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차우미와 하선주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하선주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차우미가 말했다.“준혁이 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준혁이?”하선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나도 한동안 못 봤는데 아마 지금쯤 수능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몇 달 전 추석이었던 것 같아.”“준혁이 걔 키가 엄청 컸어. 네 외삼촌보다 더 크더라. 얼굴도 잘생겨서 얼마나 예쁨을 받는지 몰라.”준혁이 얘기가 나오자 하선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우리가 그때 그랬거든. 조금만 더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다고.”하선주의 말을 통해 들은 준혁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하지만 오늘 봤던 준혁이의 모습은 그들이 기억하는 모습과 전혀 달랐다.차우미는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아마 대학 입시 끝나면 안평을 떠날 것 같아. 네 외숙모 얘기 들어보니까 준혁이 걔 청주대학을 지망하는 것 같더라고.”“청주대학?”차우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청주대학은 국내 명문대학 중 한 곳으로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낸 것으로 유명했다.청주대학에 입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어쩌면 희망이 있었다.하지만 어렸을 때 준혁이가 지망하던 곳은 차우미가 다녔던 대학교였다.하선주는 말이 없어진 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도 놀랐지?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했어.”“어릴 때 준혁이는 네가 다니던 대학에 간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더니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더라. 지금 전교 1등이라고 들었어.”엄마의 말을 들으니 차우미는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줄곧 전교 1등이었어?”“그래.”“3년 동안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을걸. 네 외숙모가 매번 준혁이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애가 참하고 성실해. 손이 안 가는 아이라니까. 요즘 애들에 비하면 네
그녀의 상황은 진작에 진정국에게 얘기했는데 지금 연락이 왔다는 건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차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손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거길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차동수가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냥 밥 먹는 자리라고 괜찮다고 하셨어. 그쪽에서 너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나 봐. 네 상황을 얘기했는데도 괜찮다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더라.”“물론 네가 가고 싶지 않으면 내가 아저씨한테 잘 얘기할게.”차동수는 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차우미는 지금 거절하면 박물관 이미지에도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밥만 먹는 자리라고 했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갈게.”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조각사들의 집까지 차를 보냈다.차우미는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차에 올랐다.“우미 씨, 손 다쳤다던데 지금은 좀 어때?”박물관에서 일한지 가장 오래된 선배 박종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는 선배였고 차우미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지가 앉았으니 천천히 아물 거예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어디 봐봐.”박종웅은 핸드폰 불빛으로 그녀의 손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바닥 대부분이 화상으로 피딱지가 앉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박종욱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뼈는 괜찮아?”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뼈는 멀쩡해요.”“그럼 다행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뼈 다치면 귀찮아져. 최근에는 일도 하지 말고 상처 치료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물도 묻히지 말고. 피딱지가 떨어지면 괜찮을 거야.”“걱정 마세요. 저 괜찮아요.”“그래.”박종욱은 최근 그녀가 없는 사이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작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는 많이 밀려 있었고 주문 의뢰와 인터뷰, 복구 작업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차우
날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걸렸다. 환한 가로등 불빛과 별하늘이 어우러져 조용한 안평 도심도 번화 도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오두막은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교외의 명승지에 지어졌다. 고대의 왕궁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해마다 안평에 여행 오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었다.게다가 음식도 맛있다고 소문 나서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다녀간 뒤로 안평을 대표하는 명승지가 되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그들은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3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는 3년 전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그에게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나상준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그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가 살짝 아래로 드리웠다.주변의 형형색색의 복고풍 가로등과 그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차우미는 3년 전 그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밤이었고 이런 아련한 풍경이었던 것 같았다.“벌써 도착했어? 자,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다른 차를 타고 온 박물관 조각사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들은 전부 이 업계에서 최소 몇십 년을 일한 노장들이었다.담당자가 다가와서 조각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박종욱은 차우미가 멍 때리고 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미 씨,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뭐 해?”차우미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요.”비록 나상준이 무슨 이유로 여기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고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녀와 마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비서한테 연락 받았는데 그쪽에서 다 도착했다고 하더라고. 넌 어디야? 도착했어?”“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네.”