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파, 마늘, 식초, 그리고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전연우는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도우미가 실수로 만둣국에 파를 넣었다.“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파를 안 드신다는 걸 깜빡했어요. 지금 바로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장소월은 차려놓은 만둣국에 초록색 파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걸러내면 돼요.”전연우가 말했다.“다음엔 조심해요.”“대표님, 다음번엔 꼭 조심하겠습니다.”도우미는 거실에서 나가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전연우가 장소월의 그릇 안에 있는 파를 집어 자신의 그릇에 넣었다.장소월이 물었다.“네가 직접 빚은 거야?”“응.”장소월은 이루 말 못 할 감정이 피어올랐다. 전생에서 그와 결혼해 함께 살았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전연우를 위해 빨래, 요리, 집 청소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익혔었다. 이번 생엔 도리어 전연우가 그녀를 위해 만두 빚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언제 배웠어?”“마음만 먹으면 뭔가를 새로 익히는 건 어렵지 않아.”장소월은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오 아주머니의 손맛이 느껴졌다. 순간 그녀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짓눌러 눈에 고였던 눈물을 거두어들였다.“맛은 괜찮네. 앞으로... 날 위해 이런 거 해줄 필요 없어. 난 너한테 고마워하지 않아.”전연우는 만둣국에 손도 대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처음이야. 윤서와 보육원에서 자랄 때 내가 줄곧 윤서를 챙겨줬었어. 의부님한테 입양된 이후엔 단 한 번도 음식이라는 거 만들어본 적 없어.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 많은 일들을 잊어버렸어. 소월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걸까?그녀가 자신한테 특별한 존재라는 거?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구애했으나, 결국 전연우가 선택한 건 원수의 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기뻐해야 하는 걸까?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 않았을뿐더러 사랑까지 해주면서 최고의
“너 오늘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일단 이거 먹어. 입에 안 맞으면 도우미한테 새로 만들어달라고 할게.”장소월이 차갑게 내뱉었다.“너 혼자 먹어.”인씨 가문은 왜 아직도 전연우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인정아는 전연우를 극도로 증오해야 마땅한데 말이다.다시 고민해보니 어쩌면 그에게 또 어떤 국회의원 딸을 소개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전, 전연우가 파티에 참석한 다음 날부터 서울시 시장이 자신의 딸을 그에게 소개해주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겼다...그런 강력한 권력에 전연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장소월은 결코 믿지 않았다.전연우가 파티에서 돌아온 이후 장소월은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가 자신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생각만 해도 역겹기 그지없었다.장소월은 벽에 걸린 엄마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니 마음속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아래층 주방에서 전연우는 만둣국 두 그릇을 모두 혼자 비웠다.전연우는 어떤 물건은 완전히 소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예전의 전연우는 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지금 그녀에겐...그는 자신이 원하는 건 단지 그녀의 몸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까지 포함된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전연우는 인내심이 두둑한 사냥꾼과도 같았다.전연우는 직접 국수 요리를 만들어 작업실에 올려갔다.그가 장소월이 손에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내려놓고는 딸을 달래듯 젓가락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너무 화내면 몸이 상해. 일단 빨리 밥 먹어. 서재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 눈에 국 한 방울이라도 보이게 하지 마.”듣기엔 협박 같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먹음직한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국수 위에 계란 후라이가 얹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간장까지 뿌려져 있어 향긋한 냄새가 올라
다음날, 아침.장소월은 최근 며칠간 가슴 통증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전연우가 물었다.“몸이 불편해? 서철용 부를까?”장소월은 창밖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요즘 자꾸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매번 아주머니가 내려가 봤을 땐 아무도 없었어.”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어루만져주었다.“그런 생각하지 마. 경호원들이 있으니까 별장을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해. 설사 위험해진다고 해도 내가 곧바로 달려올 거야.”“저번에 분명 검은 그림자가 정원에서 나왔다가 사라지는 거 봤단 말이야. 진짜 이상해.”“괜찮아. 내가 옆에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전연우는 확실히 그녀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장소월의 안전을 위해 서울시 전체 치한에 힘을 쏟고 있으니 말이다.“내려와. 국수 만들어줄게.”장소월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안 먹어. 요즘 며칠 동안 계속 그 국수 먹었잖아. 오늘은 다른 거 먹을래.”“그래.”전연우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마자 창밖 어딘가를 보고는 몸 전체에서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며 말했다.“너 먼저 가. 나도 곧 갈게.”장소월이 나가자 전연우는 바깥을 내다보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다가 끊으려고 한 순간 통화가 연결되었다.상대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전연우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아직도 장난 안 끝났어? 마지막이야. 내가 직접 움직이게 만들지 마.”얼마 후, 전연우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자 어둠 속에서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화상을 입은 얼굴 위, 혼탁한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충만된 채 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인시윤은 그녀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히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전연우는 어디에 가든 그녀를 데려갔고, 또 직접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하지만 그의 아내였을 때... 또 그의
