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중에서 양현숙이 계획대로 순산을 선택하려 할 때, 시윤이 갑자기 막아섰다.“제왕절개로 해주세요.”“의사 선생님이 아이 크기가 적당하다고 했잖아. 너도 자연분만으로 결정했고. 그런데 왜 갑자기 바꿔? 자연분만이 아이한테도 좋고 회복도 빨라.”양현숙이 놀란 듯 설득했지만, 시윤은 여전히 제 고집을 부렸다.도준을 힐끗 본 양현숙은 시윤이 도준과 싸운 것 때문에 고집을 부린다는 걸 눈치채고는 낮은 소리로 설득했다.“윤아, 부부는 원래 다 그래. 부부 싸움은 물 베기라잖아. 게다가 너 외모에 신겨도 많이 쓰잖아. 제왕절개로 애 낳으면 흉터 남아. 너...”“그래도 제왕절개로 할래요. 제 배인데 제 마음대로 결정하지도 못해요?”고집을 부리는 시윤을 꺾지 못한 양현숙은 옆에 있는 도준을 힐끗 살폈다. 하지만 도준은 시윤을 한창 보더니 시윤의 의견을 따르라는 짤막한 답만 내놓았다....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도준은 시윤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선 애 낳고 나서 얘기해.”시윤은 도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감고는 묵묵히 수술실로 실려갔다.이곳의 의료진은 모두 도준이 모셔온 사람들이라 단연 업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출산 직전 수많은 검사를 통해 위험을 가장 낮추는 방안도 짜놓은 상태다.하지만 그럼에도 시윤이 수술실로 들어가자 도준은 시윤을 임신시킨 제 선택을 후회했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이 따르는 수술대에 올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준은 짜증이 밀려왔다. 심지어 제 공제를 벗어난 일에 불안했는지 수술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시간이 1분 1초 흘러 어느덧 40분이란 시간이 지났다. 양현숙도 걱정이 앞서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며 복도를 서성거렸다.“왜 아직도 안 나오지?”그때 간호사가 다가와 위로했다.“수술 시간은 약 1시간이니 이제 곧 나올 겁니다.”양현숙은 나이가 있는 데다 고정관념까지 있어 시윤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듯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갑자
시윤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 눈을 뜨자마자 병실 안에 있는 사람을 본 시윤은 흠칫 놀랐다.그때 시영이 먼저 웃으며 다가왔다.“윤이 씨, 정신 들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다들 와줬네요?”시윤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는요?”“여기 있어.”양현숙은 자고 있는 아이를 안고 다가왔다. 조심성이 담긴 동작에 벌써 외할머니의 자애로움이 묻어 있었다.“예쁘지?”하지만 쭈글쭈글한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제가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손을 만진 순간 왠지 모를 기쁨이 솟아났다.이건 시윤이 10달 동안 품고 있던 아이다.시윤은 제 품에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양현숙은 상처를 건드릴까 봐 제 품에 안고 옆에서 보여줬다.시윤이 깨어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준비한 선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시영은 미리 준비한 금으로 된 돌 반지를 아기 침대 위에 올려 놓았고, 지훈도 두둑한 현금다발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그때 수인이 땡그랑거리면서 커다란 봉투를 내놓았다.“사양 말고 받아요.”커다란 봉투 안에 담긴 그릇을 본 양현숙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이 친구는 혹시 뭐 폐품 수거하는 친구야?”그 말에 시윤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웃을 뻔했으나 이내 배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비슷해요.”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지훈이 양현숙이 꺼낸 물건을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이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골동품이잖아?”“이게 골동품이에요?”그 말에 양현숙은 놀란 듯 되물었다.“네, 그 안에 있는 거 가치로 환산하면 11자릿수는 될걸요.”양현숙은 후줄근하게 입은 수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표정을 본 수인은 싱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사양 말고 받으세요. 저 윤이 씨랑 오래된 친구예요.”수인의 경박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영은 얼른 그를 옆으로 밀어 버리며 끼어들었다.“됐어, 놀라시잖아.”시끌벅적한 와중에 시윤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하지만 시
