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팀 팀장 연봉이 그 사람 한 달 수입에도 미치지 못한다니까요.”“그만!”기성은이 돌연 소리쳤다.소민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역시 그와는 세 마디 이상 주고받지 못한다.소민아는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는 조용히 핸드폰을 만졌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갓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설을 읽으며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자리에 올려놓았다.“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택시비만큼 돈 드릴게요.”소민아는 핸드폰에 정신을 집중한 채 차에서 내렸다.“소민아 씨!”기성은이 핸들을 꽉 잡고서 소리쳤다.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네?”기성은이 창문을 내렸다.“내 여자친구 해요.”“?”소민아는 온몸이 경직되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한마디 말에 그녀는 호흡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밤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콧등에 떨어져서야 천천히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기성은이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나 도착하려면 35분 정도 걸려요. 내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민아 씨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네요.”소민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복도에 뛰어 들어가 비를 피했다. 그녀는 힘껏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나 꿈꾸는 거 아니지?”소민아는 집에 돌아간 뒤 한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릴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성은의 문자였다.[생각해 봤어요?]소민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가슴을 부여잡았다.“왜 이러지?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죽을 것 같아.”“기성은이 나더러 여자친구가 되어달래. 이게 진짜라고?”“진짜라고?”소민아는 예전 그녀의 잘못으로 몇억이나 손해 볼 뻔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되지는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눌러 보내버린 문자는 망망대해에 뿌린 모래알과도 같이 조금의 파란도 일으키지 못하고 조용히 밑으로 가라앉았다.소민아는 넋이라도 빠진 듯 핸드폰을 안고 있었다. 2분이 지나도록 그는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실은 아직도 기성은이 왜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기성은과 같은 사람에게 조금의 저항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서팀을 포함한 회사 모든 직원들은 그와 한 마디만 섞으면 그거로 하루종일 행복해한다.기성은은 대표님을 제외하고 회사 여직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그는 회사 일을 제외한 사생활을 내비친 적이 없다. 그는 출중한 외모뿐만 아니라 회사 임원들 세 배나 되는 연봉까지 갖추고 있다.유일한 결점이라면 성격이 너무 차갑다는 것이다!너무 냉정해 모든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전 회사에 대학교 퀸카가 인턴으로 온 적이 있었다. 회사 전체를 통틀어 그녀보다 예쁜 여자는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하지만 어느 날 기성은의 발을 밟은 일이 고의로 그의 주의력을 끌기 위함이었다는 게 들통나자 3일도 안 되어 회사에서 쫓겨났다.퀸카는 그렇게 울며불며 회사를 떠났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퀸카는 한 도시 시장의 딸인데 그를 유혹하는 걸 목적으로 들어왔다고 했다.소민아는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고 나서야... 기성은이 자신에겐 그리 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잘못한 일이 어찌 그의 발을 밟은 것뿐이겠는가.기성은은 그녀가 시끄럽다고 나무란 것 외에 다른 건... 정말 불평한 적이 없다.비서팀 사람들 모두가 기성은의 옆에서 일하는 그녀를 부러워했었다.또한... 그녀는 그와 함께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일한 사람이다.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이직을 결심했을 때, 그의 맞은편 자리에서 일하고 있으면 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었다.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설
이번에 보낸 문자도 결국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렸다.소민아는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핸드폰을 안고 방에 들어가 열어보았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답장에 그녀는 이성을 잃고 욕설을 퍼부었다.“진짜 짜증 나. 좀 적극적이면 어디가 덧나나!”“됐어. 잠이나 자자.”그날 밤 소민아는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가도 다시 눈을 뜨고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새벽 3시,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정말 미치겠어요. 내가 왜 비서님과 사귀겠다고 했을까요!][스스로를 괴롭히는 거나 다름없는데!]소민아는 분노에 차올라 미친 듯이 문자를 보냈다.[안 사귈 거예요. 다른 사람 찾아봐요!]그때 답장 하나가 도착했다.[일이 이제 끝났어요. 자요.]헤어지겠다는 소민아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래요. 잘 자요.]그리고... 다음은 없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완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하여 이튿날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피곤한 상태로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얼굴로 마지막 1분에 사무실에 발을 들이고는 책상에 축 늘어졌다.옆에서 누군가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아 씨, 어젯밤 늦게까지 데이트한 거예요? 다크서클 심각한 거 좀 봐요!”“그러니까요! 남자친구 어떤 사람이에요? 듣기론 엄청 잘 생겼다던데 진짜예요?”소민아는 앞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채 희미한 정신으로 말했다.“네? 제가 남자친구 생겼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말한 거예요?”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가왔다.“몰랐어요? 어젯밤 소피아 씨가 소민아 씨와 남자 한 명이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을 단톡방에 보냈잖아요. 사진이 희미하긴 했지만 뒷모습만 봐도 잘생겼던데요!”“맞아요! 민아 씨, 남자친구랑 기 비서님 중에서 누가 더 잘생겼어요?”소민아는 그녀에게 건네주는 핸드폰 속 사진을 보고는 말했다.“아니에요! 이 사람은 엄마가 소개해준 맞선남이에요. 남자친구 아니니까
