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 그룹은 적잖은 산하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증권, 부동산, 게임 등을 제외한 대부분 회사들은 모두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다. 신이랑이 성세 그룹 산하 소설 플랫폼 회사에 들어올 거라는 건 직원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라인 시리즈라는 이름의 소설 플랫폼은 성세 그룹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 분리해 나온 회사다. 대표님이 그런 선택을 한 건 분명 사모님 때문일 것이다.얼마 전 풍신 작가의 사인회에 사모님이 신이랑을 만나러 직접 걸음 했다는 소문도 돌더니, 이젠 풍신 작가 본인이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세상에... 대표님은 사모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렇게 전례 없는 결정까지 하셨다.정말이지 믿기 힘든 일이다.소민아는 여전히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아 비서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줄곧 신이랑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를 도와 글을 수정하다가 졸리면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처음엔 조금 미안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신이랑이 혼자 쓰는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신이랑의 사무실엔 푹신한 소파도 있고 신선한 과일도 매일 끊기지 않았다. 에어컨조차도 그녀 사무실의 것보다 더 따뜻했다.신이랑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소민아는 담요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새로운 버전의 계약서를 살펴보던 신이랑은 담요를 주워 그녀 몸에 덮어주었다.그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소민아가 거의 소파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손을 뻗어 다시 안전하게 눕혔다.하지만 그때, 소민아도 몸을 뒤척이려던 참이었던 지라 그의 손길과 움직임이 겹치는 바람에 허리를 접질렸다.“잠시만요... 허리가... 너무 아파요!”뭔가 잘못됨을 감지한 신이랑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세를 낮추고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왜요? 접질렸어요?”“네. 아파요. 움직이지도 못하겠어요!”“봐봐요.”신이랑이 그녀의 허리를 문질렀다.“이제 좀 괜찮아졌어요?”등에서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네. 조금만 더 힘줘요.”그
소민아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허리를 짚고 일어섰다.“아... 아니에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랬어요. 다른 날엔 이렇게 게으름 피우지 않아요. 저 오늘 점심밥은 집에서 가져왔으니까 다음에 같이 먹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한 듯 빠르게 빠져나왔다.그녀가 거절한 건 회사 사람들이 또 제멋대로 그들을 입에 올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저번 기성은과 함께 비상계단에 있었던 일도 한동안 시끄럽게 들끓지 않았던가. 기성은이 강압적으로 일을 덮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대표님에게 불려가 한바탕 혼났을 것이다.소민아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가 먹을 것을 사러 가던 중 화장실을 지나칠 때,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진 봤어요? 소민아 씨가 신 편집장님 사무실에서 자는 걸 누가 찍어 올렸잖아요. 소민아 씨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편집장님도 기 비서님도 저렇게 꽉 잡고 있는 거죠. 저번에 기 비서님이 소피아 씨를 시켜 우리한테 입 간수 잘해야 한다고 경고하셨잖아요. 아니면... 사내 연애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아직 기 비서님과의 사이도 명확하지 못한데 남자를 또 한 명 꼬드기고 있네요.”“그러니까요.”여자가 거울을 비춰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아무리 봐도 내가 소민아보다 훨씬 더 나아요. 그렇게 훌륭한 남자 두 명이 그깟 소민아 한 명 때문에 애를 태우다니, 참.”“소민아 씨가 두 사람에게 무슨 독을 풀었는지 당최 모르겠네요.”소민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목소리가 끊겨버렸다.그냥 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든 그녀는 동료들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다. 지금 비서실 모든 직원들이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보기만 하면 슬슬 피해 다닌다.평소 가장 친했던 백혜진도 요즘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며 그녀를 대한다.소민아가 1층으로 내려가는
“이랑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멀지 않은 곳 테이블에 앉은 몇 명의 직원들이 소현아를 계속 힐끔거리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하고 있었다.소민아는 몇 입 먹지도 않고 감자탕이 도착했다는 핑계로 얼른 자리를 떴다.역시 이제부턴 구내식당에 오지 말아야겠다.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송시아는 여전히 병원에서 치료받는 중이었다. 금방 오전에 왔다 갔던 사람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민아 씨 오라고 한 적 없는 거로 기억하는데요.”송시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코를 슥 문질렀다.“전 부대표님의 비서잖아요. 옆에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부대표님께서 좋아하시는 감자탕 가져왔어요. 어서 맛보세요.”소민아가 그릇을 가져와 감자탕을 덜어 두 손으로 송시아에게 건넸다.“송... 부대표님, 왜...