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서유는 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많았다.깨어났다 해도 몇 마디 못 하고 바로 다시 스르르 깊은 잠에 빠졌다.김시후는 침대맡에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핼쑥한 얼굴엔 수염이 자랐고 그 모습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서유가 깨어나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봐 정가혜는 나가서 좀 사 오려고 했다. 서유가 별로 먹지 못해도 말이다.정가혜는 김시후에게 나가서 흰죽 좀 사 오겠다고 하고는 병실을 나섰다.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유가 잠에서 깼다. 온몸이 부어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어쩌면 얼굴도 부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할지 서유는 예상이 갔다.서유는 김시후가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마음이 살짝 차분해졌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사월아... 혹시 해 떴어?”김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얼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떴어...”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해가 뜰 리가 없었다.하지만 요 며칠 서유는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해가 떴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해가 보고 싶은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해가 떴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해가 떴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은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지만 유리창으로 햇살 한줄기가 들어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듯해졌다.“사월아, 나 주워 온 날도 이런 날씨 아니었어?”“맞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이 예쁜 날이었어. 햇살도 엄청 따듯하고. 네가 잔디밭에 누워 있는 걸 단번에 봤지 뭐야.”송사월이 5살 되는 해 복지원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풀숲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복지원에 데려갔다.그가 그녀를 안아 올린 그때부터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운명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서유는 김시훈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꿈에서 어떤 여자가 그녀를 향해 손
서유가 그런 자신을 비웃다가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에 미친 듯이 기침했다. 순간 입에서 피가 거품처럼 뽀글뽀글 나오더니 산소마스크를 꽉 채웠다.“서유야!”김시후는 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그러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티슈를 꺼내 산소마스크를 벗기고는 기침으로 나온 피가 섞인 가래를 받았다.피가 티슈를 타고 뼈마디가 선명한 그의 손에 떨어진 순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했지만 닦을수록 피는 점점 많아졌다.빨간 피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옷과 베개를 적셨다.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에 김시후는 심장이 아파졌고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간호사는 비상벨을 듣고 얼른 주치의와 원장을 모셔 왔다.주서희는 심하게 기침하는 서유를 보고는 바로 의사들에게 응급실로 베드를 옮기라고 했다.사람들은 부랴부랴 병실로 달려왔다가 허둥지둥 다시 빠져나갔다. 김시훈만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온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김시훈은 그렇게 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 굳어버렸다.크고 웅장한 몸은 지금 이 순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깊은 바다에라도 빠진 것처럼 허우적댈 힘도 없었다.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껴온 사람이 정말 떠난다는 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그를 떠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무엇인지 모를 무언가가 자꾸만 손등에 툭툭 떨어졌고 이미 말라붙은 피를 적셨다.정가혜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런 김시후를 마주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원망도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가 서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옆에서 보아온 터라 잘 알고 있었다. 비껴간 5년만 아니었으면 둘은 무사히 평생을 함께했을 것이다.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하느님은 그들을 엇갈리게 한 것도 모자라 지금 서유의 목숨마저 앗아가려 하고 있다.이런 생각에
김시후는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응급실로 들어갔다.수술대에는 작고 마른 체구의 한 사람이 생기 없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기다란 눈초리 아래에 있는 예쁜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얼굴에 묻어있던 핏자국이 깨끗이 닦여지고 병적으로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는 마치 샘가 옆에 핀 피안화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안화는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서유야...”김시후는 수술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춘 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그러자 부드러운 울림이 곧 사라질 듯한 서유의 의식을 되살렸다.그녀는 지친 눈을 느릿느릿 뜨고 마지막으로 송사월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 월...”서유는 간신히 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의식은 분명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희미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그녀의 입술 가까이 귀를 갖다 대고서야 김시후는 서유가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나 여기 있어.”그는 힘을 건네주기라도 하는 듯 서유의 손을 꼭 잡았다.서유는 생명을 연장해 주는 마지막 산소를 들이마시며 떠듬떠듬 당부의 말을 전했다.“가... 혜... 잘... 부탁... 해.”떠나면서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정가혜가 평생 무사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뿐.김시후는 고개를 숙여 서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그러자 서유는 입을 다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사월아... 다음 생에는... 나 다시 잊어버리지 마.”김시후는 순간 심장이 찌릿 아팠다. 질식할 것만 같은 통증이 사지를 꽉 조여 그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했다.원래 어떤 아쉬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칼에 마음을 관통당한 듯 지금의 김시후가 그러했다.말로 표현할
