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하룻밤 인연, 약혼남의 형과 사랑에 빠지다: Chapter 361 - Chapter 370

1603 Chapters

제361화 민도준의 시중을 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권하윤이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기 바쁘게 옷을 갈아입은 고은지가 피팅룸에서 걸어 나왔다.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는 차갑고 도도한 그녀의 분위기를 더 극대화해 주었다.해당 스튜디오는 유명 브랜드의 한정판 취급하는 고급 스튜디오인지라 매 디자인당 한벌씩밖에 없다. 더욱이 점원이 고객별로 사이즈 수선까지 도맡아 하는 곳인지라 고은지 곁에는 사이즈 체크를 확인하는 점원이 따라붙었다.때마침 몸을 돌린 고은지는 눈앞에 나타난 권하윤을 보고 잠깐 놀란듯 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는 듯 점원에게 협조해 주었다.그리고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파악한 민시영이 권하윤을 끌고 다른 구석으로 걸어갔다.“하윤 씨, 이 옷 하윤 씨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은데 한번 입어보는 게 어때요?”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삼켜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이윽고 피팅룸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이내 거절했다.“아니에요.”“하긴, 이 색 너무 화려한 것 같네요.”두 사람이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점원이 양복 하나를 들고 수줍은 걸음으로 민도준 앞에 다가갔다.“고객님께서 선택한 양복 수선을 마쳤는데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그러지.”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큰 키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매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 때문에 어린 점원은 호흡이 흐트러져 멍하니 서 있었다.민도준은 아예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힐끗거리며 낮게 경고했다.“옷이 저절로 나한테로 날아 오기를 기다리나?”점원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듯 말을 더듬으며 거듭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됐어.”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제수씨? 나 좀 도와주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그도 그럴 것이, 남녀의 정을 따지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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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드레스 좀 골라 봐

수선을 거친 외투는 민도준의 몸에 딱 맞았다.평소 이렇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거의 입지 않는 민도준인지라 본래 지니고 있던 야생미가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 같은 분위기와 억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하지만 권하윤은 칭찬할 입장이 아니었고 고은지는 말수가 적은지라 결국은 옆에서 지켜보던 민시영이 입을 열었다.“오빠 진짜 멋있네.”거울에 비친 민도준은 뒤쪽을 흘깃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입바른 소리만 할 줄 안다니까.”“진심이거든. 그렇게 기분 좋으면 나랑 하윤 씨가 이따가 고른 옷도 오빠가 계산하던가.”“그래.”농담 섞인 민시영의 요구에 통쾌하게 대답한 민도준은 거울로 권하윤을 힐끗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제수씨가 나를 도와 넥타이까지 매줬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않겠어?”갑자기 호명 당한 권하윤은 흠칫 놀라 굳어버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쥐어 짜냈다.“별말씀을요.”말속에 담긴 내용은 어렵사리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그때 점원이 수선을 마친 드레스를 들고나오면서 고은지에게 다가갔다.“고객님, 입어 보세요. 또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바로 포장해 주세요.”고민도 걸치지 않고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점원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 그들의 대화에서 이 드레스가 곧 있을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라고 들었는데 이토록 경솔하게 결정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지가 결정한 일에 점원이 뭐라 할 수는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드레스를 넣은 가방을 고은지에게 건넸다.“도준 씨, 저 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래.”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권하윤과 민시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떠나버렸다.그리고 얼마 뒤, 민시영도 권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눈치껏 말을 꺼냈다.“저도 오후에 친구와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드레스 고르면 도준 오빠더러 계산하게 해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저녁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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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공씨 가문 가주가 온다는 데 싫어?

권하윤은 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민도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려우면서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는 그녀를 바라봤다.“왜? 공씨 가문 가주가 온다는 데 싫어?”마치 시험하는 듯 물어 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밀려오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싫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저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분이 오든 말든 제가 싫어할 게 뭐 있다고요.”“그래?”그녀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민도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피팅룸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그러면 갈아입어.”상대가 더 이상 시비를 걸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권하윤은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문을 잠갔다.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주말에 공태준이 온다고?’그렇다는 건 그녀에게 4일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 사이 그녀는 권미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고 도망치지 못하더라도 가족을 먼저 피신시켜야 했다.이윽고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머리를 정리하더니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피팅룸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나왔을 때 민도준은 밖에 없었다.“민 사장님께서 이미 계산을 마치고 떠나셨습니다. 이 옷은 어디 불편한 점이 있던가요?”대신 다가와 설명하는 점원의 말에 권하윤은 살짝 안도하며 시선을 거뒀다.“네, 허리가 조금 너른 것 같아요.”“네, 그러면 바로 수선해 드리겠습니다.”드레스 두 벌을 손에 든 채 쇼핑몰을 나온 권하윤은 차에 오르기 바쁘게 강수연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됐다.그녀는 오늘 저녁 고씨 가문을 초대했으니 집에 들르라는 당부를 함과 동시에 또 이것저것 생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너더러 우리 승현이 좀 돌보라고 했잖니.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쩜 애가 그리 무심한 거니? 만약 승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그녀의 잔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 보니 왠지 민도준이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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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사돈지간의 만남

