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뭐라 받아치려던 순간 권하윤은 자기가 지금 권씨 집안 넷째라는 걸 인지했다. 권하윤 신분이라면 그녀가 할 줄 아는 게 확실히 없었다.그녀의 침묵에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생각났어?”남자의 물음에 권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저한테 별장 열쇠도 주셨잖아요. 그러니 우리 거기 가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안돼.”만약 상대가 민도준이 아니고, 마침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빌딩 한 채를 빚지지 않았다면 권하윤은 아마 당장에 욕설을 퍼부었을 거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녀는 그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민도준의 도움이 필요했다.천천히 일어나는 그녀의 동작에 의자가 뒤로 밀렸다.기왕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그녀가 오늘 입은 옷은 연보라색 원피스였다. 그리고 그 안에 같은 색 계열의 실크 슬립을 받쳐 입었다.겉에 입은 치마를 벗자 슬립에 가려진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어느 한 군데라도 민도준의 손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권하윤은 일부러 자기 몸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치 보지 못하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기라도 하듯이.의자에 앉은 민도준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여자를 흥미롭게 바라봤다.“계속해.”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을 힐끗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에 미처 읽지 못한 감정이 언뜻 지나갔다.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나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품 속에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권하윤은 어느새 손발을 그에게 두르며 품에 안기더니 약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여기서 무서워요. 우리 가면 안 돼요?”잠시 뜸을 들인 뒤 민도준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불쌍한 척하는 데 아주 도가 텄네.’지금도 보면 권하윤은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머리를 그의 품에 묻은 채 계속 파고들어 그를 간지럽혔다.민도준은 아무 감정이 없는 듯 그녀를 밀어냈다.“놔.
“내가 잘못했어요. 안 따라 갈래요.”“차 세워요. 얼른 차 세워…….”점점 가까워지는 정문을 쳐다보던 권하윤은 조급해진 마음에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민도준과 같이 민씨 저택 안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아마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녀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웃음 띈 음성으로 말했다.“나랑 헤어지기 섭섭한 거 아냐? 설마 나를 속인 거야?”제 발등을 찍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하윤은 오늘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순진한 그녀를 탓할 밖에. 두세 마디 말로 민도준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정문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민도준은 차를 세울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사장님이 오늘 작심하고 그녀를 데려왔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더 이상 매달리길 포기했다.마지막 코너를 도는 순간 결심한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공간을 통해 뒤 좌석으로 넘어갔다.입고 있던 스커트가 올라가며 다리와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운전석으로부터 희롱 섞인 눈빛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네 발로 기듯이 넘어갔다.뒤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밖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사장님, 오셨습니까?”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틈새에 웅크린 하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다행히 창에 선팅이 되어있는데다 제때 숨은 까닭에 정문 앞의 경비 요원은 차 뒤 공간에 엎드린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인사하며 문을 연 경비원이 허리를 굽힌 채 민도준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거대한 민씨 저택은 본채과 별채로 되어 있었다. 또 사방을 에워싼 넓은 숲에는 여러 양식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저택 안으로 들어선 검은색 부가티는 몇 바퀴를 돌고서야 야외 주차장에 멈춰 섰다.주차장에 있던 경비 요원이 앞으로 나와 차문을 열었다.“사장님, 오셨습니까?”차에서 내린 민도준이 새카만 차창을 힐끔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차가 멈추자, 민승현이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주 조급한 표정이었다.경비 요원이 나오며 인사했다.“오셨습니까? 세차를 하시겠습니까?”민승현의 이름을 들은 권하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할 수 있는 건 겨우 숨을 죽인 채 민승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민승현이 권하윤이 숨어있는 차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둘째 형이 왔습니까?”“네, 방금 들어가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민승현은 더 당황스러웠다.바로 30분 전에 직접 할아버지로부터 즉시 본가에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께서 그를 찾으시는 바람에 이미 좌불안석이었는데, 둘째 형도 와 있다니.민승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안은 매우 조용했다.다리를 꼬고 앉은 민도준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착 가라앉은 표정의 민 노인은 손에 든 염주를 쥐고 있었다. 민승현이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할아버님, 둘째 형.”“승현이 왔냐?”민 노인이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예, 할아버지께서 찾으셨잖아요?”민도준을 한번 쳐다본 민 노인이 민승현에게 말했다.“승현아, 네가 회사에 들어간 지도 꽤 됐지? 또 최근엔 약혼도 했고. 이제 혼자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 너를 당분간 둘째에게서 좀 많이 배우게 할 생각이다. 너의 미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게야.”“네?”민승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민도준한테서?!!’사업을 배울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속으론 아연실색하면서도 감히 거절 못한 채 헛웃음만 나왔다.“회사에서 아직 처리 다 못한 일들이 좀 있습니다. 처리 다한 뒤에…….”민 노인의 눈빛이 지나가자 민승현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네 둘째 형이 최근 동림 입찰 건으로 애쓰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네가 마침 네 형을 돕는 게 좋겠다.”민 노인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압박감을 느낀 민승현은 감히 거절하지 못한 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예, 할아버지.”“그럼 얘기 끝난 건가요? 끝났으면 갈게요.”
