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의 모든 챕터: 챕터 181 - 챕터 190

1214 챕터

제181화

서유가 송사월을 탓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라 정가혜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나치고는 물 뜨러 갔다.김시후는 문 앞에 선 채 침대에 누운 작고 가녀린 서유를 바라보며 눈물이 차올랐다.그는 최대한 몸을 떨지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침대맡으로 다가갔다.앞이 보이지 않는 서유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혜가 돌아온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옷깃을 잡으려 했다.“가혜야...”옷깃을 잡기도 전에 크고 기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그녀의 손을 꼭 잡은 그 손은 살짝 떨고 있었다. 김시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말할지 몰라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서유는 그 손이 남자의 손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머릿속에 이승하의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서유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불렀다.“사월아...”김시후는 그녀가 아직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알아보고 나서도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무너졌던 멘탈에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침대맡에 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위부터 아래로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그렸다.서유는 그런 김시후를 밀쳐내지 않고 만지작거리게 내버려두었다.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한참 지나서야 김시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서유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처절하면서도 미련이 가득했다.“응.”서유가 대답하더니 되물었다.“왜 돌아온 거야?”김시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너 보러 온 거야...”그는 요 며칠 마음이 너무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라도 날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고 그녀를 찾아오고 싶은 충동을 잘 억제할 수가 없었다.아파트로 찾아가 밤새워 기다렸지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유와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기에 주서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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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김시후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전에 왜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지 말이다.그녀의 죽은 뒤 모습을 보고 그가 슬퍼하고 자책할까 봐 그를 쫓아낸 것이었다.사실 서유는 늘 그대로 변한 적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를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승하를 사랑해서 자신을 그렇게 못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깊은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이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서유는 그의 무력함을 느끼고 다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바닥을 꼬집었다.“사월아, 이제 가면 안 돼?”김시후는 손을 내밀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이번엔 네가 뭐라 해도 안 가. 끝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영원히 네 옆을 지킬 거라고...”영원이라는 말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상처 주기 싫었다.그녀는 가슴이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에게 말했다.“사월아, 나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어. 눈 좀 붙일게.”김시후는 그런 그녀가 너무 마음이 아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일단 좀 자. 내가 옆에 있을게.”그는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내쫓을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눈을 감았다.김시후는 참대맡에 앉아 가만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녀가 깊은 잠이 들고 나서야 그는 핸드폰을 꺼내 소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원장실에서 주서희를 귀찮게 하던 소준섭은 김시후가 걸어온 전화를 보고는 멈칫했다.저번에 김시후에게 문자를 보내 설명했지만 김시후는 답장이 없었다. 그런 김시후가 먼저 찾아왔으니 소준섭은 조금 기뻤다.그는 주서희를 놓아주더니 전화를 받았다.“시후야, 어쩌다 전화를 다 하고?”김시후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심부전, 고칠 수 있어?”소준섭은 김시후의 질문을 듣고 바로 그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챘다.“적합한 심장은 찾았고?”김시후는 무력감이 몰려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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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요 며칠 서유는 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많았다.깨어났다 해도 몇 마디 못 하고 바로 다시 스르르 깊은 잠에 빠졌다.김시후는 침대맡에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핼쑥한 얼굴엔 수염이 자랐고 그 모습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서유가 깨어나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봐 정가혜는 나가서 좀 사 오려고 했다. 서유가 별로 먹지 못해도 말이다.정가혜는 김시후에게 나가서 흰죽 좀 사 오겠다고 하고는 병실을 나섰다.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유가 잠에서 깼다. 온몸이 부어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어쩌면 얼굴도 부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할지 서유는 예상이 갔다.서유는 김시후가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마음이 살짝 차분해졌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사월아... 혹시 해 떴어?”김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얼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떴어...”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해가 뜰 리가 없었다.하지만 요 며칠 서유는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해가 떴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해가 보고 싶은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해가 떴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해가 떴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은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지만 유리창으로 햇살 한줄기가 들어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듯해졌다.“사월아, 나 주워 온 날도 이런 날씨 아니었어?”“맞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이 예쁜 날이었어. 햇살도 엄청 따듯하고. 네가 잔디밭에 누워 있는 걸 단번에 봤지 뭐야.”송사월이 5살 되는 해 복지원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풀숲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복지원에 데려갔다.그가 그녀를 안아 올린 그때부터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운명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서유는 김시훈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꿈에서 어떤 여자가 그녀를 향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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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서유가 그런 자신을 비웃다가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에 미친 듯이 기침했다. 순간 입에서 피가 거품처럼 뽀글뽀글 나오더니 산소마스크를 꽉 채웠다.“서유야!”김시후는 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그러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티슈를 꺼내 산소마스크를 벗기고는 기침으로 나온 피가 섞인 가래를 받았다.