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뭐라 받아치려던 순간 권하윤은 자기가 지금 권씨 집안 넷째라는 걸 인지했다. 권하윤 신분이라면 그녀가 할 줄 아는 게 확실히 없었다.그녀의 침묵에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생각났어?”남자의 물음에 권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저한테 별장 열쇠도 주셨잖아요. 그러니 우리 거기 가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안돼.”만약 상대가 민도준이 아니고, 마침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빌딩 한 채를 빚지지 않았다면 권하윤은 아마 당장에 욕설을 퍼부었을 거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녀는 그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민도준의 도움이 필요했다.천천히 일어나는 그녀의 동작에 의자가 뒤로 밀렸다.기왕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그녀가 오늘 입은 옷은 연보라색 원피스였다. 그리고 그 안에 같은 색 계열의 실크 슬립을 받쳐 입었다.겉에 입은 치마를 벗자 슬립에 가려진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어느 한 군데라도 민도준의 손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권하윤은 일부러 자기 몸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치 보지 못하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기라도 하듯이.의자에 앉은 민도준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여자를 흥미롭게 바라봤다.“계속해.”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을 힐끗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에 미처 읽지 못한 감정이 언뜻 지나갔다.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나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품 속에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권하윤은 어느새 손발을 그에게 두르며 품에 안기더니 약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여기서 무서워요. 우리 가면 안 돼요?”잠시 뜸을 들인 뒤 민도준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불쌍한 척하는 데 아주 도가 텄네.’지금도 보면 권하윤은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머리를 그의 품에 묻은 채 계속 파고들어 그를 간지럽혔다.민도준은 아무 감정이 없는 듯 그녀를 밀어냈다.“놔.
“내가 잘못했어요. 안 따라 갈래요.”“차 세워요. 얼른 차 세워…….”점점 가까워지는 정문을 쳐다보던 권하윤은 조급해진 마음에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민도준과 같이 민씨 저택 안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아마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녀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웃음 띈 음성으로 말했다.“나랑 헤어지기 섭섭한 거 아냐? 설마 나를 속인 거야?”제 발등을 찍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하윤은 오늘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순진한 그녀를 탓할 밖에. 두세 마디 말로 민도준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정문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민도준은 차를 세울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사장님이 오늘 작심하고 그녀를 데려왔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더 이상 매달리길 포기했다.마지막 코너를 도는 순간 결심한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공간을 통해 뒤 좌석으로 넘어갔다.입고 있던 스커트가 올라가며 다리와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운전석으로부터 희롱 섞인 눈빛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네 발로 기듯이 넘어갔다.뒤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밖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사장님, 오셨습니까?”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틈새에 웅크린 하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다행히 창에 선팅이 되어있는데다 제때 숨은 까닭에 정문 앞의 경비 요원은 차 뒤 공간에 엎드린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인사하며 문을 연 경비원이 허리를 굽힌 채 민도준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거대한 민씨 저택은 본채과 별채로 되어 있었다. 또 사방을 에워싼 넓은 숲에는 여러 양식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저택 안으로 들어선 검은색 부가티는 몇 바퀴를 돌고서야 야외 주차장에 멈춰 섰다.주차장에 있던 경비 요원이 앞으로 나와 차문을 열었다.“사장님, 오셨습니까?”차에서 내린 민도준이 새카만 차창을 힐끔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차가 멈추자, 민승현이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주 조급한 표정이었다.경비 요원이 나오며 인사했다.“오셨습니까? 세차를 하시겠습니까?”민승현의 이름을 들은 권하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할 수 있는 건 겨우 숨을 죽인 채 민승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민승현이 권하윤이 숨어있는 차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둘째 형이 왔습니까?”“네, 방금 들어가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민승현은 더 당황스러웠다.바로 30분 전에 직접 할아버지로부터 즉시 본가에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께서 그를 찾으시는 바람에 이미 좌불안석이었는데, 둘째 형도 와 있다니.민승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안은 매우 조용했다.다리를 꼬고 앉은 민도준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착 가라앉은 표정의 민 노인은 손에 든 염주를 쥐고 있었다. 민승현이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할아버님, 둘째 형.”“승현이 왔냐?”민 노인이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예, 할아버지께서 찾으셨잖아요?”민도준을 한번 쳐다본 민 노인이 민승현에게 말했다.“승현아, 네가 회사에 들어간 지도 꽤 됐지? 또 최근엔 약혼도 했고. 이제 혼자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 너를 당분간 둘째에게서 좀 많이 배우게 할 생각이다. 너의 미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게야.”“네?”민승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민도준한테서?!!’사업을 배울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속으론 아연실색하면서도 감히 거절 못한 채 헛웃음만 나왔다.“회사에서 아직 처리 다 못한 일들이 좀 있습니다. 처리 다한 뒤에…….”민 노인의 눈빛이 지나가자 민승현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네 둘째 형이 최근 동림 입찰 건으로 애쓰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네가 마침 네 형을 돕는 게 좋겠다.”민 노인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압박감을 느낀 민승현은 감히 거절하지 못한 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예, 할아버지.”“그럼 얘기 끝난 건가요? 끝났으면 갈게요.”