식탁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심지어 민도준 외에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민씨 가문 사람들 앞이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도 있는 앞에서 그 가문의 어르신인 고창호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동은 그들에게 한없는 치욕을 안겨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그 때문에 고씨 집안사람들 주위에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러던 그때, 아직 사회의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고선재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하는 것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우리 고씨 가문이 지금껏 민씨 가문과 수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 단지에 제공해 준 기술이 얼마나 많은지는 누구나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에 반해 민도준은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다.“기술을 제공했다고? 이봐요, 고선재 씨. 본인 가문의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네.”“그게 무슨 뜻이죠?”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창호를 힐끗 바라봤다.“무슨 뜻이냐고? 고씨 가문의 칩 생산 기술과 발명들이 모두 우리 그 단명한 부모님한테서 훔친 거라고.”“어디서 그런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그건 분명 내 아버지가…….”“선제야.”고창호는 얼른 고선재를 막아서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당시 우리 진태가 자네 부모님과 대학 동기인 데다 친우였던 건 맞네. 더욱이 파트너 관계이기도 했었으니 고씨 가문 칩 생산 기술에 두 사람의 공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어찌 됐든 앞으로 같은 식구가 될 사이인데 네것 내것이 어디 있나? 우리 두 집안 것이지. 자, 상철 형님과 민 사장 자네한테 한잔 올리지.”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되살아났다.하지만 민도준이 끝까지 잔을 들지 않는 바람에 허공에 떠 있는 고창호의 손이 조금 뻘쭘하게 됐다.그 상황을 보고 있던 민상철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민도준, 어르신이 술을 권하는데 잔도 안 들고 뭐 하는 거야?”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민도준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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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민도준이 병을 고쳐주다

이미 수없이 받은 질문임에도 고은지는 여전히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잘 대해줘요. 오늘도 함께 드레스 고르러 갔었고요.”드레스라는 소리에 고창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지난 2년 간 고생한 보람은 있네. 이제 제대로 된 짝을 만났구나. 넌 내 손녀다. 내 곁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니. 네가 잘 해내고 있다니 내가 다 기쁘구나.”“네.”“할아버지가 걱정해 주시는데 그 태도는 뭐니?”그녀의 무뚝뚝한 태도에 언짢았는지 옆에 있던 고진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하지만 고창호는 오히려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이런 태도가 오히려 더 좋은 거지. 됐다. 나도 피곤하구나. 얼른 가서 주말에 있을 약혼 준비나 제대로 해 둬.”그 말에 고은지는 상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이윽고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을 밟으며 그림자처럼 사라졌다.-오늘 밤의 달빛은 유독 아름다웠지만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한 권하윤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욕실로 들어가 하루 종일 누적된 피곤함을 물로 씻어냈다.하지만 식사할 때 고창호와 민도준이 대치하던 장면을 떠올리자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솔직히 그녀는 일전에 고씨 가문이 칩 생산 기술로 유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민도준의 부모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보아하니 고씨 가문도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니네.’낮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닦던 권하윤은 거울 속 자기의 쇄골에 나 있는 빨간 자국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운을 당겨 자국을 가렸다.그녀와 민도준은 스튜디오에서 헤어지고 난 뒤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물론 공씨 가문 가주가 오니 제대로 준비하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걱정스러웠지만 연락하지 않은 덕에 그 대화를 피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자기 위로를 하며 밖으로 나온 그때, 갑자기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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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민도준의 도움

