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 가도 된다고 했지?”민도준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먹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너무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남자의 행동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권하윤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그러던 그때 민지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 집 음식이 맛은 괜찮지만 실내 인테리어가 별로네요. 다음번에 경인 지역으로 가요. 그쪽에 있는 레스토랑 음식 맛도 좋고 인테리어도 괜찮거든요.”권하윤은 자기가 어색해 할까 봐 민지훈이 일부러 분위기를 풀려고 끼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엇기에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일이 있은 뒤 민지훈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형 이번에 동림 부지 입찰 내놓을 생각이었어?”동림 부지는 정책적인 지원을 받는 곳이기도 하고 재개발구역이기도 하기에 큰 고깃덩이나 마찬가지였다.때문에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 눈독 들였고 민씨 가문 사람들도 당연히 그중 하나에 속한다.심지어 그 부지를 차지하려고 민상철이 직접 사람을 보낸 걸 보면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담판에 성공할 기미가 보였지만 그때 마침 민도준이 끼어들어 그 땅을 먹어버렸고 민씨 가문 전체와 척을 지는듯한 민도준의 행동으로 인해 그와 식구들의 관계는 더욱 미묘해졌다.특히 지난번에 민도준에게 협력을 제안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민상철은 당연히 그가 직접 부지를 개발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입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새어나갔으니 민씨 집안사람들은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다.민지훈의 말에 민도준은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할 말 있으면 해.”민지훈은 민도준의 이런 성격이 이미 익숙한 듯 말을 이었다.“경제력과 인맥으로 따지면 경성에서 민씨 가문을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잖아. 입찰자를 모집하겠다면 아무래도 같은 식구한테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겠어? 같은 식구면 일하기도 편리하고 지분 나누기도 쉽고. 누가 벌어도 다 버는 거잖아.”여기
“급할 거 뭐 있어?”민도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그전에 계산할 거 먼저 계산하자고.”권하윤은 그의 말에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지금 민도훈이 따지려 드는 일을 생각해 보면, 그가 빌딩 한 채 손해 보게 한 거, 그의 이름을 빌려 사람을 속인 거, 그리고 민지훈을 보는 순간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도망간 거, 이 몇 가지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자 권하윤은 결국 먼저 뉘우치는 태도라고 보여야겠다고 결심했다.“잘못했어요.”그녀는 감히 민도준을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목소리는 되도록 진심이 묻어나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하지만 귓가에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고개 숙이고 뭐해? 내가 사람 들 앞에 내놓지 못할 내연남이라서 그래?”‘민도준을 내연남으로 대한다고?’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찌근거렸다. 그리고 얄팍한 수단은 더 이상 소용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곧바로 의자를 민도준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에게 바싹 붙었다.두 의자가 틈도 없이 꼭 붙자 권하윤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돌아봤다.“저 그런 뜻 아니에요.”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손을 올렸다.그 행동에 놀란 권하윤은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러던 그때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들어갔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는 마치 검은빛을 내는 비단 같았다.그러던 그때, 부드럽게 권하윤의 머리 뒤까지 흘러간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두피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쳐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깨끗한 얼굴은 순간 남자의 시선 아래에 훤히 드러났다.고통스러운 표정에는 마치 학대를 당하기라도 한 듯 연약함이 묻어있었다. 민도준은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눈빛은 여자의 눈썹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더니 입술, 그리고 목덜미에 닿았다.
바로 뭐라 받아치려던 순간 권하윤은 자기가 지금 권씨 집안 넷째라는 걸 인지했다. 권하윤 신분이라면 그녀가 할 줄 아는 게 확실히 없었다.그녀의 침묵에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생각났어?”남자의 물음에 권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저한테 별장 열쇠도 주셨잖아요. 그러니 우리 거기 가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안돼.”만약 상대가 민도준이 아니고, 마침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빌딩 한 채를 빚지지 않았다면 권하윤은 아마 당장에 욕설을 퍼부었을 거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녀는 그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민도준의 도움이 필요했다.천천히 일어나는 그녀의 동작에 의자가 뒤로 밀렸다.기왕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그녀가 오늘 입은 옷은 연보라색 원피스였다. 그리고 그 안에 같은 색 계열의 실크 슬립을 받쳐 입었다.겉에 입은 치마를 벗자 슬립에 가려진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어느 한 군데라도 민도준의 손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권하윤은 일부러 자기 몸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치 보지 못하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기라도 하듯이.의자에 앉은 민도준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여자를 흥미롭게 바라봤다.“계속해.”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을 힐끗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에 미처 읽지 못한 감정이 언뜻 지나갔다.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나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품 속에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권하윤은 어느새 손발을 그에게 두르며 품에 안기더니 약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여기서 무서워요. 우리 가면 안 돼요?”잠시 뜸을 들인 뒤 민도준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불쌍한 척하는 데 아주 도가 텄네.’지금도 보면 권하윤은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머리를 그의 품에 묻은 채 계속 파고들어 그를 간지럽혔다.민도준은 아무 감정이 없는 듯 그녀를 밀어냈다.“놔.
