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536 챕터
제81화
“그래. 넌 돌아가서 푹 쉬고 의사가 당부했던 말 잊지 말고 지켜. 시간 나면 또 보러 올게.”“그럴 필요 없어. 나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자꾸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차우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나중에 시간 나면 내가 한번 선배 보러 갈게.”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온이샘은 자신을 보러 온다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나를 보러 온다고 말한 건가?’그가 오매불망 꿈에서 그리던 상황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했다.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정말이야?”차우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어서 가서 일 봐. 서흔 씨 기다리겠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로 연락해.”“그래.”온이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대화를 끝내고 차우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소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님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인자한 부모님은 지역 특산물을 잔뜩 싸서 그의 차에 넣어주었다.온이샘이 극구 사양하자 차우미가 말했다.“선배, 받아 둬. 두고 간식처럼 먹으면 맛있어. 부모님께도 가져다드려.”그녀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안 받을 수는 없었다.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는 우리 고향 특산물 가져올 테니까 먹어봐. 엄마는 강원도 분이신데 강원도 음식도 맛있어.”차우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하선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두 분도 어서 들어가세요.”차에 오른 온이샘은 하선주 부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웃는 얼굴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차우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시동을 걸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파트를 벗어났다.백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우미도 천천히 나를 받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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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차동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차우미와 하선주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하선주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차우미가 말했다.“준혁이 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준혁이?”하선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나도 한동안 못 봤는데 아마 지금쯤 수능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몇 달 전 추석이었던 것 같아.”“준혁이 걔 키가 엄청 컸어. 네 외삼촌보다 더 크더라. 얼굴도 잘생겨서 얼마나 예쁨을 받는지 몰라.”준혁이 얘기가 나오자 하선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우리가 그때 그랬거든. 조금만 더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다고.”하선주의 말을 통해 들은 준혁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하지만 오늘 봤던 준혁이의 모습은 그들이 기억하는 모습과 전혀 달랐다.차우미는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아마 대학 입시 끝나면 안평을 떠날 것 같아. 네 외숙모 얘기 들어보니까 준혁이 걔 청주대학을 지망하는 것 같더라고.”“청주대학?”차우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청주대학은 국내 명문대학 중 한 곳으로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낸 것으로 유명했다.청주대학에 입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어쩌면 희망이 있었다.하지만 어렸을 때 준혁이가 지망하던 곳은 차우미가 다녔던 대학교였다.하선주는 말이 없어진 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도 놀랐지?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했어.”“어릴 때 준혁이는 네가 다니던 대학에 간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더니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더라. 지금 전교 1등이라고 들었어.”엄마의 말을 들으니 차우미는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줄곧 전교 1등이었어?”“그래.”“3년 동안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을걸. 네 외숙모가 매번 준혁이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애가 참하고 성실해. 손이 안 가는 아이라니까. 요즘 애들에 비하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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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그녀의 상황은 진작에 진정국에게 얘기했는데 지금 연락이 왔다는 건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차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손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거길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차동수가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냥 밥 먹는 자리라고 괜찮다고 하셨어. 그쪽에서 너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나 봐. 네 상황을 얘기했는데도 괜찮다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더라.”“물론 네가 가고 싶지 않으면 내가 아저씨한테 잘 얘기할게.”차동수는 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차우미는 지금 거절하면 박물관 이미지에도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밥만 먹는 자리라고 했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갈게.”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조각사들의 집까지 차를 보냈다.차우미는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차에 올랐다.“우미 씨, 손 다쳤다던데 지금은 좀 어때?”박물관에서 일한지 가장 오래된 선배 박종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는 선배였고 차우미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지가 앉았으니 천천히 아물 거예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어디 봐봐.”박종웅은 핸드폰 불빛으로 그녀의 손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바닥 대부분이 화상으로 피딱지가 앉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박종욱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뼈는 괜찮아?”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뼈는 멀쩡해요.”“그럼 다행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뼈 다치면 귀찮아져. 최근에는 일도 하지 말고 상처 치료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물도 묻히지 말고. 피딱지가 떨어지면 괜찮을 거야.”“걱정 마세요. 저 괜찮아요.”“그래.”박종욱은 최근 그녀가 없는 사이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작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는 많이 밀려 있었고 주문 의뢰와 인터뷰, 복구 작업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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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날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걸렸다. 환한 가로등 불빛과 별하늘이 어우러져 조용한 안평 도심도 번화 도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오두막은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교외의 명승지에 지어졌다. 고대의 왕궁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해마다 안평에 여행 오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었다.