지난번 산에서 했을 때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었고 또 중간에 다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기껏해야 잠깐 맛본 축에 속했다.하지만 지금은 넓은 공간과 충족한 시간이 있었기에 흥이 났는지 민도준은 권하윤에게 낮에 입어봤던 야릇한 드레스를 입도록 달랬다.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 고생을 겪고 난 권하윤은 고급 드레스는 한 번만 입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민도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권하윤이 자지 않고 스탠드 등을 보며 멍을 때리는 모습이었다.“피곤하지 않아?”“피곤해요. 그것도 엄청.”지칠 대로 지친 권하윤은 그의 손을 피하며 낮게 중얼거렸다.“그런데 왜 안 자?”“저…….”커다란 손이 머리를 덮으며 상념으로 터질 듯 부푼 머리를 살살 문질러 주자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저 서원 여고를 폭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 학교 재학생과 졸업한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모르겠어요.”민도준이 이미 그녀가 진짜 권하윤이 아니라는 걸 안 마당에 더 이상 권씨 가문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역시나 그녀의 말을 들은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하윤 씨가 무슨 보살이라도 되는 줄 알아? 중생을 제도하게?”그의 비꼬는 어조에 마음이 상했는지 권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삐졌소 하는 듯 축 처진 작은 얼굴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코를 잡고 흔들었다.“왜? 말도 못 해?”그의 말에 권하윤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안타까워서 그러죠. 온갖 고생 끝에 겨우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나 했을 텐데 학교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2차 피해를 봐야 하잖아요.”“평온한 삶?”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하윤 씨 정말 왜 이렇게 귀엽지?”분명 칭찬 같은 한마디였지만 권하윤은 그의 입속에서 나온 귀엽다는 단어가 좋은 의미가 아닐 거라고 느껴졌다. 언제나 그녀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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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선물을 요구하다

“그래?”민도준은 다정한 손길로 권하윤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줬다.“그러면 뭘 하고 싶은데? 둘째 작은 사모님?”“가당치도 않네요. 다섯째 작은 사모님도 할 자격이 없는데 둘째 작은 사모님이라니요.”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허망한 듯 입꼬리를 끄집어 올렸다.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것도 모자라 이제 곧 권씨 가문과 함께 명예가 실추될 텐데. 안 그래? 하, 우리 제수씨 아주 자비가 없어.”웃을 듯 말 듯 한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하지만 권씨 가문 얘기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한 건 도준 씨가 고은지 씨랑 약혼한다는 걸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안다는 거죠.”“그렇네. 하마터면 그걸 잊을 뻔했군.”민도준은 권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했다.“나 곧 약혼하는데 선물 같은 거 없어?”“…… 뭘 원하는데요?”두 상의 눈이 갑자기 마주쳤다.분명 가까운 거리였지만 권하윤은 상대의 눈에서 그 어떤 정서도 읽어낼 수 없었다.아마도 그 속에 말려들어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자세하게 볼 엄두를 내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밀려오는 압박감에 권하윤이 점차 무너지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물건은 됐고 내 말 잘 들으면 선물 받은 거로 칠게.”갑자기 다정해진 목소리에 권하윤은 일순 말을 잃어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했다.“알았어요.”“착하네.”민도준은 마치 고양이의 털을 매만지듯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손가락으로 빗질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머리에 살짝씩 가해지는 힘에 노곤노곤해졌는지 권하윤의 눈꺼풀이 닫히려고 할 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살거렸다.“내 말 잘 듣겠다고 한 약속 잊지 마?”낮게 깔려 농담인 듯 경고 같은 그의 목소리에 권하윤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북을 쳤다.이윽고 민도준이 뒤에서 끌어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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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목적에 도달한 권하윤은 숨을 죽인 채 권효은이 비밀을 얘기하길 기다렸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권효은은 그저 오후에 신입생들의 교외 확장 활동이 있으니 제국 호텔에 오라는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스틱스는 경성 권세가들의 비밀의 섬이라면 제국 호텔은 경성 재벌가들의 화원이나 다름없다.재벌들의 대부분 파티가 그곳에서 열리며 수많은 재벌녀와 연예인을 볼 수 있는 곳.호텔에 도착한 권하윤이 문앞에 차를 대고 한참을 기다리자 승합차 한대가 나타났다.차에서 내린 여자애들은 모두 외모가 출중한 데다 호텔 로비를 걸어 들어갈 때 예의를 갖췄지만 눈에 드리운 흥분은 쉽게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그중 두 여자애는 눈에 띄게 침착해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권하윤은 이내 그 둘이 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3년이 되는 애들이라는 걸 알아챘다.이름은 각각 임주빈과 최설아였다.이번 행사도 두 사람이 앞장서서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메이크업룸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여자애들이 능숙하게 화장하고 드레스를 고르는 모습을 본 권하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장을 마친 그녀들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치맛자락을 든 채 숙녀의 걸음걸이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사실 일전에 권효은은 권하윤에게 전화해 연회장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해두었다.아니나 다를까 권하윤과 여학생들이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주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권하윤과 함께 온 여자애들은 파티의 규모에 놀랐는지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저 여자 그 유명한 배우 리나 아니야?”“와, 진짜네. 실물이 훨씬 낫네.”“야, 저기 봐. 저 사람 어느 유명 플랫폼 창시자 아니야?”“맞아. 대박, 여기에서 실물을 영접하다니.”재잘거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두 선배의 표정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특히 임주빈은 줄곧 냉소를 짓고 있다가 옆에 있는 최설아가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표정을 숨겼다.그때, 최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다른 여학생들에게 명령했다.“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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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방어선이 무너지다

