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홀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그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고 역시나 아까의 그 번호였다.딱 한 번 본 번호였지만 이미 성유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그 번호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한편 도연제에서는 숙자 아주머니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누구라고요?”“전 지석민이고요, 서연이... 아니, 성유리 아빠예요.”남자는 노래진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유리 여기 있는 거 아니까 한 번만 나와 보라고 전해 주세요.”성씨 집안에서 성유리를 잃어버린 뒤 성유리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숙자 아주머니도 남자의 행색을 보고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숙자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유리 아가씨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어요.”“집으로 갔다고요? 왜요? 이 집...”“우리 도련님이랑 이미 이혼하셨어요.”숙자 아주머니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그러니까 아가씨 찾으려면 성씨 집안에나 가봐요. 얼른 나가요.”“이혼이라고요?”성유리의 이혼은 지석민이 미처 예상 못 한 일이었다.뉴스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의 결혼 소식을 보고 성유리가 박한빈 같은 재계 1위 재벌한테 시집갔다고 좋아했는데 이혼이라니!“네, 진작에 이혼했으니까 빨리 나가요. 안 그러면 경호원 부를 거예요!”숙자 아주머니는 눈앞의 남자를 아주 더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눈을 흘기다가 문을 걸어 잠갔다.숙자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박한빈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밖에 누구예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을 잘 못 찾은 사람이에요.”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바라봤다.물론 박한빈이 커가는 걸 같이 지켜보기도 하고 나이도 박한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숙자 아주머니였지만 박한빈의 그 날카로운 눈빛만 보면 심장이 철렁하곤 했다.그래서 아주머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
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박한빈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해주었다.차에 올라탄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검은색과 금색으로 된 라이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밑부분에 박한빈의 이름이 새겨진 게 전부였다.이 작은 라이터가 결혼 기간 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다음 해에는 박한빈이 말도 안 하고 결혼기념일에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성유리는 이런 보여주기식 선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었다.올해 역시...박한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터를 다시 넣어두고 눈앞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 탓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뜬 채 기사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기사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에...”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어느새 박한빈이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유난히 짧은 머리에 노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원래 이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었지만 숙자 아주머니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이번에는 창문을 내려보았다.“박 대표님이시죠?”“안녕하세요! 역시 대표님 인물 하나는 끝내주시네,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아요!”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지석민에도 박한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누구시죠?”“저요? 저는 서연이, 아니 유리 아빠죠! 제가 금방 금성에 와서 유리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사람을 못 찾았거든요. 근데 이렇게 대표님 먼저 만나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무슨 일이시죠?”“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지내나 하고 와 봤는데 이 년... 아, 애가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표님 찾아온 겁니다. 근데 우리 유리는...”“어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진짜 이혼하셨어요?”“네.”“아니, 무
식당 앞에 도착한 박한빈은 기사가 말해주어서야 성시원과 대화 중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성시원은 한눈에 봐도 아주 귀찮아하며 남자를 지나쳐갔지만 지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성시원이 차에 탈 때는 아예 큰 소리로 소리까지 질러댔다.“성 회장님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표님을 찾아가서 그날 서연이랑 있었던 일을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성유리든 성씨 집안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자리를 뜨려 했던 박한빈은 지석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다시 차를 세웠다.“대표님?”서훈의 부름에도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지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던 성시원은 지석민도 같이 차에 태웠다.“대표님, 저분이 말씀하시는 서연이가...”서훈이 움직이지 않는 박한빈을 보며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박한빈은 그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차에 타버렸다.서훈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박한빈의 의중은 모르는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따라서 차에 올랐다.저녁에 술을 마신 탓에 박한빈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고 조수석에 앉은 서훈은 박한빈이 깨기라도 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차가 한창 달리는 와중에 박한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아봐.”그 말에 놀란 서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뭘요?”그에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성유리 양부.”...한편 낯선 곳에 떨어진 성유리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호텔에 들어온 뒤로 성유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성유리가 하루 동안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과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성유리는 그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눈을 못 뜰 수도 있었다.“여기에 친구나 가족 있어요?”“없어요.”“그럼 직장동료분께라도 연락을 드릴까요?”“괜찮아요.”걱정스레 묻는 직원에 성유리는 해열제를 넘기며 말했다.“그냥