이번에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이승하가 응급실 문밖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말이다.마치 처음 만났을 때와같이 그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서유의 앞에 다가왔다.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을 내밀며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나 왔어...”이승하는 여태껏 서유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서유는 점점 의식을 되찾더니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세상을 떠나기 전인 사람에게는 환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전 서유가 본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마지막으로 이승하를 다시 보고 싶다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서유가 정가혜를 보고 나서도 계속 응급실 밖을 응시하자 김시후는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얼른 주서희에게 말했다.“이 대표한테 전화해서 빨리 서유 마지막 모습 보라고 전해!”주서희는 멈칫했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라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그녀는 이승하를 손꼽아 기다리는 서유를 보고 또 곧장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 전원 역시 꺼져있었다.결국 주서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힘없이 말했다.“꺼져 있어요...”목이 터져라 울던 정가혜도 서유가 이승하를 기다리며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이승하의 개인 핸드폰은 절대 꺼져있지 않다고 했던 서유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주서희에게 전했다.“서유 핸드폰에 이승하 씨 개인 번호가 있어요. 누가 서유 핸드폰 좀 가져다줄 수 있나요? 병실 머리맡에 있는 종이봉투 안에...”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몸을 돌려 병실로 달려가더니 곧 서유의 핸드폰을 가져왔다.주서희는 핸드폰을 받아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며 정가혜에게 물었다.“비밀번호가 뭡니까
삐-심전도 모니터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술대 위에 있던 사람은 이렇게 떠난 것이다.울다 못 한 정가혜가 결국 기절했고, 주서희는 황급히 그녀를 끌고 가 응급처치를 시도했다.김시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한 채 꼼짝하지 않고 수술대 위 서유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없이 몇 분 동안 쳐다보다가, 그는 나약해진 서유의 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러자 옆방 응급 구조 실에 있던 주서희가 김시후를 가로막았다.“김 대표님, 서유 씨 마지막 유언은 곧장 화장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나도 알아...”그는 창백한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옷 좀 갈아입혀 주고 싶어서.”서유의 옷은 그의 손에 묻은 피로 더러워졌다. 평소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유였기에 틀림없이 이런 옷을 입고 화장하러 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은 주서희를 놀라게 했다. 김시후는 서유를 매우 사랑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걸까?주서희는 멀어지는 김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김 대표님은 적어도 서유 씨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려 하는데, 이 대표님은 그림자조차 안 보인다니...’그러다 마음속의 놀라움도 점차 옅어졌다.‘남자는 항상 이렇게 매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품어서는 안 돼...’김시후는 서유를 안고 병실로 돌아와 그녀의 몸을 깨끗이 닦고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혔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시 서유의 주민등록증을 집어 들고 경호원에게 사망 진단서를 떼도록 했다.진단서를 손에 넣은 순간 역시 김시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병원 옆에 있는 화장터로 향했다.곧이어 서유를 직접 화장터로 데려온 김시후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직원이 그를 막아 나섰다.“선생님, 이 안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다음 소각 작업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결국 소각문 밖에서 멈춰 선 김시후는 서유가 몇몇 직원의 인도하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어둠이 깔리자 철문이 열렸고 유골함을 든 직원이 걸어 나왔다.“서유 씨 화장 끝났습니다. 가족분들은 유골함 받아 가세요.”그러자 김시후의 경호원이 즉시 다가가 유골함과 주민등록증을 가져왔다.경호원은 유골함을 손에 받쳐 들고 허리를 숙여 반쯤 정신을 잃은 김시후에게 건넸다.“대표님, 이만 서유 씨를 집에 데려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이승을 떠도는 외로운 망령이 될지도 모릅니다.’감히 이 말까지는 뱉지 못했지만, 김시후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이윽고 핏빛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유골함에 닿았다.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한 움큼의 재로 변했다고 생각되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그날 밤처럼 콩알만 한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쳤다.