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세움에서 내보낸 광고들 전부 다 내려야 할 거예요. 그 손해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호텔에서 그녀한테 손을 쓴다면 우리 세움에까지 그 불똥이 튄다는 걸 모르고 계셨어요? 이 일을 어르신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도와주시지 않을 거예요.”남진영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건 어르신께서 성연신 그놈이 외손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고 계셔서 그런 거야.”“그럼 성연신한테 찾아갔어야죠.”“성씨 가문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일 좀 벌이지 말아요.”“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이에요. 그리고... 성유진 이모한테 이런 말썽꾸러기 자식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사람 제대로 본 거 맞아요?”‘생김새도 닮지 않았고 심지안보다도 안 닮았단 말이야. 어쩌면... 처음부터 나이에 집중하고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을지도 몰라.’“말조심해. 말썽꾸러기라니. 연아가 어릴 때부터 부모 사랑 못 받고 자라서 그래. 우리가 잘 보호하고 챙겨줘야지. 분명 어르신한테 이쁨 받을 거야.”고청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조사해 봐야겠군.’...심지안은 화장실에서 두 시간 동안 꼼꼼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러나 어떤 흔적은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옷깃을 세우고 그곳을 단단히 가렸다. 한편, 성수광은 거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할아버지.”성수광은 그녀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안아, 너 할아버지한테 솔직하게 얘기해 봐. 다른 남자가 생긴 거니?”“아니요,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연신 씨예요.”그 얘기를 꺼내며 그녀는 흥분된 모습을 보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수광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네가 억울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연신이 그놈한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는 없겠느냐? 너희 두 사람 어렵게 여기까지 왔잖아.”“할아버지, 저와 연신 씨 사이에
가늘고 긴 속눈썹이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그 여자 때문에 이럴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해요.”‘몸도 깨끗하지 못한 주제에. 그녀가 나한테 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내 곁에 돌아오는 건 허락할 수 있지만 난 절대 먼저 머리를 숙이지 않을 거야. 결코 예전처럼 그녀한테 관대하지 않을 것이고 성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도 그녀한테 내어줄 마음이 없다.’한편,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성수광은 이번에는 정말로 가슴을 움켜쥐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심지안은 피곤이 몰려와 바로 침대에 누웠고 깨어나 보니 벌써 이튿날 새벽이었다. 스케줄 표를 확인해 보니 오후에 진현수와 함께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었다. 진료 시간을 오후로 예약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전에 특별히 진현수에게 약속 잊지 말라고 카톡을 보냈다. 오전에는 그리 바쁘지 않았다. 그녀는 회사 직원들과 회의를 마치고 직원들 월급도 올려줬다. 오후 세 시, 그녀는 진현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참, 요즘 사업은 잘돼요?”심지안은 무심하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흠칫하던 진현수는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문제가 좀 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다 해결된 상황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현수 씨는 연신 씨가 중간에서 손을 쓴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네. 차라리 잘 된 일이야.’...안경을 쓴 의사가 진현수의 피부 검사 결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흉터를 옅어지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대략 얼마 정도 걸릴까요?”“글쎄요. 환자분이 협조하는 데 따라 회복 기간도 달라요.”“네, 치료받을게요.”심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약국에서 연고 한 봉지를 받아와 진현수에게 건네주었다.“박스 위에 사용법이 자세히 적혀 있으니까 매일 제때 바르는 거 잊지 말아요.”“흉터는 원래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게 돼요
홍교은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당신 같은 사람은 당연히 모르겠죠. 난 그 병원 부원장님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이런 일쯤이야 알아보는 건 식은 죽 먹기예요.”그녀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임시연은 왜 성연신한테 거짓말을 한 것일까? 지금 그녀의 몸 상태로 임신은 그녀한테 큰 위험이 되는 것일 텐데. 그리고 성남시에는 뭐 하러 갔을까? 성남시에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바로 이때, 젊은 남녀가 그들의 옆으로 지나갔다. “내가 말했잖아, 임신 6개월 차 되면 아이 지우지 못한다고. 예단비 안 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아니야, 넌 어차피 나와 결혼할 거잖아. 예단비는 내가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꼭 줄게...”심지안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 옆에 서 있던 진현수는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직원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였고 누군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말이다. 심지안은 이내 현장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그 사람은 많이 다치지 않아 병세는 이내 안정되어 몸조리만 잘하면 금방 나을 수 있는 상태였다. 