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해요. 조 사장님이 우리 제수씨한테 한 걸 제수씨가 조 사장님한테 돌려주면 돼요.”“네?”조 사장은 순간 당황했다.‘그런데 고작 여자인 권하윤이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어? 민도준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야 낫지.’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조 사장은 마지못해 동의했다.“민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들어들여야죠.”“그럼 우선 이 상처부터 시작하죠.”민도준은 권하윤 얼굴에 난 손자국을 힐끗 보더니니 입을 열었다.하지만 권하윤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조 사장님은 의리를 중요시하는 분이셔. 이미 동의했으니 안심하고 때려.”그제야 권하윤은 놀라움에서 벗어나 상황을 파악했다.민도준의 이런 행동이 그녀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권하윤은 민도준에게 살짝 미소 짓더니 그제야 조 사장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조 사장님, 죄송합니다.”그녀의 연약한 모습을 보자 조 사장은 당연히 그녀의 손힘이 작을 거라고 생각했다.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린 채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때.“짝”맑은 소리가 들려왔다.손의 힘은 확실히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 사장은 얼굴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아 슥 문질렀는데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그는 얼른 권하윤의 손을 잡아당겨 확인해 봤다. 그랬더니 그녀가 반지를 손바닥 쪽으로 돌려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다이아몬드 반지는 이미 그의 피로 얼룩져 원래처럼 반짝거리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도준은 재밌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뒤끝 있네.’“네가 감히 더러운 수작을 부려?”조 사장은 권하윤의 손을 잡은 채 울분을 토했다.하지만 권하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뒤로 뺐다.“죄송해요. 눈치채지 못했어요.”“씨발, 너 일부러 이랬잖아. 내가…….”하품 소리가 갑자기 그의 말을 잘라 고개를 들어보니 민도준이 느긋하게 손을 저었다.“계속.”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 사장은 할 수 없이 억울함을 삼키며
소파위 검붉은 액체가 조 사장 다리 사이로 흘러나왔다.불과 십여 초 만에 그는 이미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 않았다.동공은 수축되어 마치 다음 순간 바로 숨을 거둘 것만 같은 상태였다.입안에 사과가 막혀 비명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쉿-”민도준은 그를 위로하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칼을 홱 뽑았다.뜨거운 피가 칼날을 따라 뿜어져 나오자 조 사장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쓰러졌다.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는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손에는 여전히 사과를 쥔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정신 차려.”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넋이 나간 듯 민도준의 피로 얼룩진 앞자락과 손에 든 칼을 보고 있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민도준은 권하윤의 어깨를 잡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무서워?”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벌리자 저도 모르게 입술이 파르르 떨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 모습은 민도준의 눈에 조금 귀여워 보이기 까지해 얼굴을 꼬집고 싶었다.하지만 권하윤의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을 향해 칼을 들고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는 민도준의 모습이었다.몸은 본능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났고 두 팔을 가슴 앞으로 두르며 방어태세를 취했다.민도준은 상체를 세우며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손목을 빙빙 돌렸다.“어디까지 물러나려고?”권하윤은 머리를 쥐어 짜내며 생각하다가 문 앞에 비친 사람 그림자를 보고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몸을 틀었다.“저, 희연 언니 보러 가고 싶어요.”사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방금 권희연이 그녀를 대신해 조 사장을 막아주려 하다가 그의 발에 차였기에 지금 어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민도준이 반대하지 않자 권하윤은 부리나케 문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권희연 곁에 커다란 산 하나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산처럼 큰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로건은 몸을 쪼그린 채 앉은 채 멍하니 배를 끌어안고 숨을 몰아쉬는 권희연을 바라보고 있었
문을 닫은 뒤, 바깥에 있는 웨이터이 뭔가 낌새를 채지 못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비로소 안심했다. 하지만 소파 위에 마치 시체처럼 누워있는 조 사장을 보자 권하윤은 괜히 간이 떨렸다.“조 사장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민도준은 다 피운 담배를 테이블에 눌러 끄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명이 거기까지인가 보지. 거기 조금 잘렸다고 죽어버리다니.”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남자한테 있어서 그곳은 가장 치명적인 곳이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민도준의 심기를 건드려 저도 똑같은 꼴이 될까 봐 두려웠으니까.그런데 조 사장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뒷수습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살금살금 조 사장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창백해졌고 가슴에는 이미 움직임이 없었다.손을 그의 코밑에 갖다 댈 때 권하윤은 긴장한 탓에 숨을 죽였다.