“아무도 없었어. 네가 잘못 본 거야.”그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걸어왔다.“사모님! 조금 전 보셨다는 사람 아마 저일 겁니다.”장소월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당신이라고요?”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쪽에서 경호를 서다가 갑자기 문밖에 일이 생겨 다녀왔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모님을 놀라게 했습니다.”전연우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이 자리를 떴다.“이제 됐지? 요즘 내가 별장에 경호원들을 많이 배치해서 네가 그런 착각을 했을 거야.”“이제 밥 먹자, 응?”장소월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다시 살펴보았다. 정말 그녀가 잘못 본 걸까?장소월이 현관까지 걸어갔을 때 별이가 돌연 손에 비행기 장난감을 들고 뒤뚱거리며 불안하게 뛰어왔다. “엄마...”장소월이 아이를 안으려고 할 때 은경애가 먼저 껴안았다.“아가씨, 제가 할게요.”장소월은 자신의 손을 힐끗 보고는 다시 거두어들였다.“그래요.”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식탁으로 갔다.그녀의 손에 관해선 두 사람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모두 예전에 생겼던 상처다.지금 장소월은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만 길어지면 손에 힘이 빠지고 부들부들 떨린다.은경애는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돌연 손에 힘이 풀렸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었다. 두 사람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은경애가 빠르게 아이를 받아 안지 않았다면 어쩌면 별이는 지금 병원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의자에 앉아있을 때만 겨우 별이를 안아줄 수 있었다.장소월의 몸에 남은 상처는 천천히 옅어지고 있었다. 전연우가 저녁마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상처에 연고를 발라준 덕분이었다.장소월은 아직 자신의 상처가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밥을 먹고 있을 때 도우미가 초대장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대표님, 저번 탁자 위에 있던 것입니다. 중요한 물건 같아서 서랍 안에 넣어뒀
“날 걱정하는 거야?”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빼냈다. 전연우는 그녀의 눈빛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전연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가 원하는 건 장소월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말이다.“그런 장소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밖에 나가 놀고 싶으면 다른 사모님들과 피부과 다니거나 카드나 쳐.”“여자들이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건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장소월은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사모님들과 만나 카드나 화투를 치거나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았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급히 설명했다.“매번 경호원들이 네 일정을 나한테 보고하잖아. 네가 나가서 뭘 하는지 난 빠짐없이 다 알고 있어.”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화를 낼 겨를을 주지 않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소민아 씨 일은 이미 내가 해결했어...”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덥석 잡아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는 두 팔로 허리를 감쌌다.“어떻게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할 거야?”장소월은 그의 어깨를 애써 밀어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도우미는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은경애도 별이를 안아 들고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전연우는 손가락을 장소월의 검고 반짝이는 머리카락 안으로 집어넣었다. 많이 자라긴 했지만 아직은 좀 짧았다. 예전만큼 자라려면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려야 할 것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과 가까이 가져가자 장소월은 그가 뭘 하려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결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착하지. 키스하자.”야릇한 분위기가 점점 더 농후해졌다. 지금 도망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오늘 키스는 그야말로 짙고 길었다. 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내가 없을 땐 밖에 나가지 마. 집은 경호원들이 있어서 안전하잖아. 내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
