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민도준에게 온다는 사실을 강아련에게 말한 민승현은 권하윤의 설명에 납득했다.“그래도 전화라도 하고 왔어야지.”민도준 쪽을 바라보며 하윤은 치솟는 화를 참고 말했다.“당신과 형님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까 봐 음식을 준비해 온 거예요. 만약 일에 방해가 된다면 지금 바로 갈게요.”“잠깐.”민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그가 입을 떼자 민승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방만한 포즈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민도준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이왕 제수씨가 가져 왔으니 그냥 계세요.”두 쌍의 눈이 서로 부딪혔다. 화가 치미는 한 쌍과 흥미진진한 눈빛의 한 쌍이.“하하하, 형님이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두 사람 사이의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민승현이 민도준을 향해서 아부하듯이 웃었다. 그리고 하윤을 향해 돌아서서는 다시 큰 소리로 지시했다.“너 아직도 거기서 뭐해. 빨리 음식 차리지 않고.”하윤이 가져온 도시락에는 탕 하나에 요리 4개가 담겨 있었다. 포장을 열자마자 오전 내내 굶었던 민승현은 즉시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그러나 채소 위주의 요리들을 본 그의 얼굴이 또 다시 찌푸려졌다.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일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는 것도 두 가지나 있었다.“아니 도대체 음식을 어떻게 고른 거야? 내가…….”“맛이 괜찮네요.”민도준의 한 마디는 민승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더 이상 평도 못하고 목을 움츠린 채 도시락을 들었다.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하윤은 민도준만 있는 줄 알고 자신의 것과 2 인분을 주문해 온 터였다.민승현이 의심할까 봐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한쪽 소파에 앉아서 사무실이라고 하는 곳을 살폈다.이 방의 인테리어는 블랙썬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늘어난 사무용 데스크와 컴퓨터로 겨우 사무 공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콜록콜록…….”밥을 먹다 고추에 사레가 들린 민승현이 계속된 기침에 입을 가리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권하윤! 휴지 줘!”식탁이 없어 사무
권하윤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오빠, 도준 오빠, 바쁘시죠?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문밖에서 들리는 애교를 띤 여자 목소리에 민승현이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인 것 같아요.”마침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던 민도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하윤을 쳐다보았다.“오늘 정말 번잡하네.”민승현이 억지웃음을 웃었다.“하하, 방금 민정이가 근처에 있는데 먹을 것들 좀 갖다 주겠다고 해서, 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지금 바로 돌아가라고 할게요.”문밖에서 손에 보온 도시락 몇 개를 들고 서있는 강민정은 스커트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에 흘러내려와 있었다.“오빠.”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본 민승현은 문을 열고 가라고 하려는 원래 생각을 잊어버린 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된 거야, 왜 온몸이 다 젖어 있어?”강민정이 보온 도시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빠가 도준 오빠와 밥을 못 먹고 있다고 해서, 제가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급하게 나오다 우산을 못 챙겼어요.”“너는 어째 항상 이렇게 잘 빠트리니?”나무라는 듯하지는 애정이 가득한 말투였다.민승현은 젖은 옷을 입고 돌아가야 할 강민정이 안타까우면서도 또 마음대로 남아있게 할 수도 없었다.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쳐다봤다.“형, 봐, 민정이 옷이 다 젖었어. 이렇게 돌아가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잠시 들어와서 옷 좀 말리고 가라고 하자.”강민정은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민도준이 거절할까 봐 겁이 났다.그런데 뜻밖에도 민도준이 생각지도 못한 친절을 베풀었다.“그래,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감기에 걸리면 안 되지. 들어와.”말을 하면서 민도준의 시선이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는 하윤을 스쳐 지나갔다.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윤은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떤 반응도 하고 싶지 않았다.실내의 상황을 보지 못한 강민정은 자신의 계략이 성
“아.”강민정은 자신의 옷이 그대로 다 비치는 걸 인제 발견한 것처럼 가슴을 감싼 채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옷이 왜 이렇지. 방금 도시락 안 젖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옷이 젖는 것 생각도 못했어. 아이 정말, 창피해서…….”“괜찮아, 형과 내 어디 남이야? 모두 한 가족인데 뭐. 괜찮아.”민승현은 민정을 달래면서 또 권하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말이 너무 듣기 싫었던 거였다.“너는 생각이 왜 그 모양이야? 민정인 내 사촌 여동생이고, 자연히 형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한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아, 당신이 말하지 않았으면 정말 잊고 있을 뻔했어요. 맞아요. 민정 씨는 당신의 사촌, 여동생이죠.”뒤의 세 글자를 하윤이 또박또박 말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굳었다.“권하윤! 너 이상한 소리하지 마!” 하윤이 비웃으며 말했다.“나와 여기서 싸우는 시간에 얼른 당신 사촌 여동생을 집에 데려다 주는 게 여기서 말리는 것보다 빠르지 않겠어요?”하윤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단지 민도준의 지시가 없어 가겠다고 말하지 못할 뿐이었다.그가 말하지 못할 거란 것을 알고 있는 하윤이 연극을 보는 듯한 민도준을 향해 돌아섰다. 미소 띤 얼굴 아래 이를 갈면서 말이다.“도준 오빠?”강민정 역시 민도준을 쳐다봤다. 정말 어렵게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았는데 권하윤의 말 몇 마디에 놓치게 생겼다.입술을 깨문 채 민도준을 쳐다보는 그녀는 남아 있어라고 그가 말해 주길 간절히 바랬다.애석하게도 민도준은 그녀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눈에 흥미로운 빛을 담고 자신을 죽이지 못해 분해하는 권하윤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나도 피곤해. 오늘은 여기까지.”민승현은 한숨을 돌렸지만 강민정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민승현을 따라 밖으로 몇 걸음 걷다가 권하윤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언니는 같이 안 가요?”민승현이 뒤의 상황을 알아채고 짜증을 냈다.“너 왜 아직 버티고 있어? 형이 바쁜 거
