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임시연 맞아. 저번에 사진 보여줬잖아.”흠칫하던 진유진은 이내 화가 치밀어 올랐다.“저 여자가 남의 남자 빼앗아서 임신까지 한 그 여자야?”그녀가 임시연의 쪽을 가리키며 큰 목소리로 말했던 터라 주위의 사람들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임시연을 쳐다보았다. 한편, 임시연은 명품샵에서 신상 옷을 입어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에도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심지안을 향해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지안 씨도 쇼핑하러 왔어요? 반가워요.”그녀는 진유진의 싫은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연신이한테 아빠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하고 싶은데 지안 씨가 한번 골라줄래요?”“어머, 살다 살다 이런 뻔뻔스러운 사람은 또 처음 보네. 남의 남자를 가로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떳떳한 거야? 지금 우리 앞에서 자랑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화가 치밀어 오른 진유진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지안이 앞에서 이런 얘기를 일부러 하는 걸 보면 참 당돌한 여자야.’그러나 임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랑 연신이가 사귀었을 때 심지안 씨는 학생 신분이었어요. 게다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데 가로챘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뭐요? 나이가 많은 게 뭐 자랑이에요? 나이가 많으면 남의 남편한테 꼬리 쳐도 되는 거예요?”진유진은 점점 더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쪽 마음대로 생각해요. 난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들어보면 심지안 씨가 이 결혼에 대해 얼마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네요.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요. 내가 금관성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요.”임시연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성연신은 자신에게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지난달 절에 가서 염주를 받아왔어요. 염주를 가져온 지 얼마 안 돼서 난 아이를 가지고 되었고 사랑도 얻게 되었죠. 이제 이 염
그녀의 말에 임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농담이 지나치네요. 이 아이는 연신이 아이예요.”“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심지안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옆에 걸려있는 양복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이 양복 포장해 주세요.”옆에 있던 임시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남자 옷은 왜요? 누구한테 선물하려는 거예요?”‘진현수인가? 벌써 심지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야? 진도가 빠르네.’심지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성연신 씨한테 주려고요.”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라고 생각한 임시연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연신 씨한테 선물하려고요. 우리 두 사람이 이혼하긴 했지만 서로 친구가 될 수는 있는 거잖아요. 시연 씨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해요.”어차피 이런 짓은 임시연도 한 적이 있으니까. 친구라는 명목으로 성연신한테 접근해 심지안의 뒤통수를 쳤으니까.‘역시 심연아보다 똑똑하네.’“그럼요. 근데 연신이는 이런 싸구려 옷 입지 않아요. 지안 씨의 안목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 같아요.”잠깐 망설이던 임시연은 그녀를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입기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내가 사준 거라면 또 모르죠.”심지안은 임시연이 보는 앞에서 성연신의 부카드를 꺼내 계산했고 매장 직원에게 보광 그룹으로 옷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성연신이 이 옷을 입든 안 입든 그건 상관없다. 임시연 이 여자의 도발적인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 일부러 그런 것이다. 한편, 부카드를 본 임시연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성연신이 유일한 부카드를 심지안한테 준 거야? 5년 전의 나도 이런 대접은 못 받았다고!’그녀는 이런 차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억지웃음을 보이며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지안아, 너 진짜 짱이다. 임시연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난 네가 또 손찌검이라도 할 줄 알았어.”진유진은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심지안을 쳐다보았다. “임시연 같은 여자한테는 보통 방법을 써서는 안 돼. 자기가 상류층이라고 생각하잖아.
