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봉구안의 금족령이 풀렸지만 아침 문안을 오지 않는 비빈들은 여전히 많았다.아프다는 건 핑계고 귀비 사람들인 것은 분명했다.내실에서 연상은 봉구안의 머리를 다듬어주며 불만을 터뜨렸다.“마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빈마저 아프다고 출석하지 않다니. 설마 벌써 마마의 은혜를 잊은 걸까요?”“전에는 마마를 대신해서 궁중 법규를 베끼겠다고 하더니 한순간의 변덕일 줄은 몰랐네요!”봉구안은 후궁 장부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이익을 따라가는 건 사람의 본능이야.”대청.봉구안이 상석에 앉고 몇몇 비빈들이 양측에 앉아 있었다.그들은 일제이 일어서서 황후에게 문안을 올렸다.“만수무강하십시오, 황후마마.”“다들 앉거라.”봉구안은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엄격한 선별을 거쳐 후궁의 자리를 꿰찬 여인들이라 하나같이 용모가 출중했다.안타깝게도 황제는 귀비에게만 눈이 멀어 이 많은 여인들이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으니 후궁에 원망의 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마구 시합을 할까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거라.”봉구안의 말이 끝나자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와의 시선을 피했다.한참 후, 현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에둘러 말했다.“신첩은 워낙 몸이 허약하여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격한 운동은 못할 것 같습니다. 몸만 건강했어도 참여하고 싶은데 안타깝네요.”현비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황후가 당연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말을 타는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연상아, 현비의 이름을 기입하거라.”현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봤고 피식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봉구안은 웃음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녕비였다.자리에서 일어선 녕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빼주세요. 신첩은 어릴 때부터 자고로 여자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검을 휘두르고 말 위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사내들
영소전.소식을 들은 귀비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황후는 정녕 미친 거야? 감히 날 마구 시합에 끌어들여?”“설마 금인장 가져갔다고 자기 마음대로 후궁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최근에는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황제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당장에 황후를 찾아갔을 것이다.마구 시합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은 귀비뿐이 아니었다.아침 조회가 끝난 후, 비빈들은 한자리에 모여 불만을 토로했다.“마구 시합을 대체 왜 하는 겁니까? 황후마마는 참 이상해요. 이상한 일만 만드는 것 같아요.”“황후께서 아무리 잘 포장해도 난 싫어요. 지금은 선조 시기도 아니고 오늘날의 남제는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들이 성을 지키는 상황은 오지도 않을 거라고요.”“권력 좀 잡았다고 뭐라도 하려는 거겠지요. 우리만 고생이네요. 마구시합이 대체 운영이나 될지 두고 보겠어요.”한편, 녕비는 자녕궁을 찾아가서 일러바쳤다.“고모, 황후가 오늘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아시나요? 그 여자가 글쎄 우리 가문의 교양에 의문을 제기했다니깐요? 고모마저 무시하는 거잖아요!”태후 역시 마구 시합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미 후궁 일에 손을 떼기로 했고 황후와 귀비의 겨루기를 지켜보기로 한 이상, 황후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조카딸인 녕비를 조금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계 상궁, 이따가 영화궁에 가서 녕비는 나와 함께 불경을 드려야 하니 마구 훈련을 할 시간이 없다고 전해라.”녕비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감사합니다, 고모!”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내 조카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당연히 도와야지. 다만 명심해. 대놓고 황후를 적대하진 말거라. 누가 뭐래도 후궁의 안주인은 황후야.”“예, 고모.”황제의 측근은 궁 곳곳에 퍼져 있었다.산적 사건이 끝난 후로 소욱은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시켰다.그래서 녕비와 그녀의 대화를 포함해 아침에 있었던 일도 자연히 그의
황제의 서재에 도착한 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국무 때문에 바쁘니 간단히 말하거라.”마장 훈련에 두 명만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그는 황후가 말을 안 듣는 비빈들 때문에 자신에게 부탁하려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귀비의 두통약이 다 떨어져갈 때가 됐네요. 그래서 약을 가져왔습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약을 전해주자고 여기까지 왔다고?’사내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지난번에는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말을 마친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서 그 의원을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마침 우연히 의원이 경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거짓말인지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거 참 우연이로군.”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그런데 왜 바로 영소전으로 가져가지 않고 짐한테 온 거지?”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산적 사건 때문에 귀비와 신첩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신첩이 주는 거라고 하면 귀비가 먹지 않을 것 같아서요.”소욱은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마구 시합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비빈들이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참는다고?“약은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봉구안이 떠난 뒤, 유사양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황후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단순히 약만 전하러 온 거라니.그가 알기로 현재 두 명만 마구 훈련에 참석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은 골골거리는 현비인 걸로 알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이 참석해 주지 않으면 마구 시합을 대체 어떻게 조직하려고 그럴까?소욱은 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의원에 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영소전에 보내거라.”유사양은 공손히 물러났다.귀비
