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그런 권하윤의 모습을 보면서 우스웠다.“스스로 고개를 돌릴래,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강한 힘으로 그녀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돌려놓았다.“그만해, 응?”그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다.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 그럼 네가 거짓말한 일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아까 문자메시지에서 네가…….”그러자 그녀는 화를 내며 말했다.“말하지 말아요. 내가 방금 다 갚았잖아요!”민도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너는 나에게 딱 한 번 갚은 거고, 네가 오늘 한 거짓말이 한 개는 아닌 거로 아는데.”이 말을 들은 권하윤은 순식간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문자메시지에서 딱 한 번 속였잖아요. 다른 거짓말이 뭐가 있죠?”민도준은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톡 찌르더니 더 이상 말이 없었다.차를 몰고 한참이나 달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결국,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민도준을 몰래 쳐다봤다.‘내가 오늘 그를 한 번 이상 속였다고 말하는 걸 보면, 혹시 최수인에 관한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설마, 그가 최수인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약 믿지 않는다면 왜 나에게 더는 묻지 않지?’민도준은 별장에 가려다가 중간에 전화를 받고 길을 바꾸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차가 멈추자 하윤은 아주 빠르게 말했다.“민 사장님께서 친히 저를 데려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녀가 막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민도준에게 다시 잡혔다.뜨거운 키스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고 그녀는 호흡곤란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풀려났다.“잘 들어가.”그의 허락을 받은 하윤은 빠르게 달려갔다.그 모습을 민도준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어린 애가. 겁도 많은 게 꾀도 많아.’차에 시동을 걸며 그는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이 받지 않자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일고여덟 번
최수인은 권하윤이 그 자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어봤다.“그때 내가 도준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당신도 거기 있었죠?”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태연한 척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 비밀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전에 말했듯이, 나는 직업윤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최수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돈이 필요하면 도준한테 주라고 하면 되지 않나? 이백억은 그에게 전혀 큰돈이 아니에요.”“설마 도준이 안 주는 건 아니겠죠?”하윤은 미소를 지었다.“민 사장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요.”최수인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은 분명히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는 하윤을 쳐다보더니 두 눈이 점점 커졌다.“그럼, 당신이 나한테 와요. 나는 도준보다 대범하니까!”“확실해요?”민도준의 여자를 뺏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최수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둘은 어차피 길게 만날 수 없으니까 어쨌든 내가 먼저 줄을 설게요.”하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귀에 거슬렸다.그녀는 남은 차를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가볼게요.”최수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접시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찻주전자를 들고 책상에 놓인 족자 상자를 훑었다.“당신도 참 신중하네요.”“연기하려면 반드시 진짜처럼 해야 해요.”하품을 하자 최수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래요. 소식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요.”하윤이 일어나자마자 그가 한마디 더 했다.“만약 생각이 바뀌어 나한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생각해 볼게요.”그녀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해서 최수인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그녀가 떠난 뒤, 그는 감탄했다.“어쩐지 도준이 흥미를 느끼더라니, 확실히 재미있긴 해.
강수연의 비난 섞인 말을 권하윤은 변명 하나 없이 다 받아들였다.“어머님 말씀이 다 맞아요. 제가 요 며칠 승현 씨를 보살피는 것이 확실히 부족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머님께서 괜찮으시면 승현 씨에게 전화해서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해 주세요. 그러면 저도 그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강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승현이 여기서 안 살면 어디서 살아?”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님 아직도 모르고 계세요? 며칠 동안 승현 씨는 민정 씨 집에서 잤어요.”“뭐야?”순간, 강민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러나 그녀는 곧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왜 헛소리를 하세요. 오빠가 언제 우리 집에서 잤어요?”“권하윤! 너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한 거야?”“이모, 화내지 마세요. 새언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강민정은 마치 정말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훌쩍거리며 말했다.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바로 휴대전화에서 사진 몇 장을 찾아냈다.“아가씨, 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이건 아가씨가 직접 SNS에 올린 거잖아요.”[오늘 오빠한테 저녁을 해줬는데 오빠가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해 줬어요.][천둥 칠까 봐 무서워요.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강민정의 SNS에는 둘의 다정한 모습이 거의 매일 올라와 있었다. 일부 사진은 둘이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이를 보고 있던 강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윤이 한 장 한 장 사진을 내밀자 강민정의 얼굴빛이 갈수록 하얗게 변했다.이 사진들은 모두 그녀가 일부러 하윤에게 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수연은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했다.“민정아, 너와 승현은 비록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지만 이제 둘 다 어린아이가 아니야. 마땅히 거리를 두어야지. 이렇게 늘 오빠에게 달라붙어 있으면 되겠니?”“네? 저는…… 네…….”“잘못했어요, 이모.”강민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잘못
