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은 심지안이 느리게 다가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대로 몸을 숙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두 사람이 가까이 붙었다.그는 손으로 심지안의 턱을 잡고 바로 붙여버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는 조금의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성연신은 그가 어느 순간부터 이런 스킨쉽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처음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이런 행동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요즘 들어 심지안과 더욱 가까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몽롱한 가운데, 심지안이 천천히 눈을 떠 성연신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했다. 긴 속눈썹이 햇빛 아래서 빛나고 있었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심지안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인 줄로 착각했다. 심지안은 성연신도 자신처럼 지금 이 키스에 취했고 그로 인해 설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 성연신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심지안은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은한테 관심이 없다고 얘기해 놓고 지금은 또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역시, 미남계 앞에서는 방법이 없었다.심지안이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키스는 끝이 났다. 성연신은 불만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외투를 들고 나가려고 했다.붉어진 심지안의 얼굴 위로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설마 삐진 걸까?’바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려는데 일어서자마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사람이 흐물거리는 액체 괴물처럼 나른해졌다. 마치 모든 정력을 뺏긴 기분이었다. 드라마 속의 괴물도 분명 이렇게 사람의 혼을 빼먹었을 것이다. 심지안은 성연신의 뒤를 따라 한 쇼핑몰에 도착했다. “좋아하는 거, 마음대로 골라요.”“옷을 사주시게요?”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성연신을 바라보았다.“그럼 쇼핑몰에 와서 쇼핑 말고 뭘 더 할 수 있습니까?”심지안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성연신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럼 미리 감사합니다!”“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성연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우아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 속 재정경제에 관련된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손남영은 그의 침묵 속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형 정말 지안 씨와 가짜 부부연기를 하기로 했어요?”성연신은 여전히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진짜 확실해요? 이건 인생의 중요한 일이예요. 형, 한쪽으로 시연 씨를 마음에 품고 다른 한쪽으로 지안 씨를 붙잡아두면 안 돼요. 이러면 바람둥이라고요!”손남영은 장학수로부터 심지안의 가정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심지안을 처음 봤을 때 장면도 생각나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넌 하루에 여자 세 명씩 바꾸면서 무슨 자격으로 날 말하는 건데?”손남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우리는 상호 간의 협의로 이루어진 거래고요. 이것과는 다르잖아요!”“그래,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고상한 사람이야.”“...”“저 진지하게 얘기했어요. 시연 씨랑 어제도 연락했는데 다음 주 금요일 비행기 표래요. 형이 지금 선택을 해야 해요.”말을 들어는 보았다.성연신의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조소하는 의미가 점차 농후해졌고 목소리는 싸늘해졌다.“너 중재자가 되고 싶은 거니?”손남영은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었다.“형을 위해서예요.”“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이쯤 되자 손남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감정에 관련된 일은 장사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두 여자 사이에 싸움이나 갈등이 생겨 정말 일이 터진다면 퍽이나 뼈저리게 고통을 느낄 것이다.“이 신발 내가 먼저 찜했어. 선착순 몰라?”“형 혼자서 가게 반을 샀는데 이까짓 신발 하나 나한테 양보 못 해요?”“내가 말했잖아. 선착순이라고. 너의 도덕적 잣대에 빗대어 날 비판하려고 하지 마.”한바탕 떠드는 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오자 성연신은 손남영과 눈을 마주치고는 일어나 들어갔다.심지안이 한 여자와 크리스털 힐을 놓고 다투는 모습만 보였다.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양보할 기미를 보
심지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뇨. 아주머니, 혹시 뭐 들으셨어요?”보광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청소 아주머니와 잠시 일을 같이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 기획팀으로 옮겼기에 가끔 회사에서 청소 아주머니를 만나면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지안 씨와 같은 부서 사람이 화장실에서 지안 씨 험담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것도 며칠째 같은 사람이요.”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아주머니, 그 사람 이름이 뭔지 아세요?”“은 언니라고 부르는 걸 들은 것 같아요.”심지안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기획팀에서 오직 경은만이 이름에 은자가 들어갔다.공교롭게도 성연신을 찾아가는 도중 다른 부서 고위 임원들과 마주쳤고, 그 사람들은 허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이야~ 지안 씨, 또 성 대표님을 찾는 거예요?”그녀는 몸이 굳어졌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저는 그냥 옥상에 가서 바람 좀 쐬려고요.”“부끄러워하지 말아요. 경은 씨가 우리한테 다 말했어요, 지안 씨 성 대표 쫓아다닌다고. 매일 퇴근하면 위층에서 성 대표 찾는다면서요? 