다시 금성에 돌아온 성유리는 성시원이 감시를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몰랐지만 붙여도 상관없었기에 굳이 지석민과의 만남을 피하지는 않았다.기복루, 금성에서 꽤 유명만 식당이며 성유리와 지석민이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성유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있던 지석민은 다리를 꼬고 서빙을 해주는 여직원을 희롱하고 있었다.세상 두려울 게 없는 눈과 더러운 말을 내뱉는 입 앞에서 여직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메뉴판만 꽉 쥐고 있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거긴 하지만 막상 이런 광경을 두 눈에 담으니 성유리는 다시 한번 숨을 참았다.그때 성유리를 본 지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서연아!”주먹을 꽉 쥔 성유리는 결국 지석민에게로 다가갔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직원은 구세주라도 만난 양 메뉴판을 내려놓고 도망가버렸다.그런 여직원의 다리를 끝까지 보고 있던 지석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성유리를 보며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었다.“오랜만이야 서연아! 넌 어쩜 점점 더 예뻐지니?”말을 하면서 지석민은 성유리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그 손을 빠르게 피하고는 차갑게 지석민을 노려봤다.“하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그래도 네 아빤데.”“서연아, 내가 그래도 너를 10년이나 키웠는데 어쩜 그리 매정하니. 성씨 집안 아가씨 됐다고 이렇게 나 모른 척하기야?”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지석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에 놓인 손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역겨운 말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너도 알잖아. 내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또 감옥에서 몇 년 살다 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어.”“다른 자식도 없고... 내 노후는 네가 보장해줘야지.”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돈 달라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그깟 돈 몇 푼이 뭐라고 그러니? 넌 지금 성씨 집안...”“성시원 찾
그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래요. 가서 말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지석민이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석민이 테이블을 '탁' 치며 쫓아나가려고 할 때 한 남자 직원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손님, 계산을 아직 안 하셨어요.”“밥도 안 시켰는데 무슨 계산이야!”“밥은 안 시키셨지만 차를 드셨잖아요. 그건 계산하셔야죠.”직원은 말을 하면서도 지석민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그 눈빛에는 무시가 가득했다.그에 화가 난 지석민이 벌벌 떨며 1억이 들어있는 카드를 던져주려 했는데 그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계산하죠.”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석민이 고개를 돌렸고 마침 직원에게 제 카드를 건네준 성유정이 지석민을 보며 웃고 있었다.“지석민 아저씨 맞으시죠?”“당신은...”“저는 성유리 씨 동생 성유정이에요.”“아 성씨 집안에서 주워왔다는 그 잡종?”성유정을 보며 웃음을 흘린 지석민은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왜요, 나한테 할 말 있어요?”지석민의 시선이 아주 불쾌했지만 성유정은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웃으며 말했다.“아저씨가 아까 성유리랑 하던 얘기 저도 다 들었어요.”“그래서요?”“돈 필요하시죠?”성유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성유리가 아저씨를 고분고분하게 모실 수 있게 만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한편 식당에서 나온 성유리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부터 멀어져갔다.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것에 쫓기듯 한 발걸음이었다.지석민이 더는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건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저도 이젠 반항할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두려웠다.어릴 때 나무에 묶인 코끼리처럼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어릴 때의 그 기억이라는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도 조급하게 걸은 탓에 차가 지나가는 걸 못 본 성유리는 하마터면 차에 치일뻔하기까지 했다.“야, 너 미쳤어?!”차
조경우와 성유리는 그렇게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금성에 오랫동안 성유리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조경우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금성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금성 시내와 교외의 경계선에 위치한 식당인데 하얀 벽돌에 짙은 녹색의 기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식당 내부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는 호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도 있어 성유리는 이곳이 관광지로 쓰이는 원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식당의 사장은 여자였는데 미모는 그렇게 출중하지 않으나 특유의 분위가 아주 온화했다.조경우가 미리 예약을 해서인지 메뉴를 고르지도 않았기에 여자는 차만 올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여기는 식재료를 다 당일 들어온 걸로 쓰거든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전날 미리 말해야 되요. 어젠 급해서 제가 혼자 정했는데 괜찮으세요?”성유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조경우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에 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이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색 차에요. 사장님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채집한 찻잎이라 다른 곳에 팔지도 않거든요.”조경우는 친절히 설명하며 차를 따라주었지만 할 말이 있던 성유리는 차 맛을 음미할 겨를이 없어 대충 입만 갖다 댈 뿐이었다.조경우는 곧바로 다른 얘기들을 꺼냈다.영화, 음악, 그리고 음식들까지 꺼내는 얘기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경우에 성유리는 하나하나 다 흥미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사실 조경우랑 만나는 게 성유리는 꽤나 즐거웠다.그래서 성유리는 조경우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에 결혼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그때 조경우가 갑자기 건넨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리 전에 봤었어요.”“2년 전인가 금성대학에 다닐 때 유리 씨가 뮤지컬을 하나 했었죠? 그때 저도 무대 아래에 있었거든요.”“로미오와 줄리엣이요?”“네.”성유리의 질문에 조경우
“박 대표님도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같이 식사하자고 요청이라도 할 걸 그랬네요.”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웃는 조경우는 박한빈 앞에서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악수를 마친 박한빈은 자연스레 조경우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인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도 시선을 거두고 조경우를 보며 말했다.“데이트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네, 그럼 다음에 봬요.”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고 조경우는 다시 성유리 앞에 앉았다.“오늘 박한빈도 여기 오는지는 저도 몰랐어요.”“괜찮아요.”혹시 성유리가 불편했을까 봐 해명하는 조경우를 향해 성유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러자 조경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둘 사이에서 먼저 얘기를 시작하는 쪽은 항상 조경우였기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그에 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경우에게 제 뜻을 전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서연아!”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석민이 이미 성유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까지 와서 웃고 있었다.“밥 먹고 있었어?”“누구시죠?”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조경우가 지석민을 보며 묻자 지석민은 대뜸 조경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조씨 집안 아드님이시죠? 정말 잘 생기셨네요!”“저는 유리 아빠에요, 시골에 있을 때 유리 키워준 양아빠요.”유난히 큰 지석민의 목소리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감해진 조경우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유리 씨, 진짜 유리 씨 양 아버님이세요?”“그렇다니까요! 몇 년 동안 외국에 있느라 유리 어떻게 사는지 와보지도 못했는데 둘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뭐 비록 이미 한번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번 결혼생활은 잘 보내야죠! 그래서 제가...”“지석민 씨.”그때 성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석민의 이름을 불렀