르네시떼.“판매자는 뭐라 그래요?”최수인이 전화를 하고 오기 바쁘게 마스크를 쓰고 있던 강민정이 다급하게 캐물었다.그녀가 이렇게 다급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권하윤이 그녀와 민승현 사이를 꼰지르는 바람에 강수연의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지람보다 더 두려운 건 강수연이 강씨 가문을 들먹인 거다.오랫동안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뉘앙스의 말.몇 년 동안 남에게 얹혀살던 강민정은 본가를 입에 올리는 걸 매우 꺼려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강수연 곁에서 자랐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본가로 돌아간다는 건 추방이나 다름없었다.더욱이 강민정은 불임이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혼인을 유지하기 위해 임신한 척 입양했던 아이였으니 따지고 보면 진짜 강씨 집안 사람도 아니었다.그 때문에 그녀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민승현과 잠자리를 가졌다.그리고 순진하게도 민승현과는 피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니 그가 자기를 좋아하면 결혼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영원히 민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그런데 점차 자기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강수연은 강민정이 본인의 여동생이 가짜 임신으로 데려온 아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할 일은 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민승현이라는 동아줄을 꼭 붙잡고 있는 거다.혹은 민도준이라는 동아줄을 잡거나.하지만 이 모든 건 지금의 일을 해결한 뒤에 생각할 것들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민씨 집안에서 본인의 입지를 다지는 거였다.때문에 그 그림을 “찾아오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다.…….강민정이 다그치는 듯 쳐다보자 최수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판매자는 직접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아요. 물건은 저한테 있으니 돈만 가져오면 바로 내어드리죠.”‘나타나지 않으려 한다니…….’그렇다는 건 강민정이 200억이라는 큰돈을 무조건 내놓아야 한다는 소리였다.르네시떼를 빠져나온
민승현이 떠나간 뒤 민도준은 또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창가에 서있는 그의 눈에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민승현의 모습이 보였다.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민승현의 뒷모습을 보자 불현듯 예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권하윤이 자기와 관계를 가진 뒤로 민승현과 관계를 맺은 적 있는가라는 생각.그리고 언뜻 전에 민승현을 너무 사랑해서 지금 더 밉다고 하던 권하윤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권하윤은 그를 건드리면서까지 민승현한테 복수하려 했고.‘그러니까 나랑 바람피우면서 한편으로는 민승현과도 지지고 볶고 한다 이건가? 내가 조연이 된 거네.’민도준은 혀로 볼을 꾹 밀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광기가 언뜻 지나갔다.그리고 더 이상 고민도 하지 않고 차 키를 집어들더니 곧바로 아래층으로 나려 갔다.초인종이 울릴 때 권하윤은 와인을 마시며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그녀는 이 순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솔직히 강민정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본색을 드러내게 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제 발로 함정에 빠질 줄은 몰랐다.따뜻한 물속에서 기분 좋은 생각을 하니 권하윤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도 더 편안했다.하지만 그런 편안함은 다급한 초인종 소리에 깨져버렸다.민승현이 따지러 돌아왔나 하는 생각에 기쁜 심정이 모두 사라진 권하윤은 대충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민승현, 너…….”하지만 문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녀는 경악했다.“도, 도준 씨가 여기엔 왜 왔어요?”할 말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그녀는 민도준의 손에 이끌린 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집안으로 들어온 순간 뜨거운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권하윤의 얼굴과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쇄골이 민도준의 눈에 들어왔다.민승현을 반기기 위해 권하윤이 일부러 이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미소는 더욱 섬뜩해졌다.권하윤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순간 어깨로 옮겨지더니 엄지로 그녀의 쇄골을 느긋하게 만져댔다.“나는 오면 안 되나?”권하윤은