비빈들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궁인이 말했다.“황후께서는 태의를 보내 몸이 편찮으신 마마들을 치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몸이 아픈 분은 치료를 하고 일부러 아프다고 마장 훈련을 거부한 분은 궁중 법규 베껴 쓰기 50번에 곤장 다섯 대를 친다고 하셨습니다!”비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태의들이 분분히 나서서 비빈들의 진맥을 했다.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각자 곤장을 맞았고 궁중 법규까지 베껴야 했다.녕비는 태후의 비호가 있었기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억울해하는 비빈들도 있었다.“귀비는요? 귀비마마도 오늘 마장에 안 나갔다고 들었는데요! 황후께서는 왜 귀비마마는 가만히 두시는 건가요?”전달하러 온 궁인이 공손히 답했다.“아마 지금쯤, 영소전에도 명이 내려졌을 겁니다.”“뭐라고요? 황후께서 귀비의 곤장을 친다고요?”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영소전.형장 궁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이닥쳤다.“귀비마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춘화는 귀비의 앞을 막고 필사적으로 버텼다.“무례하다! 귀비마마께 형벌이라니! 아무리 황후라 하여도 위에 폐하가 계시는데! 폐하께서 우리 마마를 얼마나 아끼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귀비마마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폐하께서 너희를 처벌하실 거다!”귀비 역시 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형장의 궁인들도 난감했다.“마마, 소인들도 시키는 일을 할 뿐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냥 시늉만 할 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황후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귀비는 싸늘한 얼굴로 태감을 불렀다.“폐하를 모셔오너라! 이 황궁에서 누구 말이 우선인지 한번 두고 보자꾸나!”장신궁.이번에는 주변에 호위들이 없었다.폭군이 경계를 푼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매복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봉구안은 미리 변장을 하고 내전으로 들어갔다.소욱은 침상에 다리를 틀고 앉아 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귀비는 문밖을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태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마마, 유 태감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서는… 낮에 많이 피곤하시어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다 합니다.”춘화는 크게 놀랐다.“귀비마마께서 곤장을 맞을 상황이라는 건 말씀 안 드렸어?”그들은 당연히 귀비가 그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귀비는 태감을 죽일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멍청한 자식!’중요한 상황에 황제가 오지 않았으니 형장의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국엔 앞으로 나섰다.“귀비마마, 실례하겠습니다.”그들이 다가오자 춘화가 앙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무례하다! 어딜 감히!”반 시진 후.귀비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다.춘화가 다가오자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폐하는? 오신대?”춘화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자진궁 유 태감까지 나섰는데 안 된대요. 어쩌면 정말 피곤하셨을 수도 있어요.”귀비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내일, 내일 폐하를 불러 황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보여줘야겠어!”비록 진짜로 곤장을 맞지는 않았지만 그들 앞에 엎드려 있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다.사실상, 소욱은 장신궁에서 치료를 받고 자시가 넘어서야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유사양은 다급히 와서 사실을 고했다.“폐하, 영소전에 큰일이 났습니다.”“황후께서 하명하시어 귀비마마께서 곤장 다섯 대를 맞았습니다. 귀비께서는 직전에 폐하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폐하께서 안 계시니 소인도 황후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소욱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다음 날 아침.영화궁.궁인들이 봉구안의 처소를 찾았다.“마마, 폐하께서 지금 당장 영소전으로 들라 하셨습니다.”연상은 황후의 머리를 빗겨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제 귀비가 곤장을 맞은 것 때문에 그러나 봐요.”“마나, 폐하께서 그렇게 귀비를 총애하시는데 이대로 가셨다가 무슨 일이
귀비는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황제 앞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모습은 어디가고 황후 앞에서는 도발적인 눈빛을 드러냈다. “신첩이 늦어 사죄드리옵니다. 황제께서 신첩을 너무 아끼셔서 이제야 겨우 보내주셨사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을 지은 채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폐하께는 내가 자네를 잘 챙길 터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게. ”그녀는 일부러 챙긴다는 단어를 콕 집어 얘기했다.그러자 귀비는 겁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황후마마, 혹시 잊으신 겁니까? 폐하께선 금일 오전 황후마마더러 덕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쉬이 벌을 내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러고는 갑자기 황후마마를 스쳐 지나가 정자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온통 그녀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었다.