쏟아지는 비가 김시후의 머리카락과 뺨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어 유골함을 덮었다.애써 진정시킨 뒤 떨리는 손을 들어 유골함을 건네받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내가 할게.”소준섭이 유골함을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결국 김시후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그는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유골함을 받아내려 했다.그렇게 안정된 후, 김시후는 유골함을 한사코 품에 꼭 안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서유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광풍이 불며 번개가 내리치자 그 빛 사이로 김시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그는 유골함을 꼭 껴안고 소준섭의 부축 하에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 걸음 한 걸음 화장터를 빠져나갔다.예전에 김시후는 어른이 되면 서유를 아내로 삼아 집에 데려오겠다 약속한 적이 있었다.불행하게도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그녀가 황급히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하지만 서유가 살아있든 죽었든, 김시후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차가 구청에 들어섰을 때, 소준섭은 그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고 김시후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유골
김시후는 서유를 그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왔던 곳이니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혜선은 유골함을 안은 채 죽을상이 된 김시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소준섭과 경호원들이 똑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유골함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김시후의 가족일 것으로 생각했다.“도련님, 제가 빈소를 준비하겠습니다...”김시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혜선이 돌아섰을 때 그녀를 불렀다.“비석에 이름도 써주세요.”“네, 뭐라고 적을까요?”김시후는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애틋하게 대답했다.“김시후의 아내, 서유요.”이혜선은 흠칫 놀랐다.‘서유라고? 내가 전에 봤던 그 아가씨? 아주 예쁘지만 몸이 좀 허약했던 분?’이혜선은 감히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내려가서 준비했다.김시후는 유골함을 올려놓고 소준섭에게 말했다.“너 이제 가봐도 돼. 나 혼자 괜찮아.”소준섭은 거절하려 했지만 김시후가 말을 이었다.“나 서유랑 조용히 있고 싶어.”김시후는 당연히 서유에게 묘지를 마련해 줄 것이다. 서유와 단둘이 있다가 직접 그녀를 안장할 것이다.소준섭은 그런 김시후의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네 몸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김시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준섭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떠나기 전 경호원에게 김시후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소준섭이 떠나고, 김시후는 깨끗한 수건으로 유골함을 꼼꼼히 닦았다.정가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주서희로부터 김시후가 이미 서유를 화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펑펑 울었다.주서희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넸다. 마음속으로는 서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서유 씨에게는 원래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었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지도 않았겠지... 내가 무능해서 서유 씨를 죽인 거야...’정가혜는 주서희와 함께 김시후의 별장으로 갔다.빈소는 이미 마련
얼마나 울었을까, 정가혜는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져서야 겨우 몸을 가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서유가 황천길에서 입을 옷이 없게 해서는 안 되니 그녀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정가혜는 반드시 정신을 차리고 예쁜 옷 몇 벌을 골라야 했다.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유의 방으로 걸어갔다.방 안에 서유의 물건은 그대로지만 서유가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옷장에서 옷을 꺼내고 신발장에서 신발 몇 켤레를 꺼내고 이불도 정리했다.나머지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 태워버리기 아까워 기념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유품을 싸고 침실을 나서려고 돌아섰을 때, 정가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책상을 돌아보았다.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책상으로 이끌고 또 서랍을 열게 했다.안에는 공책 한 권과 ‘유서’라고 적힌 봉투가 하나 있었다.유서라는 두 글자를 보자 정가혜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이미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만약 정가혜가 일찍 발견했다면 서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쉬움이 한가득 남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유서를 꺼냈다.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편지를 천천히 펼쳤다.[사랑하는 가혜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가혜야,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인생은 이미 정해진 운명과 같아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냥 받아들이자고.난 이미 운명을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나 때문에 눈 퉁퉁 부을 때까지 울지 말고. 그럼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가혜야, 내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어릴 때부터 누가 나를 괴롭히면 네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지켜줬잖아.열두 살 때, 학교 앞에서 불량 학생들을 만났던 기억이 나. 그때도 네가 필사적으로 싸워서 나를 구해줬어.그때 네가 아르바이트해서 새로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