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윤 씨가 예전에 절 찾아왔었어요.”“무슨 뜻이에요?”신이랑은 그녀에게 전혀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4년 전 인시윤이 이랑 씨한테 찾아와 소월 언니를 찾아달라고 했다고요? 왜요?”“4년 전이면 이랑 씨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잖아요. 왜 이랑 씨를 찾아간 거예요? 이랑 씨... 대체 누구예요?”신이랑은 덤덤한 얼굴로 머지않은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에요. 이 일은... 비밀로 해줘요.”“걱정 말아요. 이랑 씨, 절대 말 안 할게요.”“집에 가요.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그래요.”“이랑 씨, 오늘 몇 화 올릴 거예요?”“얼마나 보고 싶어요?”“저야 빨리 결말을 보고 싶죠. 300만 자나 썼는데 아직 완결이 안 났어요?”“글자 수가 많다고 해서 꼭 끝나야 하는 건 아니죠. 나한텐 아직 시작일 뿐이에요.”“인시윤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 소월 언니는 아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저런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소월 언니한테 좋은 일은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여자의 질투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성을 잃고 소월 언니한테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네요.”“걱정하지 말아요. 민아 씨가 소월 씨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그러길 바라야죠.”...남원 별장 화원.장소월은 돌연 마음이 어지러워져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장미꽃을 다듬던 날카로운 가위로 네 번째 손가락을 찔러버렸다. 피부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도우미가 소리쳤다.“사모님, 손이!”“제가 지금 바로 의약 상자 가져올게요.”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조금 베었을 뿐이에요. 호들갑 떨 필요 없어요.”그때 마침 일을 마치고 온 전연우가 다친 그녀의 손을 보고는 어두워진 얼굴로 소리쳤다.“대체 당신들 뭐 하는 인간들이야! 똑바로 지켜보라고 했더니!”장소월은 물로 흐르는 피를 씻겨냈다.“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다친 거야. 도우미들한테 화낼 것 없어.”“이렇게 하면 안 돼
그녀는 파, 마늘, 식초, 그리고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전연우는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도우미가 실수로 만둣국에 파를 넣었다.“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파를 안 드신다는 걸 깜빡했어요. 지금 바로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장소월은 차려놓은 만둣국에 초록색 파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걸러내면 돼요.”전연우가 말했다.“다음엔 조심해요.”“대표님, 다음번엔 꼭 조심하겠습니다.”도우미는 거실에서 나가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전연우가 장소월의 그릇 안에 있는 파를 집어 자신의 그릇에 넣었다.장소월이 물었다.“네가 직접 빚은 거야?”“응.”장소월은 이루 말 못 할 감정이 피어올랐다. 전생에서 그와 결혼해 함께 살았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전연우를 위해 빨래, 요리, 집 청소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익혔었다. 이번 생엔 도리어 전연우가 그녀를 위해 만두 빚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언제 배웠어?”“마음만 먹으면 뭔가를 새로 익히는 건 어렵지 않아.”장소월은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오 아주머니의 손맛이 느껴졌다. 순간 그녀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짓눌러 눈에 고였던 눈물을 거두어들였다.“맛은 괜찮네. 앞으로... 날 위해 이런 거 해줄 필요 없어. 난 너한테 고마워하지 않아.”전연우는 만둣국에 손도 대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처음이야. 윤서와 보육원에서 자랄 때 내가 줄곧 윤서를 챙겨줬었어. 의부님한테 입양된 이후엔 단 한 번도 음식이라는 거 만들어본 적 없어.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 많은 일들을 잊어버렸어. 소월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걸까?그녀가 자신한테 특별한 존재라는 거?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구애했으나, 결국 전연우가 선택한 건 원수의 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기뻐해야 하는 걸까?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 않았을뿐더러 사랑까지 해주면서 최고의
“너 오늘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일단 이거 먹어. 입에 안 맞으면 도우미한테 새로 만들어달라고 할게.”장소월이 차갑게 내뱉었다.“너 혼자 먹어.”인씨 가문은 왜 아직도 전연우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인정아는 전연우를 극도로 증오해야 마땅한데 말이다.다시 고민해보니 어쩌면 그에게 또 어떤 국회의원 딸을 소개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전, 전연우가 파티에 참석한 다음 날부터 서울시 시장이 자신의 딸을 그에게 소개해주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겼다...그런 강력한 권력에 전연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장소월은 결코 믿지 않았다.전연우가 파티에서 돌아온 이후 장소월은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가 자신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생각만 해도 역겹기 그지없었다.장소월은 벽에 걸린 엄마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니 마음속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아래층 주방에서 전연우는 만둣국 두 그릇을 모두 혼자 비웠다.전연우는 어떤 물건은 완전히 소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예전의 전연우는 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지금 그녀에겐...그는 자신이 원하는 건 단지 그녀의 몸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까지 포함된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전연우는 인내심이 두둑한 사냥꾼과도 같았다.전연우는 직접 국수 요리를 만들어 작업실에 올려갔다.그가 장소월이 손에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내려놓고는 딸을 달래듯 젓가락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너무 화내면 몸이 상해. 일단 빨리 밥 먹어. 서재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 눈에 국 한 방울이라도 보이게 하지 마.”듣기엔 협박 같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먹음직한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국수 위에 계란 후라이가 얹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간장까지 뿌려져 있어 향긋한 냄새가 올라