시계를 보니 정각 아홉 시였다. 소민아는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렸다.“저 30분만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주세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검은색 정장을 입은 기성은이 한 손에 서류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은 채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소민아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어 미세한 발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비서팀에서 소민아를 제외하고는 기성은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감히 근무 시간에 잠을 자다니.기 비서님이 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소민아는 지금 송 부대표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성은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송 부대표는 일을 할 때 전연우에 버금갈 정도로 공포스럽다.그들 역시 늘 괴롭힘을 당하는 소민아를 동정하고 있었다.소민아가 지금 이렇게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건 송시아는 오전엔 거의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 그녀를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소피아는 기성은의 사무실에 들어가다가 엎드려 자고 있는 소민아를 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소피아는 업무 보고를 마치고 다른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11시 30분쯤,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소민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성세 그룹에 어떻게 이런 날로 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또다시 불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조심스레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소민아 씨 아직도...”한 번 든 잠이 점심시간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백혜진이 소민아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 이제 일어나요. 사무실 사람들 다 나갔어요.”소민아는 깜짝 놀라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지금 몇 시예요?”“벌써 점심시간이에요!”백혜진의 시선이 안쪽 사무실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순간 정면으로 마주친 차가운 눈동자에 백혜진은 화들짝 놀랐다.“민아 씨, 저 먼저 식당에 갈게요.”소민아는 얼굴을 톡톡 두드리고는 커피를 한 잔 받았다.
회사 정원에 있는 산책로.“이랑 씨! 회사엔 왜 온 거예요? 제가 여기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소민아는 기쁨보단 놀라움이 더 컸다.신이랑이 눈을 내리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인터넷에서 회사 위치를 검색해봤죠. 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더라고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살펴보니 정말 문자 하나와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있었다.“미안해요. 아까 잘 때 무음으로 해놓았었는데 깜빡했네요. 참, 밥은 먹었어요? 제가 식사 대접해 드릴까요?”신이랑이 말했다.“내가 가져왔어요.”소민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랑 씨...”“내가 직접 만들었어요.”소민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저기...”신이랑은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민아 씨 입맛에 맞춰 만들었어요. 민아 씨가 좋아하는 매운 닭 날개도 있어요...”소민아는 워낙 먹성이 좋은 사람인지라 그 말에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남자가 직접 요리를 해온다는 건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맛있다 해도 그의 마음을 이대로 받을 수는 없다.“이랑 씨, 미안해요... 저 이미 남자친구 있어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인데 제가 많이 좋아해요. 어제 고백받았어요. 정말 미안해요. 이제 이랑 씨 호의 더는 못 받겠어요!”신이랑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그럼... 우리 친구는 할 수 있을까요?”“...”신이랑 같은 거물 작가가 이렇게까지 자세를 낮추다니.“당연하죠. 이랑 씨는 제 중학교 시절 우상이었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다만 조금 놀라긴 했어요. 이랑 씨처럼 대단한 사람은 도도하고 차가운 줄 알았거든요. 이랑 씨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건 제 영광이에요...”신이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래요.”소민아는 그가 상처받았을까 봐 조심스레 말했다.“저희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요. 지금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네.”소민아의 걸음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라 신이랑은 일부러 속도를