뭇 비빈들은 귀비의 행동을 보고 따라 배워 자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둘씩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황후는 그저 그녀들더러 승마장에 와서 연습하라고만 했을 뿐, 그 어떤 수준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연상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마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 다들 승마하러 온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러 온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덤덤한 눈빛으로 저만치에서 승마를 연습하고 있는 가빈을 발견했다.“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법이야. 그걸 누가 잡느냐에 달린 문제지.”게다가 그녀가 이번 승마경기를 주최한 목적은 그들이 아니라 귀비를 위해서였다. 승마장은 아주 넓었기에 승마뿐만 아니라 휴식할 수 있는 시원한 터도 마련되어 있었다.승마를 즐기지 않는 그녀들은 귀비를 선두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오로지 가빈과 현비만 승마 연습에 집중했다.이런 상황은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봉구안은 낮에 승마장에 있다가 저녁이 되면 황제의 해독을 책임지러 장신궁으로 향했다.그는 매일 상주서를 처리한 후에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봉구안은 일부러 그를 속였으나 침구를
승마장 동쪽, 황제와 서왕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지 나란히 서 있었다.현비는 곧바로 가빈더러 인사를 건네라고 귀띔했다.두 사람은 함께 황제 앞으로 가 부드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신첩,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서왕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소인, 두 마마님께 인사드리옵니다.”부드러운 눈빛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게 보였다.소욱의 시선은 조금 전 말을 타고 달리던 황후로부터 두 사람에게로 옮겨졌다.“일어나게.”현비는 말 없이 그의 뒤로 물러섰다.가빈은 신이 나서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붙잡으려고 했다.“폐하, 말을 타러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서왕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참하고 다정한 현비마마와 귀엽고 발랄한 가빈마마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다니, 역시 폐하께선 복이 많으십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부러워? 그럼 내일 당장 식을 올려주지.”서왕은 곧바로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이윽고 그는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런데 후궁 마마들 전부 승마 연습하러 오셨다고 들었는데 왜 두 분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까?”소욱의 표정은 덤덤했다.황후가 협박하지 않았다면 후궁들은 절대 이곳까지 찾아와 승마 연습할 리 없었을 것이다.이번 승마 경기는 절대 성공리에 벌어질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말을 잘 다루는 선수가 필요한 법이다.봉구안은 말에 올라탄 뒤로 곧바로 침착을 되찾았다. 부드러움 속에 흥분이 뒤섞인 채 단번에 저만치까지 달려 나갔다.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도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껏 말을 타는 것이었다.“이랴!”말은 응원에 힘입은 듯 더욱 빨리 달렸다.두 시간 뒤.해빛이 구름층을 뚫고 숲을 비추었다.봉구안은 말과 함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말은 자리에 서 있고 봉구안은 잔디밭 위에 누운 채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다른
뭇 비빈들이 달려 나갔을 때 황제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그녀들은 후회막급이었다.게으름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황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그녀들이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사람들이 떠나고 오직 귀비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그녀는 그들처럼 사랑에 목마르지 않았다.황제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다.가빈은 입이 근질거려 하루빨리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이윽고 소문은 퍼지고 퍼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뭇 비빈들의 질투심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독수공방할 바엔 차라리 승마장에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낫지.이튿날, 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뭇 비빈들은 승마장에 도착했다.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황제는 승마장에 찾아오지 않았다.사람들은 또다시 힘이 빠졌다.“가빈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처럼 폐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누가 그래요?”“맞아요. 폐하께서 매일 승마장에 찾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냥 평소처럼 수다나 떨죠.”인파를 뚫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폐하께서 승마장을 찾는 횟수는 그래도 궁을 찾는 횟수보다 많겠죠.”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긴. 전에 폐하께서 궁을 찾으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협박하신 탓이잖아요. 그뒤로 단 한 번도... 휴, 그냥 연습에 집중하죠. 그럼 언젠가 폐하께서 찾아오실 겁니다.”갑자기 그들 뒤로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지금 다들 승마를 쉬운 일로 여기는 겁니까?”고개를 돌려보니 내내 태후의 뒤를 따르는 녕비였다.그녀가 이곳엔 무슨 일로?녕비는 그녀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우선 훈련복부터 누구나 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빈은 훈련복을 입게 되면 가슴이 작은 게 들통날 테니 폐하께선 곧바로 흥미를 잃게 되실 겁니다.”놀림을 당한 장빈은 자격지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녕비가 말을