다음날, 아침.장소월은 최근 며칠간 가슴 통증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전연우가 물었다.“몸이 불편해? 서철용 부를까?”장소월은 창밖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요즘 자꾸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매번 아주머니가 내려가 봤을 땐 아무도 없었어.”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어루만져주었다.“그런 생각하지 마. 경호원들이 있으니까 별장을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해. 설사 위험해진다고 해도 내가 곧바로 달려올 거야.”“저번에 분명 검은 그림자가 정원에서 나왔다가 사라지는 거 봤단 말이야. 진짜 이상해.”“괜찮아. 내가 옆에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전연우는 확실히 그녀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장소월의 안전을 위해 서울시 전체 치한에 힘을 쏟고 있으니 말이다.“내려와. 국수 만들어줄게.”장소월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안 먹어. 요즘 며칠 동안 계속 그 국수 먹었잖아. 오늘은 다른 거 먹을래.”“그래.”전연우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마자 창밖 어딘가를 보고는 몸 전체에서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며 말했다.“너 먼저 가. 나도 곧 갈게.”장소월이 나가자 전연우는 바깥을 내다보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다가 끊으려고 한 순간 통화가 연결되었다.상대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전연우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아직도 장난 안 끝났어? 마지막이야. 내가 직접 움직이게 만들지 마.”얼마 후, 전연우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자 어둠 속에서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화상을 입은 얼굴 위, 혼탁한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충만된 채 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인시윤은 그녀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히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전연우는 어디에 가든 그녀를 데려갔고, 또 직접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하지만 그의 아내였을 때... 또 그의
“아무도 없었어. 네가 잘못 본 거야.”그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걸어왔다.“사모님! 조금 전 보셨다는 사람 아마 저일 겁니다.”장소월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당신이라고요?”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쪽에서 경호를 서다가 갑자기 문밖에 일이 생겨 다녀왔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모님을 놀라게 했습니다.”전연우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이 자리를 떴다.“이제 됐지? 요즘 내가 별장에 경호원들을 많이 배치해서 네가 그런 착각을 했을 거야.”“이제 밥 먹자, 응?”장소월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다시 살펴보았다. 정말 그녀가 잘못 본 걸까?장소월이 현관까지 걸어갔을 때 별이가 돌연 손에 비행기 장난감을 들고 뒤뚱거리며 불안하게 뛰어왔다. “엄마...”장소월이 아이를 안으려고 할 때 은경애가 먼저 껴안았다.“아가씨, 제가 할게요.”장소월은 자신의 손을 힐끗 보고는 다시 거두어들였다.“그래요.”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식탁으로 갔다.그녀의 손에 관해선 두 사람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모두 예전에 생겼던 상처다.지금 장소월은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만 길어지면 손에 힘이 빠지고 부들부들 떨린다.은경애는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돌연 손에 힘이 풀렸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었다. 두 사람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은경애가 빠르게 아이를 받아 안지 않았다면 어쩌면 별이는 지금 병원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의자에 앉아있을 때만 겨우 별이를 안아줄 수 있었다.장소월의 몸에 남은 상처는 천천히 옅어지고 있었다. 전연우가 저녁마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상처에 연고를 발라준 덕분이었다.장소월은 아직 자신의 상처가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밥을 먹고 있을 때 도우미가 초대장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대표님, 저번 탁자 위에 있던 것입니다. 중요한 물건 같아서 서랍 안에 넣어뒀
“날 걱정하는 거야?”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빼냈다. 전연우는 그녀의 눈빛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전연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가 원하는 건 장소월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말이다.“그런 장소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밖에 나가 놀고 싶으면 다른 사모님들과 피부과 다니거나 카드나 쳐.”“여자들이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건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장소월은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사모님들과 만나 카드나 화투를 치거나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았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급히 설명했다.“매번 경호원들이 네 일정을 나한테 보고하잖아. 네가 나가서 뭘 하는지 난 빠짐없이 다 알고 있어.”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화를 낼 겨를을 주지 않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소민아 씨 일은 이미 내가 해결했어...”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덥석 잡아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는 두 팔로 허리를 감쌌다.“어떻게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할 거야?”장소월은 그의 어깨를 애써 밀어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도우미는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은경애도 별이를 안아 들고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전연우는 손가락을 장소월의 검고 반짝이는 머리카락 안으로 집어넣었다. 많이 자라긴 했지만 아직은 좀 짧았다. 예전만큼 자라려면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려야 할 것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과 가까이 가져가자 장소월은 그가 뭘 하려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결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착하지. 키스하자.”야릇한 분위기가 점점 더 농후해졌다. 지금 도망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오늘 키스는 그야말로 짙고 길었다. 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내가 없을 땐 밖에 나가지 마. 집은 경호원들이 있어서 안전하잖아. 내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