아무 것도 모르는 민승현은 민도준이 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꼼짝도 않는 것을 보고는 그저 차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침 교대한 경비원이 앞으로 나와 민도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차문이 열리자 밤바람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차 안으로 들어왔다.운전석 뒤 빈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권하윤은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민승현은 그녀에게서 10센치도 안되는 거리에 서있었다. 그가 몸을 조금이라도 낮춘다면 그의 형의 차에 숨어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권하윤이 긴장한 것과 달리, 민도준은 담배를 물고서 느릿느릿 걸어왔다.그리고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편한 대로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그가 차를 타지 않자 민승현도 꼼짝없이 차문을 열어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서 있었다.저녁 바람에 실린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온 담배 냄새가 권하윤의 가련한 심장을 칭칭 감았다.여러 차례 놀라서인지 공포심에 마비된 것 같았다.담배 반 개비를 태우는 시간이 권하윤에게는 한 세기의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민도준이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너 먼저 가. 난 뒤에 찾을 물건이 있어서.”아무런 의심 없이 민승현은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그가 오늘 운전한 차는 오픈 스포츠카였다.색상과 내부 장식 모두 강민정이 골라 준 것으로 족히 몇 달은 기다렸다.차를 뽑는 날, 강민정은 발을 삐어서 가지 못하게 되었다.당시 권하윤은 여전히 일에 열심이고 그와의 관계도 지금처럼 나쁘지 않아서 그녀를 데리고 차를 찾으러 갔다.그런데 강민정이 난데없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차에 좌석은 두 개밖에 없는데다 강민정의 ‘다리 부상’이 낫지 않아서, 결국 권하윤은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강민정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당시 권하윤은 민승현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게다가 강민정은 그의 사촌 여동생이었기에 불결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민승현이 그의 약혼녀가 몇 걸음 내, 바로 그의 눈앞에서 자신의 형과 시시덕거릴 줄은 생각
3초, 권하윤은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머리가 텅 비며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손바닥의 감촉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분명 그녀가 정말로 민도준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지금 이 순간, 하윤은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 난 고의가 아니었어요. 차 안이 너무 좁아서,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어두운 차 안에서도 혀끝으로 입술 끝을 쓸어 올리는 민도준이 보였다. 그 눈동자는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깊었다.탕!차문을 닫는 소리에 하윤이 깜짝 놀랐다.“제대로 앉아요.”말이 떨어지자 마자 민도준이 가속페달을 밟았다.……“오빠 왔어요?”민승현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민정이 아주 친밀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할아버지가 뭐 때문에 찾으신 거예요?”심신이 지친 민승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말도 마.”그가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해 주자 강민정 역시 당혹스러웠다.“그래서 할아버지는 오빠더러 도준 오빠를 설득하라는 거야? 아니면 도준 오빠를 감시하라는 거야?”“쉿.”민승현이 급하게 말을 끊었다.하지만 이미 집에 돌아왔고 더 이상 꺼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났다.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초조하고 불안했다.“누가 알겠어, 정말 짜증나 죽겠어.”“됐어.” 그의 옆에 붙어 앉은 강민정이 이해심이 많은 듯이 권유했다.“오빠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오빠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 했잖아. 지금 기회가 온 거야. 오빠가 도준 오빠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집안에서 오빠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질 거야.”“형을 설득해? 농담하는 거지?”민승현은 희망은 1도 품지 않은 채 의기소침하게 말했다.“민도준이야. 형이 뭘 하고, 안 하고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어?”전혀 얽매임 없던 민도준의 얼굴을 생각하던 강민정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나도 가서
스커트 허리부분에 달린 가느다란 끈으로 그녀의 발목을 침대 발치의 기둥에 묶고는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도망갈 곳이 없었다.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목 옆을 짚고 있는 벌꿀 빛의 팔은 혈관이 팽창해 있었다어깨와 목의 근육들이 팽팽히 당겨졌다 또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넓은 등이 조명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는 가릴 수 없었다.열기를 담은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귓가에 웃음기 섞인 음성이 들렸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하윤을 절망스럽게 할 뿐이었다.“조급해하지 마. 밤새도록 울 시간은 충분해.”……쾅-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더니,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며 유리창을 타고 흘러 내렸다.하윤은 천둥소리에 잠이 깼다.눈꺼풀이 무거운 듯 눈이 떠지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혼몽한 상태였다.