정희가 태연하게 말하는 동안, 유영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뭔가 이상했다.특히, 갑자기 사라진 사신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그때…쾅!시녀가 차를 올리던 순간, 정희가 팔을 과하게 휘두르는 바람에 찻잔이 기울었고, 뜨거운 차가 그녀의 손등을 덮쳤다.정희는 서여국 궁에서 늘 귀하게 자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다.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대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이번에도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시녀의 뺨을 후려쳤다.“짝!”순식간에 시녀의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시녀는 겁에 질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그러나 정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차가운 시선으로 시녀를 노려보았다.“이게 시중 드는 태도냐? 감히 본 귀인을 데이게 하다니! 어서 약을 가져오지 못할까!”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영은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나직이 말했다.“그만해라. 고작 이런 일로 소란 피울 필요 없다.”이곳은 장공주의 저택이었다.불필요한 소란이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하지만 정희는 억울하다는 듯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며 볼멘소리를 했다.“어머니, 이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요? 손이 이렇게 망가졌잖아요! 곧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날 탐탁지 않게 여기시면 어쩌죠?”손은 여자의 두 번째 얼굴이라 하지 않던가.시녀는 더욱 당황하여 그대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러나 정희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다.“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하느냐? 당장 약을 가져오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예! 예! 소첩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시녀는 몸을 떨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정희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눈을 굴리며 불만을 토로했다.“어머니, 공주부의 하인들은 정말 형편없어요. 이렇게 어설프게 일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생활하는
남제, 황성.유영은 여전히 사라진 사신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점점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녀는 며칠째 서왕부를 드나들며 사신들의 행방을 묻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아직 찾고 있습니다.”그녀는 처음엔 서왕이 정말로 사신들을 찾아줄 것이라 믿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단순히 자신을 적당히 무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역관.유영이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자, 딸 정희가 기다렸다는 듯 다그쳤다.“어머니, 황제 폐하께서 이미 환궁하셨다고 합니다. 저흰 언제 입궁할 수 있습니까?”그러나 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사신들의 행방뿐이었다.정희는 초조한 듯 다시 물었다.“이모님께서는 아직도 회신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새로운 국서를 보내주셨다는 소식은 없나요? 어머니?”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영은, 갑자기 딸의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너의 이모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실 리 없다! 나는 서여국 황제의 친여동생이란 말이다!”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지금 당장 입궁하여 직접 황제를 알현할 것이다!”이제 직접 황제를 만나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때였다.황궁에서의 냉대.그날, 황제 소욱은 갓 환궁하여 어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때, 한 호위가 조용히 다가와 보고했다.“폐하, 서여국의 사신을 자처하는 유영이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순간, 소욱의 손이 멈칫했다.그는 이미 봉구안으로부터 서여국에서의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상태였다.유영이 서여국 황제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아직도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며 황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이 가관이었다.더욱 우스운 것은, 그녀가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려 한다는 점이었다.소욱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더니,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돌려보내거라.”목소리는 냉랭했다.봉구안이 없는 지금, 그는
임 대인은 봉구안의 정체를 알게 되자 본능적으로 그녀와 친척 관계를 강조하려 했다.그러나 그녀가 던진 단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진짜 가족이 아니라고?”누가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냐?임 대인의 시선이 흔들렸다.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유 씨 가문의 둘째 딸, 태어나자마자 너희가 데려가 키운 것이 맞느냐?”임 대인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설마 그녀가 묻는 것이 그때의 일일 줄이야…그는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그렇습니다! 제 누이가 둘째 딸을 낳은 후, 저희에게 맡겼습니다!”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읽지 못하도록.그는 필사적으로 침착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황후마마, 이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하지만 봉구안은 여전히 형구를 손에 쥔 채,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꿰뚫어보았다.“확실하느냐? 너희가 데려갔을 때, 그 아이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것이?”