카드에 적힌 정연한 글자를 보니 심지안이 직접 쓴 건 같지 않았다. 선물 박스를 열어보니 박스 안에는 사이즈가 적당한 셔츠와 정장 외투가 들어있었다. 딱 봐도 고급 정장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186 cm의 큰 키를 가지고 있는 성연신은 타고난 옷매무새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셔츠는 빈틈없이 단추를 채우고 있었고 정장 바지 안에 셔츠 밑단을 집어넣고 있어 그의 허리선이 더 돋보였고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는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귀티가 났다.정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지안 씨가 대표님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네요.”‘후회하고 있는 거겠지. 대표님이랑 다시 화해하고 싶은데 창피해서 이러는 건가? 선물이라도 해서 대표님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건가?’성연신은 무심하게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는 차가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쳇. 바보 같은 여자가 아직 날 잊지 못했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진현수보다 더 나은 남자라고 생각한 거겠지.’어찌 됐든 성연신은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화가 치밀어올라 얼굴이 굳어졌다. 심지안이 이혼하기 전에 진현수한테도 양복을 선물해 준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 똑같은 방법으로 날 갖고 노는 거야? 어장관리야 뭐야? 겉으로는 정이 깊은 척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건드리고 다니잖아! 이런 여자의 마음속에는 자신밖에 없겠지.’한편,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정욱은 그를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대표님, 이 옷 입으실 건가요? 세탁소에 맡길까요?”결벽증이 있는 성연신은 아무리 깨끗한 옷이라 해도 깨끗이 씻은 후에야 그 옷을 입었다. “내가 언제 이딴 싸구려 입는 것 봤어?”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정욱을 쳐다보았다. “네, 지금 당장 갖다 버릴게요.”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정욱의 말에 성연신의 눈빛은 더 차갑게 변하였다.성연신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정욱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회의 시간이
성연신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4개월을 못 기다리겠어?”“못 기다리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믿지 않잖아. 나랑 같이 있을 생각도 없고.”“내 아이라면 책임질게.”“그래, 유전자 검사하는 거 나도 동의해. 근데 나랑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면서 네가 날 안 믿을 줄은 몰랐어.”눈에는 눈물이 반짝였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애써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연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빤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너 이진우랑 잤니?”그 말에 임시연은 멍해졌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진우 나쁜 놈, 결국은 연신이한테 다 털어놓은 거야?”“그래, 딱 한 번. 근데 그건 널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야.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실수하잖아.”성연신은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럼 그날 밤 나랑 하는 거 처음 아니네. 근데 그 피는 뭐야?”임시연은 온몸이 굳어버린 채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성연신의 믿음을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 빈틈없이 대답하여야만 했다.“시골에서 태어나서 열여덟의 나이에 어렵게 예술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어. 성공하고 싶고 이 사회에서 단단히 발을 붙이고 싶은 마음에 잘못된 일을 한 적도 많아. 그러나 난 어쩔 수가 없었어.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유명해지기 전에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는 것뿐이었어. 어렵게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됐고 진정한 피아니스트가 됐어. 널 만나면서 난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너한테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몰래 처녀막 복원 수술을 했던 거야. 5년 전, 많이 아팠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널 떠났던 거야. 5년 후, 널 다시 만나게 되었고 우리한테 아이가 생겼어. 난 더 이상 널 놓치고 싶지 않아.”임시연은 눈물을 흘리며 성연신의 손을 꼭 잡았다.“넌? 나한테 전혀 감정이 없는 거야? 다 잊었어? 처음 사업 시작할 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다 잊은 거냐고?”성연신은 그녀를 쳐다보며 손을 뺐다
임시연이 자리를 뜬 뒤, 성연신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차가움이 가득 묻어있었다. ‘어장관리도 아니고 이젠 날 이용만 하는 거야? 다른 여자한테 보여주려고 날 이용한 거냐고?’그는 옷장을 열고 양복을 꺼낸 뒤 옷장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심지안이 사준 양복을 바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심지안은 오늘 특히 옷을 두껍게 입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줄곧 일에 몰두해왔고 면허증을 딸 시간조차 없이 바삐 보냈었다. 심씨 가문의 회사를 맡게 된 후로는 어딜 가든 택시를 이용해야 해서 조금 불편했다. 하여 요즘 한가할 때 운전을 배우려고 학원에 가서 등록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어찌 된 일인지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한 직원이 장미꽃 한 송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장미꽃은 한 송이 또 한 송이...다들 장미꽃만 건네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심지안은 장미꽃을 두 손 가득 쥐고 있었다. 바로 이때, 진현수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직 다리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그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왔다. 잘생긴의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보기만 해도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그의 다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안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직원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외쳤다.“받아줘, 받아줘!”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에 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바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자신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이상 진현수의 마음을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계가 달라지면 그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지안 씨, 고마워요. 드디어 당신이 내 여자가 되었네요.”