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전화기 너머 간절한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알겠다고 했고 배달 기사의 말에 따라 보광 중신 건물을 나서니 살을 에는 듯한 비바람이 불어왔다. 몇백 미터 걸어 한 아파트 앞에 도착했고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긴 했지만 심지안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고 전화기 너머 배달 기사는 계속 앞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순간, 경계심이 차오른 심지안은 전화를 끊은 채 멈춰 서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다급하게 걸은 탓에 힐이 구덩이에 빠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겨우 몸을 가눈 심지안은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쳐다본 순간, 너무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홍교은이 검은 치마를 입은 채 위에는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으며 곁에는 다섯 명 정도가 되는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기세 등등한 깡패 누님과도 같았다.홍교은을 보자마자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심지안은 돌아서서 무작정 뛰기 시작했고 홍교은이 뒤에서 보디가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절대 저 여자가 보광 중신에 못 들어가게 막아야 해.”“네, 아가씨!”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뜀박질 소리에 화들짝 놀란 심지안은 보광 중신 근처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먹자골목까지 도망가기만 하면 꽤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다급한 심지안은 힐까지 버린 채 맨발로 미친 듯이 뛰었으며 지리적 우세를 차지한 그녀는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다니며 성공적으로 안전거리를 확보했지만 이내 화가 난 보디가드들은 두 길로 나눠 그녀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이때, 심지안은 먹자골목에 뛰어들었지만 비가 온 탓에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홍교은이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따를 수가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심지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화장실로 숨어들었고 이 기회를 빌려 성연신에게 구해달라고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한 남자와 마주쳤고 그 남자가 바로 강우석이었다.“네가 여기에 왜 있어?
심지안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동작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려 성연신을 쳐다보았고 정욱이 화장실로 들어가 굳게 닫힌 칸 문을 열어 심지안과 강우석을 꺼내 주었다.강우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심지안이 부른 구원투수가 성연신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연신 씨, 저 여자 진짜 무서운 여자예요. 연신 씨가 5분만 늦게 왔더라면 영원히 저를 보지 못하게 됐을 거예요.”심지안이 성연신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고 홍교은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그 입 다물어요!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홍교은은 눈앞의 이 여우 같은 여자에게 제대로 혼 좀 내주고 싶었을 뿐, 그 이상의 인명 사고를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흑흑… 연신 씨, 저 여자 말 믿지 마세요. 저 여자는 연신 씨를 가질 수 없으니 저를 망가트리려고 한 거예요!”심지안은 홍교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였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아무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었으며 홍교은이 건장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심지안을 쫓은 것도 이미 너무 공포스러운 일이었기에 더한 일도 충분히 저지를 만한 사람이었다.가질 수 없으니 망가트린다는 말에 강우석이 고개를 돌려 심지안과 성연신을 쳐다보던 순간, 홍교은도 강우석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성연신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저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우연하게 봐서 연신이 너 대신 현장을 잡으려고 했던 거야. 저 여자 말 믿지 마.”계속 말이 없던 성연신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강우석에게 시선을 돌려 아래위로 훑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지안이 화들짝 놀라서 얼른 설명했다.“난 저 사람과 우연히 만난 거예요.”“그런데 저 사람이 왜 당신을 지켜줘요? 전 조금 전에 당신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맞잖아요.”심지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전 남자친구를 모를 리가 없잖아?이런 상황에서 전 남자친구를 우연히 만났다는 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으며 더군다나 성연신은 이런 쪽으로 매우 예민했기에
정욱은 5분 내에 차를 끌고 나타났고 강우석은 롤스로이스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 차를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심지안이 그와 헤어지던 날, 그녀는 이 차를 타고 떠났으며 운전석에는 늙은 남자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그럼 이 차는 성연신의 차였고 앞에 핸들을 잡고 있던 늙은 남자는 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강우석은 앞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정욱을 쳐다보며 손을 뻗어 빗물이 흘러내리는 자신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화들짝 놀란 정욱이 뒤를 가리키며 성연신에게 물었다.“대표님, 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신경 쓰지 마.”성연신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알겠습니다.”차 뒷바퀴에 강우석이 온몸으로 물을 맞게 되었지만 그는 전혀 피하지도 않았으며 착잡한 표정으로 떠나는 심지안을 쳐다보면서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강우석에게 있어서 성연신 같은 사람은 신이나 마찬가지였고 강우석 자신은 돌려받은 40억 예금 빼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강우석은 퇴폐한 모습으로 빗속을 누비면서 빗물로 자신을 씻어내고 있었다. 