“전 대표님, 혹시 저와 손잡고 일하지 않으실래요?”전연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말해봐요.”데니안이 손을 휘젓자 어둠 속에서 경호원 몇 명이 나와 10개 돈 가방을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열어보니 달러로 가득 차 있었다.“이건 첫인사로 대표님에게 드리는 겁니다.”“저와 마음을 합쳐 일한다면 아마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겁니다. 제가 알기로 전 대표님은 국내외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서울, 아니 화국 전체에서 대표님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전연우가 말했다.“과찬이에요.”“대표님에게 넓은 인맥이 있다면, 저에겐 최고 품질의 물건이 있습니다... 저 강지훈 씨와도 오랫동안 일해왔어요. 제 최고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죠.”“오늘 이렇게 전 대표님까지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인정아가 말을 보탰다.“위험할까 봐 망설인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데니안 씨한테 안전하게 자금을 옮길 수 방법이 있네. 며칠만 지나면 이 돈이 모두 한화로 환산되어 자네 계좌에 들어갈 걸세. 함께 일하겠다고 결정만 하면 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네. 하루에 몇십억 달러도 거뜬히 벌 수 있을 걸세.”“아마 성세 그룹이 가져다주는 수익보다도 훨씬 더 크겠지.”“잠시 손을 놓았을 뿐이지, 이런 일은 자네한테 별로 어렵지도 않지 않은가.”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후 천천히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내 인맥은 확실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어요.”“하지만 사모님께서 잘못 생각하셨어요.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전연우가 일어서자 인정아는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바로 그를 잡았다.“이렇게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게. 이대로 가면 그 후과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르네.”전연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룸을 나섰다.“Fuck.”룸 안에서 남자의 유창한 영어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상 위에 있는 돈 가방들을 모조리 바닥에 뒤엎어버렸다
전연우가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남원 별장 상황은 어때?”기성은이 대답했다.“모두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선 줄곧 별장에 계십니다. 별장을 나서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전연우가 눈을 감고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일단 집으로 가.”그녀가 혼자 집에 있으면 전연우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는 장소월을 최대한 혼자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보호한다고 해도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화실에서 신이랑 소설 주인공 외모에 대해 핸드폰으로 소민아와 상의하고 있었다.전연우가 나간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조명이 돌연 꺼져버렸다.뒷이어 모든 조명이 꺼지고 남원 별장은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 도우미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장소월이었다.“큰일 났어요. 빨리 사모님한테 가봐야 해요.”“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에게 만들어주신 화원에 불이 났어요.”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달려나갔다. 그 틈을 타 검은색 그림자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사납게 번지는 불길을 장소월도 발견했다. 그녀가 그 불빛을 빌려 벽을 더듬으며 문밖으로 나갔을 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어렴풋한 윤곽이 그녀 눈앞에 나타났다.“당신 누구예요. 뭘 하려는 거예요?”장소월은 점점 더 다급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이 온몸에 감돌았다.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이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문에 부딪혔다. 상대는 분명 그녀에게 돌진한 것이 틀림없다.문밖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죽여버릴 거야!”장소월은 등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목소리 같았다.또 그 순간 머리 위 조명이 켜지고 복도에서 울리던 소리도 사라졌다.이 문은 전연우가 특별히 그녀에게 만들어준 방범문이다
“네, 사모님.”안방.장소월은 아이를 안고 앉아있었고, 은경애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세상에, 세상에.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어요.”“아주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뭘 봤길래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아가씨, 있잖아요. 저 아가씨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장 어르신의 서재에 들어가 몸을 숨기거든요. 아까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길래 서재에서 나왔어요. 전 내려온 사람이 아가씨인 줄 알고 어깨를 두드렸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린 순간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요. 얼굴이 완전히 타버려서 얼마나 흉측하던지, 그냥 사람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였어요!”“손엔 칼도 하나 들고 있었어요. 전기가 빨리 오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정말 그 사람은 장소월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최근 며칠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낀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대체 누구란 말인가!어두운 방 안, 몰래카메라에서 보내온 화면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5성급 호텔에서 송시아가 목욕 가운 차림에 손에 와인잔을 든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영상을 보고 있었다.“인시윤 저 바보 멍청이! 이렇게 좋은 기회에도 장소월을 없애버리지 못하다니!”동시에 영상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여자 이미 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따라갈까요?”송시아가 우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됐어. 너도 이제 돌아가... 계속 거기에 있다가 전연우가 돌아오면 도망치고 싶어도 못 쳐.”“네. 알겠습니다.”영상이 꺼지고 송시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코 푸는 이 상황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장소월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지금의 인시윤은 그저 그녀 손바닥 위 노리개에 불과하다.인시윤을 조종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고 문자가 도착했다. 살펴보니 네 글자가 와 있었다.[거래 실패.]“젠장, 전연우! 넌 분명 머지않아 우리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