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엄마가 슬퍼하는 거 원치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속상해하지 마요. 몸 상해요.”도준은 얼굴을 찌푸린 채 저와 피가 섞이지 않은 어머니를 위로하는 시윤을 빤히 바라봤다.‘왜 그렇게 착하기만 한가 했더니 어머님 아버님 덕이었네.’‘매사에 남을 배려하고 무슨 일을 겪든 항상 물러 터져서는.’‘그러니까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손에 쉽게 놀아나지.’마음을 추스른 양현숙은 진정이 되자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너도 얼른 민 사... 민 서방이랑 같이 돌아가서 휴식해. 대신 오빠 좀 불러주고. 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엄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이제 막 깨어나서 절대 흥분하면 안 된대요.”시윤의 걱정스러운 귀띔에 양현숙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리 흥분해도 이것보다 더할까? 괜찮으니까 오빠 불러줘.”...승우가 들어간 뒤, 시윤은 수상쩍은 모습으로 문에 바싹 붙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도준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쉬, 조용해요. 엄마가 뭐라는지 듣게.”한참을 들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시윤은 답답한 듯 중얼거렸다.“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됐어. 사람들이 나오다가 놀라면 어떡하려고? 자기 지금 놀라면 안 된다는 거 몰라?”도준은 시윤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뒤로 끌어당겼다.이에 시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댔다.“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거든요. 내 아이는 내가 잘 알아요.”도준은 여전히 시윤을 품에 꼭 안은 채 그녀의 허리를 문질렀다.“대단하네? 나한테도 아이랑 가까워질 기회 줘야 하는 거 아니야?”“싫거든요.”두 사람은 결국 티격태격하며 멀어져 갔지만 병실 안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승우는 창백하고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다가가 침대 옆에 무릎 꿇었다.“엄마, 미안해요.”짝-양현숙은 아무 말없이 승우의 뺨을 후려갈겼다.지금의 양현숙은 몹시 나약하여 손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얼굴에 떨어진 뺨 한 대는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양현
그 시각, 다른 병실에서 시윤은 도준의 다리를 베고 소파에 편히 누워 발끝을 높게 쳐들고 있다.“도준 씨, 제가 만약 엄마 친딸이 아니면 제 친부모는 누굴까요? 혹시 제가 싫어서 버린 걸까요?”시윤의 눈은 말하는 와중에 점점 어두워지더니 손으로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열 달 동안 배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버릴 수 있지?”임신한 탓인지 시윤은 생각할수록 속상했다.본인을 지금껏 집안에서 사랑받는 딸이라고 여겨왔었는데, 갑자기 버려진 고아였다니. 이토록 갑작스러운 변화에 시윤의 마음에는 진작 응어리가 맺혔다.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픈 어머니를 돌봐야 하고, 사실을 안 뒤 그런 반응을 보인 오빠 때문에 모든 걸 속으로만 삼켰었는데, 도준 앞에서 겨우 그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자 시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혹시 제가 어릴 때 너무 못생겨서 버린 거 아닐까요?”한창 시영이 보내온 회사 파일을 보고 있던 도준은 억울한 듯 호소하는 시윤의 말에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제 다리를 베고 누운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친부모님한테 물어보고 싶어?”“흥, 저를 버린 사람들을 무슨 수로 찾아요? 전 상관없어요.”몇 마디 중얼거리던 지윤은 갑자기 제 위쪽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다시 질문했다.“혹시 무슨 사고가 생겨서 할 수 없이 버린 건 아닐까요?”싫어서 버렸다는 것보다 시윤은 그래도 친부모한테 그럴싸한 핑계를 대주고 싶었다.심지어 입으로는 분명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두 눈 속에는 분명 상처가 가득 담겨 있었다.도준은 그런 시윤의 코를 살짝 눌렀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던한테 물어봐.”“익숙한 이름에 시윤은 멍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던? 던 씨가 어떻게 알아요?”“아, 그러고 보니 그때 갑자기 나타난 것도 뭐 갚을 게 있다면서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했거든요.”시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도준을 바라봤다.“설마 던 씨가 나타난 게 제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에요?”도준이 아무 대답도 하
