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두 명의 의사가 케빈을 둘러싸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환자분,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됩니다.”“아직 붕대를 풀면 안 됩니다.”시영은 이 광경을 보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남자의 얼굴에 한 대를 갈겼다. “누워.”의사는 시영의 행동에 놀라 멍하니 서 있었고 그토록 고집 세고 움직이려던 남자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의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때 시영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돌볼게요.”그 순간 시영의 미소는 온화하고 밝았으며 방금의 모든 일들이 환상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곧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시영은 침대 옆에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아해했다.시영은 비웃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설마 기억 상실증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케빈은 잠시 침묵했다. “아가씨, 오늘 시험이 있지 않나요? 여기 있을 시간이 아니에요.”시영은 멈칫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케빈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케빈, 바보같이 굴지 마. 난 그런 걸 안 믿어.”케빈은 눈앞에 있는 시영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시영의 외모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전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성숙한 여인의 매혹적인 분위기가 넘쳐났다. 그 맑고 투명했던 눈동자조차도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케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영은 케빈의 눈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듯 이마를 찌푸리며 느닷없이 물었다. “어떻게 다친 건지 기억나?”케빈은 시영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솔직히 대답했다. “산사태로 다쳤습니다.”시영이 17살이 되던 해 그녀는 수학여행으로 해외로 나갔고 불행히도 산사태에 휘말렸다. 당시 케빈은 그녀가 몸을 피할 수 있는 작은 틈을
그 머리핀을 받기 전에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시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병실 문 앞에 서 있는 시영의 얼굴에는 드문 망설임이 나타났다. 그녀는 바깥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고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시영은 손을 들어 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병실 안의 케빈은 시영의 지시를 따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케빈은 고개를 돌리며 성숙하고 매혹적인 시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을 잃은 건가요?”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케빈을 쳐다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케빈의 눈빛은 안개를 걷어내듯 맑아져 시영에게 낯선 느낌을 주었다.그제야 시영은 사건 이후 케빈이 자신을 거의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빈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으며 자신이 그를 욕하거나 때릴 때조차도 아무 말 없이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시영은 문득 깨달았다. 사실 케빈도 처음부터 그렇게 죽은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가 점점 무너져 갈 때 그 역시 생기를 잃어갔다.시영은 오랫동안 케빈을 쳐다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자 케빈은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그는 지금의 시영이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다. 기억 속의 아가씨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기억을 잃은 이 기간 동안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시영은 갑자기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케빈 오빠, 좀 괜찮아졌어?”익숙한 호칭, 하지만 다른 사람.시영은 자신이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말을 꺼내니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12살에서 18살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 부모님이 일과 접대에 바쁜 밤들 시영은 항상 케빈의 이름을 불렀다.시영은 자신이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기억 깊숙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잠든 기억과 그 밝은 날들을 깨웠다.시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병상에 앉아 손을 들어 케빈의 상처를 만지
시영의 말을 들은 케빈의 눈빛이 흔들리며 의심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명 그는 자신이 준비한 그 선물을 기억하고 있었다.시영은 케빈의 반응을 보고 그가 기억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시영은 그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꺼내어 그의 눈앞에서 두 번 흔들었다. “봐, 10년이 지났어도 내가 여전히 매일 가지고 다니잖아. 이게 우리의 감정을 증명할 수 있겠지.”케빈은 그 머리핀을 보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그는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가게에 어떻게 서툴게 들어갔는지, 자신이 카운터 앞에서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고르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케빈은 몇 달 동안 고른 끝에 결국 이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선택했다. 그는 판매원에게서 그 작은 상자를 건네받을 때 총을 들었던 손에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상자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았는지 기억했다.어디에 두어야 손상되지 않을지 몰라 가슴에 넣었던 탄창을 빼내고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넣어 두었다.케빈은 한 고용병 선배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몸에는 항상 예비 탄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생명줄이 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케빈은 차가운 탄창을 치우고 더 소중한 것을 넣었다. 