말할 때 목소리를 조절하지 않은 탓에 ‘너무 시끄러워’라는 단어가 들린 순간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그때 정은숙이 목휴식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 우린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올게.”소리를 낮추며 말했다.“하긴, 우리 손주며느리 시영도 얼른 정은숙을 부축하며 분위기를 풀었다.“그래요. 도준 오빠가 호텔 미리 예약하고 음식도 주문했거든요. 이따가 저랑 지훈이 호텔로 모실게요. 증손자 보셨는데, 그냥 가실 순 없잖아요.”시영의 임기응변 덕에 모든 사람들은 기쁨을 안고 병실을 나섰다. 그제야 맨 뒤에 있던 시영이 다른 사람들 몰래 호텔과 음식을 예약하고 웃으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방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양현숙은 아이를 안쪽 병실로 안고 들어갔다. 사실 병실에서 대신 아이를 돌볼까도 생각했지만 시윤과 도준의 표정을 살피더니 결국 문을 닫고 조용히 병실을 나서며 속으로 두 사람이 아이 때문이라도 지난 일을 털어 버리길 바랐다.아이나 다를까, 둘만의 공간을 남겨줬는데도 둘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아이가 배고팠는지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시윤은 모유가 없었지만 곧바로 전에 양현숙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전에 먼저 젖을 빠는 동작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모유가 생겨나도록 촉진할 수 있고, 아이도 젖을 빠는 걸 배울 수 있다던 말.하지만 병실에 저와 도준뿐이라 갑자기 어색해진 시윤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불러줘요.”도준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품어 안으며 대답했다.“어머님은 연세도 많은데 하루 종일 고생하셔서 휴식해야해.”그러더니 시윤에게 다가오며 그녀의 옷자락으로 시선을 돌렸다.“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단추 풀어.”그 시각, 해질녘의 노을이 도준의 어깨에 드리워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도준은 평소 날카롭던 모습이 아이 때문에 사라져 신기할 따름이었다.그런 도준을 한창 보다가 숨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보더니 시윤은 끝내 단추
시윤은 임신했을 때 아이가 태어나면 해방될 거라고 여겼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부모로서의 숙제가 이제야 시작됐다는 걸 깨달았다.그도 그럴 게, 의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울기 시작해 헐레벌떡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으니까.처음에는 도준과 대화를 나눠볼까 생각했던 시윤도 자꾸만 터지는 돌발 상황에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다 보니 마치 한데 붙은 것처럼 좀처럼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녁이 되자 도준은 시윤과 함께 병실에서 잠을 청했다.하지만 두세 시간마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도 도준이 대신했다.저는 편히 자게 두고 조용히 아이를 안고 우유를 먹이는 도준을 보자 시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우는 건지 시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데, 이 행복 뒤에 얼마나 많은 함정과 족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시윤뿐이다.심지어 행복을 누려야 할지 아니면 아파해야 할지도 몰라 그 족쇄가 저를 점점 묶도록 내버려두었다....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시윤도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혼자 걷기까지 했다. 게다가 누워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적당히 마사지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도준은 가끔 아이를 어른들께 맡기고는 문을 닫고 시윤을 마사지해 주곤 했다.임신 말기에 다리가 좀 부은 시윤은 도준의 마사지 덕에 다리는 한결 편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갑갑해졌다.그때 마침 물건 가지러 들어온 소혜가 그 모습을 보고는 병실 문과 도준을 번갈아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어, 오빠 도준 오빠 맞아? 귀신 들린 건 아니지?”“아니야. 그런데 네가 귀신이 되고 싶다면 도와줄 수는 있어.”‘맞네!’소혜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젖병을 찾아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시각, 진태섭은 밖에서 민도윤을 품에 안은 채 활짝 웃으며 어린애 목소리를 흉내 냈다.“우리 손주, 할아비 좀 봐봐.”그걸 본 소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젖병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다 문을 나선 순간 잘생긴 남자