하지만 지석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성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에 성유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왜 말을 못 해요?”“유리 씨.”점점 살얼음판 같아지는 분위기에 조경우가 일어나며 성유리의 손을 잡았지만 성유리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성유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조경우도 다급히 따라나서려는데 지석민이 또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씨 노릇 몇 년 했다고 아주 기세가 장난 아니네.”“그런데 유리야, 사람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그때 나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다고!”“근데 네가 지금 나를 내쫓아? 똑똑히 들어. 내가 우리의 부녀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 다 까발릴 거야!”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등을 돌리던 성유리의 행동도 멈췄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지석민은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지석민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건 지석민이 쥐고 있는 그 카드가, 그날 일이 성유리는 감히 언급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지석민은 제가 그 일을 들먹이면 성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제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다.그랬는데 지금의 성유리는 지석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지석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요? 당신한테 강간당할 뻔한 일이요?”평온하게 말하는 성유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온 힘을 다해 말아쥔 탓에 손바닥에 닿은 손톱은 부러졌고 그 통증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에까지 전해졌다.그 순간 성유리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몇 년간 애써 보듬은 덕분에 새로 돋아난 살들이 다 찢겨버리고 그 옛날의 곪아 터진 상처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성유리의 말에 조경우도 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그녀의 말이 끝나고 박한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천천히 물었다.“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나... 아니, 너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남자라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최정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박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다 같은 패거리잖아!” 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정민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확 밀쳐냈다. “꺼져.”그의 목소리는 차가움을 넘어 얼음처럼 서늘했다. 최정민은 처음엔 분노에 차 있었지만 박한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보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박한빈은 최정민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미 해고된 최정민으로서는 매니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물건을 챙겨 식당을 떠나버렸다.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최정민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눈빛이 떠오른 최정민은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와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눠볼까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한빈은 차 옆에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정민은 거리가 멀어 차 안의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최정민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죠?” 남자는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행동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정민의 강렬한 반응에 그는 멈칫했다가 곧 비웃듯 말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뭘 했냐고요? 방금 당신이 저를 만졌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을 거예요!”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때까지 박한빈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최정민의 시선도 마침 박한빈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누가 널 만졌다고?” 남자는 여전히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새로 들어온 거야?”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 방엔 CCTV가 있어요. 확인하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나 올 겁니다!” 최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최정민의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뭔데!” 이때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남자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차분하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평온한 한마디는 남자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박한빈의 존재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중재하려 했고 마침 식당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최정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며 남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최정민은 사과할 수 없다고
성유리는 병실 밖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병실 밖에 앉아 있는 김서영을 마주쳤다. 김서영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돌아왔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한빈이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어.” 김서영이 말을 이어갔다. “한빈이가 성격이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도 매일 일을 하고 있으니 네가 잘 지켜봐 줘야 해.”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계가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김서영이 그렇게 당부하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서영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비록 결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너희 둘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그녀는 성유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지내길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는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고 김서영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서영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왜 그녀의 부탁에 그렇게 쉽게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박한빈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행동을 쳐다보던 박한빈은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집에 가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가려고?” “어차피 당신은 이제 간호가 필요 없잖아요?” 성유리는 그의 손에 있던 서류를 한 번 쓱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걸 보니.”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고 그녀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