참 용기가 대단하네요. 하지만 내가 충고하는데, 매사에는 정도라는 게 있어요. 성 대표 성가시게 해서 도리어 해고당하면 안 되잖아요.”보광 그룹에는 성연신을 좋아하는 여인이 적지 않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첫 번째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두 번째는 성연신이 한 성격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명확한 규정은 없지만, 회사 내 직원들은 사내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알고 있다.경은이 평소에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보았을 때 분명 겉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완곡하고 듣기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다른 사람의 눈에는, 심지안의 이러한 행동은 용기가 대단하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라, 이큐가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다.“솔직히 말씀드리죠, 제가 경은 씨와 약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그 후로 항상 저를 이렇게 짓궂게 놀리네요. 근데 이렇게 높으신
이 두 글자는 심지안의 예민한 신경을 단번에 자극했다.“헛소리하지 마요. 우리는 기껏해야 위아래층에서 사는 룸메이트 사이일 뿐인데 제가 무슨 질투를 해요!”아니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를 사랑한다고도 안 한다.성연신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애정은 여전히 넘쳤다. 그는 어쩌다가 좋은 태도로 말했다.“임시연이 오늘 귀국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고 극구 저를 만나겠다며 보광까지 왔었어요.”그러다가 대화 도중에 임시연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데려다주고는 곧바로 떠났다고 했다.“허튼소리! 당신들 밥 먹으러 간 게 틀림없어요!”“아니에요.”“그럼 소매에 주름은 어떻게 된 거예요?”심지안은 볼멘소리로 남편에게 묻는 듯한 말투로 캐물었다.다만 그녀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다.“임시연이 기절할 때 잡아당긴 거예요.”“맹세해요?”성연신은 그녀의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어조를 길게 뺐다.“욕심이 지나친 것 같은데요?”“농담이에요! 연신 씨는 참 재미가 없네요. 원이랑 산책하러 갈 거니까 일찍 자요!”심지안은 연신 봐달라고 사정을 했고 힘겹게 벗어나고는 퐁당퐁당 뛰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신나 보였다.원이를 산책시키던 도중 진유진과 30분 동안 통화를 했고 진유진은 성연신의 백월광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쥐를 잡는 고양이처럼 경계했다.“일찍 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예 늦게 올 것이지, 하필이면 너희들이 결혼할 때 맞춰서 돌아오냐. 십중팔구 일을 망칠 것 같으니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돼. 성연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난 네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야!”“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 성연신이 함께 할 수 있을까?”“왜 안 돼. 혼인신고도 다 했으면서 뭐가 문제야? 자신감 가져.”심지안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근데 나도 그 사람 좋아하지 않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진유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이내 진지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성연신이 너한테 감정이 있다고 나는 확신
성연신은 그녀의 뜨겁고 진지한 눈빛에 낯 간지러워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너무 많이 생각했네요.”“아니요. 연신 씨 마음속에는 정말 제가 있어요.”심지안은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고 또 자신에게 말하는 것도 같았다.“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사랑하면 대담하게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죠!”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저도 연신 씨한테 호감이 있는데!”그녀는 멍청하지 않다. 요 며칠 동안의 여러 가지 변화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다만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이때 그의 반응이 그녀를 확신시켰다.성연신은 순간적으로 불쾌했고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심지안을 노려보았다.“그저 호감뿐이라고요?”죽도록 사랑하고 그가 아니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심지안은 코를 쓱 만지고는 자연스럽게 눈꼬리를 내려 한 줄기 스쳐 지나간 어딘가 켕기는 눈빛을 감추었다. 옆에서 보면 마치 상처받은 토끼처럼 보였다.“당연히 아니죠. 제가 연신 씨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오히려 연신 씨에게 반감을 살까 봐, 넘치는 사랑에서 빙산의 일각만 드러낸 거예요.”이 사람을 알게 된 후, 그녀의 연기는 점점 더 좋아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었다.성연신은 턱을 살짝 치켜 올려 막힘 없고 아름다운 턱선을 드러냈다. 성연신은 하찮다는 듯 말했다.“감추려 할수록 더 드러나는 법.”앞줄의 정욱, “...”왜 정욱은 오히려 대표님이 감추려 할수록 더 드러나는 것 같을까?“헤헤.”심지안은 성신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연신 씨, 언제부터 절 좋아했어요? 아니면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을 느꼈나요?”“입 좀 다무시겠어요?”“물어보면 안 돼요? 인색하긴.”“연신 씨도 제 미모에 승복하는 거죠?”“참 우연이네요. 저도 그래요.”“제가 총명하니까 정말 다행이죠, 연신 씨가 잘 안 되는 남자라는 말을 믿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서로를 놓쳤을 거예요.”“읍-”심지안의 입이
