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한 달 동안 시윤은 매일 집에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도준이 가끔 산책하러 나가자고 할 때마다 도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했다.게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 도윤 앞에 있을 때만 몇 마디 하는 게 최선이었다.가끔 침대에 달린 장난감을 가리키며 ‘이건 꽃이고 이건 별이야’라며 가르치듯 말하는가 하면 가끔 이야기를 읽어주었다.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도준은 결국 이대로 두면 시윤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양현숙을 집에 불렀다.양현숙은 시윤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 걱정스레 말했다.“왜 이렇게 야위었어?”임신 중에 쪘던 살이 모두 빠진 데다 눈 밑에 난 검푸른 다크서클을 보자 양현숙은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시윤은 오히려 덤덤하게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얼마나 좋아요. 다이어트했다 치면 되죠.”“그게 무슨 헛소리야? 도윤이 아직 젖도 안 뗐는데 너 이러다가 죽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왔으니까 점심 많이 먹어.”말을 마친 양현숙은 곧바로 주방으로 가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음식을 시윤은 몇 젓가락만 맛보고는 이내 내려놓았다.“배불렀어요.”양현숙은 거의 그대로인 밥을 보며 놀란 듯 물었다.“너 평소에도 이렇게 적게 먹어? 이러면 안 돼. 이러다 너 쓰러져. 자, 너 좋아하는 국부터 마셔.”시윤은 거절하지 않고 그릇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그걸 본 양현숙은 안심한 듯 음식을 하나둘 짚어주었고, 시윤은 여전히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먹었다.심지어 평소 먹던 양을 훨씬 초과했지만 임무 수행이라도 하듯 말이다.도준은 싸늘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인제 그만 먹어.”그동안 시윤의 이상함을 본 적 없는 양현숙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더니 맞장구쳤다.“그래, 이제 많이 먹은 것 같으니 그만 먹어.”시윤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다음 순간 메스꺼움을 느낀 듯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지켜보던 도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빠른 걸음으로
도준이 어떻게 설득하든지 시윤은 마친 듯 버둥대며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댔다.“아이, 우리 도윤이 울어요. 데려와야 해요...”그러다 미친 듯 밖으로 달려 나가는 시윤을 보자 도준은 할 수 없이 힘으로 그녀를 눌러 소파에 앉히더니 낮게 소리쳤다.“이시윤!”그 순간 시윤은 어리둥절해서 동작을 멈췄다. 도준이 이렇게 저를 부르는 건 거의 들은 적이 없었기에 시윤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이제야 도준을 발견한 듯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도준의 팔을 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우리 아이 데려와 줄래요? 우리 도윤이 매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젖도 먹여야 해서 내 곁을 떠나면 안 되는데.”“어머님이 젖병도 챙겨 가셨어. 게다가 우유도 있으니까 괜찮아. 자기 지금 아파, 약 먹고 치료해야 해서 젖먹이면 안 돼.”“제가 아프다고요?”시윤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저 불편한 곳 없어요. 저 괜찮아요. 우리 도윤이가 아픈 거예요, 내 곁을 떠나면 안 되는데.”도준은 시윤의 공허한 눈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우뚝 솟았던 도준은 쪼그려 앉아 시윤보다 낮아진 자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여보, 우리 얘기 좀 해.”시윤은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도준의 말을 반복했다.“얘기 좀 하자고요?”도준은 시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며 표정 하나하나 눈에 넣었다.“그날 공아름이 자기 납치했을 때 뭐라고 했어?”그 순간 마구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시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열심히 쌓은 보호막을 깨뜨렸다.곧이어 시윤은 제 귀를 막으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그 반응에서 대충 모든 걸 짐작한 도준은 시윤의 손을 잡아 내렸다.“그날 폭발 사고를 의심하는 거야? 그럼 말해줄 수 있어. 궁금한 거 다 말해줄게. 그날...”“말하지 마요!”시윤은 마치 충격이라도 받은 듯 제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듣기 싫어요. 나가요! 나가!”이런 모습은 단순히 현실
석훈은 아기방에서 시윤과 대화했다. 심지어 도윤이 평소 어떤 장난감을 제일 좋아하는지와 같은 도윤에 관한 질문들만 했다.시윤도 엄마로서 아이의 얘기가 나오자 이내 자랑하는 듯 줄줄 일상을 공유했다.국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심리상담사로써 석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윤과 대화할 매체를 찾았다.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반 시간이 지나자 시윤은 아기방 리클라이너에 기대 잠들었다.아기방 감시 카메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본 도준은 시윤이 잠든 걸 확인하자 그제야 다가왔다.“어때요?”“괜찮아요. 잠깐 최면을 건 것뿐이에요. 약 1시간 정도 잘 테니 밖에서 얘기해요.”시윤이 한참 동안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석훈의 확답을 들었음에도 방금 전 돌발 상황을 겪은 도준은 멀리 떠나지 않고, 아기방이 보이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었다.“현재 사모님은 현실도피 증상이 보입니다. 본인이 속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 도망치려 하고 있어요. 하지만 수많은 요소에 갇혀 모든 걸 억지로 하고 있어요.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딸이 되어야 하니까. 그날 먹지도 못할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은 것도 마찬가지예요.”도준의 그윽한 눈에 그늘이 졌다.“그러니까 지금 어머님도 배척한다는 거예요?”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요. 뜬금없이 자연분만을 제왕절개로 바꾸려고 한 것도 정신적으로 반항하는 거예요. 원래라면 자연분만으로 애를 낳고 이혼을 제안하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엄마라는 책임감, 주위 친척 친구들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억지로 역할극을 하고 있는 갈고 보시면 돼요.”기억을 되짚어보니 시윤은 아이를 낳고 깨어났을 때 도준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도윤의 울음에 대화가 중단되고, 수많은 검사가 이어지고, 아이를 돌보고, 또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면서 점차 조용해졌다.‘그래서 그런 거였네.’도준은 시윤이 아이를 낳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녀는 오히려 저를 가둬버렸다.그 순간 시윤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도윤의 엄마,