그는 걷는 내내 심지안과의 옛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 당시 자신이 초심을 잃지 않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면 생활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하지만 이젠 모든 게 늦었고 되돌릴 수가 없었다.핸드폰 진동소리가 고요한 거리에서 울려 퍼졌고 강우석은 멍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지금 어디야? 얼른 돌아와.”생일 파티에 강우석이 쫓겨나고 심지안이 끌려가자 진현수 혼자 현장에 남게 되었다.진현수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강우석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삼촌 지안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지안이가 성연신 저 사람과…”강우석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지만 눈치가 빠른 진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지안 씨와 성연신 씨가 같이 있는 걸 봤어?”“네… 삼촌과 지안이 관계가…”“우린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거야.”진현수는 숨김없이 당당하게 인정했고 강우석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대표님, 도착했습니다.”정욱이 주차를 하며 성연신에게 보고를 올렸고 그의 목소리가 마침 심지안의 말을 끊어버렸다.먼저 차에서 내린 성연신이 돌아서서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심지안의 신발을 쳐다보며 말했다.“집에 들어가면 신발부터 갈아 신어요.”심지안의 신발은 도망 도중 잃어버리게 되었고 트렁크에 신발을 준비해두는 습관이 있는 성연신은 자신의 신발을 대충 그녀에게 먼저 신겨줄 수밖에 없었다.하려던 말을 다시 삼킨 심지안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여기에 내가 신을 수 있는 신발이 있어요?”“전에 할아버지가 지안 씨 왔을 때 편하게 지내라고 사람 시켜서 일상 용품 좀 사뒀어요.”“역시 할아버지가 저를 제일 많이 생각해 주네요.”심지안이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환하게 웃자 성연신이 코웃음을 쳤다.할아버지가 생각해 주긴 무슨, 전부 그가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었다.한편, 여우로운 두 사람에 비해 뒤에 따라오던 차가 멈춰 서자마자 홍교은이 다급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려 성수광부터 찾았다.이때의 성수광은 정원 뒤편에서 물고기에게 사료를 먹이고 있었고 멀리에서 홍교은을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교은이가 웬일로 여길 찾아왔어?”“할아버지, 일단 화내지 말고 들어보세요. 제가 오늘 우연한 상황에서 심지안 저 여자가 낯선 남자와 몰래 화장실에 숨어있는 걸 목격하게 됐어요. 그래서 연신이 대신 두 사람을 잡아 뒀는데 연신이가 되려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성수광의 다정한 모습에 홍교은은 점점 겁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들은 성수광은 물고기 사료를 곁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화장실에 숨었다고?”“네. 제가 두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까 할아버지가 직접 물어보세요.”홍교은은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별 볼일 없는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예의도 없고 규칙도 없네.”말이 끝나자마자 성연신과 심지안이 성수광에게 걸어왔고 심지안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할아버지!”“그래! 어
“그건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렇지. 내가 널 안 좋아했다면 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홍교은은 손을 꼭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눈빛이 이글거렸으며 심지안은 그녀의 말에 이마를 잡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심지안과 성연신은 계약 결혼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진짜 부부였다면 아무리 성격이 좋은 여자도 홍교은과 머리채를 잡고 싸웠을 것이다.“네가 연신이를 좋아하는 건 이놈의 영광이야. 하지만 이놈은 이미 결혼했잖아. 그럼 너도 이제 포기를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하지만 저 여자가 연신이에게 미안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에요. 할아버지, 이 일은 절대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요.”듣고 있던 심지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가 입을 열었다.“적당히 하세요. 제가 사과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계속 모함까지 하는 게 말이 되나요? 어른 앞에서 적당히 할 줄도 알아야죠.”홍교은과 성수광의 대화로 봐서는 두 집안이 겉으로는 관계가 꽤 돈독해 보였기에 심지안은 성수광을 중간에서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홍교은은 심지안이 뭔가 찔리는 게 있다고 착각했기에 바로 비꼬았다.“잘못을 저질러 놓고 도망가려는 건가요?”“아니…”“난 지안이를 많이 좋아하고 지안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어. 우리 집안일에 이제 그만 끼어들었으면 좋겠어.”성수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고 얼굴에는 더 이상 자상한 표정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화가 잔뜩 난 홍교은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할아버지, 제가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연신이와 성 씨 가문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혹시라도 이 여자의 겉모습에 속을까 봐 너무 걱정돼요.”홍교은은 심지안이 도대체 어떤 수단을 썼기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렇게 그녀를 옹호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건 우리 집안의 가정사야.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이 늙은이 대신 성 씨 가문의 가주라도 되겠다는 거야?”성수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홍교은을 쳐다보자 깜짝 놀란
