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비빈들이 달려 나갔을 때 황제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그녀들은 후회막급이었다.게으름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황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그녀들이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사람들이 떠나고 오직 귀비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그녀는 그들처럼 사랑에 목마르지 않았다.황제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다.가빈은 입이 근질거려 하루빨리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이윽고 소문은 퍼지고 퍼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뭇 비빈들의 질투심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독수공방할 바엔 차라리 승마장에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낫지.이튿날, 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뭇 비빈들은 승마장에 도착했다.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황제는 승마장에 찾아오지 않았다.사람들은 또다시 힘이 빠졌다.“가빈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처럼 폐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누가 그래요?”“맞아요. 폐하께서 매일 승마장에 찾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냥 평소처럼 수다나 떨죠.”인파를 뚫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폐하께서 승마장을 찾는 횟수는 그래도 궁을 찾는 횟수보다 많겠죠.”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긴. 전에 폐하께서 궁을 찾으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협박하신 탓이잖아요. 그뒤로 단 한 번도... 휴, 그냥 연습에 집중하죠. 그럼 언젠가 폐하께서 찾아오실 겁니다.”갑자기 그들 뒤로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지금 다들 승마를 쉬운 일로 여기는 겁니까?”고개를 돌려보니 내내 태후의 뒤를 따르는 녕비였다.그녀가 이곳엔 무슨 일로?녕비는 그녀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우선 훈련복부터 누구나 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빈은 훈련복을 입게 되면 가슴이 작은 게 들통날 테니 폐하께선 곧바로 흥미를 잃게 되실 겁니다.”놀림을 당한 장빈은 자격지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녕비가 말을
춘하는 귀비의 친구라 아주 똑똑했다.그녀는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황후께선 마마가 승마장에 나타나는 게 두려우신 겁니다. 폐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마마만 보게 되실 테니까요.”귀비는 득의양양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가지 않아도 폐하께선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야.”하지만 매일 아침 일찍 승마장을 뛰어다녔더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며칠 뒤.봉구안은 관리인을 찾았다.관리인은 낮은 목소리로 몰래 말했다.“마마, 요즘 들어 다들 능상비설을 연습하고 있는데 마마님 분부대로 어려움에 봉착하면 약간씩 가르침을 주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빈마마께서 타고난 재능으로 빨리 익히셨는데 그만큼 많은 노력도 기울이셨습니다. 늦은 밤마다 몰래 찾아오셔서 연습하고 돌아가셨습니다.”봉구안은 알겠다며 손짓으로 그를 돌려보냈다.연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마마, 가빈마마께서 정말 귀비마마를 자극할 수 있을까요?”봉구안은 손에 든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일타쌍피. 그 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해, 바로 추측이지.”...깊은 밤.영소전.귀비는 약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폐하께서 오늘 밤도 자진궁에 드셨어?”춘하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마마. 소인이 알아보았는데 폐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상주서를 확인하고 나면 자진궁에 드나드신다고 합니다.”귀비는 눈빛이 싸늘해졌다.“상주서 확인을 마쳐도 자정은 넘지 않을 텐데.”춘하도 오래전부터 의아했지만 귀비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그러게요. 폐하께서 왜 이토록 빨리 일을 마친 거죠? 혹시... 혹시 피곤하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쾅!귀비는 다짜고짜 발로 춘하의 가슴을 걷어찼다.“네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해!”춘하는 뒤로 넘어지더니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귀비는 자리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폐하께서 밤마다 어디로 가시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그녀는 뭔가 수상쩍은 기분이
봉구안과 맞붙은 사내는 붉은색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느끼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봉구안의 주먹에 밀려 곧 다칠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큰소리로 외쳤다.“소환! 형님이야! 인사하려던 것뿐인데 진짜 주먹을 휘두를 건 없잖아!”봉구안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형님인데?”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용서를 빌었다.“알겠네, 알겠네, 형님, 네가 형님이야!”봉구안은 그제야 주먹을 거두었다.이윽고 큰손을 휘둘러 문을 닫았다.봉구안은 그들과 구면이었다.그녀는 송려를 묶은 끈은 풀어주고 입에 문 천도 빼주었다.송려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환,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이 자가 먼저 비겁하게 내 뒤를 밟은 거야. 그러다가 내 손에 잡힌 것이고.” 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다짜고짜 창가에 자리 잡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귀한 집 도령 모습 그대로였다.아무도 그가 최고 재벌의 아들 강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강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투덜거렸다.“내가 비겁하다고? 소환, 네가 나한테 붙인 녀석이 비겁한 거야.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살아도 우리가 널 탓한 적 있어? 저번에 편지 한 통 보냈다고 내가 대신 사람도 찾고 뒷조사까지 했는데, 그 여자도 내가 찾았는데 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숨기기까지 했잖아!”송려도 간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강림 말이 맞아. 소환, 돌아왔으면 우리한테 편지 한 통은 했어야지. 그동안 강림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묘비까지 세웠어. 해마다 우리를 불러 모아 제사상까지 차렸어서 다들 자네가 죽은 줄 안단 말이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묘비?”창가에 앉아 있던 강림은 멋쩍게 코를 어루만졌다.봉구안도 그들과 따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할게. 확실히 자네들의 도움이 컸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가 제대로 한 끼 대접하지. 하지만 오늘 밤은 송 신의와 긴히
