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글씨체를 본 시윤은 일순 멍해졌다.“아빠? 아빠 편지잖아?”승우는 시윤에게 편지를 들키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왔지만 그게 하필 이런 혼란 속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비밀이 곧 들킨다는 공포가 덮쳐와 승우는 얼굴이 하얗게 지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대로 굳어버려 빼앗아 와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민혁은 안에 든 편지를 본 순간 상대를 오해했다는 머쓱함에 헛웃음을 지었다.“하하, 정말 편지었네. 그러게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하지만 민혁이 이내 놓아주었음에도 승우는 그 자리에 굳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윤아, 내 말 들어 봐...”그 순간 불안한 예감이 닥친 시윤은 눈살을 구겼다.“아빠가 엄마한테 주는 편지가 왜 오빠한테 있어?”“그게 그러니까...”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인지한 승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씁쓸함을 삼켰다.“이건 아버지가 뛰어내린 날 집에 두고 갔던 편지야. 내가 그동안 숨겼어.”“왜?”아버지가 뛰어내린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시윤은 고민도 없이 편지를 확인했다.하지만 몇 줄을 읽고 나서 숨이 턱 막혀왔다.[사랑하는 여보.]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이렇게 편지로 전하네. 요 며칠 나에 관한 뉴스 많이 봤을 거야. 당신이 그 말 다 믿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내 명예를 회복하려고 애타하는 것도 알아.그런데 정말 부끄럽지만 나 정말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술에 취해 내 제자인 공은채한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나도 알아, 술은 그저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거. 이런 걸 핑계라고 대는 게 얼마나 비겁한 행동인지도. 나 변명하려는 거 아니야. 그저 당신이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그래.당신한테 모두 털어놓은 뒤 자수하고 교수 자리에서도 물러나려고 했어. 그런데 공은채가 아직 어려서 나한테 품지 말아야 하는 마음을 품은 것 같아. 제 목숨으로 우리 혼인에 끼어들려고 해. 어린 생명이 내 잘못 때문에 꺼져가는 걸 볼 수 없어서 설득하려고도 하고 포기하
만약 본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미리 알았다면 승우는 절대 그 편지를 숨기지 않았을 거다.승우는 편지에 적힌 시간보다 1시간 일찍 GH빌딩에 도착했다. 그날 옥상에서 본 이성호는 원래보다 열 살은 늙어 있었다.이제 막 공은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데다, 도준이 보복할 거라는 생각에 큰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탓이었다.하지만 기척을 들은 순간 그의 눈은 반짝 빛났었다. “네 엄마는? 혹시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승우는 아버지에게 본인이 시윤에게 느끼는 감정을 영원히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만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친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 천륜을 배반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때문에 이성호의 물음에 승우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안 왔어요.”그 순간 이성호의 눈에 있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얘기를 이어나가는 승우의 눈에는 고통과 회한이 가득했다.“그 한마디 때문에 아버지가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줄 알았다면 절대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시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고개를 마구 저으며 뒷걸음쳤다.“그러니까 아빠는 도준 씨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니라 가족에게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아빠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속죄하려고 했던 거야?”“왜...”시윤은 고개를 번쩍 들어 승우를 바라봤다.“왜 그랬어? 왜 편지를 숨겼어?”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승우는 시윤을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내가 너 좋아하니까. 우리가 친남매인 줄 알고 그 마음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어. 미안해, 윤아...”승우는 점점 무너져가는 시윤의 머리를 만지려 했지만, 시윤이 차갑게 뿌리쳐 버렸다.심지어 낯선 사람을 보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빠는 이제부터 내 오빠 아니야. 나한테 아빠를 해친 오빠는 없어!”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병상에서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자 시윤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윤아...”승우는 그런 시윤을 위로 하고 시었지만, 손이 닿으려는 순간 시윤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그 길로 비틀거리며 도준의 병실에 도착한 시윤은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어댔다.“아빠를 죽게 만든 게 도준 씨가 아니었어요. 오빠였어요.”“도준 씨, 도준 씨는 우리 아빠 죽게 만든 적 없어요. 목숨으로 갚을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요. 제발 정신 차려 봐요! 더 이상 정신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한대요.”“엄마도 쓰러졌어요. 상황이 많이 심각하대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이 본인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봐요, 본인을 미워한다고 생각해서...”“아빠가 얼마나 좋은 분이셨는데, 왜 하필 그런 일이 아빠한테 일어났을까요?”시윤은 전보다 몇 배는 더 세게 울어댔다. 이제 그녀의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동안 살아왔던 삶이 모두 거짓말 같아서 그 껍질을 벗기고 벗기며 진실을 찾으려 한 것뿐인데, 결국 저를 보호하던 껍질까지 벗겨내 마음에 비수가 꽂혔고.공은채의 가식적인 사랑.주림의 가식적인 의리.모든 걸 알면서 외면했던 도준...이와 같은 진실을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이제야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하필 피맺힌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아버지가 후회 속에서 세상을 등지게 만든 장본인이 하필이면 지금껏 믿고 따르고 영원히 저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오빠라니. 그것도 저에게 기형적인 감정을 품었다는 이유로.심지어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은 하필 가장 중요한 걸 뻬앗아가버렸다.오빠와 엄마뿐만 아니라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도준까지...만약 도준이 내일까지 깨어나지 않으면 시윤은 영영 사랑하는 사람이자 제 아이의 아빠를 잃게 된다.너무 큰 고통에 몸을 한껏 움츠린 시윤은 더 이상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그저 침대에 몸