“내가 잘못했어요. 안 따라 갈래요.”“차 세워요. 얼른 차 세워…….”점점 가까워지는 정문을 쳐다보던 권하윤은 조급해진 마음에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민도준과 같이 민씨 저택 안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아마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녀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웃음 띈 음성으로 말했다.“나랑 헤어지기 섭섭한 거 아냐? 설마 나를 속인 거야?”제 발등을 찍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하윤은 오늘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순진한 그녀를 탓할 밖에. 두세 마디 말로 민도준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정문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민도준은 차를 세울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사장님이 오늘 작심하고 그녀를 데려왔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더 이상 매달리길 포기했다.마지막 코너를 도는 순간 결심한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공간을 통해 뒤 좌석으로 넘어갔다.입고 있던 스커트가 올라가며 다리와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운전석으로부터 희롱 섞인 눈빛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네 발로 기듯이 넘어갔다.뒤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밖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사장님, 오셨습니까?”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틈새에 웅크린 하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다행히 창에 선팅이 되어있는데다 제때 숨은 까닭에 정문 앞의 경비 요원은 차 뒤 공간에 엎드린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인사하며 문을 연 경비원이 허리를 굽힌 채 민도준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거대한 민씨 저택은 본채과 별채로 되어 있었다. 또 사방을 에워싼 넓은 숲에는 여러 양식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저택 안으로 들어선 검은색 부가티는 몇 바퀴를 돌고서야 야외 주차장에 멈춰 섰다.주차장에 있던 경비 요원이 앞으로 나와 차문을 열었다.“사장님, 오셨습니까?”차에서 내린 민도준이 새카만 차창을 힐끔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차가 멈추자, 민승현이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주 조급한 표정이었다.경비 요원이 나오며 인사했다.“오셨습니까? 세차를 하시겠습니까?”민승현의 이름을 들은 권하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할 수 있는 건 겨우 숨을 죽인 채 민승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민승현이 권하윤이 숨어있는 차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둘째 형이 왔습니까?”“네, 방금 들어가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민승현은 더 당황스러웠다.바로 30분 전에 직접 할아버지로부터 즉시 본가에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께서 그를 찾으시는 바람에 이미 좌불안석이었는데, 둘째 형도 와 있다니.민승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안은 매우 조용했다.다리를 꼬고 앉은 민도준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착 가라앉은 표정의 민 노인은 손에 든 염주를 쥐고 있었다. 민승현이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할아버님, 둘째 형.”“승현이 왔냐?”민 노인이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예, 할아버지께서 찾으셨잖아요?”민도준을 한번 쳐다본 민 노인이 민승현에게 말했다.“승현아, 네가 회사에 들어간 지도 꽤 됐지? 또 최근엔 약혼도 했고. 이제 혼자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 너를 당분간 둘째에게서 좀 많이 배우게 할 생각이다. 너의 미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게야.”“네?”민승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민도준한테서?!!’사업을 배울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속으론 아연실색하면서도 감히 거절 못한 채 헛웃음만 나왔다.“회사에서 아직 처리 다 못한 일들이 좀 있습니다. 처리 다한 뒤에…….”민 노인의 눈빛이 지나가자 민승현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네 둘째 형이 최근 동림 입찰 건으로 애쓰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네가 마침 네 형을 돕는 게 좋겠다.”민 노인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압박감을 느낀 민승현은 감히 거절하지 못한 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예, 할아버지.”“그럼 얘기 끝난 건가요? 끝났으면 갈게요.”