수화기 너머로 자애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상준은 멀어지는 가녀린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도착했어요.”“정말? 내가 괜한 약속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바쁘면 억지로 자리 지킬 필요 없어. 언제든 돌아가도 돼. 다음에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아니에요. 이번 이벤트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 네가 공예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 네가 있으니 이번 이벤트 잘될 것 같아.”“문 앞이야? 내가 비서 내보낼게.”“아니요. 이미 들어왔어요.”“그래.”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은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진 복도 끝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담당자는 차우미 일행을 룸으로 안내했다.족히 스무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룸이었다.주최측 인원들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담당자가 진정국을 바라보며 소개했다.“이분은 하 교수님이십니다.”진정국은 곧바로 하 교수라는 노인에게 악수를 청했다.“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평 박물관 관장 진정국입니다. 하 교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반가워요. 다들 편하게 앉아요.”하 교수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70대 노인이었다.차우미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려는데 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저분이 박물관 최연소 여자 조각사인가 봐요?”오기 전에 이미 안평 박물관에 대해 조사를 끝냈기에 차우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진정국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친구의 외동딸인데 어려서부터 제 친구를 따라 목공예를 익혔죠. 타고난 재능이 남달라서 나이는 어려도 이 일을 몇십 년 동안 해온 선배들 못지 않아요.”말을 마친 진정국은 차우미를 향해 손짓했다.“우미야,
문은 반쯤 열려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문밖으로 쏠렸다.하지만 상대는 바로 들어오지 않고 조용히 허락을 기다렸다.차우미가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밖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이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지?’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차우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조금 전에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냥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와 마주친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나상준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청순한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하 교수에게 다가갔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왔다고 해서 바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좀 늦었네?”하 교수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나상준은 다가가서 하 교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 아저씨.”“마침 잘 왔어. 여기 앉아.”하 교수가 나상준에게 옆자리를 권했고 진정국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나상준에게 쏠려 있었다.다른 직원은 몰라도 진정국은 나상준을 기억하고 있었다.차우미가 결혼하던 날 식에 참석했었기에 그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나상준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는 흔치 않았다.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부류였다.태생이 큰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게 나상준이었다.그래서 차우미와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어쨌거나 진정국은 3년이 지난 오늘도 한눈에 나상준을 알아보았다.이 자리에 나온 다른 선배들도 3년 전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부는 보자마자 나상준을 알아봤다.사람들 모두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나상준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번갈아 보았다.여기 오기 전까지는 차우미가 이혼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선배들의 생각을 전혀 모르
어른의 말을 절대 끊는 법이 없는 나상준이었기에 하 교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나상준에게로 쏠리고 차우미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상준이 말했다.“저와 우미 결혼할 때 아저씨도 왔었잖아요.”차우미도 당황하고 자리에 있던 하 교수도 당황했다.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가관이었다.갑자기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상황이었다.차우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상준을 바라보았다.그녀의 기억에 결혼식에서 하 교수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하 교수는 차우미와 나상준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보자마자 마음에 들더라니 예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구나! 내가 요즘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해. 나도 늙은 거지….”하 교수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나상준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당신도 잊었어?”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칠흑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 뭐라도 말해야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의 질문에 뭔가 문제가 있는데 꼭 집어 뭐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이런, 우미도 작품에만 열중하느라 깜빡했나 보네. 이 얘기는 그만하고 이미 다 아는 사이이니까 소개는 생략하자. 앉아, 앉아.”하 교수의 말에 나상준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차우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지금 박종욱의 옆에 앉으려니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이혼한 사이인데 그와 옆자리에 앉고 싶지도 않았다.나상준은 마치 그들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그제야 차우미는 어디가 문제인지 깨달았다.그는 아직 대외적으로 그들이 이혼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것이다.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다시 나상준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외투를 벗어 종업원에게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분하고 대범한 표정으로 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
