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모두 다 전생과 같아.”‘전연우, 드디어 싫증이 났구나.’그녀는 이제 전연우가 그녀를 남원 별장에서 쫓아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전연우의 관계는 그때가 되어야만 완전히 끝난다.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살아야 한다.동영상 속, 전연우는 파티장 전체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그의 지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가 없다.심지어 예전 강씨 집안까지도 훨씬 뛰어넘었다.이럴수록 장소월은 그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더 선명히 떠올랐다.강씨 가문 사람들의 시체를 밟고, 한 계단 한 계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전연우...이게 네가 원했던 거야?금빛 햇살이 화실 창문 앞 장소월의 몸에 떨어졌다. 그녀의 피부는 마치 빛을 투과하기라도 하는 듯 하얗고 투명했다. 따뜻한 온실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도우미가 위층으로 올라왔다.“사모님, 저녁 식사 하세요.”“알겠어요.”전연우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장소월을 보는 도우미의 시선에 연민의 감정이 더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장소월을 그에게 버려진 가엾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여 장소월을 마주할 때마다 행여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행동에 신중을 기했다.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그들의 사모님의 성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심지어 대표님이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장소월은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텅 빈 거실을 마주한 채 아이와 함께 쓸쓸하게 밥을 먹었다.옆에선 은경애가 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장소월은 고전 신화 전설에 관한 자료를 펼쳐보았다.최근 사부님의 작업실에서 또 대형 게임 디자인 의뢰를 받았는데 그 배경이 신화라 장소월에게도 크나큰 도전이 되었다.전에는 단 한 번도 이에 관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전연우가 없으니 장소월은 이상하게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별장 구석구석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
전연우는 이마를 찌푸리고 조수석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고는 송시아의 질문엔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은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잠그지 않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현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밥상에 앉아 졸고 있던 은경애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어머나... 대표님?”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정장을 대충 옷걸이에 걸어놓았다.“소월이는요?”“아가씨께선 급한 작업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야식을 만들어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깜빡 잠들어버렸네요.”불현듯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아이고, 내 갈비탕.”은경애가 갈비탕을 들고 고개를 돌렸을 땐, 거실은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장소월은 하품을 하며 별이의 방에서 나오던 순간,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남자와 마주쳤다.장소월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몇 초간 쳐다보다가 차분히 시선을 피하고 몸을 돌렸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몸에 깃든 익숙한 향기를 그녀에게 보내왔다.송시아가 자주 사용하는 샤넬 향수였다.장소월이 그를 쳐다본 순간, 그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 그의 마음을 찢어발겼다.전연우는 장사꾼이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장사꾼은 없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장소월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거리는 낯선 사이와 다름없다.은경애가 갈비탕을 갖고 올라오자 전연우는 직접 받아들고 장소월의 옆에 놓아주었다. 하여 그녀가 그림판을 내려놓으려던 자리가 점령당했다.전연우가 자연스럽게 그림판을 받으며 말했다.“그림은 천천히 그려도 돼. 일단 먹어. 먹고 좀 쉬어.”장소월은 그와 말조차 섞지 않았고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전연우는 그림판을 내려놓고 창가에 가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조용히 갈비탕을 먹고 있는 그녀를 지긋이 지켜보았다.입에서 뱉어낸 연기는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사라졌다.본래 가장 익숙하고, 침대에서도 최고의 속궁합을 맞추던 그들 사이에 숨
고급스러운 검은색 박스 안,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가 누워있었다. 반지는 520개의 다이아몬드 조각을 정교하게 이어붙여 만들었는데 한 단계 한 단계 세심하기 그지없는 기술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크거나 작으면 반지 전체가 무너지고 부서지기 때문이었다.이 붉은색 보석은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것이었다.그 가치는 6천억 원에 달했다.장소월이 잠들지 못해 몽롱한 정신으로 뒤척이고 있을 때, 침대 옆쪽이 밑으로 쭉 꺼져내려갔다. 손이 누군가의 손에 살포시 끌려가더니 이어 무명지에 차가운 온도의 무언가가 느껴졌다.눈을 떠보니 전연우는 어느새 무명지에 붉은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순간 정신이 든 그녀는 곧바로 손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뭐 하는 거야?”그녀는 무명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빼내려 했다.전연우는 묵묵히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피곤함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청혼...”장소월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전연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인시윤의 결혼은 마무리됐어. 내일 외부에 공표할 거야.”