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오늘 검은 셔츠에 심플한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만은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다.손끝에 반쯤 탄 담배를 끼운 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힐끗 확인하더니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왔네.”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권하윤은 자기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목이 메어왔고 다리는 추를 단 듯 무거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선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처럼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 와서 앉아.”권하윤은 마치 끈 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민도준의 명령에 따랐다.권하윤이 그의 옆 소파 위에 앉는 순간 소파가 푹 꺼져들어가며 그녀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그때, 담배를 쥔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담배를 쥔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는 순간 머리카락이 담뱃불에 닿아 곱슬곱슬하게 말렸다.뜨거운 온도가 귓가에 맴도는 바람에 권하윤은 꼼작도 못하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민도준이 자기를 재떨이로 쓸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였다.뜨거운 손길이 볼을 타고 점점 올라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손은 그녀의 눈꺼풀에 살짝 닿았다.“울었어?”민도준의 한마디에 권하은 몸을 흠칫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침 민도준의 장난기 섞인 눈과 마주했다.“나 만나러 오기 그렇게 싫었어?”“그런 거 아니에요.”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아주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거란 직감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전에 다른 일 때문에 운 거예요.”“민승현 때문이야?”눈썹을 치켜뜨며 물어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좋은 방패막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게 바보니까.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민도준은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마치 불만이라도 표하는 듯 손을 움직였고 갑자기 어깨에 전해지는 통증에 권하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순간 뜨거운 담뱃불
“무슨 일이에요?”권하윤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옷을 입었다.“여기서 기다려.”그 말에 권하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는 건 그녀에게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이 옷에 닿았을 때 민도준이 한 마디 보충했다.“옷은 입을 필요 없어.”“…….”민도준이 떠나간 뒤 공기는 유난히 조용했다.하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바닥에 널린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었다.민도준은 뭐 하러 가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언뜻 “도망쳤다”, “사라졌다”라는 단어를 들었다.하지만 남의 일에 파고드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시해버렸다.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평정심을 되찾자 권하윤은 그제야 목이 말르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곧바로 방 안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방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도수 높은 양주와 잠겨 있는 금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물을 직접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방문을 나섰다.그녀가 있는 층은 아래층보다 많이 조용했다. 게다가 문과 벽이 온통 검은색으로 되어있는 데다 문고리가 없어 제대로 보지 않으면 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권하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길게 뻗은 복도에 똑같은 방이 여러 개 놓여 이곳을 떠나는 순간 다시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하지만 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인영 하나가 갑자기 어딘 가에서 튀어나왔다.“권하윤 씨, 혹시 무슨 시키실 일 있습니까?”깜짝 놀란 권하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찾아봤지만 눈앞의 사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옷이 터질듯한 근육질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반쯤 걷어올린 옷소매 아래로 커다란 문신이 보였다.그 모습에 순간 눈앞이 어질해난 권하윤은 최대한 예의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혹시 물 있어요?”“네.”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꿇어앉은 여자애를 보고 있자니 권하윤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가 바닥에 꿇어앉 아 애원하던 그때 그 기억이.하지만 자기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애원하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저 언니 방에 잠깐만 숨어 있게 해줘요. 절대 언니한테 피해 주지 않을게요. 저 정말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잔뜩 여윈 얼굴로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불쌍했고 동정심을 자극했다.하지만 권하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여자애는 자기가 성공했다는 걸 직감했다.“언니, 도와줘요.”“여기 있고 싶지 않다면서 왜 펜트하우스까지 올라왔어?”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묻는 권하윤의 말에 여자애의 눈에 싸늘한 빛이 언뜻 지나가더니 고개를 돌려 로건이 떠난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솔직히 그녀는 권하윤을 속여 방으로 들어가 로건을 따돌릴 생각이었다.