아무 것도 모르는 민승현은 민도준이 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꼼짝도 않는 것을 보고는 그저 차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침 교대한 경비원이 앞으로 나와 민도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차문이 열리자 밤바람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차 안으로 들어왔다.운전석 뒤 빈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권하윤은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민승현은 그녀에게서 10센치도 안되는 거리에 서있었다. 그가 몸을 조금이라도 낮춘다면 그의 형의 차에 숨어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권하윤이 긴장한 것과 달리, 민도준은 담배를 물고서 느릿느릿 걸어왔다.그리고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편한 대로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그가 차를 타지 않자 민승현도 꼼짝없이 차문을 열어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서 있었다.저녁 바람에 실린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온 담배 냄새가 권하윤의 가련한 심장을 칭칭 감았다.여러 차례 놀라서인지 공포심에 마비된 것 같았다.담배 반 개비를 태우는 시간이 권하윤에게는 한 세기의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민도준이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너 먼저 가. 난 뒤에 찾을 물건이 있어서.”아무런 의심 없이 민승현은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그가 오늘 운전한 차는 오픈 스포츠카였다.색상과 내부 장식 모두 강민정이 골라 준 것으로 족히 몇 달은 기다렸다.차를 뽑는 날, 강민정은 발을 삐어서 가지 못하게 되었다.당시 권하윤은 여전히 일에 열심이고 그와의 관계도 지금처럼 나쁘지 않아서 그녀를 데리고 차를 찾으러 갔다.그런데 강민정이 난데없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차에 좌석은 두 개밖에 없는데다 강민정의 ‘다리 부상’이 낫지 않아서, 결국 권하윤은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강민정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당시 권하윤은 민승현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게다가 강민정은 그의 사촌 여동생이었기에 불결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민승현이 그의 약혼녀가 몇 걸음 내, 바로 그의 눈앞에서 자신의 형과 시시덕거릴 줄은 생각
3초, 권하윤은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머리가 텅 비며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손바닥의 감촉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분명 그녀가 정말로 민도준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지금 이 순간, 하윤은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 난 고의가 아니었어요. 차 안이 너무 좁아서,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어두운 차 안에서도 혀끝으로 입술 끝을 쓸어 올리는 민도준이 보였다. 그 눈동자는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깊었다.탕!차문을 닫는 소리에 하윤이 깜짝 놀랐다.“제대로 앉아요.”말이 떨어지자 마자 민도준이 가속페달을 밟았다.……“오빠 왔어요?”민승현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민정이 아주 친밀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할아버지가 뭐 때문에 찾으신 거예요?”심신이 지친 민승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말도 마.”그가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해 주자 강민정 역시 당혹스러웠다.“그래서 할아버지는 오빠더러 도준 오빠를 설득하라는 거야? 아니면 도준 오빠를 감시하라는 거야?”“쉿.”민승현이 급하게 말을 끊었다.하지만 이미 집에 돌아왔고 더 이상 꺼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났다.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초조하고 불안했다.“누가 알겠어, 정말 짜증나 죽겠어.”“됐어.” 그의 옆에 붙어 앉은 강민정이 이해심이 많은 듯이 권유했다.“오빠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오빠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 했잖아. 지금 기회가 온 거야. 오빠가 도준 오빠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집안에서 오빠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질 거야.”“형을 설득해? 농담하는 거지?”민승현은 희망은 1도 품지 않은 채 의기소침하게 말했다.“민도준이야. 형이 뭘 하고, 안 하고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어?”전혀 얽매임 없던 민도준의 얼굴을 생각하던 강민정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나도 가서
스커트 허리부분에 달린 가느다란 끈으로 그녀의 발목을 침대 발치의 기둥에 묶고는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도망갈 곳이 없었다.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목 옆을 짚고 있는 벌꿀 빛의 팔은 혈관이 팽창해 있었다어깨와 목의 근육들이 팽팽히 당겨졌다 또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넓은 등이 조명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는 가릴 수 없었다.열기를 담은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귓가에 웃음기 섞인 음성이 들렸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하윤을 절망스럽게 할 뿐이었다.“조급해하지 마. 밤새도록 울 시간은 충분해.”……쾅-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더니,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며 유리창을 타고 흘러 내렸다.하윤은 천둥소리에 잠이 깼다.눈꺼풀이 무거운 듯 눈이 떠지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혼몽한 상태였다.몇 번이나 노력하고서야 그녀는 천근만근처럼 여겨지는 눈꺼풀을 끌어올렸다.낯설면서도 익숙한 방은 이곳에서 있었던 하윤의 기억을 모두 깨웠다.어젯밤의 기억, 그리고 예전의 기억도.지난번 약에 취한 그녀를 민도준이 해독시켜 줬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별장.어슴푸레한 창 밖을 보고 아직 새벽인 줄 알았는데,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알림 표시줄에 문자 두 건이 떠 있었다.첫 번째 문자는 문태훈이 보낸 것이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권하윤 씨가 약속을 꼭 지키기를 바랍니다.]두 번째 문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몸이 더 쑤시는 듯했다. [점심에 블랙썬으로 도시락 배달!]하윤의 눈 흰자위가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밤새도록 죽을 만큼 시달렸는데 또 노비처럼 도시락까지 배달하라고? 하, 수레 끄는 노새도 이렇게 힘들진 않을 거야.’원망은 원망이고, 결국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녀다.게다가 그 그림이 200억 가치가 되는지 그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안 된다면 민도준이 금주 아빠 지원으로 그녀에게 빌려 주어야 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