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행히도 민승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권하윤을 한참 찾아다녔다는 거에 불만인 듯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면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는데!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그의 말투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아, 그때 강민정 씨와 둘이 아주 꽁냥거리고 있는 것 같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권하윤의 한 마디에 민승현은 마지막 의심까지 씻어버리고 풉 웃었다.“네가 민정이랑 같아? 어딜 비교해?”“그렇게 나 애타게 찾으니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누가 애타게 찾았다는 거야! 난 그저…….”버럭 하며 부정하던 민승현은 결국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 권하윤과 그의 둘째 형이 붙어먹은 줄로 착각해 급하게 찾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몰라. 이제 너 죽든 말든 상관 안 해!”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 채 민승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제야 전화 거너 편에 있던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방금은 일부러 민승현의 신경을 자극한 거다. 그렇게 되면 그가 자기를 냉대하며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권하윤은 긴장을 풀며 모든 일의 원흉을 분한 듯 째려봤다.아직까지 민도준이 일부러 민승현을 불러낸 것에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입에 담배를 물고 옷을 입던 민도준이 마침 그녀의 눈빛을 발견하고 뿌연 연기 뒤에서 눈썹을 치켜떴다.“아직도 모자라?”권하윤은 상대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눈을 피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 널브러진 옷을 보니 더욱 심란했다.“민 사장님이 제 옷 다 망가트렸는데 어떻게 배상할 거예요?”화가 너무 쌓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민도준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내고 손에 쥐었다. 이윽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숙이며 여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어떻게 배상할까?”그 눈빛을 보니 권하윤은 방금 전의 모습이 온데간데
권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그런데 보아하니 민도준이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물론 비웃긴 했지만 말이다.이미 골치 아픈 일이 넘쳐나는 그녀로써는 한 가지라도 덜고 싶은 마음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더 할 말 없으면 저 먼저 가볼게요.”“잠깐만.”긴 다리를 들며 막아서는 민도준의 동작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이시죠?”말투도 한껏 인내심이 묻어났다. 민도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일 내 전화 기다려.”그 말에 권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민도준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걸 그녀도 눈치챘고. 게다가 오늘 있은 일은 정말 해프닝에 불과한데 앞으로 또 더 만나자니 놀랄 수밖에.‘설마 계속 만나자는 건가?’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민도준은 “선심” 쓰듯 되물었다.“내가 데리러 가길 원하나?”“아니요!”권하윤은 곧바로 억지 미소를 짜냈다. 여기서 더 버티면 당장이라도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어떻게 그래요. 제가 찾아가죠.”“그래, 가 봐.”-휴게실을 떠난 권하윤의 얼굴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와르르하고 무너졌다.곧이어 욕지거리가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상대는 당연히 휴게실 안에 있는 민도준이었다.그렇다고 한들 크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큰 신분 차이 때문에 한껏 조심한데다가 집에 큰 변고가 찾아온 그날부터 그녀는 자기 인생이 평화와 자유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한민혁 덕분에 같은 색 같은 기장의 비슷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덕에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었다. 존재감을 한껏 숨긴 채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연회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연회장을 떠났다.하지만 전화상으로 그녀에게 불같이 화내던 민승현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줄 마음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강민정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승리자의 자태를 뽐내며 그녀를 힐끗힐끗 뒤돌아 볼 뿐.강민정은 권하윤
“그게……”권희연은 머뭇거렸다.“말하기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이건 두 사람의 사적인 문제이기에 그녀에게 따져 물을 이유도 권한도 없었다.“그건 아니야.”하지만 권하윤에게 미안한 감정뿐인 권희연은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털오놓았다.“내가 민도준 씨한테 무례를 범했어.”“그런데 언니 치마가 왜?”“민도준 씨가 나 발로 찼거든.”권희연의 머쓱한듯한 말에 권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민도준이 권희연에게 강압적으로 관계를 요구했다고 생각했는데 민도준 말이 맞았을 줄이야.’전화를 끊은 뒤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권희연은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그때 일이 있고 난 뒤 명성도 많이 높아져 전설처럼 불러지고 있다.그로 인해 그녀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는 가문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권미란은 그녀의 혼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민도준에게 접근하게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설마, 권미란이 오래전부터 권희연과 민도준을 엮으려 했나?’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대담한 생각에 몇 년 전 강민우가 권희연에게 약을 쓴 일도 의심스러웠다.권씨 가문은 명문가 말단에 속해 있지만 그래도 명문가라 불릴 수 있는 집안이었기에 재산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강민우의 돈과 선물을 많이 받아먹고도 모른 척해 상대를 자극했으니 더욱 이상했다. 그들이 일부러 강민우를 자극해 이 모든 일을 꾸몄다면 모를까.‘그 일로 인해 권희연의 깨끗한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더욱 각인됐고 권씨 집안 여자의 위신도 함께 올라갔으니……’권하윤은 입꼬리를 씩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권씨 가문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럽고 무서운 가문이었네.’권하윤은 차 안에서 잠시 동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그 시각,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가슴까지 깊게 파인 V넥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누군가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차에 실렸다.그녀는 버둥거리며 앞에서 멀