그것은 바로 시영에게 줄 머리핀이었다.케빈은 그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쳐다보며 시영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걸 받을 때 좋아했었나요?”시영은 잠시 멈췄다가 미소를 지었다. “좋아했어.” 시영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했다. “아주 좋아했어.”케빈은 선물을 고를 때부터 불안해하던 마음이 풀렸다. “다행이에요.”비록 표정은 없었지만 시영은 오랜 시간 케빈과 함께 지냈기에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을 알 수 있었다.시영은 손가락으로 나비의 날개를 살짝 문지르며 무심한 듯 물었다. “왜 나비를 선택한 거야?”케빈의 항상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아가씨의 열여덟 살 생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아가씨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평안하고 순조로운 삶을 시
시영은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강소진을 데리고 나왔다. 차에 오른 후, 강소진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시영을 쳐다보며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부대표님...”“강 비서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 시영이 눈을 뜨며 말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방금의 소녀의 그리움은 사라지고 차분하고 능숙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강 비서, 명심해. 나와 케빈은 이미 10년 동안 함께 해왔어. 이번에 우리가 사고를 당한 건 그가 나를 구하려다 다친 거야. 알겠어?”강소진의 눈이 크게 뜨며 물었다.“그... 함께 지내왔다는 게 일만 같이 한 거예요, 아니면...”“침대에도 오르고 연애도 했어. 알겠어?”“네, 알겠습니다...”‘세상에, 보디가드 주제에 대체 무슨 수로 부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야! 부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 그런가? 진작 알았으면 자신도 좀 더 용기를 냈을 텐데! 이제 부잣집 사위 되는 건 케빈인가?’시영은 강소진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가방 안의 나비 머리핀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저녁 7시.케빈의 병실 문이 열렸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렸지만 들어온 사람은 시영이 아닌 강소진이었다.강소진은 저녁 식사를 들고 와서 말했다. “부대표님께서 저녁에 약속이 있으셔서 저보고 저녁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식기를 차리면서 강소진은 자신의 월급만큼 비싼 약식을 보며 다시 한번 케빈을 쳐다봤다.속으로 분통이 터졌다. ‘이 녀석 정말 운 좋네!’케빈은 매우 빠르게 식사를 했는데 준비된 요리들을 하나씩 먹어치웠다. 강소진은 식기를 치우면서 국과 밥을 함께 먹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속으로 한탄했다.“다른 일 없으시다면 저는 가보겠습니다...”“아가씨의 비서이신 거죠?”강소진은 놀라서 움찔했다. ‘뭐야, 나를 견제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잘생겨서 날 내쫓으려는 건가?’강소진은 경계하며 말했다. “아, 네, 왜 그러시죠?”“그럼 제가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지 아시나요?”케빈의 질문은 의문형이었지만 강소
시영의 말투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두 사람이 정말로 10년 동안 함께 지낸 연인 같았다. 하지만 케빈은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시영의 팔을 풀어주며 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저... 할 말이 있어요.”시영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금방 다시 밝아졌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이미 말했잖아.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해도 돼. 우리 사이에는 못 할 말이 없어.”‘제가 민용재가 심어놓은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시영의 눈빛을 마주한 케빈은 도저히 이 말을 물을 수 없었다. 지금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면 이 모든 것이 깨질까 두려웠다.이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이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몇 날 며칠 동안이라도 이 꿈같은 상황을 더 느끼고 싶었다...그래서 케빈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했다. “아가씨, 저녁은 드셨어요?”시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케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케빈이 방금 한 행동이 이런 사소한 질문을 하려던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녀는 이를 지적하지 않고 무심하게 침대에 기댔다. “부하 직원이 매입에 실수를 해서 오후 내내 수정하느라 바빴고, 저녁엔 상대방과 식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밥은 거의 못 먹고 술만 많이 마셨어.”“제가 야식을 사 올게요.”케빈이 돌아서려 하자 시영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일어나서 웃으며 말했다. “아픈 사람더러 음식을 사 오게 하는 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케빈은 아직 이런 친밀한 관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불편해하며 눈길을 돌렸다. “거의 다 나았으니 이젠 아픈 사람이 아니에요.”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시영의 그윽한 눈빛이 케빈의 탄탄한 팔뚝을 따라 올라갔다. “게다가 병든 남자친구에게 음식을 사 오게 하는 건 내가 마음이 아파서 그래.”케빈은
