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후는 서유를 그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왔던 곳이니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혜선은 유골함을 안은 채 죽을상이 된 김시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소준섭과 경호원들이 똑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유골함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김시후의 가족일 것으로 생각했다.“도련님, 제가 빈소를 준비하겠습니다...”김시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혜선이 돌아섰을 때 그녀를 불렀다.“비석에 이름도 써주세요.”“네, 뭐라고 적을까요?”김시후는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애틋하게 대답했다.“김시후의 아내, 서유요.”이혜선은 흠칫 놀랐다.‘서유라고? 내가 전에 봤던 그 아가씨? 아주 예쁘지만 몸이 좀 허약했던 분?’이혜선은 감히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내려가서 준비했다.김시후는 유골함을 올려놓고 소준섭에게 말했다.“너 이제 가봐도 돼. 나 혼자 괜찮아.”소준섭은 거절하려 했지만 김시후가 말을 이었다.“나 서유랑 조용히 있고 싶어.”김시후는 당연히 서유에게 묘지를 마련해 줄 것이다. 서유와 단둘이 있다가 직접 그녀를 안장할 것이다.소준섭은 그런 김시후의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네 몸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김시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준섭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떠나기 전 경호원에게 김시후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소준섭이 떠나고, 김시후는 깨끗한 수건으로 유골함을 꼼꼼히 닦았다.정가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주서희로부터 김시후가 이미 서유를 화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펑펑 울었다.주서희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넸다. 마음속으로는 서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서유 씨에게는 원래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었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지도 않았겠지... 내가 무능해서 서유 씨를 죽인 거야...’정가혜는 주서희와 함께 김시후의 별장으로 갔다.빈소는 이미 마련
얼마나 울었을까, 정가혜는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져서야 겨우 몸을 가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서유가 황천길에서 입을 옷이 없게 해서는 안 되니 그녀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정가혜는 반드시 정신을 차리고 예쁜 옷 몇 벌을 골라야 했다.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유의 방으로 걸어갔다.방 안에 서유의 물건은 그대로지만 서유가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옷장에서 옷을 꺼내고 신발장에서 신발 몇 켤레를 꺼내고 이불도 정리했다.나머지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 태워버리기 아까워 기념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유품을 싸고 침실을 나서려고 돌아섰을 때, 정가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책상을 돌아보았다.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책상으로 이끌고 또 서랍을 열게 했다.안에는 공책 한 권과 ‘유서’라고 적힌 봉투가 하나 있었다.유서라는 두 글자를 보자 정가혜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이미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만약 정가혜가 일찍 발견했다면 서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쉬움이 한가득 남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유서를 꺼냈다.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편지를 천천히 펼쳤다.[사랑하는 가혜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가혜야,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인생은 이미 정해진 운명과 같아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냥 받아들이자고.난 이미 운명을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나 때문에 눈 퉁퉁 부을 때까지 울지 말고. 그럼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가혜야, 내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어릴 때부터 누가 나를 괴롭히면 네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지켜줬잖아.열두 살 때, 학교 앞에서 불량 학생들을 만났던 기억이 나. 그때도 네가 필사적으로 싸워서 나를 구해줬어.그때 네가 아르바이트해서 새로
정가혜는 이 편지를 보고 이미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봉투에 끼워진 은행 카드는 마치 고철 조각처럼 그녀의 심장을 꽉 누르고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바보 같으니라고. 죽기 전까지 나 돈 없을까 봐 걱정한 거야? 하지만...’“서유야, 난 네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난 널 원한다고...”정가혜는 봉투를 움켜쥔 채 깊은 그리움에 빠져 서글피 울었다.결국 울다 지친 정가혜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서유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서유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정가혜는 꿈속에서까지 서유를 보게 된 것이다.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마치 나락으로 떨어진 듯 무력감을 느꼈고 가슴에 단단한 것이 막힌 듯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그녀는 퉁퉁 부어오른 두 눈을 뜬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듯 고요해진 느낌이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구찌 종이봉투에서 흘러나오는 서유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정가혜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이끌고 전화를 들었다.액정 화면에 이승하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그녀는 순간 손동작을 멈추었다.서유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했지만 이승하는 연지유에게 전화를 받게 했다.그런 야박한 남자는 서유의 죽음을 알 자격이 없으니 정가혜는 받지 않았다. 상대방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끝까지 받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유의 옷을 챙겨주려는데 ‘김씨’라는 사람이 수많은 메시지를 보내온 것을 확인했다.그동안 꾸준히 보내온 메시지였다. 전부 서유를 보고 싶다는 등 변태적인 메시지였고, 서유가 의식을 잃어 병원에 실려 간 날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보내왔다.정가혜는 그 미안하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이 김씨라는 사람이 그동안 서유에게 과도하게 집착한 것 같았다. 서유가 죽은 후에도 이런 변태의 메시지를 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휴대