이 자세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젯밤 한참을 시달린 하윤은 감히 더 이상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속에서 또 화가 치밀었지만 말하지 않고 가만히 참았다.“꽤 성깔이 있네요.”민도준은 기분이 좋은 듯 그녀와 따지지도 않았다. 단지 손에 힘이 좀 더 세어졌다.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하게 움직였다.“또 나랑 하고 싶은 거예요?” 낮은 웃음소리가 다소 경박하게 들렸다.하윤이 그가 한 말에 반응하며 팔걸이를 짚고 일어섰다.몸을 조금 들어 올리자마자, 어깨가 눌러져 도로 주저앉았다.“뭐에요?”이 말은 분명 참을 수 없었다.오늘의 목적을 생각한 하윤이 다시 앉았다.테이블을 마주 보도록 앉아있던 의자를 반 바퀴 돌렸다.“밥 안 먹은 거 아니에요? 먹어요.”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남은 밥은 잘 안 먹어요.”“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민도준이 말하는 것은 강민정이 가져온 도시락이었다.보온통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음식은 아직도 따뜻하다.몇 가지 음식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꽃 모양의 당근을 보니 여간 신경을 쓴 게 아닌 것 같았다.한참을 바쁘게 만든 음식이 결국 하윤의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강민정이 알게 된다면 아마 화가 나 뒤로 넘어갈 것이다.여기까지 실랑이하던 하윤도 배가 고파서 앞의 남자를 무시한 채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음식 맛이 달짝지근하고 좀 느끼해서 몇 입 먹던 하윤이 물병으로 손을 뻗었다 중간에 컷 되었다.그녀의 가슴 앞을 가로지른 손이 생수 병 뚜껑을 비틀어 그녀 입술 앞까지 내밀었다.“마셔.”이런 친절에 적응이 안 된 하윤이 물병을 건네 받으려 했다. “내가 마실게요.”손목이 내려가고 물이 가슴으로 쏟아지며 커다란 물자국이 옷에 번졌다.“당신…….”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병 입구가 또 다시 그녀의 입술에 대어졌다.“자, 마셔.”거절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민도준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을 먹여줬다.몇 모금 마신
민도준이 씨익하고 웃었다.큰 손으로 하윤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한민혁에게 당신 데리고 옷을 사러 가라고 하지요.”이때의 그는 사나운 기운을 벗고 다정한 애인처럼 군다.그가 기분이 좋은 것을 본 하윤은 돈을 빌리는 얘기를 꺼낼까 생각했다.그가 손을 뗐을 때, 하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목은 그녀의 작은 손으로는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다.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뜨며 물었다. “왜? 잘못 알았어?”아무렇게 대답한 하윤은 내친 김에 그의 팔을 끌어안고서 고개 들어 간절히 바라보았다.“한민혁에게 나하고 같이 가라고 하면, 그럼 당신은요?”‘이 여자가 또 내 기분을 맞추려고 하네.’하윤이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또 그에게 부탁할 게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소파에 앉아 다리를 치켜들었다.“나는 아직 일이 남았어요.”“아.”그의 옆에 앉은 하윤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머릿속 주판알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민도준이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뭘 궁리하는 거예요?”“어?”하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아무 생각 안했는데요.”민도준이 피식 웃었다.“꼬리도 제대로 숨길 줄 모르면서 무슨 여우가 된다고, 응?”하윤은 좀 민망했다. 하지만 기왕에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후에도 입을 열기가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어투를 고르며 말했다.“사장님, 요즘 사업은 어때요?”이것은 쓸데없는 말이었다.민도준은 경성의 거의 모든 지하 사업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민씨 집안도 어느 정도는 그를 두려워할 정도였다.장사가 잘 되느냐고 묻는 것은 해가 밝으냐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마침 그녀의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민도준이 그녀의 말을 듣더니 손을 멈추고 놀리듯이 웃었다.“돈이 필요해요?”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데, 그 부드러운 음성에 하윤은 그만 목이 메어왔다.잠자코 등을 곧게 펴고 앉았다. 표정도 진지해졌다.“만약 당신에게