“전 대표님, 혹시 저와 손잡고 일하지 않으실래요?”전연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말해봐요.”데니안이 손을 휘젓자 어둠 속에서 경호원 몇 명이 나와 10개 돈 가방을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열어보니 달러로 가득 차 있었다.“이건 첫인사로 대표님에게 드리는 겁니다.”“저와 마음을 합쳐 일한다면 아마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겁니다. 제가 알기로 전 대표님은 국내외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서울, 아니 화국 전체에서 대표님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전연우가 말했다.“과찬이에요.”“대표님에게 넓은 인맥이 있다면, 저에겐 최고 품질의 물건이 있습니다... 저 강지훈 씨와도 오랫동안 일해왔어요. 제 최고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죠.”“오늘 이렇게 전 대표님까지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인정아가 말을 보탰다.“위험할까 봐 망설인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데니안 씨한테 안전하게 자금을 옮길 수 방법이 있네. 며칠만 지나면 이 돈이 모두 한화로 환산되어 자네 계좌에 들어갈 걸세. 함께 일하겠다고 결정만 하면 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네. 하루에 몇십억 달러도 거뜬히 벌 수 있을 걸세.”“아마 성세 그룹이 가져다주는 수익보다도 훨씬 더 크겠지.”“잠시 손을 놓았을 뿐이지, 이런 일은 자네한테 별로 어렵지도 않지 않은가.”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후 천천히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내 인맥은 확실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어요.”“하지만 사모님께서 잘못 생각하셨어요.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전연우가 일어서자 인정아는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바로 그를 잡았다.“이렇게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게. 이대로 가면 그 후과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르네.”전연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룸을 나섰다.“Fuck.”룸 안에서 남자의 유창한 영어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상 위에 있는 돈 가방들을 모조리 바닥에 뒤엎어버렸다
전연우가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남원 별장 상황은 어때?”기성은이 대답했다.“모두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선 줄곧 별장에 계십니다. 별장을 나서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전연우가 눈을 감고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일단 집으로 가.”그녀가 혼자 집에 있으면 전연우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는 장소월을 최대한 혼자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보호한다고 해도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화실에서 신이랑 소설 주인공 외모에 대해 핸드폰으로 소민아와 상의하고 있었다.전연우가 나간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조명이 돌연 꺼져버렸다.뒷이어 모든 조명이 꺼지고 남원 별장은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 도우미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장소월이었다.“큰일 났어요. 빨리 사모님한테 가봐야 해요.”“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에게 만들어주신 화원에 불이 났어요.”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러 달려나갔다. 그 틈을 타 검은색 그림자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사납게 번지는 불길을 장소월도 발견했다. 그녀가 그 불빛을 빌려 벽을 더듬으며 문밖으로 나갔을 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어렴풋한 윤곽이 그녀 눈앞에 나타났다.“당신 누구예요. 뭘 하려는 거예요?”장소월은 점점 더 다급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이 온몸에 감돌았다.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이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문에 부딪혔다. 상대는 분명 그녀에게 돌진한 것이 틀림없다.문밖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죽여버릴 거야!”장소월은 등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목소리 같았다.또 그 순간 머리 위 조명이 켜지고 복도에서 울리던 소리도 사라졌다.이 문은 전연우가 특별히 그녀에게 만들어준 방범문이다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
소민아도 고모의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뼈에 사무치게 경험해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기성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와 함께하지 않을 수도 없다.예전 회사에서는 시끄럽게 다투기가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에게 벌컥 화를 내며 영원히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그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앞으로 그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예전처럼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엔 가장 싫어했던 일들을 지금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기성은 씨,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3년 뒤면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었잖아요. 기성은 씨는 날 속였어요.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잘 지내고 싶어요.명세진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너무 흉흉해.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겠어. 하, 현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바보 같은 놈이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소민아는 명세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신매매를 하던 암시장 유흥업소 세 곳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량의 금지된 마약 물품이 발견되었고, 면북으로 팔려갈 뻔한 백여 명의 여자들이 구조되었다고 한다.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는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결국 남운 국경 수비대에 붙잡혔다. 마지막으로 밝혀진 정보로는 약물에 완전히 중독되어 몰래 면북 지대로 넘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그 아래에는 한 소녀가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이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장기가 적출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곧이어 휴대폰에 면북 범죄 조직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납치된 사람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