“우미가 다쳤어요.”나상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렸다.하 교수는 화들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 다쳤어? 심각해?”나상준은 담담한 얼굴로 간략해서 설명했다.“사람을 구하다가 손을 다쳤는데 지금은 아물고 있는 단계예요.”그 말로 박물관 사람들은 그들이 이혼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차우미가 왜 갑자기 돌아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상준이 그녀의 지금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건 둘이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차우미가 먼저 말하려고 했지만 나상준이 그녀보다 빨랐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떻게 내 현재 상황까지 세세하게 다 알고 있지?’“그랬구나. 정말 참하고 선량한 처자네.”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우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우미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을 잘 도와줬어요. 그래서 박물관 식구들도 다들 우미를 좋아해요.”“그래요. 말수는 적지만 가장 세심하고 부지런한 직원이죠.”“전에 진상 손님이 찾아온 적 있었는데 우미가 나서서 해결했어요.”“저렇게 얌전해 보여도 일할 때는 아주 결단력 있어요.”사람들의 칭찬에 차우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미지근한 성격과 반응이 느리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고치기 어려운 단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그런 특징은 오히려 단점이 아닌 배울 점으로 들렸다.나상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길쭉하고 하얀 손가락이 눈앞에 보이자 차우미는 잠깐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찻잔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오면서 분위기가 더 몽환적으로 보였다.오늘은 어쩐 일인지 자꾸만 옛날 일이 떠오르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나상준은 한 번도 이렇게 자상하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준 적 없었다.메뉴가 계속 올라오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차우미는 천천히 반찬을 음미하고 있었고 옆에 앉은
고기를 삼킨 뒤에도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지 찻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고기가 질겼나?’힘겹게 고기를 삼킨 뒤, 그녀는 접시에 반이나 남은 갈비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한 토막을 다 먹고 나면 더 이상 다른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안 먹으면 음식을 낭비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차우미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갈비로 젓가락을 가져갔다.그런데 이때, 옆자리에서 젓가락이 다가오더니 그녀가 먹다 만 갈비를 가져갔다.차우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상준은 조용히 갈비를 자신의 접시에 내려놓고 야채를 그녀의 접시에 담아주었다.차우미는 그의 접시에 담긴 자신이 먹다만 갈비찜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나상준을 보니 그는 평상시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만약 그가 냉담한 성격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주혜민을 담고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오늘 그가 보인 이상 행보는 아직 전처인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오해하기 충분했다.하지만 아닌 걸 알기에 그녀는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단지 오늘 밤 보여준 그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달랐기에 의아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다.차우미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계속해서 식사에 집중했다.그는 부지런히 반찬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날라주고 있었다.평소에도 그녀는 야채를 즐겨 먹었던 것 같았다.나상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워진 그녀의 접시를 보고 그녀의 음식 취향에 대해 대략 알 것 같았다.‘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그 뒤로 그는 그녀가 먹는 속도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 그녀에게 챙겨주었다.그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드디어 끝이 났다.“진 관장,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내일 직접 박물관에 한번 방문하겠네. 내일 가서 디테일한 부분을 의논하자고.”자리에서 일어선 하 교수가 진정국에게 말했다.진정국은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박물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온이샘은 차우미의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가 이제야 자기가 누군가와 싸웠다는 걸 믿어주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차우미는 자기의 질문이 어디가 잘못돼서 온이샘이 웃는지 생각하며 의아해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멍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사랑스러웠다.그가 싸웠다는 말에 이토록 진지한 표정을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온이샘은 그런 차우미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같은 반 친구를 도와야 해서 싸운 거야.”차우미는 입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선배도 싸울 줄 아네.”차우미의 눈에 온이샘은 아주 세련되고 우아하며 이성을 가지고 말로 사람을 설득하지 절대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온이샘은 차우미가 놀라는 모습을 즐기며 말했다.“왜, 놀랐어?”차우미가 고개를 저었다.“놀란 건 아니고 조금 의외여서. 나는 선배가 절대 싸움질 하는 사람 같지 않았거든.”온이샘이 웃었다.“그때는 어렸고 지금과는 상황도 다르잖아.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모두 뛰어갔고 게다가 상대가 모두 우리보다 커서 친구를 구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어.”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상황이었구나.”“그래, 상황이 상황인 것만큼 그런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온이샘의 설명을 듣고 차우미는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게다가 그때 당시 모두 나이가 어렸고 청소년이니 많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차우미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살피며 걸어갔다.“그다음은 어떻게 됐어?”온이샘은 차우미가 평정심을 회복하자 눈을 지그시 뜨고 뒤를 따랐는데 여전히 조금 전과 같이 팔을 벌려서 차우미를 보호하며 걸었다.“혈기 왕성했던 우리가 미세한 차이로 이겼어. 비록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기뻐하며 골목에 앉아 같이 웃었어. 우리가 도와준 친구의 이름이 유리였는데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골목길 맨 끝에서 아침 식사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거든. 유리는 우리를 거기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처리