피가 티슈를 타고 뼈마디가 선명한 그의 손에 떨어진 순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했지만 닦을수록 피는 점점 많아졌다.빨간 피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옷과 베개를 적셨다.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에 김시후는 심장이 아파졌고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간호사는 비상벨을 듣고 얼른 주치의와 원장을 모셔 왔다.주서희는 심하게 기침하는 서유를 보고는 바로 의사들에게 응급실로 베드를 옮기라고 했다.사람들은 부랴부랴 병실로 달려왔다가 허둥지둥 다시 빠져나갔다. 김시훈만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온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김시훈은 그렇게 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 굳어버렸다.크고 웅장한 몸은 지금 이 순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깊은 바다에라도 빠진 것처럼 허우적댈 힘도 없었다.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껴온 사람이 정말 떠난다는 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그를 떠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무엇인지 모를 무언가가 자꾸만 손등에 툭툭 떨어졌고 이미 말라붙은 피를 적셨다.정가혜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런 김시후를 마주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원망도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가 서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옆에서 보아온 터라 잘 알고 있었다. 비껴간 5년만 아니었으면 둘은 무사히 평생을 함께했을 것이다.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하느님은 그들을 엇갈리게 한 것도 모자라 지금 서유의 목숨마저 앗아가려 하고 있다.이런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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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김시후는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응급실로 들어갔다.수술대에는 작고 마른 체구의 한 사람이 생기 없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기다란 눈초리 아래에 있는 예쁜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얼굴에 묻어있던 핏자국이 깨끗이 닦여지고 병적으로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는 마치 샘가 옆에 핀 피안화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안화는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서유야...”김시후는 수술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춘 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그러자 부드러운 울림이 곧 사라질 듯한 서유의 의식을 되살렸다.그녀는 지친 눈을 느릿느릿 뜨고 마지막으로 송사월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 월...”서유는 간신히 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의식은 분명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희미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그녀의 입술 가까이 귀를 갖다 대고서야 김시후는 서유가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나 여기 있어.”그는 힘을 건네주기라도 하는 듯 서유의 손을 꼭 잡았다.서유는 생명을 연장해 주는 마지막 산소를 들이마시며 떠듬떠듬 당부의 말을 전했다.“가... 혜... 잘... 부탁... 해.”떠나면서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정가혜가 평생 무사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뿐.김시후는 고개를 숙여 서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그러자 서유는 입을 다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사월아... 다음 생에는... 나 다시 잊어버리지 마.”김시후는 순간 심장이 찌릿 아팠다. 질식할 것만 같은 통증이 사지를 꽉 조여 그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했다.원래 어떤 아쉬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칼에 마음을 관통당한 듯 지금의 김시후가 그러했다.말로 표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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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이번에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이승하가 응급실 문밖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말이다.마치 처음 만났을 때와같이 그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서유의 앞에 다가왔다.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을 내밀며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나 왔어...”이승하는 여태껏 서유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서유는 점점 의식을 되찾더니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세상을 떠나기 전인 사람에게는 환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전 서유가 본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마지막으로 이승하를 다시 보고 싶다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서유가 정가혜를 보고 나서도 계속 응급실 밖을 응시하자 김시후는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얼른 주서희에게 말했다.“이 대표한테 전화해서 빨리 서유 마지막 모습 보라고 전해!”주서희는 멈칫했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라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그녀는 이승하를 손꼽아 기다리는 서유를 보고 또 곧장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 전원 역시 꺼져있었다.결국 주서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힘없이 말했다.“꺼져 있어요...”목이 터져라 울던 정가혜도 서유가 이승하를 기다리며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이승하의 개인 핸드폰은 절대 꺼져있지 않다고 했던 서유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주서희에게 전했다.“서유 핸드폰에 이승하 씨 개인 번호가 있어요. 누가 서유 핸드폰 좀 가져다줄 수 있나요? 병실 머리맡에 있는 종이봉투 안에...”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몸을 돌려 병실로 달려가더니 곧 서유의 핸드폰을 가져왔다.주서희는 핸드폰을 받아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며 정가혜에게 물었다.“비밀번호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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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삐-심전도 모니터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술대 위에 있던 사람은 이렇게 떠난 것이다.울다 못 한 정가혜가 결국 기절했고, 주서희는 황급히 그녀를 끌고 가 응급처치를 시도했다.김시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한 채 꼼짝하지 않고 수술대 위 서유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없이 몇 분 동안 쳐다보다가, 그는 나약해진 서유의 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러자 옆방 응급 구조 실에 있던 주서희가 김시후를 가로막았다.“김 대표님, 서유 씨 마지막 유언은 곧장 화장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나도 알아...”그는 창백한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옷 좀 갈아입혀 주고 싶어서.”서유의 옷은 그의 손에 묻은 피로 더러워졌다. 평소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유였기에 틀림없이 이런 옷을 입고 화장하러 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은 주서희를 놀라게 했다. 김시후는 서유를 매우 사랑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걸까?주서희는 멀어지는 김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김 대표님은 적어도 서유 씨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려 하는데, 이 대표님은 그림자조차 안 보인다니...’그러다 마음속의 놀라움도 점차 옅어졌다.‘남자는 항상 이렇게 매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품어서는 안 돼...’