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 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송시아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어들이고 그릇을 받았다.“내 기억으로 민아 씨는 무남독녀였던 것 같은데... 언니나 오빠는 없어요?”소민아가 숨김없이 대답했다.“사촌 언니 한 명 있어요. 소현아라고 하고요. 제 부모님이 너무 바쁘셔서 어렸을 때부터 전 대부분 사촌 언니 집에서 자랐어요.”송시아가 머리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감자탕을 한 입 떠먹었다.“그래요?”하지만 송시아는 소민아에게서 자신 여동생의 그림자를 발견했다.그 아이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지금 소민아와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늘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곤 했다.예전 송시아가 허둥지둥하며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소민아를 단번에 선택한 것도 이 이유였다.그녀의 눈동자가 송시아에게 더없이 익숙한 느낌을 안겨준 것이다.“오늘 저녁 시간 있어요?”소민아가 대답했다.“네, 있죠!”송시아는 감자탕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저녁에 나랑 같이 파티장에 가요. 예쁘게 꾸미고
“소민아 씨 말 참 재밌게 하네요. 그냥 내 말대로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거 사요. 직원 복지라고 생각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 컥컥컥...”송시아가 기침하자 소민아는 바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부대표님, 먼저 목을 좀 적시세요. 잠시 뒤에 약 가지러 가야 하죠? 제가 다녀올게요.”송시아가 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말했다.“그래요.”소민아가 병실에서 나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송시아는 몇 초 뒤에야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쓸데없는 생각일 것이다.저녁, 소민아는 송시아가 준 카드를 가지고 고급 브랜드 매장에 가서 옷을 샀다. 평소 바지만 입던 그녀는 갑자기 치마를 입으니 너무 불편해 계속 치마를 만지작거렸다.송시아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왜요? 예전 기성은의 밑에 있을 안 입어봤어요? 클라이언트 만나러 갈 때 민아 씨 안 부르던가요?”소민아가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대표님,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기 비서님은 제가 우둔하고 느리다고 계속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만 하셨어요.”송시아가 더는 말하지 않자 소민아는 연이어 말했다.“부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 몸에 무리가 갈 거예요.”“사소한 병일 뿐이에요. 천천히 다스리면 돼요. 하지만 돈은 영원히 날 기다려주지 않아요. 기회를 놓치고 나면 내 손에 돈을 쥐여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송시아가 손을 뻗어 소민아의 벨트를 정리해주다가 그녀 손목에 난 상처를 보고는 돌연 손을 덥석 잡았다.“이 상처 어떻게 생긴 거예요?”너무나도 큰 송시아의 반응에 소민아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말했다.“어렸을 때 밥을 하다가 조심하지 않아 데였어요. 부대표님, 왜 그러세요?”송시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준비됐으면 나 따라와요.”소민아는 차를 몰다가 백미러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송시아를 보고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40분 뒤, 천추 산장에
소피아가 자리에서 일어서 룸 밖으로 나갔다. 소민아가 한 무리 아저씨들과 친밀한 자세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그중 몇 명은 낯이 익었다. 전에 협력한 적이 있는 회사 임원이었다.소피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소민아, 너에게도 늙은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날이 오는구나.’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소피아는 룸에 돌아와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제가 나가보니까 이미 내려가고 없더라고요. 다만 제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는데...”“소민아 씨를 본 것 같아요. 건중 테크놀로지 대표랑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더라고요.”기성은이 물었다.“소민아 씨가 여기 왜 있어요?”소피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어요. 소민아 씨는 지금 송 부대표님의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에 왔을 리 없겠죠.”“기 비서님, 이렇게 빨리 가시려고요? 비서님과 이 천추 산장 개발에 관한 일로 자세하게 상의드리려 했는데요.”천추 산장의 총 책임자가 다가와 말했다.기성은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구 선생님, 아직 이른 시간이니 얘기하시죠.”“정말 영광이에요. 성세 그룹 같은 대단한 회사에서 저희 보잘것없는 산장에 관심을 가져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온 건 저희 대표님 때문입니다. 결혼식을 산장에서 진행하려고 알아보던 도중 사모님께서 마침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하여 대표님께서 절 보내 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하셨습니다.”“하하하... 사모님께서 만족스러워하셨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완벽한 야외 결혼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절대 실망 안 하실 겁니다.’천추 산장은 호텔과 각종 오락 시설이 갖춰진 리조트 산장이었다.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안겨준다. 들어선 순간 그야말로 천당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그때 2층 룸 안, 신이랑도 와 있었다.여우람이 들고 있던 계약서를 신이랑의 앞에 놓아주었다.
