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서재에 도착한 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국무 때문에 바쁘니 간단히 말하거라.”마장 훈련에 두 명만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그는 황후가 말을 안 듣는 비빈들 때문에 자신에게 부탁하려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귀비의 두통약이 다 떨어져갈 때가 됐네요. 그래서 약을 가져왔습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약을 전해주자고 여기까지 왔다고?’사내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지난번에는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말을 마친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서 그 의원을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마침 우연히 의원이 경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거짓말인지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거 참 우연이로군.”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그런데 왜 바로 영소전으로 가져가지 않고 짐한테 온 거지?”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산적 사건 때문에 귀비와 신첩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신첩이 주는 거라고 하면 귀비가 먹지 않을 것 같아서요.”소욱은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마구 시합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비빈들이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참는다고?“약은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봉구안이 떠난 뒤, 유사양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황후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단순히 약만 전하러 온 거라니.그가 알기로 현재 두 명만 마구 훈련에 참석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은 골골거리는 현비인 걸로 알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이 참석해 주지 않으면 마구 시합을 대체 어떻게 조직하려고 그럴까?소욱은 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의원에 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영소전에 보내거라.”유사양은 공손히 물러났다.귀비
비빈들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궁인이 말했다.“황후께서는 태의를 보내 몸이 편찮으신 마마들을 치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몸이 아픈 분은 치료를 하고 일부러 아프다고 마장 훈련을 거부한 분은 궁중 법규 베껴 쓰기 50번에 곤장 다섯 대를 친다고 하셨습니다!”비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태의들이 분분히 나서서 비빈들의 진맥을 했다.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각자 곤장을 맞았고 궁중 법규까지 베껴야 했다.녕비는 태후의 비호가 있었기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억울해하는 비빈들도 있었다.“귀비는요? 귀비마마도 오늘 마장에 안 나갔다고 들었는데요! 황후께서는 왜 귀비마마는 가만히 두시는 건가요?”전달하러 온 궁인이 공손히 답했다.“아마 지금쯤, 영소전에도 명이 내려졌을 겁니다.”“뭐라고요? 황후께서 귀비의 곤장을 친다고요?”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영소전.형장 궁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이닥쳤다.“귀비마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춘화는 귀비의 앞을 막고 필사적으로 버텼다.“무례하다! 귀비마마께 형벌이라니! 아무리 황후라 하여도 위에 폐하가 계시는데! 폐하께서 우리 마마를 얼마나 아끼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귀비마마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폐하께서 너희를 처벌하실 거다!”귀비 역시 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형장의 궁인들도 난감했다.“마마, 소인들도 시키는 일을 할 뿐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냥 시늉만 할 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황후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귀비는 싸늘한 얼굴로 태감을 불렀다.“폐하를 모셔오너라! 이 황궁에서 누구 말이 우선인지 한번 두고 보자꾸나!”장신궁.이번에는 주변에 호위들이 없었다.폭군이 경계를 푼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매복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봉구안은 미리 변장을 하고 내전으로 들어갔다.소욱은 침상에 다리를 틀고 앉아 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귀비는 문밖을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태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마마, 유 태감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서는… 낮에 많이 피곤하시어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다 합니다.”춘화는 크게 놀랐다.“귀비마마께서 곤장을 맞을 상황이라는 건 말씀 안 드렸어?”그들은 당연히 귀비가 그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귀비는 태감을 죽일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멍청한 자식!’중요한 상황에 황제가 오지 않았으니 형장의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국엔 앞으로 나섰다.“귀비마마, 실례하겠습니다.”그들이 다가오자 춘화가 앙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무례하다! 어딜 감히!”반 시진 후.귀비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다.춘화가 다가오자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폐하는? 오신대?”춘화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자진궁 유 태감까지 나섰는데 안 된대요. 어쩌면 정말 피곤하셨을 수도 있어요.”귀비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내일, 내일 폐하를 불러 황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보여줘야겠어!”비록 진짜로 곤장을 맞지는 않았지만 그들 앞에 엎드려 있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다.사실상, 소욱은 장신궁에서 치료를 받고 자시가 넘어서야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유사양은 다급히 와서 사실을 고했다.“폐하, 영소전에 큰일이 났습니다.”“황후께서 하명하시어 귀비마마께서 곤장 다섯 대를 맞았습니다. 귀비께서는 직전에 폐하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폐하께서 안 계시니 소인도 황후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소욱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다음 날 아침.영화궁.궁인들이 봉구안의 처소를 찾았다.“마마, 폐하께서 지금 당장 영소전으로 들라 하셨습니다.”연상은 황후의 머리를 빗겨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제 귀비가 곤장을 맞은 것 때문에 그러나 봐요.”“마나, 폐하께서 그렇게 귀비를 총애하시는데 이대로 가셨다가 무슨 일이