권하윤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파에 앉아 계세요. 제가 술 갖고 올게요.”민도준이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자 권하윤은 그제야 안심하고 위층으로 햔했다.술을 가지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당장 옷을 갈아입는 게 더 시급했다.샤워가운을 입고 민도준과 함께 있는다는 건 마치 늑대 앞에서 배를 까고 누워있는 토끼랑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하지만 가운을 벗고 갈아입을 옷을 손에 든 순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권하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다급히 옷으로 가슴을 가렸다.“왜 들어왔어요!”민도준은 노골적인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누가 왔다고 알려주려고.”“누가 왔다고요?”권하윤은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옷을 걸쳤다.그 모습을 대놓고 지켜보던 민도준은 더 이상 볼게 없어지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분명 민승현이 돌아왔을 텐데. 큰일이네.’권하윤은 순간 조급해났다.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민도준은 아무 일 없는 듯 욕조 쪽으로 다가가 물을 손으로 휘젓더니 손가락 사이에 꽃잎을 끼운 채로 들어 올렸다.“둘이 같이 목욕이라도 하려고 했나 봐?”처음에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권하윤은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그녀는 민승현과 다른 방을 사용해왔고 민승현도 그녀 방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기에 민도준이 이 안에 숨어 있기만 한다면 발견될 리가 없었다.생각을 마친 권하윤은 시선을 민도준 쪽으로 돌렸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셔츠는 어느새 뜨거운 열기에 나른해졌는지 몸에 달라붙어 잘빠진 근육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다급하게 다가가 상의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혹시 계속 여기 숨어있으면 안 돼요? 저 민승현 바로 돌려보낼게요. 약속할게요.”“음?”민도준은 손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털어버렸다.“무슨 뜻이야? 나더러 상간 남처럼 욕실에 숨어 권하윤 씨 약혼남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그가 말하면 말할수록 권하윤은 마음이 불편해졌다.민도준을 상
‘욕실에 사람이 숨어 있는데 당황하지 않을 리 있어?’권하윤은 감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내가 뭘 또 당황했다고 그래? 너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지.”민승현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린 채 권하윤을 쳐다봤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요즘 들어 나한테 매번 맞서더니 이렇게 쉽게 돈을 내놓는다고? 설마…….’권하윤은 켕기는 구석이 있기에 민승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뭔가 들킨 건 아닌지 불안했다.심장은 점차 소리를 키우면서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너…….”민승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권하윤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시각 권하윤은 시선을 욕실에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는 들키게 되면 어떻게 상황을 수습할지 궁리했다.“너 설마 이 돈으로 나 협박하려는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그제야 평정심을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너무 말문이 막혀 마른침을 두어 번 삼킨 뒤에야 자기 목소리를 되찾았다.“내가 널 협박할 게 뭐가 있어?”시치미를 떼는 권하윤의 태도에 민승현은 코웃음을 쳤다.“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너랑 합방하자고 협박하려는 수작이겠지.”“…….”‘고작 십몇 분이면서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그게 몇십억 가치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어이없어하는 권하윤과 달리 두 사람이 아직 합방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들리는 순간 민도준의 눈에 있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윽고 욕실 문쪽을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마저 멈췄다.‘하, 그러니까 두 사람 아직이라는 거네?’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욕실 안을 빙 둘러봤다. 좁은 욕실 안 벽면에는 핑크색 수건이 걸쳐져 있었고 세면대에는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세면도구만 있었다. 그것만 보면 이 공간은 이미 결혼한 여자의 욕실 같지 않았다.한편, 밖에서는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걱정 마. 난 너랑 너의 거기에 관심 없어. 돈 가졌으니 그만 가.”권하윤은 팔을 쭉 뻗은 채 카드를 민승현에게 쥐여주고는 더 이상 그와는 접촉하
권하윤은 갑자기 덮쳐오는 민승현의 동작에 놀라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민승현! 너 어디 아파? 발정 났으면 강민정 찾아가. 나 귀찮게 하지 말고!”민승현은 남성의 존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권하윤의 거절도 무시한 채 그녀를 침대에 눌렀다.권하윤이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고 있을 때, 욕실의 스크럽 유리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그 모습을 본 권하윤은 민도준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놀란 나머지 몸을 흠칫 떨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고리가 점점 돌아갔다. 마음이 조급해난 권하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뿜어 나왔는지 민승현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찼다.“아!”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민승현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웅크렸다.권하윤은 가장 빠른 속도로 욕실 쪽으로 달려가 문과 등진 채로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민승현이 이상함을 눈치챌 거라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내가 아무리 네 약혼녀라도 네가 날 강요할 수 없어!”민승현은 그제야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한번 대차게 걷어차이고 나니 흥미도 바로 식어버렸다. 오히려 권하윤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노가 담겼다.“너 딱 기다려!”집을 떠날 때도 민승현은 문을 일부러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그가 떠나는 순간 권하윤의 몸은 힘이 쭉 빠졌다.욕실 문이 그녀의 등 뒤에서 천천히 열리더니 힘찬 팔이 그녀의 비틀거리는 몸을 끌어안았다.“놀랐어?”권하윤은 버둥거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의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아직도 민도준이 하마터면 민승현과 마주칠 뻔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승현이 본인 침실 문을 쾅쾅 거리며 닫은 뒤 떠나가는 소리고 나서야 권하윤은 방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그 시각 민도준은 아까와는 정반대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권하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