다행히 약한 숨결이 그녀의 손가락을 스쳤고 미약하지만 고른 걸 봐서는 바로 죽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이윽고 민도준과 방법을 의논해 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얼굴에 걸려 있는 비웃음을 발견했다.권하윤은 못 본 체 입을 열었다.“홍옥정은 조 사장 구역인데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게 알려지면 저희를 보내주지 않는 거 아니에요?”긴장하는 권하윤과 달리 민도준은 여유롭게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품을 갖고 놀았다.“그럴지도 모르지. 혹시 여기 도망칠 방법 있어?”“도망친다고요?”권하윤은 싱긋 웃으며 내뱉은 민도준의 충격적인 발언에 눈을 부릅떴다.“설마 로건 씨만 데려온 건 아니죠?”“맞는데.”“그런데 방금 로건 씨마저 보냈다는 거네요?”“응.”남자의 대답에 권하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절망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더니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눈을 내리깔았다.“왜? 나랑 같이 죽기 싫어?”‘그걸
방안.권하윤은 의자를 흔들며 수치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밖에 있는 사람들이 갔는지 알 수 없어 안전하게 하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이것이 임시적인 방편일 뿐이라고 부단히 자신을 암시했지만 옆에서 계속 자신한테로 꽂히는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이 더해졌다.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권하윤은 애써 민도준의 눈길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연기했다.“우리 지금 당장 나가요.”하지만 이제야 두 걸음 걸었을 때 민도준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남자의 눈 깊숙한 곳의 뜨거운 열기를 보는 순간 권하윤은 괜히 말을 더듬었다.“왜, 왜요?”민도준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느긋하게 문질렀다.“듣기 좋던데, 더 소리 내 봐.”“민도준 씨!”“알았어. 농담을 못하겠네.”민도준은 권하윤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방 안에 놓인 큰 침대를 보는 순간 권하윤의 입에서 하마터면 욕지거리가 새어나올 뻔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래요!”민도준은 아기 고양이가 사람을 긁는 것처럼 타격감 없는 권하윤의 버둥거림을 무시한 채 그녀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으며 거울을 가리켰다.“거울 봐봐. 지금 어떤지.”권하윤은 산발이 된 머리와 얼굴을 덮고 있는 핏자국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윽고 아무 말 없이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받아 깨끗이 세수했다.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감각 없던 상처가 차가운 물에 닿자 갑자기 쓰라려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차가운 숨을 들이켰다.세수하는 동안 전해지는 고통에 그녀는 내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이곳의 수건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권하윤은 세수를 끝내고 난 뒤 휴지를 뽑아 얼굴을 대충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민도준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민도준 씨도 씻어요.”“씻겨 줘.”대감님처럼 손을 슥 내미는 민도준을 보자 권하윤
방금 차가운 물에 씻겨 온도가 낮은 상처에 갑자기 체온보다 높은 입술이 닿자 권하윤은 마치 뜨거운 불에 데는 것만 같았다.민도준은 악의적으로 연한 살결을 핥으며 권하윤이 몸을 바들바들 떠는 걸 감상하더니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그제야 놓아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에서 풀려날 때 권하윤의 상처는 이미 아파서 마비되었다.방금 느낀 고통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기에 권하윤은 눈물이 글썽한 눈을 들며 민도준을 바라봤다.“화 풀렸어요?”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갑자기 대화가 왜 거기로 튀지?”권하윤은 몸을 움츠리며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들어왔어! 이럴 수가, 방금 이미 두 사람이나 따돌렸는데! 만약 누군가 조 사장의 저 꼴을 보면 우리는 나갈 수 없잖아!’권하윤이 넋을 잃고 허둥댈 때 민도준이 갑자기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나갔다.이제 와서 상대를 막아 나서기 늦었다는 판단이 들어 권하윤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를 따라 나갔다.하지만 밖의 상황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조금 도도해 보이는 냉미녀였다.“민 사장님.”그녀는 민도준을 보자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소파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조 사장을 보는 순간 이내 속 시원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불과 몇 초 만에 모든 감정을 다시 눈 밑으로 감춘 그녀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가 안내하겠습니다.”권하윤은 멍해서 민도준이 여자를 따라 나가는 걸 바라봤다.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멍하니 서서 뭐해? 가기 싫어졌어?”여자는 그제야 권하윤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이분은…….”민도준은 스스럼없이 권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내 제수씨.”차가운 여인의 얼굴에는 순간 경악한 표정이 나타났지만 이내 그걸 감추더니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여자가 그들에게 안내한 길은 권하윤이 올 때 지나왔던 길이 아니었다. 올 때와는 다르게 이