소욱은 평소 승마장을 즐겨 찾았다. 하지만 비빈들의 승마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그런데 태후가 직접 청을 건넬 줄이야.“폐하께서 나랏일로 바빠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요즘 들어 저희 두 사람에 관한 불화설이 많이 돌고 있어 후궁 내부 안전을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저와 얘기를 나눠보지 않겠습니까?”...승마장.태후는 말을 타고 있는 비빈들을 보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그녀들은 총애를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폐하, 폐하께서는 승마에 능하시니 비빈들의 부족점이 무엇인지 한번 봐주시겠나이까?”소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저만치에서 말을 끌고 걸어오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보잘것없는 솜씨지요.”태후는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황제의 이토록 매정한 태도에 뭇 비빈들이 또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황후의 진심이 안타까울 뿐.봉구안은 말을 관리인에게 넘겨준 뒤 태후와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신첩, 태후마마와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로 말했다.“어서 일어나게. 황후, 궁중 승마경기라니, 참시하고 좋네. 수고 많았어.”“수고야 당연히 해야지요.”소욱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의 말투에는 비아냥거림이 잔뜩 배어있었다.이 인원으로 무슨 경기를 치른단 말인가?“그냥 시작하게. 봐야 할 상주서가 산더미처럼 쌓였어.”봉구안은 느긋했다.“자매님들이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시작하지요.”궁인들은 경기장에 천수막을 쳤다.자리에 앉은 뒤 태후가 봉구안에게 물었다.“황후, 저들과 함께 겨루는 게 아니었나?”봉구안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예.”태후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쉽게 되었군. 내 기억에 황후의 승마 실력이 아주 훌륭했던 걸로 아는데.”승마장에 오를 준비를 하던 비빈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폐하께서 드디어 우리를 봐주셨네! 긴장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해 두는 건데.”“시작했어, 시작했어!”비빈들은 일제히 말을 타
귀비는 도청자처럼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전에는 얼마나 많은 소문이 들려오든, 황제가 며칠 동안 영소전을 찾지 않든, 그녀는 황제가 가빈에게 마음을 줄 리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가빈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이야...귀비는 그늘에 서서 두 주먹을 꽉 움켜잡은 채 심장이 쿵쾅거렸다.황제는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그는 그대로 자리를 뜨지 않으면 가빈을 물러나라고 명령할 것이다.하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빈이 아직 저 자리에 서 있다니...“마마, 바람이 차갑습니다. 영소전으로 돌아가시지요?”춘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귀비는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이대로 가다간 고삐가 풀리고 말 것이다.귀비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가빈이 말을 타는 모습이 정녕 영비와 닮았단 말이냐!”춘하는 감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가빈마마는 단지 이 순간에만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것뿐이옵니다. 절대 마마님의 매력을 능가할 리 없사옵니다.”귀비는 사실만 듣고 싶었다.춘하는 귀비를 모시기 전부터 궁일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영비를 실물로 영접했었다.“아뢰온데 소인이 보기에 가빈마마는 말을 타실 때에만 영비마마와 좀 닮았사옵니다...”귀비는 순간 눈빛이 복잡해졌다.황제가 영비를 이토록 잊지 못하고 있을 줄이야....관람석.가빈은 여전히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폐하, 꿈에 영비마마께서 오늘 신첩을 응원하겠다고 하셨나이다. 신첩도 이 일이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조금 전 신첩이 공연할 때 갑자기 신이 돕는 듯한 기분이 들었나이다. 마치 영비마마와 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달까요...”소욱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다년간 그를 모시던 유사양도 황제가 영비를 그리워하는 건지 가빈이 한 말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가빈이 말을 마치자 소욱이 물었다.“능상비설, 홀로 익힌 것인가?”가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귀비는 비록 말을 다룰 줄 아나 이미 오랫동안 말에 올라타지 않았다.황제에게 보여주기 전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궁에서 유일하게 승마를 연습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승마장이었다.“뭐라? 우리 마마님께서 들어가지 못하신다고?”춘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승마장 관리인 주제에 귀비를 막다니!승마장 입구.관리인은 난감한 나머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귀비마마, 이건 소인의 뜻이 아니라 상전에서 내린 명령이라 감히 어길 수 없나이다!”귀비는 표정이 싸늘했다.이 후궁에 그녀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 있다고?아직 귀비가 직접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춘하가 대놓고 따져 물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는데 왜 오늘 안된다는 겁니까? 누가 내린 결정이에요?”관리인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황후마마십니다. 