차우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양쪽의 건물과 도로 표지판, 그리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을 구경하였고 온이샘은 예전에 이곳에 놀러 왔던 이야기들을 했다.그는 예전에 친구들과 같이 여기에 와서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차우미는 차 안에 있을 때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온이샘의 이야기를 들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무후문을 지나 조금 더 걷다가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골목거리는 매우 외진 곳이었는데 거의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양쪽에는 엄청나게 오래된 성벽이었는데 도색도 되지 않아 벽 모서리의 가장자리에는 이끼층이 선명하게 보였다.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것 같았는데 낮에는 괜찮아도 밤에 다니기에는 위험할 것 같았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약간 놀라고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여기에는 와 본 적이 없지?”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 아닌 것 같아.”발 아래 길은 청색 돌길이었는데 어젯밤에 내린 비에 돌판들이 아직도 젖어 있었다.골목길은 구불구불하고 좁아서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습했던 것이다.차우미는 넘어질까 봐 고개를 숙이고 길을 보며 조심조심 걸었다.이런 길에서는 미끄러져 넘어지기 쉽다.온이샘은 차우미가 걷는 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 여기는 아는 사람이 적어서 많이들 오지 않아. 여기 주변에 사는 사람과 나와 같은 극소수의 아는 사람들만 다니는 곳이야.”온이샘은 말하면서 슬그머니 차우미의 가까이로 가더니 그녀의 뒤에서 손을 벌리고 넘어지려고 할 때 바로 부축할 수 있게 준비했다.사실 온이샘은 어젯밤에 비가 내린 줄도 몰랐고 이 길이 이렇게 습해서 미끄러울 줄은 더더욱 몰랐다.그가 차우미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걸었던 길을 그녀와 함께 걷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온이샘도 도착해서 이렇게 미끄러운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차우미가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려고 신경을 썼다.차우미는 온이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
시간은 어느새 9시가 되어 태양이 점점 더 뜨거워졌는데 양산이 차우미의 머리 위를 가리는 순간 햇빛과 단절되어 약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이건 양산의 공로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온이샘의 공로였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는데 여름 바람이 살살 불면서 그의 몸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감쌌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괜찮아.”“그냥 해.”온이샘은 양산 손잡이를 꼭 잡고 차우미를 바라보았는데 새하얀 피부에 버들잎 같은 눈썹을 보자마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양산은 태양의 뜨거움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햇빛도 막아서 차우미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마저 잘 보였다.온이샘이 마음아파하며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왜?”차우미는 온이샘의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다크서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심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아.”차우미도 아침에 씻고 거울을 볼 때 봤었다.그녀는 밤에 늦게 자고 수면 시간이 짧기만 하면 다음 날에 곧바로 다크서클이 나왔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그나마 조금은 괜찮았었다.지금 컨디션도 좋고 졸리지도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온이샘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우미는 눈을 만지며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자서 그래. 혜지 씨가 관강동 별장에 예은이 데리러 왔는데 그때가 밤 10시였거든, 그리고 상준 씨와 얘기를 조금 하느라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어.”차우미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속이지 않고 온이샘에게 이야기했다.온이샘은 그녀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속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선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했다.온이샘의 눈에는 온통 차우미로 가득 찼다.“그럼, 아침 먹고 호텔로 데려다 줄 거니까 한잠 자. 점심때 되면 연락할 테니 같이 식사하고 오후에 안평으로 가자.”온이샘은 차우미의 일이 끝나서 이제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일 일이 없으니 마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조금 전에 호텔 앞에서 봤던 표정인데 그때는 햇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 안이어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순간 온이샘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조여왔는데 마치 뭔가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는데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차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선배, 여기서 일은 다 끝났어?”차우미는 아무것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듯 표정을 회복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조금 전의 표정이 보이지 않자 억지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말했다.“응, 어젯밤까지 다 처리했어.”온이샘은 정말 일했다는 것을 강조하듯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의 대답은 차우미가 미리 예상했었는데 그녀는 온이샘이 정말로 일이 있었고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그때 차우미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앞을 바라보며 웃었다.“선배, 우리 어디 가서 아침 먹는 거야?”온이샘은 차우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함을 들었다.그는 차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지만 별로 심각한 것 같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무후문으로 갈 건데 혹시 들어봤어?”차우미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거기가 옛날 건물들이 있는 곳이지?”온이샘은 차우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무후문은 청주에서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거리에 있는데 이 도시에서 3년 동안 생활한 차우미가 모를 리가 없었다.무후문은 소문이 많이 나서 청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반드시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외부에서 여행으로 잠깐 오는 사람들도 아는 곳을 청주에서 생활했던 차우미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하지만 온이샘은 자기가 지금 차우미를 데리고 가려는 그곳은 절대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주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온이샘이 흐뭇해하며 웃었다.“거기는 아침 먹기에 조금 불편해. 내가 지금 가려는 곳은 그 옆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