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 씨 말 참 재밌게 하네요. 그냥 내 말대로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거 사요. 직원 복지라고 생각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 컥컥컥...”송시아가 기침하자 소민아는 바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부대표님, 먼저 목을 좀 적시세요. 잠시 뒤에 약 가지러 가야 하죠? 제가 다녀올게요.”송시아가 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말했다.“그래요.”소민아가 병실에서 나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송시아는 몇 초 뒤에야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쓸데없는 생각일 것이다.저녁, 소민아는 송시아가 준 카드를 가지고 고급 브랜드 매장에 가서 옷을 샀다. 평소 바지만 입던 그녀는 갑자기 치마를 입으니 너무 불편해 계속 치마를 만지작거렸다.송시아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왜요? 예전 기성은의 밑에 있을 안 입어봤어요? 클라이언트 만나러 갈 때 민아 씨 안 부르던가요?”소민아가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대표님,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기 비서님은 제가 우둔하고 느리다고 계속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만 하셨어요.”송시아가 더는 말하지 않자 소민아는 연이어 말했다.“부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 몸에 무리가 갈 거예요.”“사소한 병일 뿐이에요. 천천히 다스리면 돼요. 하지만 돈은 영원히 날 기다려주지 않아요. 기회를 놓치고 나면 내 손에 돈을 쥐여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송시아가 손을 뻗어 소민아의 벨트를 정리해주다가 그녀 손목에 난 상처를 보고는 돌연 손을 덥석 잡았다.“이 상처 어떻게 생긴 거예요?”너무나도 큰 송시아의 반응에 소민아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말했다.“어렸을 때 밥을 하다가 조심하지 않아 데였어요. 부대표님, 왜 그러세요?”송시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준비됐으면 나 따라와요.”소민아는 차를 몰다가 백미러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송시아를 보고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40분 뒤, 천추 산장에
소피아가 자리에서 일어서 룸 밖으로 나갔다. 소민아가 한 무리 아저씨들과 친밀한 자세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그중 몇 명은 낯이 익었다. 전에 협력한 적이 있는 회사 임원이었다.소피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소민아, 너에게도 늙은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날이 오는구나.’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소피아는 룸에 돌아와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제가 나가보니까 이미 내려가고 없더라고요. 다만 제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는데...”“소민아 씨를 본 것 같아요. 건중 테크놀로지 대표랑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더라고요.”기성은이 물었다.“소민아 씨가 여기 왜 있어요?”소피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어요. 소민아 씨는 지금 송 부대표님의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에 왔을 리 없겠죠.”“기 비서님, 이렇게 빨리 가시려고요? 비서님과 이 천추 산장 개발에 관한 일로 자세하게 상의드리려 했는데요.”천추 산장의 총 책임자가 다가와 말했다.기성은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구 선생님, 아직 이른 시간이니 얘기하시죠.”“정말 영광이에요. 성세 그룹 같은 대단한 회사에서 저희 보잘것없는 산장에 관심을 가져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온 건 저희 대표님 때문입니다. 결혼식을 산장에서 진행하려고 알아보던 도중 사모님께서 마침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하여 대표님께서 절 보내 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하셨습니다.”“하하하... 사모님께서 만족스러워하셨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완벽한 야외 결혼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절대 실망 안 하실 겁니다.’천추 산장은 호텔과 각종 오락 시설이 갖춰진 리조트 산장이었다.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안겨준다. 들어선 순간 그야말로 천당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그때 2층 룸 안, 신이랑도 와 있었다.여우람이 들고 있던 계약서를 신이랑의 앞에 놓아주었다.
