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해 경직되었다.그녀는 웃음기를 거두고 이승하에게 다가가서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보았다.“승하야, 내가 여기 있는 게 기분 나빠?”이승하의 조각 같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음산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곳은 이승하의 휴스턴 개인 저택으로 위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지유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그녀가 이승하를 미행했다는 것을 증명한다.연지유는 남자의 눈빛에 놀라 뒤로 물러난 후, 몸에 있는 목욕 수건을 감싸고 내키지 않는 듯 위로 당겼다.“승하야, 이모가 네 행적을 훤히 알고 계셔. 이젠 나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우리 사이에 진전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나 여기로 보내신 거야...”연지유는 용기를 내어 하얀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남자가 옆으로 비켜섰다.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연지유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절망적인 미소를 지었다.“이승하, 대체 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이승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가.”평소 같았으면 연지유는 감히 이승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얌전히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목욕 수건을 두르고 여자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그런데 이승하는 마음이 움직이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하다니. 이걸 연지유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연지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했다.“나랑 결혼하겠다고 형이랑 약속한 거 잊었어?”그 말을 들은 이승하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형이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하지 않아. 알아들었으면 빨리 나가.”연지유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예전에 이 말로 위협하면 이승하는 늘 타협했다.타협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지만 지금은 그녀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쫓아내려 한다.연지유는 재
소수빈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이승하의 눈치를 살폈다.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조각 같은 얼굴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내 말을 못 들으셨나? 아니면 서유 씨의 생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건가?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소수빈은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쉬세요.”그가 돌아서서 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누가 사망했다고?”소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내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는데 대표님 진짜 못 들으셨나?’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온몸에서 한기를 뿜어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서유, 서유 씨가요.”이승하가 잘 듣지 못할까 봐 소수빈은 일부러 서유의 이름을 강조했다.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죽어?”소수빈은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듣지 못한 게 아니라 서유 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으시는구나!’그는 주서희에게 들은 말을 이승하에게 전했다.“대표님, 서유 씨는 심부전이었어요.”이승하는 차갑게 말했다.“서유는 그저 심장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웬 심부전이야?”소수빈이 말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승하는 쾅하고 문을 닫아버렸다.방금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휴대폰을 든 이승하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이승하는 이미 통제를 벗어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그는 서유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에게 뺨을 맞고 화가 나서 일부러 그를 속인다고 생각했다.이승하는 반드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연속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이승하의 인내심이 바닥 날 무렵 통화가 연결되었다.순간, 그의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그녀가 자신의 전화를 받았다는 건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정가혜는 그의 말에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서유가 이런 장난을 할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이랑 당신 약혼녀, 그리고 사촌 여동생이 어떻게 서유를 때렸는지 벌써 잊었어요? 심부전 말기인 환자의 뒤통수에 못이 박혔는데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정가혜는 소리를 치며 불평했지만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서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맞은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당신, 어떻게 그렇게 독할 수 있어요? 서유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 앞으로 유서까지 썼다고요...”전화기 너머의 원망스러운 울부짖음에 이승하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조여왔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싶었지만 평소처럼 쉽게 통제할 수 없었다.억제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더 불안해졌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공포를 내버려 두었다.그는 휴대폰을 움켜쥐고 차갑게 물었다.“뒤통수에 못이 박혔다는 건 무슨 말이죠?”정가혜는 남자가 일부러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주 선생님이 도착했을 때, 서유 뒤통수에는 이미 못이 박혀 있었어요. 못에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다 출혈로 인해 심부전이 악화되지도 않았겠죠. 