이승우는 눈을 곱게 접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물어보면 내가 뭐부터 대답해야 해?”그의 목소리는 아직 회복하지 않아 조금씩 갈라졌지만 권하윤의 귀에는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듣기 좋았다.그녀는 이승우를 향해 웃고 싶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울고 싶으면 울어. 오빠 앞에서 참을 필요 없어.”너무 오랫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이승우의 한 마디 말이 권하윤의 마음의 벽을 무너트렸다. 권하윤은 마치 감정이 터지기라도 한 듯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이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옥시미터를 낀 손으로 권하윤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한참 뒤 진정을 한 권하윤은 눈물을 닦으며 밖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승우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일부러 한껏 가벼운 말투로, 권씨 가문이 자신을 괴롭힌 사실은 빼놓은 채 기쁜 듯 입을 열었다.“이제 경성에 왔으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오빠도 깨어났겠다 앞으로 우리 가족 점점 행복해질 거야.”애써 미소 짓는 권하윤을 꿰뚫어 본 이승우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 지었다.이 요양원의 사람은 그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감시하고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챘다. 게다가 동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자기가 깨어나면 동생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왔다는 건 자유조차 없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그는 아는체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동생의 귀밑머리를 넘겨주었다.“많이 야위었네.”“오빠도 그러면서.”오빠의 관심 어린 말에 권하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하지만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는 마치 애교 부리는 것 같았다.“그래, 오빠 많이 못생겨졌지? 우리 윤이 오빠 이제 싫어하는 거 아니야?”참으로 공교롭게도 어릴 적 가족이 그녀를 부르던 애칭도 윤이였다.아마 그녀가 권하윤이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권하윤은 이승우가 일부러 장난치는 걸 눈치채고는 입을 삐죽거렸다.“못생겨도 좋아. 오
권하윤을 바라보는 이승우의 표정은 조금 차가웠다.“너 아버지를 믿어?”“믿어. 아버지는 한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분이셔. 그런 일을 할 분이 절대 아니야.”확고한 대답에 이승우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졌다.“그거면 됐어. 아버지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됐어.”“그게 무슨 말이야? 그거면 됐다니? 오빠, 그때 아빠 곁에 있은 사람이 오빠니까 알 거 아니야. 아빠는 대체 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는데? 그리고 공은채. 공씨 가문에서 그 여자의 죽음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가 대체…….”“윤아.”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승우의 짤막한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엄숙함이 묻어 있었다.“더 이상 묻지 마. 다 지난 일이야.”“지난 일? 아빠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음악가가 하루아침에 손가락 받으며 누명을 쓴 채 투신했는데, 그렇게 몸이 산산이 부서진 채 돌아가셨는데 나더러 어떻게 그냥 지나가라고!”눈시울이 붉어진 권하윤을 보자 이승우는 끝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동생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었다.“윤아, 그러지 마. 오빠가 이렇게 빌게.”그 한 마디에 권하윤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기라도 하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공씨 가문 때문에 살길을 찾아 죽은 척 위장까지 했으면서, 그러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거면서 진실을 안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어?’갑자기 몰려오는 무력감에 목이 메어왔다.“알았어.”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지막하게 한 마디 꺼냈다.“휴식 잘해.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올게.”그런 권하윤을 보면서 이승우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병실을 나가는 순간 권하윤은 올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정신을 가다듬은 뒤 곧바로 떠나는 대신 요양원 의사를 찾아가 이승우의 상태에 대해 물어봤다.사실 어머니와 여동생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요양원 사람들이 계속 다그치는 바람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미련이 남은 듯 고개를 돌