너무나도 강경한 신이랑의 태도에 여우림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이랑 씨, 설마 성세 그룹에 들어간 이유가 소민아 씨는 아니죠?”대답이 없으니 긍정이나 다름없었다.그 순간 여우림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차를 들이켜도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다.“소민아 씨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예요. 이랑 씨...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더 긴데, 그 정이라도 좀 생각해주면 안 돼요?”신이랑은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였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민아 씨가 이 책 좋아해요.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저작권 계약은 원래대로 15년에 끝마치는 거로 해요.”신이랑은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난 이만 돌아가 출근해야 해요.”“이랑 씨, 200억 어때요. 이게 내 한계예요.”룸에서 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싫어요. 이거 놔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민아 씨!”신이랑이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가 끌려가고 있는 소민아를 잡아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당신들 누구시죠?”“이 자식 너 뭐야?”상대방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신고하려고요. 천추 산장이에요.”신이랑이 신고하자 그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분분히 자리를 떴다.“당신 내가 기억할 거야!”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신이랑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신고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행동일 뿐이었다.신이랑은 고개를 돌려 소민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너무나도 얇은 그녀의 옷을 본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입혀주었다.“민아 씨,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소민아는 너무 취해 세상 모든 사물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였다. 심지어 바로 눈앞 사람 얼굴도 흐리멍덩하게 보일 지경이었다.그때 마침 기성은도 천추 산
화를 내며 자리를 뜨는 기성은의 뒷모습을 보며 소피아는 분노에 차올라 쿵쿵 발을 굴렀다.왜 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화를 분출한단 말인가. 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다.계약서를 받은 뒤 기성은은 회사로 돌아가 이 일을 대표에게 보고했다.전연우가 말했다.“잘했어. 사람을 보내 결혼식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라고 해.”“네, 대표님.”전화를 끊고 보니 책상엔 아직 검토하지 않은 새로운 계약서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음에도 기성은의 눈엔 좀처럼 글씨가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만년필을 들고 이마를 꾹꾹 짓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산만하게 지나가 버렸다.기성은은 종래로 이렇게 도가 지나치게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적이 없다.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오후 3시, 소피아가 들어와 회의 시간을 알렸다.오후 4시 반, 회의가 끝났다.기성은이 전원을 끄지 않은 컴퓨터가 놓여 있는 소민아의 책상 앞으로 다가오자 백혜진은 고개를 들고 늘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보고했다.“저기 그... 기 비서님, 소민아 씨는 오늘 아침 일찍 외근하러 회사에서 나갔어요. 송 부대표님과 함께 병원에서 출발해 천추 산장에 가 클라이언트들과 식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제가 조금 전 문자 보내뒀어요.”그때, 백혜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들고 살펴보았다.“민아 씨 집에 돌아갔대요.”“어머! 신 편집장님이 보내온 문자네요!”늘 차분하고 느릿했던 사람이 순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러버렸다.백혜진은 걱정스레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이미 사무실에 들어가 있었다.백혜진의 말이 퍼지자 회사 단톡방은 또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소민아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얼마 후 달달하고 매콤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어서 마셔요. 더 있어요.”신이랑이 그녀를 위해 만든 해장국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까지 취했단 말인가.해장국을 다 먹인 뒤 신이랑은 소민아가 주정을 부리며 바닥에
30초 뒤, 소민아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추 산장에서 나올 때부터 신이랑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올 때까지...소민아는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의 옷을 헤집고 농락했던 것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소민아, 너 그렇게 남자가 고파? 드라마 주인공들은 술에 흠뻑 취하면 이튿날 아무것도 기억 못 하던데 난 왜 이렇게 하나하나 뚜렷하게 생각나는 거야. 세상에. 다 끝났어, 끝났어...”소민아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타입이었을 줄이야.신이랑이 그녀에게 따지고 들면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 할 정도로 추태를 부렸다.같은 아파트 맞은편 오피스텔이라 방 구조는 그녀의 집과 아주 흡사했다.소민아는 침대 옆에서 가방을 들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둡게 조명이 꺼져 있는 거실을 보니 신이랑은 아마도 자고 있는 듯했다.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돌연 옆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이랑이 하얀색 잠옷을 입고 앞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다. 소민아를 본 순간 그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를 등 뒤에 숨겼다.소민아는 그의 행동을 포착했다. 또한 그의 방에서 풍겨 나오는 담배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간 멍하니 시선을 맞추었다. 소민아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이랑 씨... 깼어요?”신이랑이 담담히 대답했다.“아니요. 오늘 소설 올려야 해서요. 집에 가려고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약간 마음이 저려왔다.“아직까지도 안 잔 거예요? 오늘 제가 실수해서 시간을 지체한 거죠? 미안해요! 클라이언트들이 자꾸 술을 권하는 바람에 취해버렸어요. 저 평소엔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아요.”신이랑이 눈동자를 내리뜨렸다.“괜찮아요.”“그럼 전 이만 갈게요! 이제 이랑 씨도 자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소민아가 나가자 복도 센서 등이 켜졌다. 그녀는 빠르게 자신
