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그래서 식탁에는 박한빈과 김서영 둘만이 마주 앉게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수프를 마시며 묻는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는 유리랑 같이 사니까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나가라고 한 거였어. 이젠 이혼도 했으니 들어와야지.”“괜찮아요.”“도연제가 더 편해요.”“뭐가 편한데? 새 여자친구 데려가는 게 편해?”말투는 평온했지만 단어마다에 조롱이 가득 배어있는 문장을 들은 박한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의 시선을 못 느낀 척 계속 말했다.“나 진지해. 네 아버지가 시킨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 만나겠다면 난 반대 안 한다.”“하지만 성유정은 안돼. 걔는 절대 우리 집에 못 들여.”“왜요?”박한빈의 질문에 김서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니?”“그냥 어머니가 왜 유정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에요.김서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대꾸를 못 하자 김서영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성유정 그 아이만 아니면 다 괜찮아.”“저는 어머니 눈에는...”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저한테 골라주신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어요.”성유리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박한빈에 김서영은 웃으며 말했다.“유리?”“그래, 유리 좋아하지. 그런데 뭐 어쩌겠니, 너흰 이미 이혼을 했고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벌써 선보고 있던데.”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선이요?”“그래, 오늘 오페라 보러 갔다가 만났어. 조경우 씨랑 같이 있더라.”“조경우면 그 절름발이 말하는 거예요?”“네.”“성씨 집안에서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요.”그 말에 김서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 너도 반성이란 걸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 왜 유리가 절름발이에게 가면서까지 너랑 이혼했겠니?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으며 그 입가에 핀 미소는 사람 자체가 한없이 온화해 보이게 했다.조경우가 뭐라고 했는지 성유리는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조경우를 바라보았다.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은 하나의 호수를 연상케 했다.성유리를 재미없고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던 박한빈은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문득 성유리가 스케치북을 뺏으려 하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은 성유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키스한 날이었다.박한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경우는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또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조경우 혼자 차에 탄 뒤 성유리는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른 성유리는 다른 손을 들어 조경우를 향해 흔들어주었다.그렇게 조경우의 차가 떠나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성유리는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지우고 고개를 떨궜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액셀을 밟아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성유리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검은색 맥세라티에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었다.하지만 창문이 내려지고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성유리는 제가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신했다.“타.”“괜찮아요.”잠시 벙쪄있던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난 지하철 타고 가면 돼.”말을 마친 성유리가 박한빈 차 뒤로 돌아가려고 하자 박한빈은 차를 뒤로하며 성유리의 길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그에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더니 치마를 잡았다 놓으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성유리는 조수석에 타지 않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실 말씀 있으세요, 박 대표님?”박한빈은 말없이 강하게 액셀을 밟았고 그 반동에 방심하고 있던 성유리는 앞 좌석에 머리까지 박을 뻔했다.그에
그걸 다 알면서 저도 모르게 농담을 뱉고 또 예상했던 혐오 가득한 말을 듣다니, 참 자학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알겠어요.”“박 대표님 할 말 다 하셨으면 저 이만 내려도 될까요?”박한빈은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옆에 멈춰 섰다.그에 바로 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성유리의 귀에 다시금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가만히 두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박한빈은 운전대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으니까... 성씨 집안에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도 좋아.”“이런 방식으로 나 역겹게 하지 말고.”마지막 말을 들은 성유리는 문고리를 꽉 쥐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박 대표님 호의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말을 마친 성유리는 차에서 내린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성유리의 인영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봤다.하지만 성씨 저택 근처에 지하철역 같은 건 없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아까 성유리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난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무열과 보란 듯이 함께 있고 이번에는 조경우까지 만나는 게 다 자신에게 손을 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박한빈이 이런 가십거리에 엮이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성유리였기 때문이다.정말 성유리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써먹는 사람인 것 같았다....성유리는 빠르게 아파트로 돌아갔고 마침 조경우가 몇 분 전에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오늘같이 얘기 나눈 거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같이 밥 먹고 얘기할 기회가 있을까요?”조경우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뜻은 꽤나 직접적이었다.다들 성인이고 어차피 나와서 맞선까지 본 사이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긴 했다.그리고 성유리도 조경우가
성유리는 밤이 깊어 가도록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눈을 감으면 멈추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습기 가득한 방과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그리고 유난히 더러운 옷과 도둑이 지나간 자리마냥 사정없이 뒤져진 서랍.마지막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남자의 얼굴까지.8년 동안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 악몽에서 헤여나온 적이 없었다.그런데 성유리에게 그런 지옥을 남겨준 남자가 오늘 교도소에서 나온 것이다.성유리의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도 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모두 너무나 익숙했다.아무리 도망쳐도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금방 잡은 이 집도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았다.한 쌍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다가 금방이라도 덮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성유리는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집에서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오승희가 자신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단 걸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성유리에게 뭔가를 알려줄 수도 없는 상태의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뭔가 든든해지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금성에 온 그 남자가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성씨 집안일 텐데 성씨 집안과 성유리의 관계로 보아 그들이 병원 주소를 알려줄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간호사에게 당부 몇 마디를 남기고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항공권을 끊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도 계약을 한 상태로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긴 성유리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성유리는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공항에 내려 핸드폰을 켜보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유리는 일단 택시를 잡아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고 호텔 방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
성유리는 홀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그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고 역시나 아까의 그 번호였다.딱 한 번 본 번호였지만 이미 성유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그 번호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한편 도연제에서는 숙자 아주머니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누구라고요?”“전 지석민이고요, 서연이... 아니, 성유리 아빠예요.”남자는 노래진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유리 여기 있는 거 아니까 한 번만 나와 보라고 전해 주세요.”성씨 집안에서 성유리를 잃어버린 뒤 성유리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숙자 아주머니도 남자의 행색을 보고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숙자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유리 아가씨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어요.”“집으로 갔다고요? 왜요? 이 집...”“우리 도련님이랑 이미 이혼하셨어요.”숙자 아주머니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그러니까 아가씨 찾으려면 성씨 집안에나 가봐요. 얼른 나가요.”“이혼이라고요?”성유리의 이혼은 지석민이 미처 예상 못 한 일이었다.뉴스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의 결혼 소식을 보고 성유리가 박한빈 같은 재계 1위 재벌한테 시집갔다고 좋아했는데 이혼이라니!“네, 진작에 이혼했으니까 빨리 나가요. 안 그러면 경호원 부를 거예요!”숙자 아주머니는 눈앞의 남자를 아주 더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눈을 흘기다가 문을 걸어 잠갔다.숙자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박한빈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밖에 누구예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을 잘 못 찾은 사람이에요.”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바라봤다.물론 박한빈이 커가는 걸 같이 지켜보기도 하고 나이도 박한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숙자 아주머니였지만 박한빈의 그 날카로운 눈빛만 보면 심장이 철렁하곤 했다.그래서 아주머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