심지안은 그 사람에게 보상금을 챙겨주었고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한 난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심전웅이 전에 투자한 관광산업이었고 예정대로라면 다음 달에 완공될 것이다. 심지안은 냉장고에서 콜라 한 병을 꺼내 마셨고 차가운 콜라가 입안을 가득 채우자 피로가 금세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TV를 켜고 소파에 편히 누워 모처럼 퇴근 후의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잠시 후, 뉴스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현재 성수광 어르신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요?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째인데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더 안 좋아진 상태인가요?”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병원 원장은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심지안 씨도 어르신 뵈러 온 거예요?”“네, 혼자 왔어요?”“네, 집안 어르신들은 다 바쁘셔서요.”“그럼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편하게 말해요.”“병실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 없으면 나한테 문자 해줄래요. 그때 들어가려고요.”고청민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는 게 성 대표님 말하는 거예요?”“네...”“알았어요. 들어가서 문자할게요.”“그냥 지안이라고 불러요. 나보다 어리면 누나라고 해도 좋고요. 다른 뜻은 없으니까 편하게 생각해요.”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한 남자아이가 실수로 그의 옷에 아이스크림을 묻혔다. 남자아이는 이내 고청민을 향해 사과했다.“형, 미안해요. 빨리 괜찮다고 해요.”“괜찮아...”심지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티슈 한 장을 꺼내 고청민에게 건네주었다. “닦아요.”등 뒤에 아이스크림이 묻힌 탓에 고청민은 힘겹게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내가 해줄게요.”그녀는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물티슈를 들고 아이스크림을 닦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부드러운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진영에게 며칠 동안 감금되어 있던 동안 그녀는 볼살이 많이 빠져 얼굴이 갸름해졌고 하얀 피부가 돋보여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동안 아무도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하지 않았던 터라 그는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다 됐어요. 한참 말려야 할 거예요. 아직은 젖은 상태예요.”“괜찮아요. 고마워요. 지안 씨.”심지안은 의자에 앉아 고청민의 문자를 기다렸다. 5분 뒤, 성연신이 안에 없다는 그의 문자를 받고 나서야 그녀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30분 뒤, 고청민이 병실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성수광은 허약한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있었고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의 상태가 저번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심지안은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단지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예요?”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걸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지금 중정원에 있지도 않고 3개월의 시간은 금방 지나가게 될 테니까. “그래, 하지만 조건이 있어.”그 말에 심지안은 역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먹지 말거라. 시간 되면 중정원에 원이 보러 자주 들러 거라. 원이가 너 없으니까 살이 많이 빠졌어.”심지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성연신 씨와 자주 얼굴 보게 되는 거잖아.’그녀는 지금 성연신과 마주치기도 싫고 그와 엮기는 게 싫었다. “3개월 후, 그때도 너희 두 사람이 화해하지 못한다면 나도 마음을 접을 것이야. 안 그러면 내가 병원에서 치료도 맘 놓고 받을 수가 없구나.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할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그럼 내 뜻에 따르겠느냐?”“저...”‘콜록콜록...’갑자기 성수광은 기침을 세게 했다. 그 모습에 그녀는 헐레벌떡 의사를 부르러 병실을 나가려고 했고 때마침 서백호가 그녀를 막아섰다. “어르신께서 요 며칠 계속 이러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하셨어요. 이대로 병세가 악화한다면 어쩌면... 내년 봄까지는 힘들 것이라고. 작은 사모님, 어르신께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시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죠?”그의 말에 그녀는 마음이 덜컥 내렸다. 그녀는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준 분이셨다. 심전웅보다 더 그녀한테 잘해준 분이셨다.“약속할게요... 하지만 연신 씨가 그걸 받아들일까요?”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차가운 그 남자의 마음을 그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성수광은 기침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그놈한테는 내가 말할 것이다.”“네, 할아버지 뜻에 따를게요. 저희 두 사람 일 걱정하지 마시고 몸조리 잘하세요.”“그래, 난 좀 쉬어야겠다. 너도 그만 가보거라.”“네.”심지안이 병실을