너무나도 강경한 신이랑의 태도에 여우림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이랑 씨, 설마 성세 그룹에 들어간 이유가 소민아 씨는 아니죠?”대답이 없으니 긍정이나 다름없었다.그 순간 여우림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차를 들이켜도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다.“소민아 씨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예요. 이랑 씨...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더 긴데, 그 정이라도 좀 생각해주면 안 돼요?”신이랑은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였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민아 씨가 이 책 좋아해요.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저작권 계약은 원래대로 15년에 끝마치는 거로 해요.”신이랑은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난 이만 돌아가 출근해야 해요.”“이랑 씨, 200억 어때요. 이게 내 한계예요.”룸에서 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싫어요. 이거 놔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민아 씨!”신이랑이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가 끌려가고 있는 소민아를 잡아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당신들 누구시죠?”“이 자식 너 뭐야?”상대방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신고하려고요. 천추 산장이에요.”신이랑이 신고하자 그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분분히 자리를 떴다.“당신 내가 기억할 거야!”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신이랑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신고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행동일 뿐이었다.신이랑은 고개를 돌려 소민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너무나도 얇은 그녀의 옷을 본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입혀주었다.“민아 씨,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소민아는 너무 취해 세상 모든 사물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였다. 심지어 바로 눈앞 사람 얼굴도 흐리멍덩하게 보일 지경이었다.그때 마침 기성은도 천추 산
화를 내며 자리를 뜨는 기성은의 뒷모습을 보며 소피아는 분노에 차올라 쿵쿵 발을 굴렀다.왜 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화를 분출한단 말인가. 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다.계약서를 받은 뒤 기성은은 회사로 돌아가 이 일을 대표에게 보고했다.전연우가 말했다.“잘했어. 사람을 보내 결혼식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라고 해.”“네, 대표님.”전화를 끊고 보니 책상엔 아직 검토하지 않은 새로운 계약서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음에도 기성은의 눈엔 좀처럼 글씨가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만년필을 들고 이마를 꾹꾹 짓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산만하게 지나가 버렸다.기성은은 종래로 이렇게 도가 지나치게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적이 없다.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오후 3시, 소피아가 들어와 회의 시간을 알렸다.오후 4시 반, 회의가 끝났다.기성은이 전원을 끄지 않은 컴퓨터가 놓여 있는 소민아의 책상 앞으로 다가오자 백혜진은 고개를 들고 늘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보고했다.“저기 그... 기 비서님, 소민아 씨는 오늘 아침 일찍 외근하러 회사에서 나갔어요. 송 부대표님과 함께 병원에서 출발해 천추 산장에 가 클라이언트들과 식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제가 조금 전 문자 보내뒀어요.”그때, 백혜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들고 살펴보았다.“민아 씨 집에 돌아갔대요.”“어머! 신 편집장님이 보내온 문자네요!”늘 차분하고 느릿했던 사람이 순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러버렸다.백혜진은 걱정스레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이미 사무실에 들어가 있었다.백혜진의 말이 퍼지자 회사 단톡방은 또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소민아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얼마 후 달달하고 매콤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어서 마셔요. 더 있어요.”신이랑이 그녀를 위해 만든 해장국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까지 취했단 말인가.해장국을 다 먹인 뒤 신이랑은 소민아가 주정을 부리며 바닥에
30초 뒤, 소민아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추 산장에서 나올 때부터 신이랑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올 때까지...소민아는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의 옷을 헤집고 농락했던 것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소민아, 너 그렇게 남자가 고파? 드라마 주인공들은 술에 흠뻑 취하면 이튿날 아무것도 기억 못 하던데 난 왜 이렇게 하나하나 뚜렷하게 생각나는 거야. 세상에. 다 끝났어, 끝났어...”소민아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타입이었을 줄이야.신이랑이 그녀에게 따지고 들면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 할 정도로 추태를 부렸다.같은 아파트 맞은편 오피스텔이라 방 구조는 그녀의 집과 아주 흡사했다.소민아는 침대 옆에서 가방을 들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둡게 조명이 꺼져 있는 거실을 보니 신이랑은 아마도 자고 있는 듯했다.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돌연 옆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이랑이 하얀색 잠옷을 입고 앞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다. 소민아를 본 순간 그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등 뒤에 숨겼다.소민아는 그의 행동을 포착했다. 또한 그의 방에서 풍겨 나오는 담배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간 멍하니 시선을 맞추었다. 소민아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이랑 씨... 깼어요?”신이랑이 담담히 대답했다.“아니요. 오늘 소설 올려야 해서요. 집에 가려고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약간 마음이 저려왔다.“아직까지도 안 잔 거예요? 오늘 제가 실수해서 시간을 지체한 거죠? 미안해요! 클라이언트들이 자꾸 술을 권하는 바람에 취해버렸어요. 저 평소엔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아요.”신이랑이 눈동자를 내리뜨렸다.“괜찮아요.”“그럼 전 이만 갈게요! 이제 이랑 씨도 자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소민아가 나가자 복도 센서 등이 켜졌다. 그녀는 빠르게 자신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