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가 그런 자신을 비웃다가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에 미친 듯이 기침했다. 순간 입에서 피가 거품처럼 뽀글뽀글 나오더니 산소마스크를 꽉 채웠다.“서유야!”김시후는 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그러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티슈를 꺼내 산소마스크를 벗기고는 기침으로 나온 피가 섞인 가래를 받았다.피가 티슈를 타고 뼈마디가 선명한 그의 손에 떨어진 순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했지만 닦을수록 피는 점점 많아졌다.빨간 피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옷과 베개를 적셨다.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에 김시후는 심장이 아파졌고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간호사는 비상벨을 듣고 얼른 주치의와 원장을 모셔 왔다.주서희는 심하게 기침하는 서유를 보고는 바로 의사들에게 응급실로 베드를 옮기라고 했다.사람들은 부랴부랴 병실로 달려왔다가 허둥지둥 다시 빠져나갔다. 김시훈만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온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김시훈은 그렇게 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 굳어버렸다.크고 웅장한 몸은 지금 이 순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깊은 바다에라도 빠진 것처럼 허우적댈 힘도 없었다.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껴온 사람이 정말 떠난다는 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그를 떠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무엇인지 모를 무언가가 자꾸만 손등에 툭툭 떨어졌고 이미 말라붙은 피를 적셨다.정가혜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런 김시후를 마주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원망도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가 서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옆에서 보아온 터라 잘 알고 있었다. 비껴간 5년만 아니었으면 둘은 무사히 평생을 함께했을 것이다.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하느님은 그들을 엇갈리게 한 것도 모자라 지금 서유의 목숨마저 앗아가려 하고 있다.이런 생각에
김시후는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응급실로 들어갔다.수술대에는 작고 마른 체구의 한 사람이 생기 없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기다란 눈초리 아래에 있는 예쁜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얼굴에 묻어있던 핏자국이 깨끗이 닦여지고 병적으로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는 마치 샘가 옆에 핀 피안화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안화는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서유야...”김시후는 수술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춘 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그러자 부드러운 울림이 곧 사라질 듯한 서유의 의식을 되살렸다.그녀는 지친 눈을 느릿느릿 뜨고 마지막으로 송사월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 월...”서유는 간신히 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의식은 분명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희미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그녀의 입술 가까이 귀를 갖다 대고서야 김시후는 서유가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나 여기 있어.”그는 힘을 건네주기라도 하는 듯 서유의 손을 꼭 잡았다.서유는 생명을 연장해 주는 마지막 산소를 들이마시며 떠듬떠듬 당부의 말을 전했다.“가... 혜... 잘... 부탁... 해.”떠나면서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정가혜가 평생 무사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뿐.김시후는 고개를 숙여 서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그러자 서유는 입을 다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사월아... 다음 생에는... 나 다시 잊어버리지 마.”김시후는 순간 심장이 찌릿 아팠다. 질식할 것만 같은 통증이 사지를 꽉 조여 그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했다.원래 어떤 아쉬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칼에 마음을 관통당한 듯 지금의 김시후가 그러했다.말로 표현할
이번에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이승하가 응급실 문밖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말이다.마치 처음 만났을 때와같이 그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서유의 앞에 다가왔다.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을 내밀며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나 왔어...”이승하는 여태껏 서유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서유는 점점 의식을 되찾더니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세상을 떠나기 전인 사람에게는 환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전 서유가 본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마지막으로 이승하를 다시 보고 싶다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서유가 정가혜를 보고 나서도 계속 응급실 밖을 응시하자 김시후는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얼른 주서희에게 말했다.“이 대표한테 전화해서 빨리 서유 마지막 모습 보라고 전해!”주서희는 멈칫했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라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그녀는 이승하를 손꼽아 기다리는 서유를 보고 또 곧장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 전원 역시 꺼져있었다.결국 주서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힘없이 말했다.“꺼져 있어요...”목이 터져라 울던 정가혜도 서유가 이승하를 기다리며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이승하의 개인 핸드폰은 절대 꺼져있지 않다고 했던 서유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주서희에게 전했다.“서유 핸드폰에 이승하 씨 개인 번호가 있어요. 누가 서유 핸드폰 좀 가져다줄 수 있나요? 병실 머리맡에 있는 종이봉투 안에...”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몸을 돌려 병실로 달려가더니 곧 서유의 핸드폰을 가져왔다.주서희는 핸드폰을 받아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며 정가혜에게 물었다.“비밀번호가 뭡니까