전화 건너편에서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끝내 목소리가 흘러 놔왔다.“그래요.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민 사장님이 아무리 훌륭한 파트너라고 해도 제 연애사에 남자와 사귀었던 경험은 없어요.”“풉.”물을 마시고 있던 시윤은 던의 뜬금없는 말에 입안에 있던 물을 모두 뿜어내더니 한참 동안 기침했다.일이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시윤은 얼른 전화를 받아 들었다.“던 씨, 오해예요. 사실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물어봐요. 대답한다는 보장은 못 드리지만.”“...”시윤은 어이없어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혹시 제 출생에 대해 알아요?”질문을 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윤은 신호가 나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여보세요? 혹시 들려요?”“네, 들려요.”“그런데 왜 대답 안 해요?”“말했잖아요, 꼭 대답한다는 보장 못 드린다고.”“...”시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점점 꼬여가는 상황에 시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도준은 이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질문 하나에 지분 1%.”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 건너편에서 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알고 있어요.”‘뭐야? 1%가 이렇게 날아갔다고?’시윤은 이번에 훨씬 신중해져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제 친부모님이 누구죠?”“그건 대답할 수 없어요.”‘돈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걸 보니 내 부모님이 던 씨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게 틀림없어.’시윤이 한참 동안 아무 질문도 하지 못하자 도준이 대신 물었다.“던 씨 친구예요? 가족이에요?”그 질문에 던은 잠깐 대화를 멈추었다.“더 말했다가 민 사장님이 쉽게 알아챌 수 있으니 아쉽지만 포기할게요.”“그런데 저...”시윤이 뭔가 더 말하려고 할 때 도준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그래요. 중도에 포기한다니 아까 준다던 1%도 없는 일로 하죠.”“...”결국 돌고 돌아 헛수고한 셈이 되자 던은 말을 잇지 못했다....전화를 끊은 뒤
해연은 승우가 달콤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자 얼굴이 더 빨갛게 익어버렸다.“맞아요. 이해연. 제 이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네요.”승우는 싱긋 웃었다.“해연 씨도 앞으로 성 빼고 이름으로 불러요.”승우의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연은 오늘이 운수 좋은 날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럼 앞으로 승우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그렇게 해요.”해연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 순간 평범하기만 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하지만 기회를 잡은 김에 승우와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수간호사가 갑자기 다급하게 다가와 그녀를 불렀다.“해연아, 병실 데이터 노 쌤한테 갖다줬어?”“네? 가요.”이내 정신을 차린 해연은 허둥지둥 대답했다.“죄송해요. 얘기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그래요.”승우는 해연이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힐끗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한편, 해연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아쉬움에 잠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어렵사리 승우와 대화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렇게 빨리 끝났으니 말이다.하지만 놀랍게도 해윤이 모든 일을 끝마친 뒤 자료실에서 나왔을 때, 또 승우와 마주쳤다.“이승... 승우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승우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한 병을 해연에게 건넸다.“오늘 엄마가 깨어났다고 알려줘서 고마웠어요.”음료수를 받아 든 해연은 심장이 터질 듯 콩닥거렸다.“별거 아니었는데요.”그때 승우가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퇴근할 시간이죠? 교대 시간이 6시인 거로 아는데.”“맞아요. 어떻게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요?”해연은 음료수병을 꽉 움켜쥔 채 수줍고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승우를 바라봤다.다행히 승우는 해연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오늘 저녁 시간 되면 밥 살게요.”“돼요!”해연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기가 너무 빨리 대답했다는 걸 인지했지만 승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저녁 식사 시간, 승우는 식탁 앞에 앉아 어색한 듯 두리번거리는 해연을 바라봤다.“