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해 경직되었다.그녀는 웃음기를 거두고 이승하에게 다가가서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보았다.“승하야, 내가 여기 있는 게 기분 나빠?”이승하의 조각 같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음산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곳은 이승하의 휴스턴 개인 저택으로 위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지유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그녀가 이승하를 미행했다는 것을 증명한다.연지유는 남자의 눈빛에 놀라 뒤로 물러난 후, 몸에 있는 목욕 수건을 감싸고 내키지 않는 듯 위로 당겼다.“승하야, 이모가 네 행적을 훤히 알고 계셔. 이젠 나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우리 사이에 진전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나 여기로 보내신 거야...”연지유는 용기를 내어 하얀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남자가 옆으로 비켜섰다.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연지유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절망적인 미소를 지었다.“이승하, 대체 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이승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가.”평소 같았으면 연지유는 감히 이승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얌전히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목욕 수건을 두르고 여자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그런데 이승하는 마음이 움직이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하다니. 이걸 연지유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연지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했다.“나랑 결혼하겠다고 형이랑 약속한 거 잊었어?”그 말을 들은 이승하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형이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하지 않아. 알아들었으면 빨리 나가.”연지유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예전에 이 말로 위협하면 이승하는 늘 타협했다.타협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지만 지금은 그녀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쫓아내려 한다.연지유는 재
소수빈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이승하의 눈치를 살폈다.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조각 같은 얼굴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내 말을 못 들으셨나? 아니면 서유 씨의 생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건가?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소수빈은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쉬세요.”그가 돌아서서 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누가 사망했다고?”소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내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는데 대표님 진짜 못 들으셨나?’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온몸에서 한기를 뿜어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서유, 서유 씨가요.”이승하가 잘 듣지 못할까 봐 소수빈은 일부러 서유의 이름을 강조했다.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죽어?”소수빈은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듣지 못한 게 아니라 서유 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으시는구나!’그는 주서희에게 들은 말을 이승하에게 전했다.“대표님, 서유 씨는 심부전이었어요.”이승하는 차갑게 말했다.“서유는 그저 심장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웬 심부전이야?”소수빈이 말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승하는 쾅하고 문을 닫아버렸다.방금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휴대폰을 든 이승하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이승하는 이미 통제를 벗어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그는 서유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에게 뺨을 맞고 화가 나서 일부러 그를 속인다고 생각했다.이승하는 반드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연속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이승하의 인내심이 바닥 날 무렵 통화가 연결되었다.순간, 그의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그녀가 자신의 전화를 받았다는 건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정가혜는 그의 말에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서유가 이런 장난을 할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이랑 당신 약혼녀, 그리고 사촌 여동생이 어떻게 서유를 때렸는지 벌써 잊었어요? 심부전 말기인 환자의 뒤통수에 못이 박혔는데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정가혜는 소리를 치며 불평했지만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서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맞은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당신, 어떻게 그렇게 독할 수 있어요? 서유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 앞으로 유서까지 썼다고요...”