삐-심전도 모니터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술대 위에 있던 사람은 이렇게 떠난 것이다.울다 못 한 정가혜가 결국 기절했고, 주서희는 황급히 그녀를 끌고 가 응급처치를 시도했다.김시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한 채 꼼짝하지 않고 수술대 위 서유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없이 몇 분 동안 쳐다보다가, 그는 나약해진 서유의 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러자 옆방 응급 구조 실에 있던 주서희가 김시후를 가로막았다.“김 대표님, 서유 씨 마지막 유언은 곧장 화장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나도 알아...”그는 창백한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옷 좀 갈아입혀 주고 싶어서.”서유의 옷은 그의 손에 묻은 피로 더러워졌다. 평소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유였기에 틀림없이 이런 옷을 입고 화장하러 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은 주서희를 놀라게 했다. 김시후는 서유를 매우 사랑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걸까?주서희는 멀어지는 김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김 대표님은 적어도 서유 씨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려 하는데, 이 대표님은 그림자조차 안 보인다니...’그러다 마음속의 놀라움도 점차 옅어졌다.‘남자는 항상 이렇게 매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품어서는 안 돼...’김시후는 서유를 안고 병실로 돌아와 그녀의 몸을 깨끗이 닦고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혔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시 서유의 주민등록증을 집어 들고 경호원에게 사망 진단서를 떼도록 했다.진단서를 손에 넣은 순간 역시 김시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병원 옆에 있는 화장터로 향했다.곧이어 서유를 직접 화장터로 데려온 김시후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직원이 그를 막아 나섰다.“선생님, 이 안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다음 소각 작업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결국 소각문 밖에서 멈춰 선 김시후는 서유가 몇몇 직원의 인도하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어둠이 깔리자 철문이 열렸고 유골함을 든 직원이 걸어 나왔다.“서유 씨 화장 끝났습니다. 가족분들은 유골함 받아 가세요.”그러자 김시후의 경호원이 즉시 다가가 유골함과 주민등록증을 가져왔다.경호원은 유골함을 손에 받쳐 들고 허리를 숙여 반쯤 정신을 잃은 김시후에게 건넸다.“대표님, 이만 서유 씨를 집에 데려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이승을 떠도는 외로운 망령이 될지도 모릅니다.’감히 이 말까지는 뱉지 못했지만, 김시후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이윽고 핏빛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유골함에 닿았다.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한 움큼의 재로 변했다고 생각되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그날 밤처럼 콩알만 한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쳤다.쏟아지는 비가 김시후의 머리카락과 뺨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어 유골함을 덮었다.애써 진정시킨 뒤 떨리는 손을 들어 유골함을 건네받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내가 할게.”소준섭이 유골함을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결국 김시후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그는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유골함을 받아내려 했다.그렇게 안정된 후, 김시후는 유골함을 한사코 품에 꼭 안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서유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광풍이 불며 번개가 내리치자 그 빛 사이로 김시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그는 유골함을 꼭 껴안고 소준섭의 부축 하에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 걸음 한 걸음 화장터를 빠져나갔다.예전에 김시후는 어른이 되면 서유를 아내로 삼아 집에 데려오겠다 약속한 적이 있었다.불행하게도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그녀가 황급히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하지만 서유가 살아있든 죽었든, 김시후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차가 구청에 들어섰을 때, 소준섭은 그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고 김시후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유골
