠시 잠을 청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위를 덮친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성유리도 상대를 알아차리고 경직되었던 몸이 풀렸다.이를 감지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유리가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려는데 박한빈이 그런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감쳐물었다.그러자 샴페인의 과일 향이 성유리의 입안으로 옮겨졌다.다소 흥분한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고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빛이 꼭 깊은 밤 매복해 있는 맹수처럼 보여 성유리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몸을 들어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박한빈의 사납고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성유리는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박한빈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마지막 한 번을 침대에서 끝낸 뒤 박한빈은 성유리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여오며 물었다.“뭐 잊은 거 없어?”성유리는 온몸이 기진맥진한 데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렇게 되물었다.“뭐요?”“뭐일 것 같은데?”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풀었다.진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고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박한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침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살짝 멈칫한 그가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서 성유리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의 눈빛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어디 가는 거야?”“집이요.”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입술을 꽉 다문 박한빈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달칵...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닫자 넓은 집 안에 곧 박한빈 혼자 남겨졌다.그리고 돌아서면서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성유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커프스단추는 아직 그녀의 가방 안에 있었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면서 버리려고 했지만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성유리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자기, 아직 안 잤지?”저쪽에서 송효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좋은 소식이 있어.”“안 잤어, 말해.”성유리가 커프스단추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지난번 네 책 영화로 제작될 것 같아! 밀레니엄 픽처스라고 알아? 엄청나게 큰 제작사야!”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은 소식이네. 그래서?”“쯧,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돈은 눈에도 안 차겠지만 그래도 큰 건이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판권 못 팔 일은 없어. 그러니 이번에 잘 협상해야 해!”“그래, 힘내.”“아니, 왜 나만 힘내? 그럼 너는?”“내가 판권은 다 그쪽에 맡겼잖아?”“음... 그렇긴 한데 네가 직접 협상에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성유리가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안 가.”“왜?”“이유는 없어. 협상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말아.”성유리의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송효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송효주가 황급히 외쳤다.“자기, 우리 같이 한번 만나보자, 응? 내가 이미 편집장님한테 너 데리고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네가 안 가면 난 할 말이 없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