게다가 음식도 맛있다고 소문 나서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다녀간 뒤로 안평을 대표하는 명승지가 되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그들은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3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는 3년 전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그에게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나상준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그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가 살짝 아래로 드리웠다.주변의 형형색색의 복고풍 가로등과 그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차우미는 3년 전 그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밤이었고 이런 아련한 풍경이었던 것 같았다.“벌써 도착했어? 자,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다른 차를 타고 온 박물관 조각사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들은 전부 이 업계에서 최소 몇십 년을 일한 노장들이었다.담당자가 다가와서 조각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박종욱은 차우미가 멍 때리고 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미 씨,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뭐 해?”차우미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요.”비록 나상준이 무슨 이유로 여기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고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녀와 마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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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비서한테 연락 받았는데 그쪽에서 다 도착했다고 하더라고. 넌 어디야? 도착했어?”“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네.”수화기 너머로 자애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상준은 멀어지는 가녀린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도착했어요.”“정말? 내가 괜한 약속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바쁘면 억지로 자리 지킬 필요 없어. 언제든 돌아가도 돼. 다음에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아니에요. 이번 이벤트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 네가 공예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 네가 있으니 이번 이벤트 잘될 것 같아.”“문 앞이야? 내가 비서 내보낼게.”“아니요. 이미 들어왔어요.”“그래.”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은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진 복도 끝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담당자는 차우미 일행을 룸으로 안내했다.족히 스무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룸이었다.주최측 인원들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담당자가 진정국을 바라보며 소개했다.“이분은 하 교수님이십니다.”진정국은 곧바로 하 교수라는 노인에게 악수를 청했다.“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평 박물관 관장 진정국입니다. 하 교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반가워요. 다들 편하게 앉아요.”하 교수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70대 노인이었다.차우미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려는데 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저분이 박물관 최연소 여자 조각사인가 봐요?”오기 전에 이미 안평 박물관에 대해 조사를 끝냈기에 차우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진정국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친구의 외동딸인데 어려서부터 제 친구를 따라 목공예를 익혔죠. 타고난 재능이 남달라서 나이는 어려도 이 일을 몇십 년 동안 해온 선배들 못지 않아요.”말을 마친 진정국은 차우미를 향해 손짓했다.“우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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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문은 반쯤 열려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문밖으로 쏠렸다.하지만 상대는 바로 들어오지 않고 조용히 허락을 기다렸다.차우미가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밖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이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지?’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차우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조금 전에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냥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와 마주친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나상준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청순한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하 교수에게 다가갔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왔다고 해서 바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좀 늦었네?”하 교수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나상준은 다가가서 하 교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 아저씨.”“마침 잘 왔어. 여기 앉아.”하 교수가 나상준에게 옆자리를 권했고 진정국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나상준에게 쏠려 있었다.다른 직원은 몰라도 진정국은 나상준을 기억하고 있었다.차우미가 결혼하던 날 식에 참석했었기에 그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나상준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는 흔치 않았다.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부류였다.태생이 큰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게 나상준이었다.그래서 차우미와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어쨌거나 진정국은 3년이 지난 오늘도 한눈에 나상준을 알아보았다.이 자리에 나온 다른 선배들도 3년 전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부는 보자마자 나상준을 알아봤다.사람들 모두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나상준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번갈아 보았다.여기 오기 전까지는 차우미가 이혼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선배들의 생각을 전혀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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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어른의 말을 절대 끊는 법이 없는 나상준이었기에 하 교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나상준에게로 쏠리고 차우미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상준이 말했다.“저와 우미 결혼할 때 아저씨도 왔었잖아요.”차우미도 당황하고 자리에 있던 하 교수도 당황했다.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가관이었다.갑자기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상황이었다.차우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상준을 바라보았다.그녀의 기억에 결혼식에서 하 교수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하 교수는 차우미와 나상준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보자마자 마음에 들더라니 예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구나! 내가 요즘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해. 나도 늙은 거지….”하 교수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나상준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당신도 잊었어?”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칠흑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 뭐라도 말해야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의 질문에 뭔가 문제가 있는데 꼭 집어 뭐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이런, 우미도 작품에만 열중하느라 깜빡했나 보네. 이 얘기는 그만하고 이미 다 아는 사이이니까 소개는 생략하자. 앉아, 앉아.”하 교수의 말에 나상준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차우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지금 박종욱의 옆에 앉으려니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이혼한 사이인데 그와 옆자리에 앉고 싶지도 않았다.