힘으로 도준을 이길 리 없는 시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이 흐트러진 채로 도준의 아래에 깔리게 되었다.그러다 문득 도준이 정말 저를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안 돼요. 저 임신 중이예요.”시윤의 쇄골에 코를 박은 도준은 뜨거운 숨결을 시윤의 가슴에 내 불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조그만 것이 진짜 방해되네.”“아니, 것이라뇨?”가시 돋친 태도로 버럭하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럼 뭔데?”“음...”시윤은 잠시 생각했다.“아니지.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니 이름 못 짓잖아요. 이름은 평생 따라다니는 거라 사주에 맞게 잘 지어야 하는데.”벌써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가득한 시윤의 온화한 눈을 보자 가득이나 참기 어려웠던 도준의 욕망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결국 허리를 숙여 다시 시윤을 아래에 가뒀다.“아, 무거워요. 일어나요.”“여보, 아이만 너무 챙기지 말고 나도 좀 챙겨.”챙기긴 뭘 챙기라는 건지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뭔가 느껴진 시윤은 순간 얼굴이 화르르 타올라 고개를 돌렸다.“도준 씨도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안정을 취해야 하니 그러지 마요.”심지어 말하는 사이 제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도준의 숨결에 참으려고 애써 봤지만 결국 등줄기에 힘이 빠져버렸다.“자기가 방법 좀 생각해 봐.”“제, 제가 뭔 방법이 있다고...”시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이에 도준은 낮게 웃으며 시윤의 손을 잡더니 이윽고 입가에 입을 맞췄다.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에도 시윤은 부끄러웠는지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됐어요. 이만 자요.”“선택 안 하면 둘 다 시도해 볼까?”“건강한 생활 몰라요?”“알지. 그러니까 지금 이러는 거잖아. 성욕도 참으면 몸에 안 좋아.”“아니!”“...”깔끔하게 정리된 시트는 시윤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구겨지더니 그 구겨진 사이사이 드리운 그림자는 야밤의 어둠속에 뒤섞였다.물론 임신했다는 걸 의식한 탓에 살
등 뒤 관객석에서 승우는 공연을 보는 시윤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지난 이틀간 병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시윤은 항상 그를 못 본 척 무시해 왔다.시윤이 저를 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승우 역시 매번 어머니의 병실에 시윤이 있을 때마다 묵묵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그런데 지금, 어둠 속에 있는 미세한 불빛을 빌어 승우는 고작 시윤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물론 거리가 멀어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시윤이 더 이상 저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지 않으니.시간이 1분 1초 흘러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자 승우는 그제야 공연이 어느새 끝났다는 걸 알아채고 기계적으로 박수쳤다.배우들이 하나둘 무대 위로 올라와 커튼콜을 할 때, 윤영미가 마이크를 쥐고 관중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무대 아래의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윤영미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에서 시윤이 일어섰다. 시윤은 오늘 아주 심플한 옷차림이었는데 수수하게 화장한 예쁜 얼굴에서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시윤이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그녀를 지젤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오랫동안 공연한 경험 덕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도 시윤은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여주었다.“오늘 아무것도 안 하고 여러분의 박수를 받게 되어 조금 멋쩍네요.”그러다 잠깐 숨을 돌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죄송합니다. 제 몸 상태 때문에 마지막 공연을 함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아쉬웠지만 방금 무대 아래에서 공연을 보다 보니, 마지막 공연을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관객의 입장으로 보게 되어 오히려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 극단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존경하는 영미 쌤, 우리 극단 식구들, 스탭분들...”시윤은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마지막으로 우리 남편 너무 감사해요. 제 남편은 항상 제가 가장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요. 그래서 남편 옆에만 있으면 모든 걸 혼자 마주할 필요가 없어요. 남편한테 기대고 믿고...”시윤의 애틋한 고백에 원혜정이 퍼뜨렸던 이