상황을 살피러 달려온 노정숙은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뒤 도준을 힐끗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환자분 의지가 대단하네요. 정말 의식을 회복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이제 막 샤워를 마친 터라 도준은 머리가 젖어 있었다. 그는 뻐근한 팔을 돌리더니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는 시윤을 바라봤다.“누가 하도 같이 죽네 마네 난리를 피워대서 시름을 놓을 수가 있어야죠.”그 말에 노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게 웃었다.“가족분도 이제 한시름 놨겠네요.”의사가 떠나자 시윤은 그제야 도준이 깨어났다는 걸 실감했다.도준이 침대에 앉아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시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왜 그래? 나 모르겠어?”시윤은 눈시울이 시큰거려 곧장 도준의 품으로 달려가려 했다.그때, 웬 그림자 하나가 시윤보다 한발 먼저 도준에게 쌩하고 달려갔다.“흑흑, 도준 형. 놀랐잖아. 형이 죽은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도준은 민혁이 제 몸에 달라붙기 전에 발로 차버리며 귀찮은 듯 말했다.“울긴 뭘 울어?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맞아. 도준 형은 100살까지 오래오래 살아야 해.”민혁은 눈물을 쓱쓱 닦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윽고 옆에 있는 시윤을 보자 제가 방해꾼이라는 걸 바로 눈치챈 듯 이내 자리를 비켜 주었다.“그럼 둘이서 얘기해, 난 나가볼게.”‘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시윤은 침대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눈시울을 붉힌 채 도준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도준은 등 뒤로 숨긴 시윤의 손을 잡아끌었다.“왜 그래? 입에 기름칠한 것처럼 쉴 새 없이 말하더니, 내가 깨어니까 또 기분 안 좋아졌어?”“저 도준 씨 애 임신했어요. 도준 씨 곧 아빠 돼요.”한참 대답이 없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울어버리는 시윤을 보자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럼, 내 애 아니면 누구 애겠어?”“진자 나빴어! 날 속여서 임신하게 했으면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는데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진짜 걱정돼서 죽을
“잠깐만. 나도 금방 옷 갈아입을 테니까 같이 가.”“아니에요, 이제 막 깨어났는데 휴식해요.”“뭐야? 지금 나더러 자기한테 딴맘 품고 있는 오빠 만나러 가는 걸 지켜만 보라는 거야?”도준은 시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얌전히 기다려.”사실 시윤도 도준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 폭발 사고를 겪고 나니 시시각각 도준의 곁에 꼭 붙어 있고 싶어 결국 얌전히 침대에 앉아 발을 흔들며 도준을 기다렸다.도준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한 채로 대충 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곧이어 옷을 들어 올리는 동작에 따라 그의 탄탄한 근육이 여과 없이 눈앞에 드러났다.시윤은 곁에서 그걸 말없이 훔쳐봤다.하지만 도준이 뒤돌아서자, 시윤의 눈에는 점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도준의 등에 난 상처는 모두 그녀를 보호하다가 생긴 거다.물론 이미 딱지가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도준이 옷을 미처 입기도 전에, 시윤은 그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더니 제 고개를 파묻었다.“도준 씨.”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시윤의 손목을 문질러댔다.“왜? 갑자기 하고 싶어?”장난기 섞인 도준의 말에, 가슴까지 차올랐던 슬픔이 순간 사라지자 시윤은 불만 섞인 투로 투덜댔다.“좀 진지할 수 없어요?”도준은 이내 뒤돌아서 코끝이 빨개진 시윤을 지그시 응시했다.“그러게 누가 옷 갈아입는 데 갑자기 덮치래?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나더러 진지해지라고?”시윤은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도준의 등에 난 흉터에 제 손을 갖다 대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많이 아프죠?”도준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괜찮아.”시윤을 다시 돌아오게만 할 수 있다면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하지만 시윤은 도준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를 취할 수 없어 가슴 아픈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곳이 화학 공장인 줄 몰랐어요?”“알았어.”“알면서 왜 걸려들어요?”도준은 시윤의 볼을 한 손으로 감싸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미끼가 마침 내