나상준은 마치 그들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그제야 차우미는 어디가 문제인지 깨달았다.그는 아직 대외적으로 그들이 이혼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것이다.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다시 나상준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외투를 벗어 종업원에게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분하고 대범한 표정으로 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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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우미가 다쳤어요.”나상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렸다.하 교수는 화들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 다쳤어? 심각해?”나상준은 담담한 얼굴로 간략해서 설명했다.“사람을 구하다가 손을 다쳤는데 지금은 아물고 있는 단계예요.”그 말로 박물관 사람들은 그들이 이혼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차우미가 왜 갑자기 돌아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상준이 그녀의 지금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건 둘이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차우미가 먼저 말하려고 했지만 나상준이 그녀보다 빨랐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떻게 내 현재 상황까지 세세하게 다 알고 있지?’“그랬구나. 정말 참하고 선량한 처자네.”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우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우미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을 잘 도와줬어요. 그래서 박물관 식구들도 다들 우미를 좋아해요.”“그래요. 말수는 적지만 가장 세심하고 부지런한 직원이죠.”“전에 진상 손님이 찾아온 적 있었는데 우미가 나서서 해결했어요.”“저렇게 얌전해 보여도 일할 때는 아주 결단력 있어요.”사람들의 칭찬에 차우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미지근한 성격과 반응이 느리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고치기 어려운 단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그런 특징은 오히려 단점이 아닌 배울 점으로 들렸다.나상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길쭉하고 하얀 손가락이 눈앞에 보이자 차우미는 잠깐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찻잔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오면서 분위기가 더 몽환적으로 보였다.오늘은 어쩐 일인지 자꾸만 옛날 일이 떠오르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나상준은 한 번도 이렇게 자상하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준 적 없었다.메뉴가 계속 올라오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차우미는 천천히 반찬을 음미하고 있었고 옆에 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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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고기를 삼킨 뒤에도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지 찻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고기가 질겼나?’힘겹게 고기를 삼킨 뒤, 그녀는 접시에 반이나 남은 갈비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한 토막을 다 먹고 나면 더 이상 다른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안 먹으면 음식을 낭비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차우미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갈비로 젓가락을 가져갔다.그런데 이때, 옆자리에서 젓가락이 다가오더니 그녀가 먹다 만 갈비를 가져갔다.차우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상준은 조용히 갈비를 자신의 접시에 내려놓고 야채를 그녀의 접시에 담아주었다.차우미는 그의 접시에 담긴 자신이 먹다만 갈비찜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나상준을 보니 그는 평상시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만약 그가 냉담한 성격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주혜민을 담고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오늘 그가 보인 이상 행보는 아직 전처인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오해하기 충분했다.하지만 아닌 걸 알기에 그녀는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단지 오늘 밤 보여준 그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달랐기에 의아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다.차우미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계속해서 식사에 집중했다.그는 부지런히 반찬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날라주고 있었다.평소에도 그녀는 야채를 즐겨 먹었던 것 같았다.나상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워진 그녀의 접시를 보고 그녀의 음식 취향에 대해 대략 알 것 같았다.‘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그 뒤로 그는 그녀가 먹는 속도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 그녀에게 챙겨주었다.그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드디어 끝이 났다.“진 관장,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내일 직접 박물관에 한번 방문하겠네. 내일 가서 디테일한 부분을 의논하자고.”자리에서 일어선 하 교수가 진정국에게 말했다.진정국은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박물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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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나상준이 걸음을 멈추었다.차우미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온이샘이었다.‘서흔 씨 만난다더니 여기서 만난 거였어?’복도 전방에 핸드폰을 들고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온이샘이 보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박물관 식구들도 걸음을 멈추고 온이샘을 바라보았다.그날 온이샘이 박물관으로 찾아왔을 때, 적지 않은 작업자들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상준의 눈치를 살폈다.예전에 차우미가 이혼했다고 추측했던 이유도 온이샘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일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것 같았다.나상준의 옆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기에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표정에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온이샘을 오늘 처음 보는 진정국은 그가 바로 직원들이 입에 마르게 칭찬하던 남자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진정국은 저도 모르게 나상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온이샘의 출현은 뜻밖이었지만 만났으니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차우미는 하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교수님, 아는 선배가 저기 있는데 인사만 하고 올게요. 먼저 가세요.”하 교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남자들은 평균적으로 차우미보다 나이가 많았다.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안다고 온이샘이 차우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일반 후배들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하 교수는 나상준을 힐끗 바라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어서 가봐.”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차우미는 나상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온이샘에게 다가갔다.온이샘은 전방에 우뚝 서서 가만히 있는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는 전화를 받으러 잠깐 나오는 길이었다. 강서흔은 이미 취했는데도 계속 술병을 끌어안고 있었고 말려도 듣지 않을 걸 알기에 가만히 자리만 지켜주고 있었다.그때 전화가 걸려와서 밖으로 나왔는데 하필 식사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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