한민혁이 말한 상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까닭에 몇 분 안 되어 도착했다.가는 내내 한민혁은 백미러를 쳐다보며 수시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권하윤이 주차를 하려고 할 때 한민혁은 먼저 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었고, 그녀가 주차를 마치자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우리는 LV에 가는 거예요, 아니면 샤넬에 가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미니어처 커스터마이징 브랜드가 따로 있나요?”회전문으로 들어가니 백화점 특유의 향기가 ‘어서 오세요'라는 글자와 함께 불쑥 다가왔다.하윤은 직원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한민혁을 바라봤다.“이곳이 익숙한 것을 보니 민 사장님 여자 친구들을 데리고 자주 오시나 보죠?”한민혁은 그녀의 말 속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웃었다.“아닙니다. 제 어린 여자 친구에게 배운 거예요. 우리 도준 형은 아무리 주변에서 유혹해도 순결을 지키는 분이시죠.”하윤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았다.민도준은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남자였다. 명문가 딸 중에서도 민도준의 이야기는 많이 떠돌고 있었다.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의 소식을 알아보곤 하는 것이었다.이야기 속의 그는 결코 일편단심인 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았다.하지만 하윤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신분과 지위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단지 하룻밤의 인연을 맺을 운명밖에는 되지 않았다.좋게 말하면,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만난 것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민도준이 권하윤의 몸에 관심이 있는 틈을 타 얻고자 하는 것을 교환하는 수준의 관계였다. 하지만 최근 그와의 거래를 들여다보면 왠지 밑지는 장사 같았다. 심지어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조심하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랐다.매장에 들어간 그녀는 치마 한 벌을 골랐다. 하지만 한민혁의 강력한 권유로 한 벌의 슈트를 더 추가했다.본래 그녀는 활동적인 캐주얼 스타일이 잘 어울렸지
르네시떼.이곳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보물 가게’였다. 대형 경매회사의 고가의 예술품이나 골동품 등은 대부분 이곳에서 흘러나갔다.권하윤은 이곳에 처음 방문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헌책방 같은 레트로 분위기였다.가게 입구에는 사람 키 반 정도 높이의 카운터가 있었고,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사장님 계세요?”하윤이 여러 번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이런!’그녀는 좀 더 큰 소리로 불렀다.“할아버지!”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무 계단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요. 그는 귀가 어둡거든요.”가게의 낡은 나무틀을 돌자 발밑 마루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계단 뒤에는 베란다가 있었다.꽃무늬 옷을 입은 남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얼굴을 책으로 덮고 손에 든 부채를 제멋대로 흔들고 있었다.골동품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남자가 들고 있는 부채와 그가 얼굴에 덮어둔 책 모두 확실한 골동품이기 때문이었다.심지어 모두 가보가 될 만한 수준의 것들이었다.그러나 남자는 그것들을 그냥 평범한 물건과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책을 치우자 지나치게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는 하품을 하며 권하윤을 흘겨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팔 겁니까, 살 겁니까?”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권하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사장님께 보여드릴 물건이 있는데 보시고 견적 좀 부탁드려요.”그녀는 핸드폰에서 ‘한매도’의 사진을 찾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는 비스듬히 보더니 3초 만에 대답했다.“정상 가격은 260억이고, 암거래 가격은 160억입니다.”권하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정상 가격과 암거래 가격은 또 뭐예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찻주전자를 들고 입에 부었다.그는 권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은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지요?”그녀는 멍해졌다.
민도준은 최수인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런 뜻이 있긴 했지.”최수인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그러고도 네가 내 친구야?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어떤 친구? 만화 캐릭터에 빠진 친구? 난 그런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만화 캐릭터라니! 동정이지!”“여자에게 세일러문으로 분장하라고 하고, 너랑 같이 자게 해도?”최수인은 짜증이 났다.“됐어, 그만 얘기해. 어차피 내일 권씨 집안 아가씨가 나와 함께 갈 거니까. 너 한 명 빠져도 상관없어.”“권씨 집안?”“그래.” 최수인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가풍이 엄격한 권씨 집안 말이야. 넌 생각지도 못했지?”“권씨 집안의 누구?”최수인은 민도준의 말투에서 서늘한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랑을 계속했다.“알려주지. 넌 절대 생각하지도 못할…….”“권하윤?”최수인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아니 네가 어떻게 한번에 정확하게 맞췄지?”“내 어린 제수씨였구나?”최수인은 그의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너 말투가 왜 이렇게 메스꺼워?”민도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손에 든 라이터를 가지고 놀면서 불을 켰다 껐다 했다. “그녀가 너와 함께 자겠다고 약속했어?”최수인은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기세를 꺾이기 싫어 일부러 뜸을 들였다.“말하면 재미없잖아.”“그렇구나.”손에 든 불꽃이 튀며 민도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즐겁게 놀기를 바랍니다.”최수인은 그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내기에서 져서 기분이 안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난 수인은 판소리를 흥얼거리며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여기 아무도 안 계십니까?”……‘권하윤이 ‘한매도’를 판다고?'소식을 들은 강민정은 매우 놀랐다.‘권하윤도 어쨌든 명문가 아가씨이니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어떻게 할아버지가 직접 주신 ‘한매도’를 팔 생각을 했지?’‘할아버지가 주신 그림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