연회가 후반부에 이르자 여자애는 당연하다는 듯 외톨이가 되어버렸다.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까지 했다.떠들썩한 연회장에서 그녀는 이방인이라도 되는 듯 따돌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물 만난 고개처럼 누비고 다니는 동기들과 달리 그녀는 관대처럼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의 무시를 당했다.더욱이 그녀가 오늘 보여준 행동들은 앞으로 그녀의 입학 자격까지 박탈하고 인생까지 망칠지도 몰랐다.이윽고 그녀는 아까 자기가 너무 심했나 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주최자의 태도로 정 대표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노골적인 신체접촉을 해왔었다.분명 상대가 잘못한 상황인데 모든 죄가 자기한테 씌워지자 여자애는 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손에 파묻은 채 눈물을 터뜨렸다.그 시각, 연회장 한구석에 앉아 있던 권효은은 그녀의 변화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이젠 고분고분해질 것 같네.”“언니도 참 대단하네요.”그 옆에서 여자애의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본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지만 최대한 언짢은 기색을 숨기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러던 그때, 여자애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목을 한껏 움츠리며 쭈뼛쭈뼛 권효은 앞에 다가왔다.“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파티를 망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까는 제가…….”“됐어. 내가 이미 너를 대신해 정 대표한테 사과 전화를 드렸으니 이따가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다시 모셔 와. 이번이 처음이니까 성적에는 넣지 않으마.”권효은의 말은 사형선고를 받은 여자애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윽고 여자애는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무조건 제대로 사과드릴게요.”여자애는 치맛자락을 들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위층 휴게실로 올라갔다.분명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었지만 영혼은 점점 나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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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불치병을 치료하다

민도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애원했다.“권효은도 이젠 저 믿고 있어요. 이제 곧 증거도 수집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시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돼요? 네?”“좋아. 경성에서 해원까지 이틀 정도 걸리는데 그 시간을 잘 이용해 봐.”점점 기어오르는 권하윤은 한 방 먹이고 난 민도준은 그제야 흥미로운 듯 실험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내 통화 다들 잘 엿들었나? 이제 내가 당신들 의견 들어볼 차례지?”그는 분명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난기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직원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이에 민도준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전에 제품 품목 책임진 사람이 누구지?”“저요.”물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제품 매니저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전에 여기에서 가장 돈 되는 제품이 뭐였지?”“제품의 좋고 나쁨은 다방면으로 판단해야지 하고 수입도 단기 수익인지 장기 수익인지 브랜드 수익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시장에 유입된 뒤의 데이터도 비교해야 최종 결론을 얻을 수 있기에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이미 따로 명령을 받은 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아직 과학기술 단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는 것만 믿고 말을 빙빙 에둘렀다.하지만 민도준이 볼 때 그 말들은 그저 하등 쓸모없는 헛소리뿐이었다. 이에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복잡하면 계산하지 마.”대화가 너무 잘 통하자 제품 매니저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내뱉기도 전에 민도준이 턱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집에 가서 당신 아들 수학 숙제나 봐줘.”“민 사장님, 그게 무슨…….”“무슨 뜻이냐고? 짐 싸서 꺼지라고.”제품 매니저는 민도준이 낙하산으로 회사에 출근한 첫날부터 자기와 같은 고참 직원을 해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다른 매니저들에게 눈빛을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적으로 얘기가 오간 다른 매니저들은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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