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대표님.”전연우는 문 쪽을 힐끗 보고는 아직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는 장소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나 일 처리하러 가야 해. 금방 돌아올 거야.”전연우가 몸을 일으키자 장소월은 베개를 들어 그의 등에 던져버렸다. 전연우는 등에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에겐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충격이었다.베개가 떨어지자 전연우는 뒤돌아 주워올린 뒤 툭툭 털고는 그녀의 등 뒤에 다시 놓아두었다. 장소월은 일부러 그와 맞서기라도 하는 듯 새빨갛게 핏줄이 선 눈으로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난 너랑 결혼 안 해. 절대 안 해!”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착하지, 응?”전연우는 방에서 나간 뒤 잊지 않고 문을 닫았다. 복도는 방음이 좋지 않아 경호원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경호원이 보고했다.“어떤 놈이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전연우의 음산한 눈빛에선 조금 전의 그 따뜻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어디 있어?”“아래에 있습니다. 대표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아래층엔 기자가 바닥에 짓눌러져 있었는데, 그 옆엔 고가의 카메라가 놓여있었다.“이거 놔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경고하는데 나랑 같이 있던 사람이 당신들 신고했어요. 날 보내주지 않으면 다 감옥에 처넣을 거예요.”전연우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신고하려면 해봐.”그가 고대 군왕 같은 장엄한 기세를 내뿜으며 정장을 입고 느릿하게 내려왔다.기자는 전연우를 본 순간 겁에 질려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장씨 가문의 입양아였던 전연우, 그리고 성세 그룹 대표님인 지금의 전연우... 그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장씨 가문의 개에서 시작해, 이젠 한 손으로 서울 하늘도 가릴 수 있는 거물이 되었다.전연우를 눈으로 직접 본 순간, 기자는 곧바로 겁을 먹었다.“대...
이렇듯 악랄한 날씨에 두 다리까지 잃어 기어갔다면 길에서 요절했을지도 모른다. 인적 드문 외딴곳에 있는 이 별장 구역을 벗어나려면 어두운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그러다 혹시 들짐승이라도 만나면 뼈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다.전연우는 정말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그는 아직도 다리 뒤편이 욱신거렸다. 경호원이 얼마나 힘주어 눌렀는지 알 수 있었다.전연우는 아래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냄새를 모두 없앤 뒤에야 위로 올라갔다.3층 복도 끝, 장소월의 얇은 몸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장소월이 물었다.“대체 언제면 사람을 해치지 않을래?”“분명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꼭 손을 잘라야만 했어?”장소월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가득 담긴 냉기 그리고 실망감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가 설명했다.“처음이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이야.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한테도 경고한 거야. 무사히 돌려보냈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여길 기웃거렸을 거야.”전연우가 이곳의 경계를 강화한 이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너랑 장해진은 똑같아. 죽을 때까지 손에 묻은 그 피 씻어내지 못할 거야. 넌 항상 그랬어. 절대 바뀌지 않아.”장소월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고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전연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새벽 3시, 하늘에서 조용히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전연우는 창가에 서서 소복이 내려앉고 있는 하얀 눈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또 1년이 지났다.그날 밤, 전연우는 서재에서 이불을 깔고 눈을 붙였다.남원 별장에 돌아와 그녀와 함께 자지 않은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장소월 역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에 돌아간 뒤 반지를 빼내려 갖은 방법을 사용했다. 가는 손가락 주위는 발갛게 부어올라 통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바디 워시, 샴푸 등 미끌
“나...”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운 것 같은 새빨간 그녀의 눈을 본 서철용은 곧바로 마음이 녹아내렸다.“소월 씨가 아프대. 수술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내가 가봐야 해.”배은란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이번엔 나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게. 난 철용 씨 곁에만 있으면 되거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나랑 아기 곁에 있어 줘. 응?”아파트 주차장 안, 서철용이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나한테 꼭 붙어있어야 해. 사람들을 봐도 긴장하거나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너한테 아무 짓 안 해.”“알겠어. 걱정하지 마. 사고 안 칠게.”배은란은 드디어 그와 함께 간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다.어젯밤 폭설이 내렸던지라 서철용은 그녀가 추워할까 봐 차에 히터를 따뜻하게 틀어주고는 목수건을 정리해주었다.“불편하면 바로 나한테 말해.”“응.”서철용은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본 순간, 잠시 마음이 저릿해졌다.차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어젯밤 내렸던 도로 위 눈은 이미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남원 별장에서 차가 멈춰서자 배은란이 먼저 서철용의 손을 잡았다. 서철용이 힐끗 쳐다보니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했다.“미끄러울까 봐.”도우미가 의료 상자를 받아들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미끄러우니까 조심해. 넘어지면 안 돼.”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진찰을 마치자 배은란이 그의 청진기를 의료 상자에 넣었다.서철용이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전연우에게 입을 열었다.“심각한 건 아니고 열이 좀 높아. 해열제를 놓았으니까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서철용은 조금 전 그녀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보았다. 이렇게나 빨리 손에 넣었다니.전연우와 같은 사람은 낭만이라는 걸 몰라 절대 장소월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서철용이 배은란에게 말했다.“아래로 내려가서 잠깐 나 기다려줄래. 심심하면 마당에서 산책해도 돼.”“