시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온통 흰색이었다.이불도, 벽도 온통 하얗기만 했다.눈앞의 상황에 놀란 시윤은 이내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여기 어디야? 내 가족은? 내 아이는? 나 나갈래. 내보내 줘!”“...”유리 벽을 사이 두고 겁에 질린 시윤의 표정을 본 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석훈이 그를 막아섰다.“이건 필요한 치료 과정입니다. 사모님은 사회적 관계와 정신적인 억압 때문에 병세가 생긴 거라 반드시 새로운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시 의식을 되찾고 원래 사태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제 말 고깝게 듣지 마세요. 민 사장님이 들어가면 사모님 상태만 더 악화할 겁니다.”도준은 문고리를 꽉 잡았던 손을 스르르 풀더니 무기력하게 두리번대는 여자를 바라보며 감정을 삼켰다.“얼마나 걸려요?”“한 달 내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한 달이라는 말을 듣자 도준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한 달이나 저기 있어야 한다고요?”“보름 정도는 여기서 지내야 합니다. 나머지 보름은 상황에 따라 거의 회복한다면 가족을 만날 수 있어요. 병이 더 이상 악화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도 되고요.”석훈은 본인의 의술에 자신감을 보였다.“사실 다른 의사라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립니다. 이건 충분이 빠른 겁니다.”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에 쪼그리고 있는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심지어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에는 핏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달만 고생하게 하고 병을 치료할 것인지, 아니면 바보가 되더라도 제 옆에 묶어둘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헐레벌떡 달려온 양현숙은 안에 있는 시윤을 본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왜 윤이 가둬요?”석훈은 이내 위로했다.“양 여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도 일종의 치료 수단입니다.”곧이어 석훈은 시윤의 병세를 간단히 설명했다. 연유를 들은 양현숙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게 다 내 탓이야. 내가 일찍 발견
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잘 있어요. 며칠 뒤 사모님 증세가 호전되면 만날 수 있어요.”시윤은 예전처럼 미친 듯이 도윤을 찾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시윤도 지금 상태로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를 돌보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이에 시윤은 한참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제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는 도윤이 안 볼 거예요. 아이 놀라면 안 되니까.”시윤의 말에 석훈은 미소를 지었다.“지금 상태가 날로 좋아지고 있어요. 이제 곧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가족을 언급하자 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날 저녁, 시윤은 처음으로 멀쩡한 정신으로 병상에 누워 창 밖의 달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정신이 다시 돌아온 탓인지 애써 외면하던 것도 하나둘 밀려오기 시작했다.가족, 아이, 그리고 도준까지...한순간 진실을 회피하려 했을 뿐인데 이성을 잃게 될 거라고 시윤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위해서라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이혼하든 직면하든 빨리 나아져야 해.’정신이 돌아온 뒤로 시윤은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면서 상태가 점차 좋아졌다. 그도 그럴 게, 시윤의 산후 우울증의 원인은 대부분 호르몬 수치가 낮아지면서 생긴 거라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데다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하니 회복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덕분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시윤은 매일 그리워하던 도윤을 만났다.보름 안 본 사이 전보다 무거워진 도윤은 포도알 같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시윤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해져 전보다 더 예뻐진 아이를 보자 시윤은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아가야, 엄마 기억나? 엄마 잊지 않았지?”시윤이 우는 모습을 보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려던 도윤은 실패하자 입으로 뭐라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천진난만한 도윤의 모습에 시윤은 이내 웃음이 터져 조심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석훈은 도준을 말없이 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무의식을 건드려 결정을 바꾸도록 유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위험이 따릅니다. 사모님은 전에 본인이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해 병을 앓았기에 또 간섭하면 심리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도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리 벽 안에서 도윤의 얼굴을 문지르며 미소 짓는 시윤을 응시했다. 도윤이 태어나고 나서 도준은 시윤이 이렇게 미소를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솔직히 시윤이 왜 저를 그렇게 억압했는지 도준은 알고 있다. 아마 본인이 어떻게 하든 도준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도준은 이혼도 동의할 리 없고, 시윤이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것도 동의할 리 없으니, 혼인과 아이 모두 시윤에게는 속박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그 뒤 일주일 동안, 시윤의 치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비록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매번 완전히 회복했다고 느낄 때마다 시윤은 불안 증세를 보이곤 했다.