황후마마께서 승마장 말과 복장이 제한되어 있으니 경기에 참석한 마마들만 드나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황후마마의 허락이 있어야만...”“어딜 감히!”귀비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봉장미 그년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황후마마도 여러분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내리신 명령입니다. 귀비마마, 소인도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니 그만 나무라세요. 황후마마의 허락 없이는 절대, 혹여나...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소인이 직접 열어 드리겠사옵니다!”황후의 미움도 살 수 없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라면 더더욱 미움을 살 수 없었다....영화궁.유사양이 직접 찾아왔다.“황후마마,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셨사옵니다.”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마마, 귀비마마께서 폐하를 찾아가신 게 틀림없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필을 내려놓고 베개에 기댔다.그녀는 아주 덤덤했고 느긋한 말투로 명령했다.“환복.”두 시간 뒤.황제의 서재.봉구안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를 발견했다. 귀비는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녀린 모습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귀비는 봉구안의 말을 차갑게 무시한 채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폐하, 신첩의 승마 실력을 아시지 않사옵니까.”소욱의 봉구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껏 싸늘해졌다.“귀비의 승마 실력은 아주 훌륭해. 황후, 걱정이 지나쳤소.” 봉구안은 되레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귀비는 선발전에 참가할 필요가 없겠네. 10일 뒤 경기장에서 보지.”귀비는 불만이 가득했다.그녀가 승마를 다시 훈련하는 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함이지 경기를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폐하, 신첩은 이를 원치 않사옵니다!”봉구안의 태도는 견결했다.“그럼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이...”귀비는 화가 나도 반박할 용기가 없어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황제의 서재 밖.연상은 황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갔다.“마마, 괜찮으셔요?”봉구안은 태연했다.“승마경기 선수 이름표에 귀비의 이름까지 넣어.”연상은 깜짝 놀랐다.“마마,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귀비가 이를 받아들이다니요!”바로 그때 귀비도 뒤따라 나왔다.그녀는 봉구안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황후마마, 나중에 만나 뵙겠습니다!”그녀가 경기에 참가하게 되면 나머지 비빈들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봉구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귀비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황제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 그래도 꽉 잡아야 할 것이야.”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난 널 가지고 노는 것뿐인데 이 정도로 득의양양해지다니?”봉구안은 무표정으로 공격을 때려 박았다.“네가 벌인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마. 그리고, 내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은 남들도 손에 넣을 수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떴다.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봉장미, 얼마나 나댈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황제의 총애만 받으려던 참이었고 황제의 명대로 함부로 나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지금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차라리 승마경기를 빌어
봉구안은 직접 말을 타는 횟수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보통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곧 훈련이 끝나갈 무렵 서왕이 승마장을 찾았다.“소인,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보통 서왕은 늘 황제와 함께였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살폈지만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저밖에 없습니다.”서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더니 저만치에서 승마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빈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서왕이 인사를 마치면 지나갈 줄 알았으나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마마께서 수고가 많으신데 필요하시다면 소인이 폐하를 승마장까지 모셔 오겠사옵니다.”연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왕을 바라보았다. 서왕은 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고 평소처럼 한결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필요 없네.”봉구안은 단칼에 거절했고 서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서왕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보아하니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네요. 죄송합니다.”“그래.”봉구안은 늘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서왕은 떠나기 전 한마디 보탰다.“소인은 마마께서 소원대로 폐하와 사랑의 결실을 보길 바라옵니다.”봉구안은 의아했다.미쳤나?그녀가 총애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자녕궁.녕비는 평온을 되찾았는지 태후와 함께 예배하고 있었다.태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불주를 세며 말했다.“수완아, 너도 전에 승마를 익혔던 것 같은데 왜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거냐?”녕비는 마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고모님, 저는 황후마마를 따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경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폐하께서도 가빈을 눈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가빈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며칠 전에 이미 승은을 입었겠지요. 궁에 떠도는 소문은 멍청한 자들이나 믿지 저는 믿지 않사옵니다.”태후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쉬운 말