전부 당신네 가족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요? 정말 서유가 불쌍하네요!”정가혜는 단숨에 울분을 토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린 후 이승하를 블랙 리스트에 넣었다.이승하는 이미 어두워진 액정을 보며 몇 분 동안 침묵을 지켰다.통창 앞에 우뚝 서 있던 몸이 갑자기 흔들리더니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그는 한 손으로 유리를 받쳐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서유가 그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뿐이었다.그날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실망해서가 아니라 못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니.서유가 혼자 절망적으로 화장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이승하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조여왔다.빠르게 밀려오는 죄책감은 마치 짓궂
김시후는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묘지를 골랐다.건너편에 있는 명승지는 그와 서유가 왔던 곳이다.그때 서유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앞으로 자주 놀러 오자고 했었다.나중에 김시후는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잊고 말았다.김시후는 품에 안긴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눈시울을 붉혔다.“서유야, 미안해...”유품을 들고 오던 정가혜는 마침 김시후의 사과를 들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유골함을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김시후를 바라보며 순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엇갈리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아쉬움이고 고통일까!정가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애써 참고 트렁크를 그의 앞에 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사월아, 이제 묻을까?”이혜선은 이미 사람을 통해 매장하기 좋은 날을 골랐다. 더 이상 미루면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서유도 가는 길이 편안하지 못할 테니 서둘러 묻는 것이 좋았다.김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정가혜가 들고 온 트렁크를 보았다.“물건이 이것밖에 없어요?”정가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다른 건 태우기 아까워서. 서유 물건을 남기고 싶어.”김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유골함을 쳐다보더니 여전히 아쉬운 듯 무덤에 넣었다.곧 직원들은 관을 박아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우더니 고인의 옷감을 태우지 말라고 당부했다.김시후가 대답하지 않자 경호원 몇 명이 다가가서 직원을 통해 묘지 담당자의 연락처를 받았다.담당자에게 풀과 나무가 훼손되지 않게 태울 것을 약속하고 또 묘지에 자금을 후원하기로 하자 담당자는 흔쾌히 허락했다.경호원들은 전화를 끊고 방화판을 바닥에 깔고 옷감을 태울 준비를 마치고는 김시후의 앞으로 걸어갔다.“대표님, 이제 태우셔도 됩니다.”김시후는 시종일관 묘비 위 서유의 영정사진을 주시하다가 경호원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져와.”경호원 중 한 명이 몸을 돌려 그늘에 놓인 대형 트렁크를 가져왔다.정가혜는 트렁크 안에 온통 남자 옷인 것
이승하는 두 사람 앞에 다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서유 어디 있죠?”정가혜가 이승하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그가 직접 서유를 데리러 왔을 때였다.그때 이승하는 차에서 내리지 않아 그의 옆 모습만 보았다.당시에는 재벌가의 뛰어난 유전자를 갖고 있고 잘 생겼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와 마주 서 있는 지금, 정가혜는 좀 놀랐고 두려웠다.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이었다.고귀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분위기와 아우라는 타고난 것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김시후는 이제야 찾아온 이승하가 여전히 꼿꼿한 태도를 보이자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서유를 만나러 왔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뒤에 있는 무덤을 가리켰다.“서유 저기 있어요.”이승하는 그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보다가 그 묘비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도도하고 음산한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말도 안 돼!”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소수빈에게 명령했다.“무덤 열어!”그는 서유가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반드시 그들의 거짓말을 폭로해야 했다!소수빈은 경호원 몇 명을 향해 손짓했고, 그들은 즉시 무덤을 향해 다가갔다.정가혜는 급히 달려가 경호원을 막았고, 김시후는 이승하의 멱살을 잡았다.“이승하! 서유 이미 죽었다고! 그런데 무덤을 열어? 대체 무슨 속셈이야?”몇 번이고 서유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이승하는 가슴이 칼에 꽂힌 것 같았고 한 번 들을 때마다 깊이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주먹을 꽉 쥐고 고통을 참으며 새빨간 눈으로 차갑게 김시후를 보며 말했다.“서유를 가지려고 일부러 숨긴 거지?”김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이승하를 정신 나간 사람 보듯 했다.“참 불쌍하네. 서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다니.”이승하는 더 이상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김시후를 손바닥으로 밀어젖혔다.무덤 앞에 성큼성큼 다가가 묘비 위의 영정사진을 무시하고 관을 들려고 힘껏 손을 들었다.정가혜는 그가 미친 것을 보고