시윤이 도준과 함께 병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승우는 병실 창가에 서있었다. 시윤을 본 순간 승우는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지만 이내 뒤따라 들어오는 도준을 보자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깨어났네요?”“아니면요?”원래대로 돌아온 도준을 보자 승우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적으로 보나 몸 상태로 보나, 지금의 도준은 큰 병을 앓다 깨어난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그런 승우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시윤은 곧장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 간병인에게 물었다.“혹시 우리 엄마 한 번도 깨어난 적 없어요?”“네. 의사 선생님도 두 번이나 진찰하러 왔었는데,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어요. 오후에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중재 시술을 진행해야 해요.”시윤은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봤다. 어머니가 이토록 충격을 받은 건 그 편지 때문이다.친아들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시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만약 그때 복도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싸우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주의를 끌 일도 없었을 거고, 어머니가 이렇게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거다.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어깨 위에 손 하나가 얹혀졌다.도준은 시윤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여기서 울지 마. 어렵게 모셔 온 의료진도 있으니, 그 의료진더러 확인해 보라고 하면 되지.”‘맞아, 시영 언니가 최고 의료진을 모셔 왔었잖아. 그분들이 있는 한 엄마는 꼭 괜찮을 거야.’시윤은 다시 힘을 되찾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봤다.“도준 씨가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믿음으로 가득한 시윤의 눈빛에 도준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손을 들어 시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착하네.”말을 마친 도준은 곧바로 앞으로의 진료를 부탁하러 나가며 승우를 바라봤다.“형님, 여기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승우는 도준이 저와 시윤이 함께 있는 상황을 꺼린다는 걸 이내 눈치챘다. 이에 본능적으로 오빠라는 신분을 내
승우는 반대편에 있는 ICU병실을 빤히 바라봤다. ‘민도준이 목숨을 내걸고 시윤을 구해줘서? 그 덕에 빚진 목숨을 갚은 셈이 돼서?’순간, 방금 전 느꼈던 이상함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도준이 깨어난 타이밍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절묘했다. 마리 시윤의 마음에 남은 매듭을 풀어주기라고 하려는 것처럼.그 뿐만 아니라 원혜정이 시윤을 납치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도준이 지키고 있는 경성에서 아무도 몰래 해원까지 건너왔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으니까.‘정말 이 모든 게 한순간 감시를 소홀히 한 탓일까?’시윤의 납치 사건이든, 아니면 도준이 시윤을 구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눈물의 상봉을 한 것이든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도준이 관건적인 순간에 시윤을 구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이 아무리 아무리 승우라고 해도 시윤과 양현숙은 도준을 쉽게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승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도준이 사라진 쪽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단서를 찾으러 ICU 병실로 향했다....한편, 그 시각 시윤은 간병인과 함께 양현숙의 손을 주물러주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 의료진이 몰려와 양현숙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이내 새로운 치료 방안을 내놓았다.그중에 섞여 있는 노정숙을 보자, 시윤은 진료가 끝나자마자 다가가 진심 어린 감사 인시를 전했다.“선생님, 전에 격려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덕에 기적이 정말 일어난 것 같아요.”말을 마친 시윤은 옆에 있는 도준을 한번 바라봤다. 그 눈에는 도준을 향한 애정이 넘쳐 흘렀다. 도준의 팔을 꼭 두르고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죽다가 다시 살아나 만난 이 인연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노정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시윤 씨는 정말 좋은 아가씨예요. 그러니 민 사장님도 본인을 깨워준 아내분 소중히 여기세요.”“네.”도준은 또 뭐라고 말하려는 시윤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을
하지만 의사가 아닌지라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결국 승우는 모든 의료 기기들을 사진 찍어 의학을 독학하는 친구한테 물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한테서 답장이 왔다.“이 기기들 모두 최첨단 기기들이야. 사진상으로는 별문제 없어.”승우는 문자로 대화하기 번거로워 아예 전화를 걸었다.“내 말은 이 기기들을 보고 사용했던 환자가 정말 의식을 잃었었는지 알 수 있냐, 그 말이야.”“환자 몸에 연결하지 않아 나도 그건 모르지. 확인하고 싶으면 이전 데이터가 있어야 해.”“그 데이터는 어디서 구하는데?”“주치의한테 있을 거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야 해서 다들 갖고 있어.”‘주치의...’‘주치의라면 노정숙 선생님 말하는 거겠지?’“그럼 의식이 없던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 있어?”“그건 환자가 얼마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에 달렸어. 회복 속도가 빠른 체질인 데다 의식을 잃은 기한이 길지만 않다면 안 될 것도 없지.”전화를 끊은 뒤, 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도준이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라면 의학을 모르는 일반인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의사는 절대 속을 수 없을 거다.그 말인즉, 정말 그렇다면 주치의인 노정숙은 당연히 알았을 거기에 직접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데이터를 복사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해.’승우는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마침 간호사 한 명이 다급히 그의 옆을 지나갔다.마침 양현숙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다급히 걸어가자 승우는 이내 간호사를 뒤따랐다.“왜 그래요? 혹시 어머니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평소 승우와 자잘한 대화를 나누기 좋아하던 간호사는 그를 보자 이내 걸음을 멈추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승우 씨, 어머님이 깨어나셨어요. 얼른 가보세요.”어머니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향했다. 하지만 병상 옆에 있는 시윤과 도준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