“경은 씨, 장난이 좀 심하네요.”경은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냥 말한 건데 무슨 또 그렇게 격하게 반응해요.”“하... 경은 씨처럼 농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심지안은 옆에 있던 동료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그냥 내버려 둬요.”어쨌든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경은은 심지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섰다.오늘은 일이 비교적 많았는데 심지안은 오전 내내 오후 회의 때 사용될 업무 데이터와 분석을 정리해 놓았다.회의가 끝날 때까지 바삐 돌아쳤다. 경은은 거들먹거리며 다가와서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프로젝트 전략을 실행할 기획안을 써서 내일 저한테 주세요. 비용, 일정, 사전 설정 효과까지 꼼꼼히 표시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그녀는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제가 이것들을 다 하면, 경은 씨는 뭐해요?”단순하게 감시하려고 하는 건가?“당연히 지안 씨가 만든 방안을 평가하고 분석해서 필요하면 수정해 주려고 그러죠. 발탁될 좋은 기회인데 구시렁구시렁 말이나 많고.”“저의 발탁을 도와줄 필요 없어요. 임무는 우리가 반반씩, 각자 해요.”경은은 잔머리를 굴렸고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그래요. 근데 지안 씨 오늘 밤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써야 할 거예요. 그럼 제가 내일 아침에 비용과 일정을 표시해 놓을게요.”심지안은 받아들였다.시간이 촉박하기는 했지만 분업이 합리적인 편이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목표가 생기자 그녀는 빠르게 일에 집중하였다.퇴근하기 전에 성연신에게 오늘 야근을 해야 하니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했다.성연신은 언제까지 야근하는지 물었고 그녀는 시간을 알려주고는 대화를 끝냈다.밤 10시.심지안은 기지개를 켜고는 컴퓨터를 끄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일어섰는데 불빛이 갑자기 꺼졌고 사무실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심지안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벽의 스위치를 찾으려고 더듬거렸다.기억에 따라 간신히 스위치를 찾
보광 중신 건물 아래.길가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성연신은 얼굴을 찌푸리며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를 노려보다가 다시 걸었다.“고객님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비록 오늘은 회사에서지만, 매번 이 바보 같은 여자의 핸드폰이 꺼질 때마다 좋은 일은 없었다.“여기서 기다려, 내가 한번 올라가 볼게.”그는 정욱에게 한 마디 내던지고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정욱은 입을 벌려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선은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자에 놓였다.“뭐야, 왜 또 마주친 거지.”‘이 여자는 대표님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왜 또 나타난 거지?’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에서 임시연의 움직임을 살폈다.마치 모든 것이 잘 짜인 것처럼, 임시연과 성연신은 건널목에서 만났다.분홍색 브이넥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가녀린 허리에 곧게 뻗은 종아리를 드러냈다. 밤바람이 불자 머리칼이 하늘하늘 날렸고 지적이고 우아한 분위를 풍겨 마치 만화 속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임시연은 성연신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입을 벌려 말하기도 전에 기침부터 났다.“콜록콜록-”그녀는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고 마치 오장육부를 토해낼 것 같았다.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장티푸스가 아니라는 것을.성연신은 그녀가 병원의 봉투를 손에 들고 있고 병원 라벨이 보광 옆에 세워진 공립병원인 것을 보았다.“어디 아파?”“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보통 감기.”임시연은 기침을 멈추고는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회사는 어쩐 일이야?”“사람 데리러.”성연신을 직접 데리러 가게 하는 사람은 오직 그가 말한 그 사람뿐일 것이다.임시연은 시무룩했고 애써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얼른 가봐.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응.”성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뼈마디가 파래졌다.갑자기 그녀는 입을 열었다.“연신아.”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얘기해요. 지금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네.”“연신 씨, 갔던 거 아니었어요? 왜 다시 온 거예요?”심지안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물었다.성연신은 눈썹을 치켜들었다.“누가 간다고 했어요.”“그럼 안 가고, 계속 사무실에 있었어요?”“조금 더 업무를 처리했더니 곧 10시가 되더라고요.”그 뜻인즉, 이참에 너를 기다렸다는 것이다.심지안은 눈을 굴리며 능글맞게 웃었다.“알았어요, 알았어요.”이 남잔 입으로만 시비를 건다.엘리베이터에서 8등신 황금비율에 허리가 좁고 어깨가 넓은 몸매를 가진 성연신은 나른하게 한쪽 벽에 기대어 그녀를 새침하게 쳐다보고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모습을 보였다.심지안은 그의 아름다운 용모와 완벽한 몸매에 홀려 2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참, 그녀는 처음부터 성연신의 이 외모로는 아무리 보아도 강우석의 삼촌 같지가 않다고 생각했다.분명히 의심했는데 흐리멍덩하게 믿어버렸다니. 이건 벌 받을 짓이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심지안은 어수선한 마음을 접기도 전에 머리를 들자 임시연과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인터넷상의 사진과 다름이 없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하며 그야말로 동양 미인의 정석이었다.나이는 성연신과 비슷해 보였는데 사진 속보다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심지안은 머리가 띵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어제 귀국해서 오늘 만나다니.하지만 그녀는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그리고 보광 중신, 즉 성연신의 구역에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그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심지안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꼬집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임시연이 심지안을 본 첫 반응은 홍교은과 조금 비슷했다.이것은 얼마나 젊고 밝으며 생기발랄한 모습인가, 마치 껍질을 벗긴 싱싱한 여지와도 같았고 깨물면 과즙이 터질 것만 같았다.몸매와 외모가 일품이다.그러나 성연신은 얼굴만 보는 사람이 아니다.그는 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단단하고 완강한 기질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