임 대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저희 손에 맡겨졌습니다!”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쏘아붙였다.“거짓말이다.”임 대인의 어깨가 움찔했다.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번뜩였다.“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너희가 데려간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이미 세 살이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그 순간, 임 대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는 반박했다.“황후마마,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세 살이 된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그러나 봉구안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너에게 한 번의 기회만 줄 것이다.”“한 촉의 시간이 지나면, 너는 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후, 감옥을 나갔다.임 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형장?”그녀가 정말로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겠다고?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어떻게 그녀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이지?무사히 넘긴 지 사십 년이 넘
관아의 지하 감옥.임 대인은 벽에 기대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척했으나, 그를 뒤덮은 식은땀과 흔들리는 눈빛은 그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냈다.그는 필사적으로 관아의 포졸들을 노려보며 외쳤다.“너희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잡아가는 것이냐! 나는 결백하다!”그러나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길을 내주었다.그 길 너머에서, 봉구안이 들어왔다.높게 묶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빛, 강렬한 기세가 단숨에 대옥 안을 장악했다.“모두 물러가라.”단 한 마디. 그 한마디에 모든 포졸들이 지체 없이 대옥 밖으로 나갔다.오백만이 문을 닫고 바깥에서 경계를 섰다.어둠이 깔린 감옥 안.남은 사람은 봉구안과 임 대인뿐이었다.임 대인은 봉구안을 처음 보는 듯했다.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너는 누구냐?”처음엔 관리인 줄 알았으나, 목소리를 듣고 보니 여자였다.관청에 여자가 올 리 없는데… 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무심하게 옆에 놓인 형구를 집어 들었다.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그것을 매만지는 것만으로도, 임 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건조함, 커진 눈동자, 땀에 젖은 손.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나,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소! 너희 관아에서도 멋대로 형벌을 가할 순 없는 것이오! 내가 말해 두겠소! 내 조카딸은 현 황제의 장모요! 나는 황실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오!”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어떻게든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위협하고자 했다.그러나 봉구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입술은 냉혹한 곡선을 그렸다.“그럼, 나에 대해선 알고 있느냐?”임 대인은 당황한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도무지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황제보다 높은 사람은 없을 터.그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내가 왜 네 정체까지 알아야 하느냐! 어서 나를
서왕은 곧장 완부옥이 원하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서왕부에서 일하는 여종이었다.그는 방 밖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한 시진 후.안에서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들렸다.이내 문이 열리고, 여종이 조심스레 나왔다.서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대야, 그 안에는 새빨간 핏물이 가득했다.서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부인은 괜찮느냐?”정충을 해독하려면 사람과 동침하는 것이 전부일 터.그런데, 이 많은 피는 대체…?여종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부인께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소첩은 부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서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이 여종은… 어디까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정말로 목욕만 시킨 것이냐?”여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서왕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완부옥이 ‘여자를 데려오라’고 했던 말이… 해독과는 다른 의미였던 것인가?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강렬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그리고 욕조 안,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완부옥이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그러나 서왕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촉촉한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였다.“무슨 일이세요? 제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보였다.서왕은 차갑게 말했다.“대체 여종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완부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저… 저를 도와 몸 속 독들을 빼달라고 했을 뿐이예요.”서왕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정충의 모충이 죽으면, 즉시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이를 막으려면, 온몸의 혈을 돌려 독을 모두 빼내야만 했다.하지만 이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그게 전부냐?”완부옥은 피식 웃었다.“아니면 뭐가 더 있어야 하죠?