“타요.” 그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심지안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할아버지와 약속한 이상 그와 언젠가는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심호흡한 뒤 차에 올라탔다.“할아버지가 당신한테도 말했나요?”“네.”“3개월은 오늘부터 시작이에요. 그러나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쌀쌀맞게 말하는 성연신을 보며 심지안은 어이가 없었다.“그 말은 내가 할 말인 것 같네요.”‘하룻밤 사이에 두 여자와 잠자리를 한 사람에게 용서는 없다고!’성연신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왜 할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거예요?”“난 감정이 있는 사람이에요. 할아버지가 그동안 나한테 잘해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그랬어요. 왜요? 그러면 안 돼요? 당신처럼 냉혈하고 잔인해야 하는 거예요?”심지안은 화를 내며 반박했고 성연신은 그녀한테 딴마음이 있다고 확신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 차가 한창 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중정원이요.”“가기 싫어요.”“고속도로에서 차를 멈출 수는 없어요. 그렇게 가기 싫으면 차에서 뛰어내리면 되겠네.”심지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심호흡했다.‘참자, 조금만 참자. 곧 고속도로에서 빠질 테니까.’그런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성연신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잠시 후, 성연신의 핸드폰이 울렸고 조수석에 탄 그녀는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임시연’이라는 세글자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녀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 중이던 성연신은 스피커 버튼을 눌렸다. “연신아,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 들었어. 할아버지는 괜찮은 거야?”“병세는 많이 안정됐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 상태야.”전화기 맞은켠에 있는 임시연은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네가 빨리 죽을 것이지. 그럼 내가 임신한 걸 알아도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금은 반드시 4
핸들을 쥐고 있던 성연신은 오른쪽을 향해 쳐다보았다. 백미러 속의 여자는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 고민에 빠진 듯하였고 걱정거리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고민 끝에 심지안은 그 얘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증손자를 그렇게 원하시는데 만약 임시연이 정말 임신한 거라면 아이를 데리고 성씨 가문으로 시집올 수 있는 거잖아. 할아버지께서 아무리 임시연을 좋아하시지 않더라도 아이를 지우라고는 하시지 않을 거야. 그때가 되면 3개월의 시간은 없던 일이 되겠지.’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제 홍교은 씨를 만났어요.”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임시연 씨가 임신했다고 했어요. 성남시 병원에서 임시연 씨가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대요. 그리고 병원 차트에 임신이라고 적혀있는 것도 확인했다고 하네요.”“홍교은이 그렇게 말한 거예요?”“네.”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고속도로를 빠진 뒤 그는 차를 길 한쪽에 멈춰 세우고 전화를 걸었다.“성남시 병원에 임시연의 병원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 줘.”상대방은 최대한 빨리 답장을 주겠다고 했고 심지안은 그 틈을 타 콜택시를 불렀다. 그 사람은 아마도 성남시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인 듯했다. 전화를 끊은 지 5분이 채 안 돼서 그녀가 콜택시를 부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님, 병원 차트 확인했는데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그분은 병원에서 진료받은 적이 없습니다.”성연신은 차가운 눈빛으로 심지안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지금 내가 헛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심지안 씨, 똑똑한 줄 알았는데 남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군요. 왜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믿어요? 한 번 속은 것으로는 모자라나?”“홍교은 씨가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고요. 임시연 씨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 좋은 마음에서 얘기해 준 건데. 그게 내 잘못이에요?”“임시연은 당신과 달리
성연신은 응시하며 말했다. “응. 난 홍교은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그럼 임시연이 정말로 임신을 했다는 말이에요?”“가능성은 있지.”손남영은 조롱의 뜻을 접고 정색하며 말했다. “이런 농담 재미없습니다.”이진우는 부드럽게 눈을 치켜뜨고 장난스레 얘기했다.“모니터링을 하면 알겠지. 드나들었다면 무조건 흔적이 남아있을 거야.”성연신의 눈이 움찔거렸다. 만약 진짜 임신을 한 거라면 그는 임시연에게 마땅한 신분을 만들어줘야 했다. 이런 결과는 그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본능적으로 거부했다.더 나아가 이 일을 깊게 조사하고 싶지도 않았다.여기 있는 사람 모두 이 일에 영민했다.그들은 모두 성연신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다만 이진우는 그를 눈여겨보고는 술자리가 끝난 뒤 사람을 보내 성남병원으로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하라고 했다.성남병원 산부인과 입구의 일주일 치 CCTV 화면은 이진우한테 넘어갔다.그는 잠시 영상을 본 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이 임무를 맡기고는 임시연의 행적이 발견되면 자신한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3일 뒤.두 사람은 빠르게 CCTV 영상을 보았고 생각지 못하게 진짜 임시연의 행적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이진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이진우는 CCTV 캡처 화면을 보고 몇 초간 생각에 잠기고는 이 소식을 성연신에게 말하지 않았다.홍교은이 심지안에게 말을 흘린 이튿날, 임시연은 자신의 차트를 숨겨버렸다. 병원에는 무조건 그녀의 사람이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심지안은 집에서 반려견들에게 줄 간식을 만들어 성연신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중정원에 가져다주었다.처음은 낯설었지만 여러 번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그렇게 몇 차례 가져다준 데다가 성연신과 반년 동안 함께 동거도 했었기에 대충 성연신이 집을 비우는 시간대를 알 수 있었다.어느 하루 그녀는 일을 마치고 중정원에 갔다. 아니나 다를까 성연신은 집에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