소민아는 마지막 5분을 남겨두고 사무실에 도착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맞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린 여전히 친구예요. 저 같은 사람도 남자친구 생겼으니, 이랑 씨는 더 좋은 여자친구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리고 오늘 점심 고마웠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하지만 앞으론 만들어줄 필요 없어요.]대화창에 곧바로 답장이 나타났다.[남자친구 좋은 사람이에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점심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완벽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원래 차갑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에요. 머릿속에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오늘 점심 제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그 사람 자리에 앉았다고 벌컥 화를 내더라고요.][그럼 그 사람이 왜 좋은 거예요?][감정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결점은 많지만, 한 번 좋아하게 되면 그 결점들이 모두 보이지 않게 되거든요.]소민아는 길을 걷다가 돌연 누군가와 부딪혔다. 이마가 남자의 딱딱한 가슴팍에 닿아 얼얼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소피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소민아 씨, 지금은 근무 시간이에요. 오전엔 잠만 자더니, 오후엔 핸드폰 들고 산책이나 하는 거예요?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막 나가세요?”소민아는 태연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워 먼지를 툭툭 털었다.“그 말 왠지 소피아 씨가 날 통제하고 싶어 하는 거로 들리네요?소민아의 시선이 기성은에서 소피아로 향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쏘아붙였다.“소피아 씨가 부대표 자리에 앉으면 다시 얘기해요.”그 말을 끝으로 소민아는 자신의 자리에 걸어가 앉았다. 사무실에서 싸움 구경을 하던 사람들도 얼른 시선을 거둔 뒤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척했다.소피아가 말했다.“기 비서님, 소민아 씨 좀 보세요.”기성은은 차갑게 그녀에게 말했다.“자기 일이나 똑바로 해요.”백혜진은 조용히 소민아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소민아는 송시아와 같은 층에서 근무하
소민아가 물었다.“그런 일이 있었어요? 전 왜 몰랐죠?”“민아 씨가 출장 갔을 때였을 거예요. 당시 민아 씨는 없었어요.”“소피아 씨가 기 비서님에게 얘기하면...”그때 소민아는 확실히 회사에 없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니. 정말이지 해가 서쪽에서 솟아오를 일이다.소민아가 흐뭇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걱정 말아요. 기 비서님은 저한테 해코지 못 해요... 할 수 없죠.”“왜요? 설마 기 비서님이 민아 씨를 계속 비서로 두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소민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그건 알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소피아 씨 좀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요? 눈 달린 사람이라면 다 알 거예요. 소피아 씨가 심심하면 날 건드린다는 걸.]2분 뒤.긴 기다림 끝에 기성은의 문자가 도착했다.[소피아 씨 말이 틀렸어요? 근무 시간에 뭐 하는 거예요? 심심한 건 민아 씨였죠.]소민아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라 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게 무슨 태도예요? 난 기 비서님 여자친구라고요! 어떻게 날 두고 그 여자 편을 들 수가 있어요? 나쁜 사람.][됐어요! 참 대단하시네요. 전 이제 여자친구 안 할래요. 다른 여자 찾아보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그 문자를 끝으로 소민아는 기성은의 연락처를 차단해버렸다.사무실에 발을 들였을 때 마침 회의하러 나가던 기성은과 마주쳤다.그녀는 대놓고 흥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홱 돌리고 자리를 떴다.퇴근 시간, 기성은은 회의를 끝마쳤고, 소민아는 물건을 모두 챙겨 시곗바늘이 정각을 가리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소민아는 가장 일찍 회사를 나서는 직원이었다. 얼마 전부터 30분 연장 근무를 하게 된 프런트 직원들은 그녀의 칼퇴근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회사를 나간 뒤, 소민아는 가방을 메고 확연히 축 처진 상태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무슨
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빙그레 웃어 보였다.“아는 사이 맞아요.”“퇴근했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그건...”그럴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말을 채 마치기 전 회사 정류장을 지나치는 버스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그럼 부탁할게요.”옆에 있던 편집부 직원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저기, 작가님, 제가 이미 차 불러뒀어요. 곧 올 거예요.”“네.”갑자기 이런 행운이?택시가 도착하자 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차에 올라탄 뒤 편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퇴근할 때마다 버스 탔었는데 오늘은 이랑 씨 덕분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네요. 헤헤헤... 고마워요.”신이랑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소민아가 물었다.“이랑 씨, 저희 회사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왔으면서 왜 저한텐 아무 말 안 했어요. 말했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그냥 인터뷰 좀 했어요. 별거 아니에요.”“인터뷰요? 인터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이랑 씨는 신비주의라던데...”신이랑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3일 뒤에 경시 도서관에서 사인회를 열 예정인데, 그날... 같이 가줄 수 있어요?”소민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죠! 저 정말 같이 가도 돼요?”그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손끝이 잘못 스쳐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 순간에도 소민아는 쉴 새 없이 차 안에서 신이랑에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택시 운전기사까지도 귀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신이랑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 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7시 반, 신이랑과 그녀는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그들은 한 중식당에 들어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컵에 물을 따라주자 그녀는 바로 목을 적시고는 말했다.“제가 말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랑 씨가 처음이에요. 제 말을 끊지 않는 사람도 이랑 씨가 처음이고요. 친구들도 제가 말이 많다며 짜증 내거든요.”신이랑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