그러지 않으면 로건이 돌아와서 권하윤이 죽은 걸 보면 그녀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생각을 정리한 여자애는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밖에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도망치지 못했어요. 언니도 저와 같은 여자애잖아요. 그러니 한 번만 도와줘요. 저 정말 어렵게 저들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 몸 파는 일 하고 싶지 않아요.”권하윤은 그 말에 눈살을 구겼다.원혜정에게 한번 당하고 나니 아무 조건 없이 낯선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이 말이 모두 진짜라면? 만약 나의 불신이 여자애의 유일한 탈출 기회를 망친다면…….’게다가 같은 여자애로서 한 번만 도와달라던 여자애의 말에 권하윤은 이미 마음이 동했다. 때문에 애원하며 도움을 청하는 여자애를 그녀는 무시할 수 없었다.“그래. 들어와.”권하윤의 말에 여자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해댔다.“언니 정말 고마워요. 제가 여기에서 도망치면 앞으로 언니를 제 생명의 은인으로 대할게요.”그리고 권하윤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방 안에 놓인 금고에 눈을 고정했다.참 공교롭게도 그녀
방금 전.권하윤이 물을 받아들면서 로건에게 입 모양으로 10초 뒤에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그리고 문이 닫기는 순간 여자애는 역시나 그녀를 공격해왔다.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권하윤은 단번에 피했고 그녀가 다시 공격해 오려 할 때 로건은 말없이 들어와 그녀를 제압했다.“대박이네요.”한민혁은 과정을 들은 뒤 권하윤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역시 도준 형의 여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대놓고 폭로되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이리 와.”권하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결심을 내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다쳤어?”팔을 만지작거리며 묻는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살짝 스쳤어요,”여자애가 보통내기가 아니라 조금 다치는 것도 어찌 보면 정상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은 바닥에 묶여 있는 여자애를 흘깃 스쳐보더니 로건에게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린 로건은 나이프를 들어 여자애의 팔 위 똑같은 위치에 상처를 냈다.당연히 살짝 스친 권하윤보다는 심각하게 난 상처에 여자애는 낮게 신음했고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데려가서 처리해.”민도준이 손을 저으며 명령을 내리자 여자애는 곧바로 끌려갔다. 하지만 끌려가는 도중에 권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분명 믿은 것 같은 눈치였는데 갑자기 자기를 곤경에 빠트린 권하윤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의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걸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아.”솜이 상처 위에 닿자 권하윤의 입가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참아.”하지만 민도준의 동작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사정없는 그의 동작에 견딜 수 없었던 권하윤은 끝내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해달라고 할게요.”“그래.”‘민도준이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권하윤은
“우리 관계, 더 이상 지속하면 안 될 것 같아요.”더 이상 얻을 게 없는데 자기 몸까지 바쳐가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물론 민도준과의 관계에 점점 매료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까지 스스럼없이 그 행위를 지속하려는 남자를 봐왔던 그녀로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민도준은 아무리 그런 소문이 터져도 그를 뭐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아니다.그녀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살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고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때문에 눈앞에 기회가 찾아온 지금 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맞았다.그녀의 요구를 들은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입을 열었다.“이젠 나랑 관계 유지하는 게 싫다는 건가?”“아무래도 저는 민승현 약혼녀 신분이기에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민도준은 재미를 잃었는지 여느 때보다도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나가.”아까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주위에는 위험하고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의 흥미를 깨트렸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것 역시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다.때문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권하윤 씨?”구석에서 로건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한민혁은 권하윤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고작 10분이 지났는데 끝났다고? 도준 형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권하윤은 그가 오해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민도준의 편에 서서 말했다.“저 상처 치료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그제야 한민혁은 뭔가 알아차린 듯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아하, 하윤 씨 다쳤었죠? 하하하, 이번에 하윤 씨 공이 컸어요.”하지만 갑자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참고 있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저기,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돼요?”“뭔데요?”“그 계집애가 잡혀가고 나서 계속 자기가 하윤 씨 이