그렇게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친 석훈은 시윤을 보며 결과를 말했다.“시윤 씨의 몸이 지금 회복하는 걸 저항하고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이곳에서 나가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 점이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이건 저로서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시윤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후볐다. 확실히 석훈의 말대로 일주일 뒤면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뒤로 시윤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누군가 아들을 꿈에서 납치해 필사적으로 찾아도 찾지 못하는 꿈은 거의 매일 반복됐다.시윤의 꿈을 얘기하자 석훈은 그걸 상세히 기록하며 건의했다.“가끔 어려움을 직면하지 못하는 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지 그 자체를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되도록 민 사장님과 얘기 나눠보세요.”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시윤은 가슴이 따끔거려 답답해나기 시작했다.그러다 결국 꽉 그러쥔 손을 풀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고려... 해볼게요.”벌써 거부감을 드러내는 시윤을 보자
어둠 때문에 가려진 도준의 억압 대신 저를 꼭 끌어안은 따뜻한 품과 힘 있는 팔이 고스란히 느껴져 시윤은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결국 참지 못해 베갯잇으로 눈물을 훔치던 시윤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도준 씨예요? 그동안 도준 씨였어요?”시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도준은 시윤이 깨어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진정을 되찾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동시에 시윤이 어떤 반응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싫어할지 아니면 아예 밀어낼지. 그런데 의외로 시윤은 그러는 대신 불쌍한 목소리로 그동안 왔던 사람이 그가 맞는지 물었다.도준은 시윤을 품에 꼭 안으며 대답했다.“응, 나야.”그 말을 듣는 순간 시윤은 더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예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시윤을 제 쪽으로 돌려 위로해 주면서 다른 짓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이것도 만족한다는 듯.조용한 병실 안에는 순간 여자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도준은 시윤의 팔을 따라 어깨를 꼭 껴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왜 도윤이보다 더 울어? 됐어, 그만 울어, 여기가 싫으면 우리 집에 가자.”집이라는 단어를 듣자 애써 피하려던 기억이 밀려오면서 시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급기야 몸을 웅그리고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싫어요.”시윤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지만 병세가 점점 악화할까 봐 도준은 결국 시윤에게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허리를 문지르며 위로했다.“그래, 자기 말 들을게. 돌아가기 싫으면 여기 있어.”그 말을 들었음에도 시윤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도준의 품에서 떨고 있었다.절대 저와 만나면 안 된다던 여자가 몸을 쪼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앙상한 팔로 본인을 감싸 안고 떨고 있는 걸 보자 도준은 끝내 손을 스르르 풀었다.“휴식 잘해.”시윤은 여전히 쪼그리고 있다가 병실 문이 닫히자 뻣뻣하게 등을 폈다.고개를 들고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는 시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사실 시윤도 도준과 얘기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본인을
석훈은 시윤을 도와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고는 시윤의 요구대로 다음 날 아침 8시로 시간을 정하고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조금 더 지나야 민 사장님을 만나려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요.”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아들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석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모성애의 잠재력은 늘 대단하긴 하죠. 심지어 가끔은 심리학과 과학의 범주를 뛰어넘을 때도 있으니까요.”“그럴지도 모르죠.”시윤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밖은 어느새 또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그동안 치료를 잘 받은 덕에 시윤은 소극적인 생각을 던져버리고 도윤을 제대로 마주했다. 물론 도윤이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든 간에, 본인과 피로 맺어진 천륜이기에 도윤을 사랑하고 낳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때문에 도윤을 위해서든, 본인을 위해서든 시윤은 물러날 수 없었다.다음날.아침 7시 50분, 석훈은 시윤을 데리고 병원 아래의 공원으로 향했다.물론 아직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햇빛은 따스했다.석훈은 시윤과 나란히 벤치에 앉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여기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비교적 편할 겁니다. 그리고 민 사장님과 대화할 때, 시윤 씨가 멈추라고 하면 저희가 개입해 바로 대화를 중단할 거고요.”다들 제 병이 발병될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았기에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석훈은 시윤의 뒤쪽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석훈이 떠남과 동시에 낙엽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분명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도준이 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늦겨울이 가고 초봄에 들어서 여전히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두꺼운 외투마저 남자의 압도하는 분위기를 억누르지는 못했고, 검은 눈동자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뚫고 주먹만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시윤의 볼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시윤은 옷소매 안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