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 기억해.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렸어. 애초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순조로운 이혼이 가능했을 것 같아?”그 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박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말이 맞다.그녀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한 것을.예전에는 대를 이어줄 아내였고 지금은... 그저 욕구나 해소하는 도구일 뿐인걸.성유리의 이런 차분한 표정은 박한빈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며 곧바로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입 맞추었다.입술이 맞닿는 순간 성유리가 또다시 툭 눈물을 흘렸고 그 서늘한 느낌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의 잇새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게 하는 키스였다.성유리는 금세 불편함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성유리는 마치 모래밭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심지어 성유리는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약점이 잡히고 갑옷이 벗겨졌다.줄곧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성유리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박한빈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유리는 지난 2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의 분출구를 찾은 듯 온 힘을 동원해 그의 살을 콱 깨물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에게 보복당하고 만다.금성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알았는데 이날 밤 그녀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금성의 밤을 두 눈을 보게 되었다.짙은 어둠 속 번쩍이는 네온 불빛은 마치 칵테일을 부은 듯 몽환적이면서도 흐릿했다.나중에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공허한 방에 선명하게 울렸고 박한빈마저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성유리가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박한빈은 더 이상 행동을 이어가지 않고 손을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뭐 먹고 싶어?”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그냥 걸어 나갔다.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다시 돌아왔다.“밥 먹자.” 그가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쯤 되니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결국 그녀는 몸의 본능에 굴복했다.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적지 않은 음식을 시켰고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 도연제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담백했다.하지만 성유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옆에 놓인 케이크였다.다크 초콜릿에 붉은 체리가 놓여있는 케이크.성유리가 천천히 손을 말아쥐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에 앉았다.케이크가 놓인 자리는 그렇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개를 길들이는 데는 타고났네.’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선사하는 게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다가간 성유리는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케이크에 박한빈의 시선이 몇 번이고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입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잠깐.”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박한빈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자기
그 후 며칠 동안 박한빈은 다시 연락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매일 다른 디저트 가게에서 보내오는 케이크를 받았다.게다가 한 개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케이크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며 그녀가 케이크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성유리는 마지못해 케이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며칠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한테 뭐 보내지 마요.”“왜, 마음에 안 들어?”박한빈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말할 때도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좋아한다며? 그럼 매일 보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으라고.성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통화가 끊겨서 들리는 신호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휴대폰을 떼어내자 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기가 막혀 나오는 웃음이었다.성유리가 갈수록 성깔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인데 더 이상 그 앞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는 걸 수도.하지만 어쨌든 나름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말없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박한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전에 눈여겨보라고 하시던 안 작가님 그림 경매가 정해졌습니다. 이달 말 진성에서 열릴 예정이랍니다.”서훈은 이렇게 말하며 박한빈 바로 앞에 초대장을 내밀었고 박한빈은 짧게 대꾸했다.하지만 서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박한빈은 의아했다.“더 할 말 있어?”“저택에서 전화가 와서 대표님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며 내일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알았어.”박한빈이 대답하자 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그가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오늘 밤 시월 파크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전송 버튼을 누
결국 성유리는 무작정 아무 매운탕 집이나 들어갔다.뜨겁고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은 누가 봐도 박한빈의 슈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박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그냥 단순히 그녀를 도구로 이용한다기엔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둘이 부부로 지낼 때도 두 사람이 밖에서 따로 외식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보석 따위를 사주긴 했어도 굳이 사람을 시켜 케이크를 보내준 적은 없었는데 박한빈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물론 성유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서둘러 차단해 버렸다.“이거 좋아해?”박한빈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자리에 도착하자 성유리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네.” 성유리가 답했다.“난 천성에서 자라서 매운 거 좋아해요.”하지만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엔 이런 것들을 못 먹게 했다.그들 눈에는 음식도 급이 나뉜 것 같았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나고 냄새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성씨 집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물론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사실 성유리도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단순히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그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에 성유리는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만 했다.“여기, 이거 봐.”박한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네며 말하자 성유리는 살짝 놀랐다.위에 적힌 이름을 보자 그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거... 뭐예요?”“경매, 가고 싶어?” 그가 묻자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 같이 가.”성유리가 손을 맞잡았다.“왜요?”“왜라니?”“왜 날 데리고 가는데요?”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난희는 기분이 좋은 듯 박한빈이 들어서자 옆 사람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신나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오셨어요.”집사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김난희를 바라봤다.