귀비는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황제 앞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모습은 어디가고 황후 앞에서는 도발적인 눈빛을 드러냈다. “신첩이 늦어 사죄드리옵니다. 황제께서 신첩을 너무 아끼셔서 이제야 겨우 보내주셨사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을 지은 채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폐하께는 내가 자네를 잘 챙길 터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게. ”그녀는 일부러 챙긴다는 단어를 콕 집어 얘기했다.그러자 귀비는 겁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황후마마, 혹시 잊으신 겁니까? 폐하께선 금일 오전 황후마마더러 덕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쉬이 벌을 내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러고는 갑자기 황후마마를 스쳐 지나가 정자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온통 그녀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었다.뭇 비빈들은 귀비의 행동을 보고 따라 배워 자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둘씩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황후는 그저 그녀들더러 승마장에 와서 연습하라고만 했을 뿐, 그 어떤 수준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연상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마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 다들 승마하러 온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러 온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덤덤한 눈빛으로 저만치에서 승마를 연습하고 있는 가빈을 발견했다.“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법이야. 그걸 누가 잡느냐에 달린 문제지.”게다가 그녀가 이번 승마경기를 주최한 목적은 그들이 아니라 귀비를 위해서였다. 승마장은 아주 넓었기에 승마뿐만 아니라 휴식할 수 있는 시원한 터도 마련되어 있었다.승마를 즐기지 않는 그녀들은 귀비를 선두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오로지 가빈과 현비만 승마 연습에 집중했다.이런 상황은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봉구안은 낮에 승마장에 있다가 저녁이 되면 황제의 해독을 책임지러 장신궁으로 향했다.그는 매일 상주서를 처리한 후에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봉구안은 일부러 그를 속였으나 침구를
승마장 동쪽, 황제와 서왕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지 나란히 서 있었다.현비는 곧바로 가빈더러 인사를 건네라고 귀띔했다.두 사람은 함께 황제 앞으로 가 부드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신첩,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서왕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소인, 두 마마님께 인사드리옵니다.”부드러운 눈빛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게 보였다.소욱의 시선은 조금 전 말을 타고 달리던 황후로부터 두 사람에게로 옮겨졌다.“일어나게.”현비는 말 없이 그의 뒤로 물러섰다.가빈은 신이 나서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붙잡으려고 했다.“폐하, 말을 타러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서왕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참하고 다정한 현비마마와 귀엽고 발랄한 가빈마마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다니, 역시 폐하께선 복이 많으십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부러워? 그럼 내일 당장 식을 올려주지.”서왕은 곧바로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이윽고 그는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런데 후궁 마마들 전부 승마 연습하러 오셨다고 들었는데 왜 두 분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까?”소욱의 표정은 덤덤했다.황후가 협박하지 않았다면 후궁들은 절대 이곳까지 찾아와 승마 연습할 리 없었을 것이다.이번 승마 경기는 절대 성공리에 벌어질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말을 잘 다루는 선수가 필요한 법이다.봉구안은 말에 올라탄 뒤로 곧바로 침착을 되찾았다. 부드러움 속에 흥분이 뒤섞인 채 단번에 저만치까지 달려 나갔다.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도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껏 말을 타는 것이었다.“이랴!”말은 응원에 힘입은 듯 더욱 빨리 달렸다.두 시간 뒤.해빛이 구름층을 뚫고 숲을 비추었다.봉구안은 말과 함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말은 자리에 서 있고 봉구안은 잔디밭 위에 누운 채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다른