장소월은 몇 번 시도했으나 마음처럼 반지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그녀는 베개를 잡아 그의 얼굴에 던져버렸다.“전연우, 너 정말 미쳤구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넌 인씨 집안을 이용했고, 인시윤을 죽이기까지 했어.”“그럼 난? 난 어떻게 이용해 먹을 생각이야? 지금 내 모든 것은 이미 네 것이 됐잖아. 장해진도 죽었고, 남천 그룹도 손에 넣었어. 대체 왜... 왜...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전연우는 손을 뻗어 흥분하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장소월의 병은 아직도 채 낫지 않았다.전연우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장해진의 죽음은 나와 관련 없고, 난 남천 그룹에 손대지 않았어. 그냥 네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남천 그룹을 관리만 하고 있을 뿐이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난 싫어... 그런 건 필요 없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대표님.”전연우는 문 쪽을 힐끗 보고는 아직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는 장소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나 일 처리하러 가야 해. 금방 돌아올 거야.”전연우가 몸을 일으키자 장소월은 베개를 들어 그의 등에 던져버렸다. 전연우는 등에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에겐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충격이었다.베개가 떨어지자 전연우는 뒤돌아 주워올린 뒤 툭툭 털고는 그녀의 등 뒤에 다시 놓아두었다. 장소월은 일부러 그와 맞서기라도 하는 듯 새빨갛게 핏줄이 선 눈으로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난 너랑 결혼 안 해. 절대 안 해!”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착하지, 응?”전연우는 방에서 나간 뒤 잊지 않고 문을 닫았다. 복도는 방음이 좋지 않아 경호원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경호원이 보고했다.“어떤 놈이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전연우의 음산한 눈빛에선 조금 전의 그 따뜻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어디 있어?”“아래에 있습니다. 대표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아래층엔 기자가 바닥에 짓눌러져 있었는데, 그 옆엔 고가의 카메라가 놓여있었다.“이거 놔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경고하는데 나랑 같이 있던 사람이 당신들 신고했어요. 날 보내주지 않으면 다 감옥에 처넣을 거예요.”전연우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신고하려면 해봐.”그가 고대 군왕 같은 장엄한 기세를 내뿜으며 정장을 입고 느릿하게 내려왔다.기자는 전연우를 본 순간 겁에 질려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장씨 가문의 입양아였던 전연우, 그리고 성세 그룹 대표님인 지금의 전연우... 그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장씨 가문의 개에서 시작해, 이젠 한 손으로 서울 하늘도 가릴 수 있는 거물이 되었다.전연우를 눈으로 직접 본 순간, 기자는 곧바로 겁을 먹었다.“대...
이렇듯 악랄한 날씨에 두 다리까지 잃어 기어갔다면 길에서 요절했을지도 모른다. 인적 드문 외딴곳에 있는 이 별장 구역을 벗어나려면 어두운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그러다 혹시 들짐승이라도 만나면 뼈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다.전연우는 정말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그는 아직도 다리 뒤편이 욱신거렸다. 경호원이 얼마나 힘주어 눌렀는지 알 수 있었다.전연우는 아래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냄새를 모두 없앤 뒤에야 위로 올라갔다.3층 복도 끝, 장소월의 얇은 몸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장소월이 물었다.“대체 언제면 사람을 해치지 않을래?”“분명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꼭 손을 잘라야만 했어?”장소월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가득 담긴 냉기 그리고 실망감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가 설명했다.“처음이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이야.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한테도 경고한 거야. 무사히 돌려보냈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여길 기웃거렸을 거야.”전연우가 이곳의 경계를 강화한 이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너랑 장해진은 똑같아. 죽을 때까지 손에 묻은 그 피 씻어내지 못할 거야. 넌 항상 그랬어. 절대 바뀌지 않아.”장소월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고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전연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새벽 3시, 하늘에서 조용히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전연우는 창가에 서서 소복이 내려앉고 있는 하얀 눈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또 1년이 지났다.그날 밤, 전연우는 서재에서 이불을 깔고 눈을 붙였다.남원 별장에 돌아와 그녀와 함께 자지 않은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장소월 역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에 돌아간 뒤 반지를 빼내려 갖은 방법을 사용했다. 가는 손가락 주위는 발갛게 부어올라 통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바디 워시, 샴푸 등 미끌