이미 울면서 뛰쳐나가야 했을 권하윤은 오히려 느긋하게 겉옷을 벗어 옷장에 걸어 넣고는 주방에서 씻은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 다시 돌아왔다.그러고는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두 사람 앞에 앉아 딸기를 입에 넣으며 구경했다.한창 뜨겁게 달아올라 점점 대답해지던 동작은 권하윤의 행동 때문에 점점 굳어졌다.그리고 스스로도 불편했는지 민승현이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씨발, 너 거기서 뭐해? 뭐하자는 건데?”“민정 씨 여기로 데려온 건 나 보라고 그런 거 아니야?”권하윤은 딸기 하나를 꼭꼭 씹어 넘기고는 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그래서 지금 보고 있잖아.”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오히려 민승현이 말문이 막혔다.솔직히 그녀 말이 맞았다. 그가 강민정을 굳이 집까지 데려온 건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건 권하윤이 모멸감을 느끼고 난처하고 분해서 이성을 잃는 모습이었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구경하는 모습은 아니었다.오히려 권하윤의 이런 반응과 눈빛을 보고 나니 그는 자기가 마치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듯한 모멸감이 들었다.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 때문에 강민정은 중심을 잃어 하마터면 너머질 뻔했다.게다가 “아”하는 짤막한 비명이 들려왔지만 민승현은 그녀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그 시각, 환한 불빛에 비친 옅은 노란색 니트 원피스는 권하윤의 몸매를 더욱 부각했고 긴 머리는 양 옆으로 갈라져 그녀의 가슴을 덮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민승현은 그녀가 알게 모르게 변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분명 원래와 똑같은 얼굴인데 행동 하나하나에 야릇함이 묻어있었고 매혹적인 눈매는 뭔가 봉인을 해제한 듯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게다가 도톰한 입술 사이로 빨간 딸기 물이 반짝거렸다가 다시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은은하게 퍼지는 딸기의 새콤달콤한 향기에 분위기가 점차 이상해질 때쯤, 강민정이 그런 변
강민정은 전화를 끊은 뒤 피식 웃었다.‘한민혁이었다니.’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그래서 민 사장님이 권하윤의 정체를 안 거였네. 한민혁이 말했을 테니까. 그런데 민 사장님과 권하윤의 관계를 의심했다니. 나도 참.’민승현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권하윤을 민도준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사실 한민혁도 솔직히 따지면 배경 있는 집안 자제다.약 20년 전만 해도 한씨 가문은 정치권을 꽉 잡고 있을만한 쟁쟁한 인물들이 넘쳐났기에 그들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만 해도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그러던 중 정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들의 지위도 하루아침에 변했다.하지만 한민혁이 그때의 그 한씨 가문 자제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강민정 역시 한민혁을 그저 도민준의 뒤를 따라다니는 동생으로 봤다. 다시 말하면 그저 망나니.그런 사람과 바람을 비우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적어도 강민정 생각에는.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강민정은 권하윤이 우습게 느껴졌다. 민승현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니 그런 지경에 이르다니.한참 동안 속으로 권하윤을 실컷 비웃고 난 강민정은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지금 바로 폭로한다고 한들 권하윤이 인정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기회를 봐서 현장을 잡기로.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강민정은 목욕 타월을 들고 이내 민승현에게 다가갔다.“오빠, 얼른 물기 제거해. 감기 걸리면 나 마음 아파.”강민정의 시중을 받자 민승현은 기분이 좋아졌다.“역시 넌 현모양처라니까.”“그게 뭔 소용이야. 부모도 없는 고아라서 공씨 집안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데.”강민정은 민승현의 몸을 닦아주며 서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점차 낮아지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하윤 언니 정말 부럽다. 당당하게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서. 내가 만약 하윤 언니라면 오빠 정말 잘 내조할 텐데, 불만이 있다고 심술부리지도 않을 거고.”평소에도 강민정의 불쌍한 모습을 보면 견디지
공아름의 손끝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상처가 나있었다.“이거 뭐야?”네일아티스트는 세게 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했다.“죄, 죄송합니다. 방금 손톱을 다듬을 때 실수로 살짝 스쳤습니다. 제…… 제가 핸드크림 발라드릴게요…….”“손 대지 마! 꺼져!”“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네일아티스트는 지체했다간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작은 해프닝이 있고 난 뒤 공아름은 좋던 기분도 어느새 사라졌다.그리고 그제야 의견을 묻는 듯 자기를 보고 있는 문태훈을 흘깃 스쳐보며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어느 손을 민도준 씨 몸에 댔는지 확인하고 그 손 부러트려!”지하실.문태훈은 성욕을 풀고 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무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이제 가도 좋아.”며칠 사이 여자는 온갖 고문을 당해 이미 눈이 흐리멍덩해져 한참 지나서야 그의 말 뜻을 이해했다.처음에는 느꼈던 분노와 공포는 이미 사라진 채 그저 연신 고맙다는 인사만 해댔다.“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그리고 문태훈이 말을 번복하기라도 할까 봐 그의 비위를 맞췄다.“저 나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게요. 정말이에요.”“죽고 싶으면 함부로 떠들어도 돼.”문태훈은 여자를 경멸하는 듯 가볍게 툭 내뱉었다.그 순간 그는 공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비위를 맞추며 설설 기던 모습이 아니었다. 약자 앞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잔인했다.“아 참, 가기 전 뭐 하나 두고 가야 할 게 있어.”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보디가드들은 점점 여자에게 다가갔고 그 모습에 겁을 먹은 여자는 점점 뒷걸음을 쳤다.“뭐예요?”“싫어, 오지 마.”“아!”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순간 지하실을 꽉 채웠다.“…….”문태훈은 천천히 지하실에서 걸어 나왔다. 여자를 안을 때 받았던 느낌을 생각하니 순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매번 공아름의 명령으로 여자들을 처리해오면서 그녀들과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