진현수는 기쁜 마음에 심지안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러나 그녀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청민 씨는 현수 씨를 만난 적도 없잖아.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 같아.’그녀는 고청민한테 고마움을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고 이내 동영상을 올린 직원에게 연락했다.그러나 때마침 외근 중이었던 직원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 고청민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이 눈썹을 살짝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 그의 맑은 눈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SNS 계정을 전환한 뒤 진현수의 SNS 계정을 찾았다. 그러고는 고백 영상을 찾아 댓글 창에 보광 중신의 공식 계정을 태그했다. 한편, 퇴근 시간이 다 돼서야 동영상을 올린 그 직원은 회사로 돌아왔다. 그 직원은 심지안에게 사과하고는 바로 동영상을 삭제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세움의 광고 모델이라는 걸 깜빡 했어요.”“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심지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이미 동영상을 올린 이상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거니까.진현수와 심지안은 오늘 병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기로 약속했다. 이틀 동안 진현수를 보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퇴근 후 병원으로 가겠다고 흔쾌히 답했다. 게다가 다리를 다친 그는 이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병원 말고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소재를 다 정리한 뒤 심지안은 기지개를 켜고 퇴근 준비를 하였다. 바로 이때 진현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안 씨, 병원으로 올 필요 없어요.”“왜요?”“회사에 일이 생겼어요. 회사 일부터 해결해야겠어요.”뭔가 생각이 떠오른 심지안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혹시 성연신 씨의 짓인가요?”잠시 망설이던 진현수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는 뜻이다.사무실에 앉아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성연신한테 문자를 보냈다.「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요?」그녀는 성연신이 이러는 이유는 분명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
한편, 방울 소리를 들은 성연신은 그녀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단숨에 낚아챘다. 진귀한 구슬이 땅에 굴러떨어졌고 그가 구슬을 발로 밟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어디서 이딴 싸구려를. 없어 보이게.”심지안은 화가 났는지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현수 씨한테 왜 그래요? 진현수 씨가 당신한테 실수한 것도 없잖아요. 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화 풀어요.”성연신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만지며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간단해요. 당신이 진현수와 헤어지면 진현수 건드리지 않을게요.”‘당신이랑 헤어졌어도 딴 놈이 당신 건드리는 건 못 참아. 역겨워서!’“당신은 내 인생에 참견할 권리 없어요.”성연신은 심지안을 놓아주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인제 그만 가봐요.”그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가긴 어딜 가.’그녀는 앞머리를 정리하고는 복도에 있는 CCTV를 힐끗 보면서 사무실 쪽을 가리켰다.“들어가서 얘기해요.”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성연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광고 모델이 되고 나니까 사생활이 꽤 신경 쓰이나 봐?’사실 이 층에는 그와 정욱 두 사람뿐이라서 CCTV를 꺼둔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그녀한테 알려 줄 생각이 없다.잠시 망설이던 심지안은 손을 뻗어 성연신의 옷깃을 쥐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앉아서 얘기해요. 당신 마음속에 있는 원한, 내 마음속에 있는 원한 다 털어놓고 얘기해요. 네?”그녀의 속셈을 한눈에 알아차렸지만 성연신은 여전히 그녀의 뜻에 따랐다.아니다 다를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바로 그의 옷깃을 뿌리쳤다. 성연신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편히 앉았다.“말해요.”“진현수 씨 사업에 대해 손대지 말아요. 그 사람은 아무 잘못 없으니까.”중소기업은 위기가 몇 번 닥치면 바로 부도가 나게 된다.“나한테 부탁하는 입장에서 태도가 그게 뭐예요?”심지안은 입술을 꽉 물었다.“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그가 오랫동안 화를 참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내가 현수 씨와 사귀게 돼서 이러는 건가?’키스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고 그녀가 발버둥 칠 때마다 성연신은 그녀를 깨물었다. 통증이 몰려온 그녀는 아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이 빨갛게 된 채로 고분고분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성연신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입술만 떼었을 뿐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입술이 저리고 아팠다. 거울을 안 봐도 입술이 분명 빨갛게 부어올랐을 것이다. 성연신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현수와 헤어져요. 안 그러면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진씨 집안에 아들이 진현수 하나죠?”그는 진현수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여자였던 심지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가 돼서 이렇게 협박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은가?그의 말에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러기만 해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마음대로 해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차갑게 입을 열었다.“당신과 진현수가 사고당한 그날, 충돌한 차량은 휘발유 운송 차량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정신을 잃게 됐죠. 진현수가 목숨 걸고 당신을 구한 게 아니라고요.”그녀는 성연신이 그 일에 대해 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내 머리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진현수 씨가 날 속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그녀의 기억 속에 진현수는 그녀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회사 일을 도와준 것도 모자라 얼굴을 다칠 위험까지 무릅쓰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를 알고 지낸 뒤로 지금까지 진현수는 단 한 번도 그녀한테 해로운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옆집 오빠처럼 늘 그녀한테 다정했고 그녀는 그가 자신을 속였다고 믿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성연신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현수는 믿고 난 믿지 않는다고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