지난 100일 동안 시윤은 산후조리원에서 재활을 하면서 도준과는 미적지근한 관계를 이어왔다.한 사람은 안방 다른 한 사람은 객실에서 지내며 싸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하지도 않아 겉으로는 모든 게 평화로운 듯했다.이 시각 도준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시윤의 목덜미를 바라볼 뿐,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윤이 젖을 먹는 모습을 보며 목울대를 꿀렁이며 어두운 눈으로 계속 응시할 뿐이었다.그렇게 한참 뒤, 도윤이 배부른 듯 울음을 멈추자 도준은 시윤의 원피스 지퍼를 올려주면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더니 목덜미에 뜨거운 키스를 남겼다.그 사이 시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이제 나가야 해요.”시윤은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속은 생기라고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시윤을 흔들 수 있는 건 아이 외에 아무것도 없다.도준은 시윤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오늘 도윤이 백일 잔치인데 나 계속 무시할 거야?”시윤은 도윤을 품에 안은 채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요?”아무 흔들림도 없는 시윤을 보자 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없이 시윤을 제 쪽으로 돌려 단추를 채워주었다.“나 오늘 산후조리원에서 물건 가져올 테니까 앞으로 집에서 지내.”“네.”이윽고 끄덕이는 시윤의 얼굴을 문질렀다.“나가자.”...백일 잔치는 매우 시끌벅적했다. 시윤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도준과 나란히 서서 손님들의 축복을 받았다.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있었지만 시윤의 귀에는 그 축복들마저 ‘웅웅’하는 소음으로 들렸다.사람들이 앞에서 입을 뻐끔거리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애써 미소를 지으며 뭐라 말한 것 같았으나 그 내용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마치 유리병 속에 갇혀 제 몸이 해야 할 임무를 하고 있는 걸 지켜보는 듯했다.그 사이, 사람들 속에 있던 나석훈은 계속 시윤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윤은 잠이 든 도윤을 안고 조용히 창 밖을 내다보았고 도준은 그런 시윤을 관찰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골든 빌라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이모님이 항상 청소를 한 덕에 들어서자마자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하지만 시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꽃을 못 본 척 도윤을 안고 아기방으로 향하더니 아이가 자는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그렇게 보다 보니 반 시간이 훌쩍 흘렀다.그때 도준이 방으로 들어와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피곤할 텐데, 밖에서 휴식해.”“네.”도준의 품에 안겨 거실로 나간 시윤은 소파에 앉아 육아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도준은 그런 시윤의 손을 꼭 잡았다.“여보.”“왜요?”시윤이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시윤의 검푸른 다크서클을 보자 도준은 한참 동안 말을 머뭇거렸다.“집은 산후조리원이랑 다르니 내가 시영이더러 산후 도우미 알아보라고 할게. 자기가 골라봐.”그 말을 들은 시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도 도윤이 돌볼 수 있어요.”석훈의 말이 떠올라 도준은 시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어머님이라도 불러 여기서 지내게 해.”“필요 없어요, 혼자서 할 수 있다고요.”마치 강조라도 하듯 시윤은 ‘혼자서 할 수 있다’는 말을 또 반복했다.양현숙도 거절하는 걸 보면 상태가 많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결국 도준은 산후 도우미 대신 이모님을 모셔 청소와 요리를 돕게 하고 도윤의 일은 모두 시윤에게 맡겼다.게다가 편의를 위해 아기 침대도 안방에 들여 도윤을 안에서 자게 했다.그 덕에 아이를 낳은 뒤 처음으로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어둠 속에서 반듯하게 누운 시윤을 보자 도준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지만 손을 대지 않고 그저 시윤을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었다.시윤도 아무 말 없이 도준의 어깨에 기대, 방 안에는 고요함이 지속됐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도윤의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침묵을 깨뜨렸다. 시윤