“하.”전화 건너편에서 곧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변명 하나는 빨리 찾네.”그리고 권하윤에게 더 이상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주소 하나를 불렀다.“20분 주지.”“20분 내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그 시각, 전화 건너편.“도준 형, 혹시 화났어?”한민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민도준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며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버렸다.“내가 화났으면 네가 거기 서있는 게 아니라 누워있었어.”“하하하…… 형도 참, 무슨 그런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해. 나 겁 많은거 알면서.”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협박에 한민혁은 헛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여전히 가타부타 말이 없는 도민준의 반응에 한민혁은 그의 표정을 슬쩍 살펴봤다.“형 하윤 씨 의심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또 만나려는 건데? 그것도 여기로 불러내기까지 하고 말이야.”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고 싶어?”“알고 싶긴 하지…….”약간 자신 없는 말투였다.“안는 맛이 꽤 좋거든.”“…….”“권하윤은 권희연과 달라. 그 여자는 권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 아니야.”“어.”대답은 했지만 한민혁은 믿기지 않았다. ‘도준 형 성욕에 뇌가 절었나? 머리가 어떻게 됐나?’한민혁이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민도준은 마치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표정을 읽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동림 지역 땅을 입찰하려 한다는 소문은 냈지?”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한민혁은 멍해 있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민도준이 왜 갑자기 이 일을 입에 담는지 알 수 없지만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형이 입찰한다는 소문 슬쩍 흘렸더니 요즘 내 핸드폰에 아주 불이 날 지경이야. 전화가 아주 쉴 새 없이 와.”“그 땅 아주 큰 고기 덩어리거든. 너도 챙겨 둬.”싱긋 웃는 민도준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리만치 오싹하게 느껴져 대답을 하고 있지 않던 그때, 민도준의 다음
민도준은 오늘 검은 셔츠에 심플한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만은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다.손끝에 반쯤 탄 담배를 끼운 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힐끗 확인하더니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왔네.”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권하윤은 자기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목이 메어왔고 다리는 추를 단 듯 무거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선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처럼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 와서 앉아.”권하윤은 마치 끈 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민도준의 명령에 따랐다.권하윤이 그의 옆 소파 위에 앉는 순간 소파가 푹 꺼져들어가며 그녀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그때, 담배를 쥔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담배를 쥔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는 순간 머리카락이 담뱃불에 닿아 곱슬곱슬하게 말렸다.뜨거운 온도가 귓가에 맴도는 바람에 권하윤은 꼼작도 못하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민도준이 자기를 재떨이로 쓸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였다.뜨거운 손길이 볼을 타고 점점 올라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손은 그녀의 눈꺼풀에 살짝 닿았다.“울었어?”민도준의 한마디에 권하은 몸을 흠칫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침 민도준의 장난기 섞인 눈과 마주했다.“나 만나러 오기 그렇게 싫었어?”“그런 거 아니에요.”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아주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거란 직감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전에 다른 일 때문에 운 거예요.”“민승현 때문이야?”눈썹을 치켜뜨며 물어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좋은 방패막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게 바보니까.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민도준은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마치 불만이라도 표하는 듯 손을 움직였고 갑자기 어깨에 전해지는 통증에 권하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순간 뜨거운 담뱃불
“무슨 일이에요?”권하윤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옷을 입었다.“여기서 기다려.”그 말에 권하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는 건 그녀에게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이 옷에 닿았을 때 민도준이 한 마디 보충했다.“옷은 입을 필요 없어.”“…….”민도준이 떠나간 뒤 공기는 유난히 조용했다.하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바닥에 널린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었다.민도준은 뭐 하러 가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언뜻 “도망쳤다”, “사라졌다”라는 단어를 들었다.하지만 남의 일에 파고드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시해버렸다.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평정심을 되찾자 권하윤은 그제야 목이 말르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곧바로 방 안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방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도수 높은 양주와 잠겨 있는 금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물을 직접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방문을 나섰다.그녀가 있는 층은 아래층보다 많이 조용했다. 게다가 문과 벽이 온통 검은색으로 되어있는 데다 문고리가 없어 제대로 보지 않으면 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권하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길게 뻗은 복도에 똑같은 방이 여러 개 놓여 이곳을 떠나는 순간 다시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하지만 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인영 하나가 갑자기 어딘 가에서 튀어나왔다.“권하윤 씨, 혹시 무슨 시키실 일 있습니까?”깜짝 놀란 권하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찾아봤지만 눈앞의 사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옷이 터질듯한 근육질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반쯤 걷어올린 옷소매 아래로 커다란 문신이 보였다.그 모습에 순간 눈앞이 어질해난 권하윤은 최대한 예의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혹시 물 있어요?”“네.”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