아무 것도 모르는 민승현은 민도준이 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꼼짝도 않는 것을 보고는 그저 차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침 교대한 경비원이 앞으로 나와 민도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차문이 열리자 밤바람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차 안으로 들어왔다.운전석 뒤 빈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권하윤은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민승현은 그녀에게서 10센치도 안되는 거리에 서있었다. 그가 몸을 조금이라도 낮춘다면 그의 형의 차에 숨어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권하윤이 긴장한 것과 달리, 민도준은 담배를 물고서 느릿느릿 걸어왔다.그리고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편한 대로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그가 차를 타지 않자 민승현도 꼼짝없이 차문을 열어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서 있었다.저녁 바람에 실린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온 담배 냄새가 권하윤의 가련한 심장을 칭칭 감았다.여러 차례 놀라서인지 공포심에 마비된 것 같았다.담배 반 개비를 태우는 시간이 권하윤에게는 한 세기의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민도준이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너 먼저 가. 난 뒤에 찾을 물건이 있어서.”아무런 의심 없이 민승현은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그가 오늘 운전한 차는 오픈 스포츠카였다.색상과 내부 장식 모두 강민정이 골라 준 것으로 족히 몇 달은 기다렸다.차를 뽑는 날, 강민정은 발을 삐어서 가지 못하게 되었다.당시 권하윤은 여전히 일에 열심이고 그와의 관계도 지금처럼 나쁘지 않아서 그녀를 데리고 차를 찾으러 갔다.그런데 강민정이 난데없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차에 좌석은 두 개밖에 없는데다 강민정의 ‘다리 부상’이 낫지 않아서, 결국 권하윤은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강민정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당시 권하윤은 민승현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게다가 강민정은 그의 사촌 여동생이었기에 불결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민승현이 그의 약혼녀가 몇 걸음 내, 바로 그의 눈앞에서 자신의 형과 시시덕거릴 줄은 생각
3초, 권하윤은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머리가 텅 비며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손바닥의 감촉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분명 그녀가 정말로 민도준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지금 이 순간, 하윤은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나, 난 고의가 아니었어요. 차 안이 너무 좁아서,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어두운 차 안에서도 혀끝으로 입술 끝을 쓸어 올리는 민도준이 보였다. 그 눈동자는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깊었다.탕!차문을 닫는 소리에 하윤이 깜짝 놀랐다.“제대로 앉아요.”말이 떨어지자 마자 민도준이 가속페달을 밟았다.……“오빠 왔어요?”민승현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민정이 아주 친밀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할아버지가 뭐 때문에 찾으신 거예요?”심신이 지친 민승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말도 마.”그가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해 주자 강민정 역시 당혹스러웠다.“그래서 할아버지는 오빠더러 도준 오빠를 설득하라는 거야? 아니면 도준 오빠를 감시하라는 거야?”“쉿.”민승현이 급하게 말을 끊었다.하지만 이미 집에 돌아왔고 더 이상 꺼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났다.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초조하고 불안했다.“누가 알겠어, 정말 짜증나 죽겠어.”“됐어.” 그의 옆에 붙어 앉은 강민정이 이해심이 많은 듯이 권유했다.“오빠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오빠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 했잖아. 지금 기회가 온 거야. 오빠가 도준 오빠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집안에서 오빠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질 거야.”“형을 설득해? 농담하는 거지?”민승현은 희망은 1도 품지 않은 채 의기소침하게 말했다.“민도준이야. 형이 뭘 하고, 안 하고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어?”전혀 얽매임 없던 민도준의 얼굴을 생각하던 강민정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나도 가서
스커트 허리부분에 달린 가느다란 끈으로 그녀의 발목을 침대 발치의 기둥에 묶고는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도망갈 곳이 없었다.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목 옆을 짚고 있는 벌꿀 빛의 팔은 혈관이 팽창해 있었다어깨와 목의 근육들이 팽팽히 당겨졌다 또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넓은 등이 조명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는 가릴 수 없었다.열기를 담은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귓가에 웃음기 섞인 음성이 들렸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하윤을 절망스럽게 할 뿐이었다.“조급해하지 마. 밤새도록 울 시간은 충분해.”……쾅-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가느다란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더니,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며 유리창을 타고 흘러 내렸다.하윤은 천둥소리에 잠이 깼다.