김시후는 서유를 그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왔던 곳이니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혜선은 유골함을 안은 채 죽을상이 된 김시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소준섭과 경호원들이 똑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유골함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김시후의 가족일 것으로 생각했다.“도련님, 제가 빈소를 준비하겠습니다...”김시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혜선이 돌아섰을 때 그녀를 불렀다.“비석에 이름도 써주세요.”“네, 뭐라고 적을까요?”김시후는 유골함을 내려다보며 애틋하게 대답했다.“김시후의 아내, 서유요.”이혜선은 흠칫 놀랐다.‘서유라고? 내가 전에 봤던 그 아가씨? 아주 예쁘지만 몸이 좀 허약했던 분?’이혜선은 감히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내려가서 준비했다.김시후는 유골함을 올려놓고 소준섭에게 말했다.“너 이제 가봐도 돼. 나 혼자 괜찮아.”소준섭은 거절하려 했지만 김시후가 말을 이었다.“나 서유랑 조용히 있고 싶어.”김시후는 당연히 서유에게 묘지를 마련해 줄 것이다. 서유와 단둘이 있다가 직접 그녀를 안장할 것이다.소준섭은 그런 김시후의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네 몸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김시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준섭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떠나기 전 경호원에게 김시후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소준섭이 떠나고, 김시후는 깨끗한 수건으로 유골함을 꼼꼼히 닦았다.정가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주서희로부터 김시후가 이미 서유를 화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펑펑 울었다.주서희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넸다. 마음속으로는 서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서유 씨에게는 원래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었어. 내가 아니었다면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지도 않았겠지... 내가 무능해서 서유 씨를 죽인 거야...’정가혜는 주서희와 함께 김시후의 별장으로 갔다.빈소는 이미 마련
얼마나 울었을까, 정가혜는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져서야 겨우 몸을 가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서유가 황천길에서 입을 옷이 없게 해서는 안 되니 그녀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정가혜는 반드시 정신을 차리고 예쁜 옷 몇 벌을 골라야 했다.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유의 방으로 걸어갔다.방 안에 서유의 물건은 그대로지만 서유가 없는 것을 보고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옷장에서 옷을 꺼내고 신발장에서 신발 몇 켤레를 꺼내고 이불도 정리했다.나머지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 태워버리기 아까워 기념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유품을 싸고 침실을 나서려고 돌아섰을 때, 정가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책상을 돌아보았다.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책상으로 이끌고 또 서랍을 열게 했다.안에는 공책 한 권과 ‘유서’라고 적힌 봉투가 하나 있었다.유서라는 두 글자를 보자 정가혜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는 이미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만약 정가혜가 일찍 발견했다면 서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쉬움이 한가득 남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유서를 꺼냈다.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편지를 천천히 펼쳤다.[사랑하는 가혜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가혜야,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인생은 이미 정해진 운명과 같아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냥 받아들이자고.난 이미 운명을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나 때문에 눈 퉁퉁 부을 때까지 울지 말고. 그럼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가혜야, 내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어릴 때부터 누가 나를 괴롭히면 네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지켜줬잖아.열두 살 때, 학교 앞에서 불량 학생들을 만났던 기억이 나. 그때도 네가 필사적으로 싸워서 나를 구해줬어.그때 네가 아르바이트해서 새로
정가혜는 이 편지를 보고 이미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봉투에 끼워진 은행 카드는 마치 고철 조각처럼 그녀의 심장을 꽉 누르고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바보 같으니라고. 죽기 전까지 나 돈 없을까 봐 걱정한 거야? 하지만...’“서유야, 난 네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난 널 원한다고...”정가혜는 봉투를 움켜쥔 채 깊은 그리움에 빠져 서글피 울었다.결국 울다 지친 정가혜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서유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서유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정가혜는 꿈속에서까지 서유를 보게 된 것이다.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마치 나락으로 떨어진 듯 무력감을 느꼈고 가슴에 단단한 것이 막힌 듯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그녀는 퉁퉁 부어오른 두 눈을 뜬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듯 고요해진 느낌이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구찌 종이봉투에서 흘러나오는 서유의 휴대폰 벨 소리였다.정가혜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이끌고 전화를 들었다.액정 화면에 이승하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그녀는 순간 손동작을 멈추었다.서유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했지만 이승하는 연지유에게 전화를 받게 했다.그런 야박한 남자는 서유의 죽음을 알 자격이 없으니 정가혜는 받지 않았다. 상대방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끝까지 받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유의 옷을 챙겨주려는데 ‘김씨’라는 사람이 수많은 메시지를 보내온 것을 확인했다.그동안 꾸준히 보내온 메시지였다. 전부 서유를 보고 싶다는 등 변태적인 메시지였고, 서유가 의식을 잃어 병원에 실려 간 날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보내왔다.정가혜는 그 미안하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이 김씨라는 사람이 그동안 서유에게 과도하게 집착한 것 같았다. 서유가 죽은 후에도 이런 변태의 메시지를 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