“잠깐만요.”권하윤은 넘어지다시피 민도준에게 달려들어 전화하려는 그의 손을 막았다.하지만 가뿐히 그녀의 손을 피한 민도준은 이내 핸드폰을 들고 권하윤의 눈앞에서 권미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안…….”한 글자를 채 내뱉지도 못하고 전화는 연결되는 바람에 권하윤은 이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품속에 있던 그녀가 마치 점혈이라도 당한 듯 뻣뻣하게 굳어있는 모습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피식 웃었다. 곧이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기 가슴에 엎드려 있는 자세를 취하게 한 뒤 핸즈프리 버튼을 눌렀다.“안녕하세요, 권 여사님.”분명 존칭을 사용했지만 왠지 모르게 건들거림이 묻어 있어 상대에 대한 존경이라곤 보아내기 어려웠다.평소 교리를 따지던 권미란은 민도준의 이런 무례한 말투에 화를 내기는커녕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민 사장님, 어쩐 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일이라…….”끝 음을 길게 끌며 놀라 말을 하지 못하는 권하윤을 힐끗 보더니 민도준은 이내 피식 웃었다.“일이 있긴 하죠.”핸즈프리 모드를 켜놓고 있는 바람에 권하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상처가 땀에 젖어 쓰라렸다. 큰 고통이 전해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갉아먹는 듯한 미세한 고통에 더욱 괴로웠다.그때 전화기 너머로 권미란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민 사장님, 내외하실 거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그게 사실은.”권하윤의 애원하는 눈빛을 무시한 채 민도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문지르며 운을 뗐다.“제가 오늘 홍옥정에서 권…….”권미란은 숨을 죽인 채 듣다가 건너편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혹시 우리 권씨 집안 누군가를 보신 겁니까?”민도준은 자기 무릎에 앉아 두 팔로 목을 껴안으며 입술을 부비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두 손은 가만있지 못하고 자꾸만 그의 몸에 불을 지폈다.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그녀의 눈빛이 자꾸만 그의 손을 흘깃거린다는 거였다. 마치 목적이 있다는 것을 티
대답하려고 입을 연 순간 민도준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목울대가 움직이더니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민 사장님?”민도준은 고개를 젖힌 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누군지는 직접 물어보세요.”말을 마치는 순간 전화는 끊겼다.“죽고 싶어 환장했어?”그는 권하윤의 머리채를 잡아끌더니 낮은 목소리를 뱉어냈다.하지만 권하윤은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애써 평온함을 유지했다.“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한 건 민도준 씨잖아요.”“그렇게 내 말을 잘 듣는다면 오늘은 어디 내 취향대로 해 봐.”마치 폭풍이 지나간 듯한 광기 어린 눈빛과 마주 치자 권하윤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차디찬 티테이블 위에 얼굴이 짓눌렸다.외투가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더니 손목에 멈추더니 그녀의 손을 뒤로 칭칭 묶었다.잇달아 민도준의 손바닥이 그녀의 엉덩이에 떨어졌다.“제대로 엎드려.”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권하윤은 두 다리가 떨려 불안한 마음에 뒤를 힐끗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테이블이 너무 차가운데, 위층으로 올라가면 안 돼요?”“참아, 곧 더워질 테니까.”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민도준의 가슴이 권하윤의 등에 닿았다.-“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권희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서더니 낮게 읊조렸다.“밤이 쌀쌀한데 왜 옷 더 입으시지 않으셨습니까?”권미란은 딸의 관심 어린 말도 들을 기분이 아니었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오늘 민 사장 만났어?”“네…….”권희연은 오늘 혹옥정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말했지만 권하윤이 당한 일만은 말하지 않았다.그저 민도준과 조 사장이 얘기하는 바람에 권하윤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고만 했다.민도준이 권하윤을 만났다는 얘기에 권미란의 표정은 파랗게 질렸다.“또 다른 얘기는 없었어?”“아니요. 조 사장님이 미리 잘 얘기한 것 같더라고요.”권미란은 그 말에 이마를 문질러댔다.“희연아, 내가 민 사장을 너에게 맡긴 건 너에
침대 머리를 붙잡고 연신 기침하는 권하윤의 등을 커다란 손이 두드렸다.기침이 멎고 나서야 그녀는 웃통을 벗고 있는 민도준을 발견하고는 갈라 터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만 두드려요. 아파요.”민도준이 건네는 물을 마신 뒤 그녀는 얼굴을 구겼다.“물 너무 차가운데 뜨거운 물 없어요?”이것저것 트집 잡는 권하윤을 보던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을 열었다.“한숨 자고 나더니 까탈스러워졌네?”반쯤 죽어 나갈 정도로 괴롭혀진 권하윤은 화가 나면서도 감히 말할 수 없어 그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바라봤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민도준은 물잔을 머리맡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권하윤은 놀라 무의식적으로 몸을 안쪽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움직이는 순간 허리에 통증이 전해져 이를 악물었다.민도준은 그녀의 일련의 동작을 여유롭게 바라보더니 차갑게 비웃었다.“그렇게 아프면서 뒤척이기는.”“이게 누구 때문인데요.”끝내 참지 못한 듯 발끈하는 권하윤을 민도준은 품속으로 끌고 오더니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누가 먼저 시작하래?”권하윤은 불만인 듯 잠깐 버둥대는가 싶더니 민도준의 품이 따뜻했는지 결국 힘을 풀고 그의 가슴에 기댔다.민도준의 말처럼 친밀한 행동을 하고 나니 사람이 까탈스러워졌는지 작은 소리로 허리가 아프다는 둥 중얼대기까지 했다.그녀의 모습에 민도준도 어쩌다가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문질러주었다.따뜻한 손바닥 열기가 전해지면서 가볍지도 세지도 않은 힘으로 살살 문지르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다.하지만 점차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귀에 거슬리는 벨 소리가 그녀를 잠에서 깨웠다.권하윤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민승현에게만 특별히 설정해 놓은 벨 소리였다.민도준은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아챘는지 농담 섞인 웃음을 지었다.“전화 온 거로 왜 그래? 바람난 게 들킨 사람처럼.”권하윤은 민도준과 장난칠 겨를도 없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저 힘이 없어 일어날 수 없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