김시후는 서유를 안고 병실로 돌아와 그녀의 몸을 깨끗이 닦고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혔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시 서유의 주민등록증을 집어 들고 경호원에게 사망 진단서를 떼도록 했다.진단서를 손에 넣은 순간 역시 김시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병원 옆에 있는 화장터로 향했다.곧이어 서유를 직접 화장터로 데려온 김시후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직원이 그를 막아 나섰다.“선생님, 이 안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다음 소각 작업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결국 소각문 밖에서 멈춰 선 김시후는 서유가 몇몇 직원의 인도하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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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어둠이 깔리자 철문이 열렸고 유골함을 든 직원이 걸어 나왔다.“서유 씨 화장 끝났습니다. 가족분들은 유골함 받아 가세요.”그러자 김시후의 경호원이 즉시 다가가 유골함과 주민등록증을 가져왔다.경호원은 유골함을 손에 받쳐 들고 허리를 숙여 반쯤 정신을 잃은 김시후에게 건넸다.“대표님, 이만 서유 씨를 집에 데려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이승을 떠도는 외로운 망령이 될지도 모릅니다.’감히 이 말까지는 뱉지 못했지만, 김시후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이윽고 핏빛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유골함에 닿았다.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한 움큼의 재로 변했다고 생각되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그날 밤처럼 콩알만 한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쳤다.쏟아지는 비가 김시후의 머리카락과 뺨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어 유골함을 덮었다.애써 진정시킨 뒤 떨리는 손을 들어 유골함을 건네받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내가 할게.”소준섭이 유골함을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결국 김시후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그는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유골함을 받아내려 했다.그렇게 안정된 후, 김시후는 유골함을 한사코 품에 꼭 안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서유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광풍이 불며 번개가 내리치자 그 빛 사이로 김시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그는 유골함을 꼭 껴안고 소준섭의 부축 하에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 걸음 한 걸음 화장터를 빠져나갔다.예전에 김시후는 어른이 되면 서유를 아내로 삼아 집에 데려오겠다 약속한 적이 있었다.불행하게도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그녀가 황급히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하지만 서유가 살아있든 죽었든, 김시후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차가 구청에 들어섰을 때, 소준섭은 그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고 김시후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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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김시후는 서유를 그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왔던 곳이니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혜선은 유골함을 안은 채 죽을상이 된 김시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소준섭과 경호원들이 똑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유골함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김시후의 가족일 것으로 생각했다.“도련님, 제가 빈소를 준비하겠습니다...”김시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혜선이 돌아섰을 때 그녀를 불렀다.“비석에 이름도 써주세요.”“네, 뭐라고 적을까요?”김시후는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애틋하게 대답했다.“김시후의 아내, 서유요.”이혜선은 흠칫 놀랐다.‘서유라고? 내가 전에 봤던 그 아가씨? 아주 예쁘지만 몸이 좀 허약했던 분?’이혜선은 감히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내려가서 준비했다.김시후는 유골함을 올려놓고 소준섭에게 말했다.“너 이제 가봐도 돼. 나 혼자 괜찮아.”소준섭은 거절하려 했지만 김시후가 말을 이었다.“나 서유랑 조용히 있고 싶어.”김시후는 당연히 서유에게 묘지를 마련해 줄 것이다. 서유와 단둘이 있다가 직접 그녀를 안장할 것이다.소준섭은 그런 김시후의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네 몸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김시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준섭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떠나기 전 경호원에게 김시후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소준섭이 떠나고, 김시후는 깨끗한 수건으로 유골함을 꼼꼼히 닦았다.정가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주서희로부터 김시후가 이미 서유를 화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펑펑 울었다.주서희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넸다. 마음속으로는 서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서유 씨에게는 원래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었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지도 않았겠지... 내가 무능해서 서유 씨를 죽인 거야...’정가혜는 주서희와 함께 김시후의 별장으로 갔다.빈소는 이미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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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얼마나 울었을까, 정가혜는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져서야 겨우 몸을 가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서유가 황천길에서 입을 옷이 없게 해서는 안 되니 그녀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정가혜는 반드시 정신을 차리고 예쁜 옷 몇 벌을 골라야 했다.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유의 방으로 걸어갔다.방 안에 서유의 물건은 그대로지만 서유가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옷장에서 옷을 꺼내고 신발장에서 신발 몇 켤레를 꺼내고 이불도 정리했다.나머지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 태워버리기 아까워 기념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유품을 싸고 침실을 나서려고 돌아섰을 때, 정가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책상을 돌아보았다.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책상으로 이끌고 또 서랍을 열게 했다.안에는 공책 한 권과 ‘유서’라고 적힌 봉투가 하나 있었다.유서라는 두 글자를 보자 정가혜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이미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만약 정가혜가 일찍 발견했다면 서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쉬움이 한가득 남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유서를 꺼냈다.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편지를 천천히 펼쳤다.[사랑하는 가혜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가혜야,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인생은 이미 정해진 운명과 같아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냥 받아들이자고.난 이미 운명을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나 때문에 눈 퉁퉁 부을 때까지 울지 말고. 그럼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가혜야, 내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어릴 때부터 누가 나를 괴롭히면 네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지켜줬잖아.열두 살 때, 학교 앞에서 불량 학생들을 만났던 기억이 나. 그때도 네가 필사적으로 싸워서 나를 구해줬어.그때 네가 아르바이트해서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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