몇 번이나 노력하고서야 그녀는 천근만근처럼 여겨지는 눈꺼풀을 끌어올렸다.낯설면서도 익숙한 방은 이곳에서 있었던 하윤의 기억을 모두 깨웠다.어젯밤의 기억, 그리고 예전의 기억도.지난번 약에 취한 그녀를 민도준이 해독시켜 줬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별장.어슴푸레한 창 밖을 보고 아직 새벽인 줄 알았는데,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알림 표시줄에 문자 두 건이 떠 있었다.첫 번째 문자는 문태훈이 보낸 것이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권하윤 씨가 약속을 꼭 지키기를 바랍니다.]두 번째 문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몸이 더 쑤시는 듯했다. [점심에 블랙썬으로 도시락 배달!]하윤의 눈 흰자위가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밤새도록 죽을 만큼 시달렸는데 또 노비처럼 도시락까지 배달하라고? 하, 수레 끄는 노새도 이렇게 힘들진 않을 거야.’원망은 원망이고, 결국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녀다.게다가 그 그림이 200억 가치가 되는지 그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안 된다면 민도준이 금주 아빠 지원으로 그녀에게 빌려 주어야 할 수도
다행히 민도준에게 온다는 사실을 강아련에게 말한 민승현은 권하윤의 설명에 납득했다.“그래도 전화라도 하고 왔어야지.”민도준 쪽을 바라보며 하윤은 치솟는 화를 참고 말했다.“당신과 형님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까 봐 음식을 준비해 온 거예요. 만약 일에 방해가 된다면 지금 바로 갈게요.”“잠깐.”민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그가 입을 떼자 민승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방만한 포즈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민도준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이왕 제수씨가 가져 왔으니 그냥 계세요.”두 쌍의 눈이 서로 부딪혔다. 화가 치미는 한 쌍과 흥미진진한 눈빛의 한 쌍이.“하하하, 형님이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두 사람 사이의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민승현이 민도준을 향해서 아부하듯이 웃었다. 그리고 하윤을 향해 돌아서서는 다시 큰 소리로 지시했다.“너 아직도 거기서 뭐해. 빨리 음식 차리지 않고.”하윤이 가져온 도시락에는 탕 하나에 요리 4개가 담겨 있었다. 포장을 열자마자 오전 내내 굶었던 민승현은 즉시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그러나 채소 위주의 요리들을 본 그의 얼굴이 또 다시 찌푸려졌다.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일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는 것도 두 가지나 있었다.“아니 도대체 음식을 어떻게 고른 거야? 내가…….”“맛이 괜찮네요.”민도준의 한 마디는 민승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더 이상 평도 못하고 목을 움츠린 채 도시락을 들었다.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하윤은 민도준만 있는 줄 알고 자신의 것과 2 인분을 주문해 온 터였다.민승현이 의심할까 봐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한쪽 소파에 앉아서 사무실이라고 하는 곳을 살폈다.이 방의 인테리어는 블랙썬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늘어난 사무용 데스크와 컴퓨터로 겨우 사무 공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콜록콜록…….”밥을 먹다 고추에 사레가 들린 민승현이 계속된 기침에 입을 가리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권하윤! 휴지 줘!”식탁이 없어 사무
권하윤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오빠, 도준 오빠, 바쁘시죠?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문밖에서 들리는 애교를 띤 여자 목소리에 민승현이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인 것 같아요.”마침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던 민도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하윤을 쳐다보았다.“오늘 정말 번잡하네.”민승현이 억지웃음을 웃었다.“하하, 방금 민정이가 근처에 있는데 먹을 것들 좀 갖다 주겠다고 해서, 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지금 바로 돌아가라고 할게요.”문밖에서 손에 보온 도시락 몇 개를 들고 서있는 강민정은 스커트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에 흘러내려와 있었다.“오빠.”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본 민승현은 문을 열고 가라고 하려는 원래 생각을 잊어버린 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된 거야, 왜 온몸이 다 젖어 있어?”강민정이 보온 도시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빠가 도준 오빠와 밥을 못 먹고 있다고 해서, 제가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급하게 나오다 우산을 못 챙겼어요.”“너는 어째 항상 이렇게 잘 빠트리니?”나무라는 듯하지는 애정이 가득한 말투였다.민승현은 젖은 옷을 입고 돌아가야 할 강민정이 안타까우면서도 또 마음대로 남아있게 할 수도 없었다.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쳐다봤다.“형, 봐, 민정이 옷이 다 젖었어. 이렇게 돌아가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잠시 들어와서 옷 좀 말리고 가라고 하자.”강민정은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민도준이 거절할까 봐 겁이 났다.그런데 뜻밖에도 민도준이 생각지도 못한 친절을 베풀었다.“그래,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감기에 걸리면 안 되지. 들어와.”말을 하면서 민도준의 시선이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는 하윤을 스쳐 지나갔다.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윤은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떤 반응도 하고 싶지 않았다.실내의 상황을 보지 못한 강민정은 자신의 계략이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