배은란이 한 입 삼키고는 말했다.“맛있네. 잠시만, 내가 레시피 물어보고 올게.”“그럼 우리도 직접 해먹을 수 있잖아.”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30분 뒤, 장소월은 깨어나 전연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병이 나 성격이 더 까칠해졌다.베개가 날아가 전연우의 얼굴을 가격할 때 서재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서철용이 말했다.“이제 괜찮아진 것 같네.”장소월과 서철용의 관계는 친구라 할 수 없었다. 그를 대하는 장소월의 태도는 늘 그래왔듯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그의 옆에 임신한 여자가 있는 걸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전연우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베개를 맞았는지 모른다.서철용도 더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배은란과 함께 방을 나섰다.전연우가 뜨거운 물을 잔에 부었다.“약 먹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와. 너 아직 몸 안 좋아. 작업 완성하고 싶으면 성세 그룹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 명 데려와서 시킬게.”“네 입으로 말한 거야. 약 먹으면 침대에서 내려갈 수 있다고.”“응. 약속해.”장소월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약을 잡아 입안에 넣고 물로 꿀꺽 삼켜버렸다.다음 그녀의 행동을 알고 이미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양말을 신겨주었다.“집에 가만히 있었는데도 병이 나다니. 널 어떻게 하면 좋니.”그녀에게 한 겹 또 한 겹 옷을 입혔다.“이러다 더워 죽겠어.”“말 안 들으면 아무 데도 못 가.”장소월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폭군, 미친놈, 양아치.”“한 번 앓고 나니 입이 사나워졌네? 어떤 폭군이 너한테 이렇게 양말 신겨주고 옷 입혀준대? 양심도 없어.”또 한 겹의 베이지색 실모자가 그녀 머리 위에 씌워졌다. 며칠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은 꽤나 많이 자라있었다.조금 전 전연우는 이미 도우미에게 최대한 창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했었다.남원 별장 마당, 서철용은 도우미에게 담요 하나를 부탁해 배은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
훔쳐 온 감정은 종래로 오래 가는 법이 없다.그 이치는 서철용 또한 잘 알고 있었다.배은란에게 있어 서철용은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그 위치는 늘 서민용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서민용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최면은 심신이 약해진 시간 일시적으로 효과를 본 것이다. 그녀가 결심하고 조작된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서민용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찾기만 한다면 바로 기억을 회복할 것이다.지금 그녀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지고 끊어져 있다. 어떤 기억은 문득문득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서민용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그날 다시 깨어난 이후로 배은란은 다시는 서민용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서철용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자신이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배은란이 곁에 있기를 원하면서도 그녀와 접촉하기를 무서워했다. 자아 모순에 빠져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임신 불안증 때문에 그래.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내가 최대한 프로젝트 시기를 뒤로 미뤄두고 집에서 같이 있어 줄게. 응?”서철용은 그녀의 손을 손바닥에 감싸고 입김을 호 불어 따뜻하게 해 주었다.“당신이 함께 있어 준다니까 너무 좋아.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 일 방해받는 거 싫어.”배은란이 진심 어린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서철용은 그녀의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괜찮아. 요즘 별로 안 바빠.”서철용도 이번 기회를 빌려 배은란을 데리고 나와 바깥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이러다 바빠지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 말이다.다른 사람의 집에서 밥을 먹는 건 배은란에게 있어 이번이 처음이었다.서철용과 전연우의 대화 주제는 모두 사업이라 장소월은 전혀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약을 먹었던지라 온몸이 뜨거워지고 열이 나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장소월이 고기 한 점을 집으
“고... 고마워요. 저도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장소월은 3층 창가에 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철용 옆에 있는 임신한 여자를 어딘가에서 본 듯 낯이 익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서철용이 이렇게까지 꽁꽁 숨겼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니...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본 서철용의 그녀에 대한 감정은 분명 가짜가 아니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서철용은 전연우와 연합해 그녀에게서 엄마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람이다. 이제 오해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간단히 사과 한마디 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전연우와 함께 독거노인으로 외롭게 살다 죽어야 하거늘.