“자, 건배.”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 극단 식구들은 민혁이 예약한 5성급 호텔에 모였다.모든 사람의 얼굴에 홀가분함과 기쁨이 섞여 있었고, 술을 자주 마시지 않던 윤영미조차 취기가 올라올 정도로 마셨다.유독 임신한 시윤은 그저 옆에서 해바라기씨만 깔 뿐이었다. 앞에 술병을 쌓아 놓고 있는 극단 식구들과 달리 시윤의 앞에는 해바라기씨 껍질만 놓여 있었다.그때 술을 마시고 배짱이 커진 수아와 소은이 술병을 들고 다가와 시윤과 도준에게 다가왔다.“선배, 선배가 돌고 돌아 끝내 전 형부한테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소은의 거침없는 말에 시윤은 흠칫 놀라 얼른 말을 잘랐다.“어, 저기 정확히 말하면 이혼한 적은 없으니 전 형부는 아니지.”하지만 술에 취한 소은은 제게 다가온 위험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혀를 놀렸다.“선배가 해외에서 그랬잖아요. 저랑 같이 전 세계 미남을 만나보겠다고. 이젠 저 혼자 남았네요... 딸꾹...”순간 서늘해진 주변 온도에 시윤은 감히 옆을 보지 못했다.다행히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수아가 소은을 끌고 가더니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너 죽고 싶어? 바람피우겠다고 한 건 몰래 말해야 한다고!”수아의 쩌렁쩌렁한 ‘귓속말’에 시윤의 얼굴은 일순 어두워졌다.‘이성이 많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구나...’그때 옆에서 기분을 알 수 없는 도준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전 세계 미남? 욕심도 많네?”“하하. 저거 다 헛소리예요. 게다가...”시윤은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도준이 허리를 숙이자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도준 씨 한사람이면 몇 인분을 하는데, 제가 어떻게 또 다른 사람 만나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윤은 도준의 팽팽해진 근육을 느꼈다. 이윽고 도준은 시윤을 꽉 끌어안으며 이를 갈았다.“지금 일부러 그러지?”‘일부러 그런 거면 어쩔 건데? 지금 손대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생기겠어?’시윤은 입을 가린 채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겁도 없이 웃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시윤은 복도에서 임우진과 마주쳤다.우진도 적지 않게 마셨는지 하얗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런 그를 보자 시윤은 약간 멋쩍게 말을 건넸다.“우진아 지난번에 도준 씨가 너 발로 찬 거 혹시 세게 다치지 않았어? 후유증은 없어?”우진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외상이라 바로 나았어요. 이젠 아프지도 않고요.”“그럼 다행이네.”그 말을 끝으로 시윤이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우진이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를 붙잡았다.“왜 그래?”잠깐 머뭇거리던 우진이 끝내 입을 열었다.“선배, 왜 또 그 사람이랑 합친 거예요? 그 사람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데다 일편단심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떠나지 않아요?”“그거 다 오해야. 도준 씨 나 배신한 적 없어. 그리고 변덕스럽지도 않고.”싱긋 웃으며 대답하던 시윤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그러고 보니 전에 민혁 씨가 분명 도준 씨 정신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왜 지금 이렇게 정상이지? 설마 이것도 잠복기가 있나?’시윤이 생각하는 사이, 우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도준이 한수진과 함께 시윤을 무시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우진은 시윤이 너무 안타까웠다. 게다가 그렇게 위험한 사람한테 시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됐다.“선배, 혹시 임신한 것 때문에 곁에 남아 있는 거예요? 선배만 괜찮다면 전...”“괜찮다면 뭐?”말이 끊기자 우진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그랬더니 도준이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문에 비스듬히 기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시윤은 도준이 폭력이라도 사용할까 봐 얼른 끼어들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애가 무사한지 물어본 것뿐이에요.”하지만 우진은 시윤의 거짓말을 맞춰주기는커녕 가슴을 곧게 세우며 도준을 응시했다.“선배만 괜찮다면 제가 선배랑 그 아이 돌봐주겠다고 말하려고 했어요.”‘끝장이네.’시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도준의 표정을 살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하지만 우진의 호언장담에 도준은 오히려 피식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