눈꺼풀이 무거운 듯 눈이 떠지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혼몽한 상태였다.몇 번이나 노력하고서야 그녀는 천근만근처럼 여겨지는 눈꺼풀을 끌어올렸다.낯설면서도 익숙한 방은 이곳에서 있었던 하윤의 기억을 모두 깨웠다.어젯밤의 기억, 그리고 예전의 기억도.지난번 약에 취한 그녀를 민도준이 해독시켜 줬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별장.어슴푸레한 창 밖을 보고 아직 새벽인 줄 알았는데,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알림 표시줄에 문자 두 건이 떠 있었다.첫 번째 문자는 문태훈이 보낸 것이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권하윤 씨가 약속을 꼭 지키기를 바랍니다.]두 번째 문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몸이 더 쑤시는 듯했다. [점심에 블랙썬으로 도시락 배달!]하윤의 눈 흰자위가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밤새도록 죽을 만큼 시달렸는데 또 노비처럼 도시락까지 배달하라고? 하, 수레 끄는 노새도 이렇게 힘들진 않을 거야.’원망은 원망이고, 결국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녀다.게다가 그 그림이 200억 가치가 되는지 그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안 된다면 민도준이 금주 아빠 지원으로 그녀에게 빌려 주어야 할 수도
다행히 민도준에게 온다는 사실을 강아련에게 말한 민승현은 권하윤의 설명에 납득했다.“그래도 전화라도 하고 왔어야지.”민도준 쪽을 바라보며 하윤은 치솟는 화를 참고 말했다.“당신과 형님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까 봐 음식을 준비해 온 거예요. 만약 일에 방해가 된다면 지금 바로 갈게요.”“잠깐.”민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그가 입을 떼자 민승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방만한 포즈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민도준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이왕 제수씨가 가져 왔으니 그냥 계세요.”두 쌍의 눈이 서로 부딪혔다. 화가 치미는 한 쌍과 흥미진진한 눈빛의 한 쌍이.“하하하, 형님이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두 사람 사이의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민승현이 민도준을 향해서 아부하듯이 웃었다. 그리고 하윤을 향해 돌아서서는 다시 큰 소리로 지시했다.“너 아직도 거기서 뭐해. 빨리 음식 차리지 않고.”하윤이 가져온 도시락에는 탕 하나에 요리 4개가 담겨 있었다. 포장을 열자마자 오전 내내 굶었던 민승현은 즉시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그러나 채소 위주의 요리들을 본 그의 얼굴이 또 다시 찌푸려졌다.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일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는 것도 두 가지나 있었다.“아니 도대체 음식을 어떻게 고른 거야? 내가…….”“맛이 괜찮네요.”민도준의 한 마디는 민승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더 이상 평도 못하고 목을 움츠린 채 도시락을 들었다.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하윤은 민도준만 있는 줄 알고 자신의 것과 2 인분을 주문해 온 터였다.민승현이 의심할까 봐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한쪽 소파에 앉아서 사무실이라고 하는 곳을 살폈다.이 방의 인테리어는 블랙썬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늘어난 사무용 데스크와 컴퓨터로 겨우 사무 공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콜록콜록…….”밥을 먹다 고추에 사레가 들린 민승현이 계속된 기침에 입을 가리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권하윤! 휴지 줘!”식탁이 없어 사무
권하윤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오빠, 도준 오빠, 바쁘시죠?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문밖에서 들리는 애교를 띤 여자 목소리에 민승현이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인 것 같아요.”마침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던 민도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하윤을 쳐다보았다.“오늘 정말 번잡하네.”민승현이 억지웃음을 웃었다.“하하, 방금 민정이가 근처에 있는데 먹을 것들 좀 갖다 주겠다고 해서, 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지금 바로 돌아가라고 할게요.”문밖에서 손에 보온 도시락 몇 개를 들고 서있는 강민정은 스커트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에 흘러내려와 있었다.“오빠.”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본 민승현은 문을 열고 가라고 하려는 원래 생각을 잊어버린 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된 거야, 왜 온몸이 다 젖어 있어?”강민정이 보온 도시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빠가 도준 오빠와 밥을 못 먹고 있다고 해서, 제가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급하게 나오다 우산을 못 챙겼어요.”“너는 어째 항상 이렇게 잘 빠트리니?”나무라는 듯하지는 애정이 가득한 말투였다.민승현은 젖은 옷을 입고 돌아가야 할 강민정이 안타까우면서도 또 마음대로 남아있게 할 수도 없었다.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쳐다봤다.“형, 봐, 민정이 옷이 다 젖었어. 이렇게 돌아가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잠시 들어와서 옷 좀 말리고 가라고 하자.”강민정은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민도준이 거절할까 봐 겁이 났다.그런데 뜻밖에도 민도준이 생각지도 못한 친절을 베풀었다.“그래,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감기에 걸리면 안 되지. 들어와.”말을 하면서 민도준의 시선이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는 하윤을 스쳐 지나갔다.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윤은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떤 반응도 하고 싶지 않았다.실내의 상황을 보지 못한 강민정은 자신의 계략이 성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