“나...”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운 것 같은 새빨간 그녀의 눈을 본 서철용은 곧바로 마음이 녹아내렸다.“소월 씨가 아프대. 수술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내가 가봐야 해.”배은란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이번엔 나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게. 난 철용 씨 곁에만 있으면 되거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나랑 아기 곁에 있어 줘. 응?”아파트 주차장 안, 서철용이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나한테 꼭 붙어있어야 해. 사람들을 봐도 긴장하거나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너한테 아무 짓 안 해.”“알겠어. 걱정하지 마. 사고 안 칠게.”배은란은 드디어 그와 함께 간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다.어젯밤 폭설이 내렸던지라 서철용은 그녀가 추워할까 봐 차에 히터를 따뜻하게 틀어주고는 목수건을 정리해주었다.“불편하면 바로 나한테 말해.”“응.”서철용은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본 순간, 잠시 마음이 저릿해졌다.차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어젯밤 내렸던 도로 위 눈은 이미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남원 별장에서 차가 멈춰서자 배은란이 먼저 서철용의 손을 잡았다. 서철용이 힐끗 쳐다보니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했다.“미끄러울까 봐.”도우미가 의료 상자를 받아들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미끄러우니까 조심해. 넘어지면 안 돼.”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진찰을 마치자 배은란이 그의 청진기를 의료 상자에 넣었다.서철용이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전연우에게 입을 열었다.“심각한 건 아니고 열이 좀 높아. 해열제를 놓았으니까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서철용은 조금 전 그녀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보았다. 이렇게나 빨리 손에 넣었다니.전연우와 같은 사람은 낭만이라는 걸 몰라 절대 장소월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서철용이 배은란에게 말했다.“아래로 내려가서 잠깐 나 기다려줄래. 심심하면 마당에서 산책해도 돼.”“
배은란이 한 입 삼키고는 말했다.“맛있네. 잠시만, 내가 레시피 물어보고 올게.”“그럼 우리도 직접 해먹을 수 있잖아.”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30분 뒤, 장소월은 깨어나 전연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병이 나 성격이 더 까칠해졌다.베개가 날아가 전연우의 얼굴을 가격할 때 서재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서철용이 말했다.“이제 괜찮아진 것 같네.”장소월과 서철용의 관계는 친구라 할 수 없었다. 그를 대하는 장소월의 태도는 늘 그래왔듯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그의 옆에 임신한 여자가 있는 걸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전연우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베개를 맞았는지 모른다.서철용도 더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배은란과 함께 방을 나섰다.전연우가 뜨거운 물을 잔에 부었다.“약 먹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와. 너 아직 몸 안 좋아. 작업 완성하고 싶으면 성세 그룹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 명 데려와서 시킬게.”“네 입으로 말한 거야. 약 먹으면 침대에서 내려갈 수 있다고.”“응. 약속해.”장소월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약을 잡아 입안에 넣고 물로 꿀꺽 삼켜버렸다.다음 그녀의 행동을 알고 이미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양말을 신겨주었다.“집에 가만히 있었는데도 병이 나다니. 널 어떻게 하면 좋니.”그녀에게 한 겹 또 한 겹 옷을 입혔다.“이러다 더워 죽겠어.”“말 안 들으면 아무 데도 못 가.”장소월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폭군, 미친놈, 양아치.”“한 번 앓고 나니 입이 사나워졌네? 어떤 폭군이 너한테 이렇게 양말 신겨주고 옷 입혀준대? 양심도 없어.”또 한 겹의 베이지색 실모자가 그녀 머리 위에 씌워졌다. 며칠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은 꽤나 많이 자라있었다.조금 전 전연우는 이미 도우미에게 최대한 창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했었다.남원 별장 마당, 서철용은 도우미에게 담요 하나를 부탁해 배은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
훔쳐 온 감정은 종래로 오래 가는 법이 없다.그 이치는 서철용 또한 잘 알고 있었다.배은란에게 있어 서철용은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그 위치는 늘 서민용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서민용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최면은 심신이 약해진 시간 일시적으로 효과를 본 것이다. 그녀가 결심하고 조작된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서민용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찾기만 한다면 바로 기억을 회복할 것이다.지금 그녀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지고 끊어져 있다. 어떤 기억은 문득문득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서민용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그날 다시 깨어난 이후로 배은란은 다시는 서민용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서철용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자신이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배은란이 곁에 있기를 원하면서도 그녀와 접촉하기를 무서워했다. 자아 모순에 빠져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임신 불안증 때문에 그래.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내가 최대한 프로젝트 시기를 뒤로 미뤄두고 집에서 같이 있어 줄게. 응?”서철용은 그녀의 손을 손바닥에 감싸고 입김을 호 불어 따뜻하게 해 주었다.“당신이 함께 있어 준다니까 너무 좋아.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 일 방해받는 거 싫어.”배은란이 진심 어린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서철용은 그녀의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괜찮아. 요즘 별로 안 바빠.”서철용도 이번 기회를 빌려 배은란을 데리고 나와 바깥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이러다 바빠지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 말이다.다른 사람의 집에서 밥을 먹는 건 배은란에게 있어 이번이 처음이었다.서철용과 전연우의 대화 주제는 모두 사업이라 장소월은 전혀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약을 먹었던지라 온몸이 뜨거워지고 열이 나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장소월이 고기 한 점을 집으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