홍교은은 고개를 홱 들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성연신에게 물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귀가 안 좋으면 몇 번 더 말해줄게.”성연신이 싸늘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대꾸하자 홍자덕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연신아, 교은이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하지만 너도 너무한 거 아니야?”하나뿐인 딸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건 홍 씨 가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창피한 일이기에 소문이라도 나면 그들은 금관성에서 더 이상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성수광도 왠지 너무한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꼭 그 여자를 이렇게 감싸고 옹호해야 돼? 대체 그 여자가 나보다 나은 게 뭐야? 왜 그 여자를 위해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잖아!”“네가 먼저 거짓말로 지안 씨를 모함하고 계속 시비를 걸었잖아. 내 사람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홍교은은 내 사람이라는 말에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고 성연신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치켜든 채, 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심지안 그 여자가 뭐라고! 난 절대 그 여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어!”무릎을 꿇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리다고 까부는 심지안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그 얼굴만 없으면 성연신이 더 이상 심지안을 옹호하고 지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홍자덕은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성연신을 보며 말했다.“여자 하나를 위해 우리 홍 씨 가문의 존엄을 발로 짓밟겠다고 하면 우리도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교은아, 가자.”홍교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성연신을 바라보다가 아버지와 함께 떠나려 했지만 성연신은 전혀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되려 여유롭게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그럼 이제부터 성 씨 가문과 홍 씨 가문의 비즈니스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겠네요. 안 그래도 매년 적자였는데.”성수광은 손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성수광은 홍자덕이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성연신도 그를 난감하게 만들게 한 건 사실이었다.비가 그치자 노을이 창문을 통해 성연신의 얼굴에 비췄다.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성수광을 힐끔 쳐다보았다.체면을 살리는 와중에 돈은 잃기 싫다는 건데, 그럼 좋은 일은 할아버지가 쏙 하고 나머지 더러운 뒤처리는 그에게 던져버리겠다는 건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 연신 씨!”이때, 맑고 고운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고 성연신이 고개를 들어보니 심지안이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저 다 씻었어요.”성연신은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자 조금 전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치유되는 듯했으며 점차 평정심을 되찾았다.심지안의 부름에 성수광의 신경은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우리 손자며느리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아무 문제 없다고 하셨어요.”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성연신 곁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 정도만 해요. 홍 씨 가문에서 돌아가신 분까지 들먹였잖아요. 더군다나 사과를 하는 태도도 나쁘지 않으니까 이제 할아버지 체면을 좀 지켜줘요. 이 일 하나로 상대방과 개싸움을 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천천히 해요. 정 안 되면 제가 앞으로 홍교은 저 여자 심기를 더 많이 건들면 되죠. 그렇다고 홍교은이 사고 칠 때마다 홍교은 아버지가 감정을 호소하지는 않겠죠.”위에서 몰래 엿들으면서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성연신은 홍교은이 심지안을 괴롭힌 일로 홍 씨 가문과 사업적으로 완전히 끊으려고 했고 그 첫 단계가 바로 홍성준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그렇게 되면 거액의 모델료를 거절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계약도 해지할 수 있었다.솔직히 심지안은 성연신이 진심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서운하긴 했다. 그녀는 보호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며 걱정이 없는 순수한 어린이가 되고 싶었다. 나중에 이런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지만 그 사람이 성연신은 절대 아닐 것이
”참나, 네놈이 꽤 인기가 있나 보네. 근데 전혀 걱정할 거 없어. 저 여자들은 이놈의 외모만 좋아할 뿐이야. 몇 년 지나서 이놈이 살이 찌고 배가 나오면 아무도 너와 이놈을 빼앗는 사람은 없을 거야.”성수관이 감개무량한 듯 말하자 심지안이 성연신의 팔을 놓으며 깔깔 웃었다.“할아버지, 연신 씨는 절대 살이 찔 리가 없을 거예요. 맨날 아침마다 러닝하고 저녁에는 강아지 산책까지 시켜요. 운동량이 어마어마해요.”저 정도로 철저하게 자아 관리를 하다니. 앞으로 어떤 여자가 저런 저 남자를 길들이게 될지 너무도 궁금했다.한편, 성연신은 허전해진 팔을 보며 기분이 언짢았으며 왠지 이 여자가 홍교은에게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그를 이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수광이 말을 더 하려고 하던 순간, 성연신이 홀로 위층으로 향했다.“너 어디 가?”성수광이 큰소리로 부르자 성연신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심지안이 성수광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연신 씨가 회사에 바쁜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일이나 하라고 해요. 제가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드릴게요.”“그래, 그래. 저놈은 신경 쓰지도 말자고. 맨날 썩은 표정을 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한편, 씻고 나온 성연신은 가운을 걸치고 서재로 향했다. 성인이 되어 외국으로 떠난 뒤부터 매년 저택에 오는 횟수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수광은 여전히 매일 하인들에게 그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시켰다. 이걸로 봐서는 성수광이 그의 손자에게도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바로 이때, 정욱이 노크를 하며 서재로 들어섰고 창가에 서서 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던 성연신이 입을 열었다.“조사는 어떻게 됐어?”“유일하게 의심되는 사람이 회사 직원 장흥수입니다. 그날 저녁 야근할 때 장흥수만 심지안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장흥수가 배달 음식을 시키자고 제안했고 심지안 씨는 배달 기사를 가장한 보디가드에게 속아 따라 나간 겁니다.”“해고해.”“알겠습니다. 저기… 대표님, 오늘 밤 심지안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