소민아도 그의 두통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아직도... 머리가 아파요?”신이랑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걱정하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집에 가서 쉬어요. 저 혼자 있어도 돼요.”그 말이 또다시 소민아의 가슴을 찔렀다.“난 아까 많이 자서 하나도 안 피곤해요.”방에 들어가 보니 컴퓨터는 아직 켜져 있었다.“앞으로는 소설 쓰느라 밤새지 말아요. 건강이 제일 중요하잖아요.”“알았어요.”“그냥 먹을 것 좀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얼른 약 먹고 쉬어요. 이 물은 너무 차가워서 안 돼요. 제가 얼른 따뜻하게 물 끓여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그래요.”소민아는 전에 그의 집에 와본 적이 있다. 그녀가 쉬고 있을 때 신이랑은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함께 먹자며 그녀를 불렀다.그렇게 한두 번 드나들다 보니 소민아는 밥을 얻어먹으러 가는 단골손님이 되어있었다.밥, 설거지, 그리고 뒷정리까지 모두 그가 직접 도맡아 했고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도 없었다.소민아는 물을 끓이다가 불현듯 핸드폰이 생각났다.그녀가 문을 열어보니 앞에 불청객 한 명이 와 있었다.복도 끝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소민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여... 여긴 왜 왔어요!”기성은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론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으니 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흘러나왔다.“여긴 왜 오셨냐고요.”기성은이 들고 있던 물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소민아에게 그가 말했다.“가져가요.”소민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건을 받았다.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기성은이 물었다.“문자 못 봤어요?”소민아는 호주머니를 더듬다가 그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핸드폰이 가방 안에 있어서요. 무슨 일로 찾은 거예요?”소민아는 차마 그를 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분명 어제 오후
“기성은 씨,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당신의 이런 다른 사람을 벌레 보듯 하는 오만한 태도예요. 왜 그렇게 사람을 깔봐요!”기성은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있었다. 소민아는 그가 준 야식을 보니 끓어오르던 화가 적잖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날이 거의 밝아오는데 무슨 야식이란 말인가. 곧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다.소민아는 화가 나 버리려고 했지만, 구영관의 음식인 걸 보고는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됐어. 공짠데 그냥 먹어보지 뭐.”“쿵...”집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로 알고 곧바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이랑이 바닥에 넘어져 있었고, 침대 옆에 두었던 유리컵이 떨어져 산산조각나 있었다.“이랑 씨, 어떻게 된 거예요!”소민아는 얼른 넘어져 있는 신이랑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신이랑은 힘없이 쿡쿡 기침했다.“난 괜찮아요. 바깥에서 말 소리가 들리던데 누가 왔어요?”소민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도둑이에요. 놀라서 도망치더라고요.”“민아 씨는 괜찮은 거죠? 신고할까요?”“괜찮아요. 얼른 쉬어요. 물이 다 끓었네요. 컵에 따라줄게요.”“네. 고마워요.”“고맙긴요.”소민아는 그가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본 뒤 이불을 덮어주고는 말했다.“푹 쉬어요. 난 더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돌아갈게요.”신이랑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그녀의 옷깃에 스쳐 지나갔고, 그의 얼굴엔 실망의 감정이 피어올랐다.소민아는 집에 가자마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기성은이 보낸 문자와 부재중 통화가 한 통 와 있었다.기성은은 늘 똑같다. 용건이 뭐든 짧게 몇 글자만 보내면 끝이다.조금만 더 길게 쓰면 죽기라도 하는지.“전화 몇 번 더 걸면 어디가 덧나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난 왜 찾은 거예요!”그녀는 분노에 차올라 핸드폰 화면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식탁에 올려져 있는 음식은 확실히 그녀 입맛에 맞는 것들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기성은이 왜 야식을 가져다주었는지
마침 잘 되었다. 그녀도 어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순조로웠던 식사 자리였는데 하마터면!어쩐지 마음껏 쓰라며 카드까지 주더라니, 역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역겹다.소민아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송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소민아가 사무실에 들어갔다.“부대표님, 부르셨어요. 오늘 아침 핸드폰이 배터리가 없어 꺼지는 바람에 출근이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다음엔 절대 지각하지 않겠습니다.”송시아가 들고 있던 서류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네? 걱정하지 말아요. 기성은이 민아 씨 반차 내줬어요. 이 인사발령 통지서를 주기 전에 개인적인 일에 관해 묻고 싶어요. 기성은과 지금 어떤 관계예요? 숨길 생각하지 말아요.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소민아는 송시아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부대표님, 저와 기 비서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또한... 심지어 친구조차도 되지 못합니다.”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친구도 안 된다고요? 내가 알기로 소민아 씨는 기성은이 전연우 외에 유일하게 자원해 도운 사람이에요. 기성은은 자기 부하직원들에 대한 요구가 엄청 높은 사람이에요. 업무에 관해선 더더욱 엄격하죠. 누가 한번 사소한 거라도 빼먹으면 바로 해고시켰어요. 하지만 민아 씨는... 저번 회의 자료를 잘못 가져와도 하루 치 월급을 깎았을 뿐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확실히... 민아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소민아는 연신 부인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요. 부대표님, 그 사람은 그야말로 정신병자예요. 사람 마음 갖고 장난이나 치고!”소민아는 홧김에 마음속에 있는 말까지 해버렸다.그녀는 이렇듯 가끔씩 자신의 입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송시아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네?”“저번엔 저랑 사귀자고 했다가 바로 주가은인지 뭔지 하는 여자한테 가더라고요. 이런 바람둥이 남자 전 싫어요. 그래서 하루 사귀고 헤어졌죠 뭐.”송시아는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