“콱!”완부옥의 바늘이 서왕의 몸을 찌르는 순간, 그의 몸속에 있던 정충이 폭발하였다. 곧바로 서왕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서왕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치 몇 달 동안 짓눌려 있던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정충이… 드디어 사라졌다.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독이 이렇게 쉽게…그러나 바로 그때, 눈앞에서 완부옥이 마른 낙엽처럼 휘청이더니 앞으로 쓰러졌다.서왕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방금 전까지 멀쩡하지 않았던가?그녀를 내려다보니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 사이로 아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제야 서왕은 깨달았다. 부작용이었다.정충을 심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몸에도 ‘모충’을 함께 심어야 한다.그런데 이제 그의 몸속에 있던 ‘자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서왕은 정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목숨에 지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는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유화! 어의를 불러...”“그럴 필요 없어요.”서왕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완부옥이 힘겹게 그를 저지했다.여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그냥… 저를 눕혀 주세요.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서왕은 마지못해 그녀의 뜻을 따랐다.완부옥은 자리에 눕자,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그녀는 서왕을 올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옷 안 입으셨어요? 저를 유혹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장막 밖으로 나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주워들었다. 한 겹 한 겹 옷을 입는 손길이 빠르면서도 능숙했지만,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그가 옷을 정리하는 동안, 완부옥은 아픈 감각을 잊으려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과거를 떠올렸다.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어머니
유영은 서여국 사신 자격으로 입궁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다.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외출 중이었고,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궁인들은 즉시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궁 안.황후가 부재한 궁에서는 녕비가 후궁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었다.“서여국 사신이 찾아왔다고?”소식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녀는 후궁의 일만 맡을 뿐, 국사에는 개입한 적이 없었다.‘이런 큰 상황을 내가 처리할 수는 없어.’ “당장 서왕 전화를 모셔오거라!”그녀는 최근 며칠간 겨우 여유를 찾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사신이 찾아오다니.또다시 궁중 연회를 준비하고 사신을 접대해야 한단 말인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이럴 때 황후가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이 궁궐이란 곳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서왕 역시 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는 직접 나서서 유영을 접견했다.유영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그럼에도 서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즉시 사람을 보내 실종된 사신단을 찾도록 명령했다.그제야 유영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신들은 이미 이른 새벽에 성을 빠져나갔으며, 빠르게 말을 달려 이제는 황성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아났다는 사실을 말이다.……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서왕부완부옥은 대문 앞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걸음을 멈추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그 단아하고 정숙하던 여인이 정말 완부옥이 맞단 말인가?"전하~”완부옥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마치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요녀와도 같았다.방심한 순간, 그녀에게 푹 빠져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서왕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더군다나 그는 정충에 걸려 있었기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하지만 완부옥은 더욱 매혹적인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숙연과 관련된 진실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소욱 역시 국사를 돌봐야 했기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갈라섰다.황성그날, 유영 모녀는 사신 자격으로 황성에 도착했다.객잔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다음 날, 뜻밖의 사건을 맞닥뜨렸다.이른 아침, 정희가 황급히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어머니! 어머니!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유영은 눈을 크게 떴다.그들과 함께 온 사신단에는 남제의 대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유영은 급히 숙소 곳곳을 살폈다.그러나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마주하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정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어머니, 혹시 우리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간 건 아닐까요?”유영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럴 리 없다.”서여국과 남제는 동맹을 맺은 나라였다.남제가 사신단을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관청에 가야겠다. 당장 신고하러 가자.”관청관청의 아전은 유영 모녀를 이당으로 안내했다.이당은 심문을 벌이는 대당과 달리, 관리가 일반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사적인 곳이기에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했다.관원들은 유영이 서여국의 특사라고 하자, 급히 응대하면서도 속으로 의아해했다.‘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한 적이 없는데…?’관청 측은 그녀에게 국서와 통관 문서를 제출해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그러자 유영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제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죠! 국서와 문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서여국에서 출발할 때, 대신들이 국서를 잃어버릴까 염려해 그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보관했던 것이다.이 순간, 유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혹시… 그들이 서여국을 위협하려는 간첩이었던 건 아닐까?’관청 측은 그녀가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자 즉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 일은 상부에
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야말로 원래 유씨 가문의 장녀, 유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추측일 뿐, 완벽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녀의 가설은 ‘압명’이라는 미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이제야 나이가 맞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황제는 봉 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너야말로 내 여동생이다. 유씨 부부는 너를 ‘대신 희생될 아이’로 삼아 유녕의 신분을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매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다.”봉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남제로 돌아가면, 저는 이 사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입니다.”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봉 부인이 남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불안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때, 봉구안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와 함께 남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여국에 남으시겠습니까?”봉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등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남제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봉구안이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만약 정말 자신이 숙연이라면?그렇다면 서여국 황제는 그녀의 친언니였다.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였다.그녀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이후에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을 터였다.황제는 묵묵히 봉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간절했다.그녀에게 있어 봉 부인은 이미 숙연이었다.이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려온 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