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박한빈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해주었다.차에 올라탄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검은색과 금색으로 된 라이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밑부분에 박한빈의 이름이 새겨진 게 전부였다.이 작은 라이터가 결혼 기간 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다음 해에는 박한빈이 말도 안 하고 결혼기념일에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성유리는 이런 보여주기식 선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었다.올해 역시...박한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터를 다시 넣어두고 눈앞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 탓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뜬 채 기사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기사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에...”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어느새 박한빈이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유난히 짧은 머리에 노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원래 이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었지만 숙자 아주머니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이번에는 창문을 내려보았다.“박 대표님이시죠?”“안녕하세요! 역시 대표님 인물 하나는 끝내주시네,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아요!”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지석민에도 박한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누구시죠?”“저요? 저는 서연이, 아니 유리 아빠죠! 제가 금방 금성에 와서 유리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사람을 못 찾았거든요. 근데 이렇게 대표님 먼저 만나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무슨 일이시죠?”“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지내나 하고 와 봤는데 이 년... 아, 애가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표님 찾아온 겁니다. 근데 우리 유리는...”“어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진짜 이혼하셨어요?”“네.”“아니, 무
식당 앞에 도착한 박한빈은 기사가 말해주어서야 성시원과 대화 중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성시원은 한눈에 봐도 아주 귀찮아하며 남자를 지나쳐갔지만 지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성시원이 차에 탈 때는 아예 큰 소리로 소리까지 질러댔다.“성 회장님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표님을 찾아가서 그날 서연이랑 있었던 일을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성유리든 성씨 집안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자리를 뜨려 했던 박한빈은 지석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다시 차를 세웠다.“대표님?”서훈의 부름에도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지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던 성시원은 지석민도 같이 차에 태웠다.“대표님, 저분이 말씀하시는 서연이가...”서훈이 움직이지 않는 박한빈을 보며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박한빈은 그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차에 타버렸다.서훈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박한빈의 의중은 모르는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따라서 차에 올랐다.저녁에 술을 마신 탓에 박한빈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고 조수석에 앉은 서훈은 박한빈이 깨기라도 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차가 한창 달리는 와중에 박한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아봐.”그 말에 놀란 서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뭘요?”그에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성유리 양부.”...한편 낯선 곳에 떨어진 성유리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호텔에 들어온 뒤로 성유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성유리가 하루 동안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과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성유리는 그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눈을 못 뜰 수도 있었다.“여기에 친구나 가족 있어요?”“없어요.”“그럼 직장동료분께라도 연락을 드릴까요?”“괜찮아요.”걱정스레 묻는 직원에 성유리는 해열제를 넘기며 말했다.“그냥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그녀의 말이 끝나고 박한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천천히 물었다.“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나... 아니, 너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남자라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최정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박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다 같은 패거리잖아!” 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정민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확 밀쳐냈다. “꺼져.”그의 목소리는 차가움을 넘어 얼음처럼 서늘했다. 최정민은 처음엔 분노에 차 있었지만 박한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보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박한빈은 최정민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미 해고된 최정민으로서는 매니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물건을 챙겨 식당을 떠나버렸다.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최정민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눈빛이 떠오른 최정민은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와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눠볼까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한빈은 차 옆에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정민은 거리가 멀어 차 안의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최정민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죠?” 남자는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행동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정민의 강렬한 반응에 그는 멈칫했다가 곧 비웃듯 말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뭘 했냐고요? 방금 당신이 저를 만졌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을 거예요!”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때까지 박한빈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최정민의 시선도 마침 박한빈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누가 널 만졌다고?” 남자는 여전히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새로 들어온 거야?”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 방엔 CCTV가 있어요. 확인하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나 올 겁니다!” 최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최정민의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뭔데!” 이때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남자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차분하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평온한 한마디는 남자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박한빈의 존재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중재하려 했고 마침 식당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최정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며 남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최정민은 사과할 수 없다고
성유리는 병실 밖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병실 밖에 앉아 있는 김서영을 마주쳤다. 김서영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돌아왔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한빈이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어.” 김서영이 말을 이어갔다. “한빈이가 성격이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도 매일 일을 하고 있으니 네가 잘 지켜봐 줘야 해.”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계가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김서영이 그렇게 당부하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서영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비록 결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너희 둘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그녀는 성유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지내길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는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고 김서영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서영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왜 그녀의 부탁에 그렇게 쉽게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박한빈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행동을 쳐다보던 박한빈은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집에 가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가려고?” “어차피 당신은 이제 간호가 필요 없잖아요?” 성유리는 그의 손에 있던 서류를 한 번 쓱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걸 보니.”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고 그녀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