뭇 비빈들이 달려 나갔을 때 황제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그녀들은 후회막급이었다.게으름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황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그녀들이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사람들이 떠나고 오직 귀비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그녀는 그들처럼 사랑에 목마르지 않았다.황제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다.가빈은 입이 근질거려 하루빨리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이윽고 소문은 퍼지고 퍼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뭇 비빈들의 질투심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독수공방할 바엔 차라리 승마장에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낫지.이튿날, 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뭇 비빈들은 승마장에 도착했다.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황제는 승마장에 찾아오지 않았다.사람들은 또다시 힘이 빠졌다.“가빈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처럼 폐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누가 그래요?”“맞아요. 폐하께서 매일 승마장에 찾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냥 평소처럼 수다나 떨죠.”인파를 뚫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폐하께서 승마장을 찾는 횟수는 그래도 궁을 찾는 횟수보다 많겠죠.”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긴. 전에 폐하께서 궁을 찾으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협박하신 탓이잖아요. 그뒤로 단 한 번도... 휴, 그냥 연습에 집중하죠. 그럼 언젠가 폐하께서 찾아오실 겁니다.”갑자기 그들 뒤로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지금 다들 승마를 쉬운 일로 여기는 겁니까?”고개를 돌려보니 내내 태후의 뒤를 따르는 녕비였다.그녀가 이곳엔 무슨 일로?녕비는 그녀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우선 훈련복부터 누구나 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빈은 훈련복을 입게 되면 가슴이 작은 게 들통날 테니 폐하께선 곧바로 흥미를 잃게 되실 겁니다.”놀림을 당한 장빈은 자격지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녕비가 말을
춘하는 귀비의 친구라 아주 똑똑했다.그녀는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황후께선 마마가 승마장에 나타나는 게 두려우신 겁니다. 폐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마마만 보게 되실 테니까요.”귀비는 득의양양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가지 않아도 폐하께선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야.”하지만 매일 아침 일찍 승마장을 뛰어다녔더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며칠 뒤.봉구안은 관리인을 찾았다.관리인은 낮은 목소리로 몰래 말했다.“마마, 요즘 들어 다들 능상비설을 연습하고 있는데 마마님 분부대로 어려움에 봉착하면 약간씩 가르침을 주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빈마마께서 타고난 재능으로 빨리 익히셨는데 그만큼 많은 노력도 기울이셨습니다. 늦은 밤마다 몰래 찾아오셔서 연습하고 돌아가셨습니다.”봉구안은 알겠다며 손짓으로 그를 돌려보냈다.연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마마, 가빈마마께서 정말 귀비마마를 자극할 수 있을까요?”봉구안은 손에 든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일타쌍피. 그 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해, 바로 추측이지.”...깊은 밤.영소전.귀비는 약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폐하께서 오늘 밤도 자진궁에 드셨어?”춘하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마마. 소인이 알아보았는데 폐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상주서를 확인하고 나면 자진궁에 드나드신다고 합니다.”귀비는 눈빛이 싸늘해졌다.“상주서 확인을 마쳐도 자정은 넘지 않을 텐데.”춘하도 오래전부터 의아했지만 귀비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그러게요. 폐하께서 왜 이토록 빨리 일을 마친 거죠? 혹시... 혹시 피곤하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쾅!귀비는 다짜고짜 발로 춘하의 가슴을 걷어찼다.“네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해!”춘하는 뒤로 넘어지더니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귀비는 자리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폐하께서 밤마다 어디로 가시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그녀는 뭔가 수상쩍은 기분이
봉구안과 맞붙은 사내는 붉은색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느끼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봉구안의 주먹에 밀려 곧 다칠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큰소리로 외쳤다.“소환! 형님이야! 인사하려던 것뿐인데 진짜 주먹을 휘두를 건 없잖아!”봉구안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형님인데?”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용서를 빌었다.“알겠네, 알겠네, 형님, 네가 형님이야!”봉구안은 그제야 주먹을 거두었다.이윽고 큰손을 휘둘러 문을 닫았다.봉구안은 그들과 구면이었다.그녀는 송려를 묶은 끈은 풀어주고 입에 문 천도 빼주었다.송려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환,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이 자가 먼저 비겁하게 내 뒤를 밟은 거야. 그러다가 내 손에 잡힌 것이고.” 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다짜고짜 창가에 자리 잡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귀한 집 도령 모습 그대로였다.아무도 그가 최고 재벌의 아들 강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강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투덜거렸다.“내가 비겁하다고? 소환, 네가 나한테 붙인 녀석이 비겁한 거야.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살아도 우리가 널 탓한 적 있어? 저번에 편지 한 통 보냈다고 내가 대신 사람도 찾고 뒷조사까지 했는데, 그 여자도 내가 찾았는데 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숨기기까지 했잖아!”송려도 간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강림 말이 맞아. 소환, 돌아왔으면 우리한테 편지 한 통은 했어야지. 그동안 강림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묘비까지 세웠어. 해마다 우리를 불러 모아 제사상까지 차렸어서 다들 자네가 죽은 줄 안단 말이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묘비?”창가에 앉아 있던 강림은 멋쩍게 코를 어루만졌다.봉구안도 그들과 따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할게. 확실히 자네들의 도움이 컸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가 제대로 한 끼 대접하지. 하지만 오늘 밤은 송 신의와 긴히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