케빈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시영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방금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이 뭔가를 떠올린 것 때문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은 후 다시 보디가드의 신분에 충실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10년 후의 케빈이 죽은 물이었다면 10년 전의 케빈은 단단한 돌멩이였다. 시영이가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그는 차갑게 무시했다. 심지어 그녀가 18살 생일에 얇은 옷을 입고 그를 유혹하려 했을 때도 돌아온 대답은 차갑고 냉정한 한 마디였다. “아가씨, 자중하세요.”그의 현재 반응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방금 따뜻해진 그녀의 마음은 다시 차갑게 식었다. 결국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는 케빈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약 그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스로 그녀와 더 이상 선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시영은 점차 평정심을 찾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지만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시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급하고 초조한 발걸음이었다.시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뒤에서 케빈이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아가씨, 저... 저 기억났어요.”시영은 잠시 멈칫하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가?’하지만 케빈이 꺼낸 말은 시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실 저는 계속 아가씨를 좋아했어요.”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시영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계속 나를 좋아했다고?’‘말도 안 돼. 케빈은 늘 나를 차갑게 대했잖아.’시영은 고개를 돌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 말 못 믿겠어. 정말로 나를 좋아했다면 왜 아까 나한테 그렇게 냉정하게 군 거야?”기억을 잃은 케빈은 지금의 시영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시영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힘들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왜냐하면, 저는 아가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배신자예요.’케빈은 잠시 멈추고
사실 케빈 자신도 언제부터 시영을 좋아했는지 몰랐다. 다만 그는 시영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케빈은 시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케빈은 시영이가 남학생에게서 받은 고백 편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고 그녀를 보지 못할 때는 마음이 불안해졌다.하지만 시영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그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었다.두 사람의 신분은 현저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는 큰집에서 보낸 사람이기에 그와 시영의 만남은 권력 싸움의 도구에 불과했다.‘아가씨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비열한 배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할까.’결과가 잘못된 것이라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다.그때의 케빈은 시영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저 소녀의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시영은 결국 자신에게서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시영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끈질겼다. 시영의 목소리가 늘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케빈 오빠.”“케빈 오빠.”때로는 화난 목소리로 때로는 기쁜 목소리로. 시영의 목소리는 그를 묶어두는 그물처럼 그의 마음을 감쌌고 그는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케빈은 자신과 시영의 결말을 무수히 상상해 보았다. 가장 좋은 결말은 그가 시영을 보호하다가 죽어 모든 죄악과 불필요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다.꿈에서조차도 그는 시영과 연인이 되는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병실에서 케빈은 시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히 그럴 수 없었어요. 저는 그저 보디가드일 뿐이에요.”사실 시영은 그의 대답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시영은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그래서 지금도 감히 그럴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나도 굳이 붙잡진 않을게, 이제 그만하자.”케빈은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여자를 달래는 법을 몰랐다. 주먹
케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영은 예전처럼 그를 졸랐다. “제발 말해줘. 그럼 다시는 이 얘기 안 꺼낸다고 약속할게.”케빈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영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과감하게 물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땠어? 열정적이었어, 아니면 순수했어? 혹시... 음란했어?”마지막 두 글자를 말할 때 시영의 발끝이 케빈의 다리를 슬쩍 스쳤다.케빈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영은 그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나서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말하라고 했잖아, 못 들었어?”시영은 방금 자신의 말투가 기억을 잃은 케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케빈 오빠, 왜 이렇게 날 화나게 만드는 거야.”케빈은 지금의 시영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가씨였다.케빈은 어렵게 입을 떼어 진실을 털어놓았다. “아가씨께서 꿈속에서 제 방안으로 들어와 어둠이 무섭다며 제 침대에 올라탔어요...”시영은 웃음을 참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뜨거운 귀를 살짝 스쳤다. “오빠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으니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게, 어때?”...잠시 후, 병실의 불이 꺼졌다. 케빈은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끼익- 문이 살짝 열렸고 시영이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케빈이가 일어나 앉아있자 시영은 침대 옆에 엎드리며 말했다.“케빈 오빠, 너무 어두워서 무서워. 오빠 침대에서 같이 자면 안 돼?”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보게 된 시영은 예전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케빈은 자신이 알던 시영을 보는 듯했다. 그는 정말 꿈속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건 규칙에 어긋나요.”시영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케빈 오빠, 정말 너무 어두워서 그래. 함께 자지 않으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시영은 케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침대로 올라탔다. 케빈이 반응하기도 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