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전연우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몸이 많이 회복된 것 같네. 이제 며칠 동안 나한테 빚졌던 거 갚아야 하지 않겠어?”“내가 빚졌다고? 전연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난 너한테 빚진 거 없어. 오히려 네가 나한테 빚졌지!”얌전히 있다가 또 불같이 화를 내는 장소월이었다.전연우는 이미 오랫동안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대다수 깊은 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정말 중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그녀가 침실에서 나가는 것을 본 전연우가 쫓아가려던 순간,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문밖에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전화를 귀에 가져간 채 서재로 들어갔다.“말해.”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상대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전... 전 대표님, 기사 내용은 이미 대표님 말씀대로 작성해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한 시간 뒤면 신문에서 기사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핸드폰 기성은한테 줘.”기성은이 전화를 받았다.“대표님.”“두 시간 뒤 기자회견 할 거라고 공표해.”“네.”전화를 끊은 뒤 전연우는 옷을 갈아입고 장소월의 화장대 밑 서랍에서 명품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떠나기 전 그는 화실에서 바삐 작업을 하고
순식간에 모든 플래시가 전연우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히 회의장으로 걸어 들어가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았다. 송시아는 성세 그룹 부대표의 자격으로 전연우의 오른쪽에 앉았다.전연우의 등장은 회의장 전체를 흥분으로 들끓게 만들었다.기자들마다 오늘 아침 갓 인쇄된 신문지를 들고 있었다. 전연우가 앉자마자 기자들이 물었다.“대표님, 오늘 기사 내용 사실인가요? 정말 인하 그룹과의 혼사를 깨신 건가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제 인하 그룹은 협력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전연우가 의연히 대답했다.“저와 인시윤 씨의 이혼은 인하 그룹과의 협력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두 회사의 사업 영역이 확연히 다른 만큼 저희의 협력은 계속될 겁니다.”“그렇다면 대표님과 인시윤 씨 사이 감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요?”기성은이 기자의 말을 끊었다.“대표님의 사생활에 관한 일은 묻지 말아 주세요. 이번 기자회견에선 회사 운영에 관한 질문만 받겠습니다.”기자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인터넷엔 이런 루머도 떠돌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인시윤 씨와 이혼하시는 이유는 4년 동안 숨겨둔 정인 때문이라고요. 그분은 4년 전 프랑스에서 유학하다가 몇 개월 전에 돌아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얼마 전 그 여자분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여자분과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이혼 발표하시는 거 아닌가요?”송시아가 가소롭다는 듯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전연우가 장소월을 언제까지 보호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던 전생처럼 이번 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장소월... 인생을 두 번이나 살았음에도 넌 발전이라는 게 없구나. 전연우를 제외하면 너한테 남는 게 대체 뭐야?’그 말에 밑에 앉아있던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카메라맨들은 서울의 지배자의 반응을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에게 카메라를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기자회견은
전연우가 여기자 목에 걸려있는 기자증을 돌려보았다. 위엔 인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언제부터 엔조이 미디어에서 인턴 기자를 성세 그룹 기자회견장에 보냈죠?”하지만 상대방은 전연우가 전혀 무섭지 않은 듯 그의 손에서 기자증을 휙 잡아당겼다.“전 대표님, 인턴 기자는 참석할 자격 없나요? 아니면 제가 한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람들 앞에서 절 협박하는 건가요?”그때 기자회견 총괄 매니저가 다급히 일어나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신입 기자라 잘 몰라서 이러는 겁니다. 제가 얼른 내보내겠습니다.”경호원이 나서려 하자 전연우가 손을 들어서 막아 세웠다.“난 성세 그룹 모든 임원이 한 일에 착오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요.”감히 허락도 없이 성세 그룹에 들어온 기자는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내가 말하면 보도할 거예요?”미모가 꽤 수려한 기자가 아래턱을 치켜들고 말했다.“못할 것 없죠. 기자란 원래 듣고 본 일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보도해 사람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사람이잖아요.”기성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고했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연우와 맞섰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그 사람과 나 사이에 아기 있다는 거 맞아요. 사생활에 관한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그 사람의 생활에 영향 주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무대 위에 앉아있는 송시아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질투가 가득 일렁이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그가 인정하고 말았다!“두 집안의 혼인은 그저 각자의 이익만 위해서일 뿐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지 않았으니, 이혼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어요. 지금의 성세 그룹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니...”전연우가 바쁜 일이 있는 듯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이혼 위자료로 저희 성세 그룹 100분 1의 주식을 인하 그룹에게 제공하겠습니다.”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100분의 1이라고?성세 그룹의 주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