전화기 너머의 원망스러운 울부짖음에 이승하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조여왔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싶었지만 평소처럼 쉽게 통제할 수 없었다.억제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더 불안해졌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공포를 내버려 두었다.그는 휴대폰을 움켜쥐고 차갑게 물었다.“뒤통수에 못이 박혔다는 건 무슨 말이죠?”정가혜는 남자가 일부러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주 선생님이 도착했을 때, 서유 뒤통수에는 이미 못이 박혀 있었어요. 못에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다 출혈로 인해 심부전이 악화되지도 않았겠죠. 전부 당신네 가족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요? 정말 서유가 불쌍하네요!”정가혜는 단숨에 울분을 토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린 후 이승하를 블랙 리스트에 넣었다.이승하는 이미 어두워진 액정을 보며 몇 분 동안 침묵을 지켰다.통창 앞에 우뚝 서 있던 몸이 갑자기 흔들리더니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그는 한 손으로 유리를 받쳐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서유가 그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뿐이었다.그날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실망해서가 아니라 못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니.서유가 혼자 절망적으로 화장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이승하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조여왔다.빠르게 밀려오는 죄책감은 마치 짓궂
김시후는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묘지를 골랐다.건너편에 있는 명승지는 그와 서유가 왔던 곳이다.그때 서유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앞으로 자주 놀러 오자고 했었다.나중에 김시후는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잊고 말았다.김시후는 품에 안긴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눈시울을 붉혔다.“서유야, 미안해...”유품을 들고 오던 정가혜는 마침 김시후의 사과를 들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유골함을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김시후를 바라보며 순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엇갈리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아쉬움이고 고통일까!정가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애써 참고 트렁크를 그의 앞에 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사월아, 이제 묻을까?”이혜선은 이미 사람을 통해 매장하기 좋은 날을 골랐다. 더 이상 미루면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서유도 가는 길이 편안하지 못할 테니 서둘러 묻는 것이 좋았다.김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정가혜가 들고 온 트렁크를 보았다.“물건이 이것밖에 없어요?”정가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다른 건 태우기 아까워서. 서유 물건을 남기고 싶어.”김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유골함을 쳐다보더니 여전히 아쉬운 듯 무덤에 넣었다.곧 직원들은 관을 박아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우더니 고인의 옷감을 태우지 말라고 당부했다.김시후가 대답하지 않자 경호원 몇 명이 다가가서 직원을 통해 묘지 담당자의 연락처를 받았다.담당자에게 풀과 나무가 훼손되지 않게 태울 것을 약속하고 또 묘지에 자금을 후원하기로 하자 담당자는 흔쾌히 허락했다.경호원들은 전화를 끊고 방화판을 바닥에 깔고 옷감을 태울 준비를 마치고는 김시후의 앞으로 걸어갔다.“대표님, 이제 태우셔도 됩니다.”김시후는 시종일관 묘비 위 서유의 영정사진을 주시하다가 경호원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져와.”경호원 중 한 명이 몸을 돌려 그늘에 놓인 대형 트렁크를 가져왔다.정가혜는 트렁크 안에 온통 남자 옷인 것
이승하는 두 사람 앞에 다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서유 어디 있죠?”정가혜가 이승하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그가 직접 서유를 데리러 왔을 때였다.그때 이승하는 차에서 내리지 않아 그의 옆 모습만 보았다.당시에는 재벌가의 뛰어난 유전자를 갖고 있고 잘 생겼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와 마주 서 있는 지금, 정가혜는 좀 놀랐고 두려웠다.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이었다.고귀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분위기와 아우라는 타고난 것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김시후는 이제야 찾아온 이승하가 여전히 꼿꼿한 태도를 보이자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서유를 만나러 왔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뒤에 있는 무덤을 가리켰다.“서유 저기 있어요.”이승하는 그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보다가 그 묘비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도도하고 음산한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말도 안 돼!”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소수빈에게 명령했다.“무덤 열어!”그는 서유가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반드시 그들의 거짓말을 폭로해야 했다!소수빈은 경호원 몇 명을 향해 손짓했고, 그들은 즉시 무덤을 향해 다가갔다.정가혜는 급히 달려가 경호원을 막았고, 김시후는 이승하의 멱살을 잡았다.“이승하! 서유 이미 죽었다고! 그런데 무덤을 열어? 대체 무슨 속셈이야?”몇 번이고 서유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이승하는 가슴이 칼에 꽂힌 것 같았고 한 번 들을 때마다 깊이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주먹을 꽉 쥐고 고통을 참으며 새빨간 눈으로 차갑게 김시후를 보며 말했다.“서유를 가지려고 일부러 숨긴 거지?”김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이승하를 정신 나간 사람 보듯 했다.“참 불쌍하네. 서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다니.”이승하는 더 이상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김시후를 손바닥으로 밀어젖혔다.무덤 앞에 성큼성큼 다가가 묘비 위의 영정사진을 무시하고 관을 들려고 힘껏 손을 들었다.정가혜는 그가 미친 것을 보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