곧 김난희가 잔뜩 들뜬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얼른 와서 봐.”“뭘 봐요?”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박한빈은 다가가서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보자마자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어갔다.“이것 좀 봐. 이건 설씨 집안 딸인데 지난번에...”“이런 건 왜 보고 있으세요?”박한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보긴, 내가 직접 손주며느리 고르려고 그러지. 방금 내가 말한...”“아직 그럴 생각 없어요.”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일단 좀 보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나보다가 약혼하면 되지. 이번엔 신중하게 천천히 해. 괜히 성유리 같은 애 만나지 말고, 하는 짓마다 재수 없게.”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여기서 성유리 얘기가 왜 나와요?”“내 말이 틀렸어? 걔 전에 양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어쩐지 그렇게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더니 역시 찔리는 게 있었어.”“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순간 가라앉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김난희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기분이 안 좋아?”“안 좋은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얘기 듣지 마시라고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음... 하긴. 그래도 유정이 녀석이 좋은 마음으로 매일 와서 나랑 얘기도 나눠주다가 실수로 나온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박한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짧게 대꾸했다.“너도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너랑 손주며느리 얘기하고 있잖아.”김난희는 태블릿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봐봐.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품행이 올바른 여자들만 골랐으니까 성유리 때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
이틀 뒤, 박한빈의 생일이었다.원래 생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준비한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당연히 파티에 오지 못했고 박한빈은 저녁에 시월 파크에 가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파티는 성공적이었고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대외적으로 공개된 파티가 아니었지만 몇몇 연예인들도 따라 들어왔다.박한빈의 이혼 소문이 퍼지자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늘어났다.밤새 박한빈은 옷에 뭐가 튄 것만 세 번이었다.마지막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쳐냈다.“박 대표님, 제가 좀 닦아드릴까요?”가슴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더없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곧게 쳐다봤지만 박한빈은 동요하지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됐다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고 서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그가 여자를 떨어뜨리자 박한빈이 지시했다.“난 먼저 갈 테니까 손님들은 네가 배웅해.”“지금 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운전기사를 부를게요...”“아니, 택시 타고 갈 거야.”박한빈은 차를 몰고 나가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서훈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여전히 번잡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문득 작년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그때도 어머니가 손수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자신과 성유리의 결혼 1주년 파티에 불참했던 탓에 성유리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도 무척 바빴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그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축하 인사나 선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밤 그는 성유리가 준비한 라이터를 선물로 받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미역국도
다만 갈수록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방으로 바로 갈 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져 잠시 잠을 청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위를 덮친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성유리도 상대를 알아차리고 경직되었던 몸이 풀렸다.이를 감지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유리가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려는데 박한빈이 그런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감쳐물었다.그러자 샴페인의 과일 향이 성유리의 입안으로 옮겨졌다.다소 흥분한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고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빛이 꼭 깊은 밤 매복해 있는 맹수처럼 보여 성유리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몸을 들어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박한빈의 사납고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성유리는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박한빈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마지막 한 번을 침대에서 끝낸 뒤 박한빈은 성유리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여오며 물었다.“뭐 잊은 거 없어?”성유리는 온몸이 기진맥진한 데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렇게 되물었다.“뭐요?”“뭐일 것 같은데?”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풀었다.진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고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박한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침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살짝 멈칫한 그가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서 성유리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의 눈빛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어디 가는 거야?”“집이요.”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입술을 꽉 다문 박한빈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달칵...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닫자 넓은 집 안에 곧 박한빈 혼자 남겨졌다.그리고 돌아서면서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성유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커프스단추는 아직 그녀의 가방 안에 있었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면서 버리려고 했지만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성유리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자기, 아직 안 잤지?”저쪽에서 송효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좋은 소식이 있어.”“안 잤어, 말해.”성유리가 커프스단추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지난번 네 책 영화로 제작될 것 같아! 밀레니엄 픽처스라고 알아? 엄청나게 큰 제작사야!”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은 소식이네. 그래서?”“쯧,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돈은 눈에도 안 차겠지만 그래도 큰 건이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판권 못 팔 일은 없어. 그러니 이번에 잘 협상해야 해!”“그래, 힘내.”“아니, 왜 나만 힘내? 그럼 너는?”“내가 판권은 다 그쪽에 맡겼잖아?”“음... 그렇긴 한데 네가 직접 협상에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성유리가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안 가.”“왜?”“이유는 없어. 협상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말아.”성유리의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송효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송효주가 황급히 외쳤다.“자기, 우리 같이 한번 만나보자, 응? 내가 이미 편집장님한테 너 데리고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네가 안 가면 난 할 말이 없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