김시후의 말에 주먹을 쥐고 있던 이승하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그렇게 꾹 눌러도 심장에서 밀려오는 아픔을 이기지 못했다.전례 없는 고통이 이승하의 사지에 빠르게 번졌다.마치 전류가 흐른 듯 온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렇게 아파도 이승하는 서유가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었다고? 절대 아니야. 분명 어디 숨어 있을 거야!’이승하는 시뻘건 눈으로 김시후를 지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정가혜는 그의 선홍색 눈동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경악했다.이렇게 무정한 남자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그녀가 눈을 떼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혜 씨 집으로 가죠!”이승하는 말을 마치고 그녀를 끌고 묘원 밖으로 갔다.“이승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김시후가 달려들어 막으려 했지만 소수빈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경호원들이 상황을 보고 즉시 나서서 소수빈을 제압하려 하자 소수빈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도 재빨리 주먹을 휘둘렀다.그렇게 양쪽의 경호원들이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지만 김시후의 쪽 사람이 적어 곧 제압당했다.“이승하! 감히 가혜 누나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이승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정가혜를 데리고 경호원이 몰고 온 고급 차량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녀를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해서 아파트 쪽으로 달렸다.차 안에 앉아 있는 정가혜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승하를 바라보았다.그의 이런 모습은 이미 서유의 죽음을 믿고 있지만 감히 마주할 수 없는 듯했다.지금 정가혜를 데리고 집으로 끌고 가는 것은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일 것이다.검증이 끝나면 그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이승하는 차를 입구에 세웠고 정가혜에게 아파트로 들어가자고 눈짓했다.정가혜는 눈을 희번덕거렸지만 결국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향했다.방안은 아주 작아서 한눈에 들어오는데 작은 침실 문만 굳게 닫혀 있었다.이승하는 빠른 걸
정가혜의 단호한 말에 이승하는 갑자기 무언가를 잃은 듯 속이 텅 빈 것 같았다.그는 눈을 붉히며 정가혜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서유는 죽지 않았어요. 이렇게 빨리 화장했을 리가 없어요...”김시후가 얼마나 서유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빨리 화장할 수 있을까?정가혜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가 매우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니.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서유는 연지유의 목소리를 듣고 죽으면 바로 화장해 달라고 했어요.”자신이 죽으면 바로 화장하라고 서유가 요구했다.그녀는 이승하가 떠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아서, 연지유에게 상처를 입어서, 이승하에게 자신의 시신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그녀가 한을 품고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승하는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마치 혼이 나간 듯 버티지 못하고 벽을 따라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고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호흡이 멈출 것 같았다.정가혜는 이승하가 땅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다.“서유를 연지유의 대역으로 여겼을 뿐이면서 왜 이제 와서 애틋한 척해요? 그러고도 당신 첫사랑을 볼 면목이 있어요?”이승하는 고개를 들어 물안개로 가득 찬 눈으로 정가혜를 보며 말했다.“난 한 번도 서유를 누군가의 대역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정가혜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서유는 죽기 전까지 자기가 연지유 대역인 줄 알았어요.”이승하의 심장이 또 조여오더니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아픔이 조금씩 퍼져나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뜨고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깊고 진한 어둠이 그를 감싸 침묵에 빠뜨렸다.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떨리는 목소리였
이승하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정가혜가 자신의 낭패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정가혜는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보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잔인한 말로 계속 남자를 자극해 복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이승하는 너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다.그녀는 서유가 남기고 간 물건이 생각나 서랍을 열어 몇 마디밖에 쓰지 않은 편지를 이승하에게 건넸다.“만약 서유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절대 당신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았어요.”정가혜는 편지를 그의 손에 쥐여주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이승하는 수중의 편지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는 벽에 기대어 십여 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편지를 폈다.[이승하.그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망상을 버리라고 했다. 그는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단 세 마디에 남자는 완전히 무너졌고 극심한 후회가 몰려왔다.편지를 쥔 손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 아름다운 글씨체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서유는 아주 간단하고 짧은 글로 그의 무정함을 호소했다.이승하는 서유를 껴안고 그런 일을 하다가 화가 나서 고약한 말을 했던 그 날 밤이 생각났다.송사월과 떠나는 것이 싫어 그녀를 잡고 싶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갑자기 말을 바꿨다.만약 그녀가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다면, 이승하는 분명 그 보잘것없고 우스운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사실 오래전, 서유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승하는 마음이 흔들렸다.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밤이 아니라 바로 서울대학교 정문 앞이었다.그때 이승하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무 그늘에 앉아 이연석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유도 아마 학교에 사람을 찾으러 왔을 것이다. 다친 이승하를 보고 물 한 병을 건네주었고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그때 이승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녀도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보지 않고 물 한 병을 내려놓고는 서둘러 학교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에야 이승하는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