그 뒤로 한 달 동안 시윤은 매일 집에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도준이 가끔 산책하러 나가자고 할 때마다 도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했다.게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 도윤 앞에 있을 때만 몇 마디 하는 게 최선이었다.가끔 침대에 달린 장난감을 가리키며 ‘이건 꽃이고 이건 별이야’라며 가르치듯 말하는가 하면 가끔 이야기를 읽어주었다.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도준은 결국 이대로 두면 시윤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양현숙을 집에 불렀다.양현숙은 시윤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 걱정스레 말했다.“왜 이렇게 야위었어?”임신 중에 쪘던 살이 모두 빠진 데다 눈 밑에 난 검푸른 다크서클을 보자 양현숙은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시윤은 오히려 덤덤하게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얼마나 좋아요. 다이어트했다 치면 되죠.”“그게 무슨 헛소리야? 도윤이 아직 젖도 안 뗐는데 너 이러다가 죽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왔으니까 점심 많이 먹어.”말을 마친 양현숙은 곧바로 주방으로 가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음식을 시윤은 몇 젓가락만 맛보고는 이내 내려놓았다.“배불렀어요.”양현숙은 거의 그대로인 밥을 보며 놀란 듯 물었다.“너 평소에도 이렇게 적게 먹어? 이러면 안 돼. 이러다 너 쓰러져. 자, 너 좋아하는 국부터 마셔.”시윤은 거절하지 않고 그릇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그걸 본 양현숙은 안심한 듯 음식을 하나둘 짚어주었고, 시윤은 여전히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먹었다.심지어 평소 먹던 양을 훨씬 초과했지만 임무 수행이라도 하듯 말이다.도준은 싸늘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인제 그만 먹어.”그동안 시윤의 이상함을 본 적 없는 양현숙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더니 맞장구쳤다.“그래, 이제 많이 먹은 것 같으니 그만 먹어.”시윤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다음 순간 메스꺼움을 느낀 듯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지켜보던 도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빠른 걸음으로
도준이 어떻게 설득하든지 시윤은 마친 듯 버둥대며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댔다.“아이, 우리 도윤이 울어요. 데려와야 해요...”그러다 미친 듯 밖으로 달려 나가는 시윤을 보자 도준은 할 수 없이 힘으로 그녀를 눌러 소파에 앉히더니 낮게 소리쳤다.“이시윤!”그 순간 시윤은 어리둥절해서 동작을 멈췄다. 도준이 이렇게 저를 부르는 건 거의 들은 적이 없었기에 시윤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이제야 도준을 발견한 듯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도준의 팔을 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우리 아이 데려와 줄래요? 우리 도윤이 매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젖도 먹여야 해서 내 곁을 떠나면 안 되는데.”“어머님이 젖병도 챙겨 가셨어. 게다가 우유도 있으니까 괜찮아. 자기 지금 아파, 약 먹고 치료해야 해서 젖먹이면 안 돼.”“제가 아프다고요?”시윤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저 불편한 곳 없어요. 저 괜찮아요. 우리 도윤이가 아픈 거예요, 내 곁을 떠나면 안 되는데.”도준은 시윤의 공허한 눈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우뚝 솟았던 도준은 쪼그려 앉아 시윤보다 낮아진 자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여보, 우리 얘기 좀 해.”시윤은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도준의 말을 반복했다.“얘기 좀 하자고요?”도준은 시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며 표정 하나하나 눈에 넣었다.“그날 공아름이 자기 납치했을 때 뭐라고 했어?”그 순간 마구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시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열심히 쌓은 보호막을 깨뜨렸다.곧이어 시윤은 제 귀를 막으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그 반응에서 대충 모든 걸 짐작한 도준은 시윤의 손을 잡아 내렸다.“그날 폭발 사고를 의심하는 거야? 그럼 말해줄 수 있어. 궁금한 거 다 말해줄게. 그날...”“말하지 마요!”시윤은 마치 충격이라도 받은 듯 제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듣기 싫어요. 나가요! 나가!”이런 모습은 단순히 현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