연상이 내전을 들어섰을 때, 넘어져 있는 병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마마, 정말로 떠나실 건가요?”봉구안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그래. 진 씨 가문의 사건은 내 마음에 새길 것이다.”그 검은 옷은 진 대인마저 해쳤다.연상은 얼굴에 걱정을 띠며 물었다.“마마, 저는 폐하께서…”“폐하께서도 결국 납득할 것이다.” 봉구안의 눈빛은 깊은 어둠에 잠긴 듯했다.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그날 밤, 소욱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은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1년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몰래 그것을 반년으로 바꿔놓았다!온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천천히 다가가려 했건만, 그녀는 이미 떠날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다!세상에 어찌 그녀만큼 무정한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소욱은 조정 일을 마친 후, 영화궁으로 향했다.호위들은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황후의 처소가 아닌 감옥과도 같았다.내전 안.그는 장자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굴에는 억제된 감정이 서려 있었다.봉구안을 보자,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어떤 비녀나 장식도 없이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그녀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신하의 예법이었다.소욱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어젯밤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아침상은 들었느냐?”봉구안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예.”“짐은 이미 사람을 보내 그 검은 옷을 추적하게 했다. 머지않아 소식이 올 것이다.”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물러나 피했다.소욱의 목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궁에서 이 오랜 시간동안 그대는 짐에게 아무런…”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없었사옵니다.”감정이란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 법.비록 그녀의 마음속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소욱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장 봉구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궁에서 나가 그 검은 옷을 쫓겠다는 거지? 좋아, 허락하마.”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조사하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라.”봉구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검은 옷을 쫓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폐하, 이번에 떠나면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소욱의 가늘고 긴 눈이 살짝 감기더니, 약간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계약서에 분명 1년이라고 적지 않았느냐...”“폐하가 기억을 잘못하셨사옵니다. 6개월입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계약서를 그에게 건넸다.소욱은 즉시 계약서를 펼쳐 보았고, 냉정한 얼굴에는 놀람과 충격, 그리고 후회가 서렸다.계약서에는 정말 6개월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처음 약속했던 것은 1년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설명은 하나뿐이었다.그녀가 ‘1년’을 ‘6개월’로 고쳐 쓴 것이다…소욱은 눈을 떨구고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차가운 물에 담긴 옥처럼 묵직하고 서늘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어두워졌고 미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억지 웃음이 떠올랐다.“황후, 이런 농담은 하지 마라.”“1년이면 1년이다. 네가 멋대로 고친 것은 인정할 수 없다.”봉구안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계약서를 믿사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소욱이 계약서를 바로 찢어버린 것이다.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욱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불가항력적인 어조로 말했다.“내가 말했듯이 1년이다.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줄일 수 없다!”봉구안은 바닥의 찢어진 종이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잊으셨
장락궁 안.영비는 진왕과 그의 동조자들 간의 내밀한 서신과 증거를 소상히 황제 앞에 올렸다.“이 모든 증거는 아버지께서 찾아내신 것이옵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진왕의 속셈을 의심하시어, 겉으로는 그와 친분을 쌓는 척하며 이 명단을 입수하셨사옵니다.”영비가 제출한 증거들은 소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그는 서류를 검토한 뒤, 정색하며 말했다.“그대의 부친에게 큰 공이 있다.”영비의 눈에는 결연한 충성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충신은 제 부친의 본분이옵니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옵니다.”“폐하께서는 요 며칠 진왕 일로 매일 늦은 밤까지 고생하셨는데, 이제 조금이나마 쉴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사실 소욱이 오늘 장락궁에 온 이유는 영비가 손에 넣은 이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는 예전부터 전조를 관리하고, 영비는 온 가문을 동원하여 그를 도왔다.영비는 평범한 여인들과 달랐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였지만, 실은 단호하고 남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그는 그녀를 첩이 아닌 참모로 여겼고, ‘후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예외로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이제는 황후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떠나기 전, 소욱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이런 증거는 앞으로 그대 부친이 직접 올리도록 하라. 전조와 후궁이 서로 얽히지 않는 것이 낫다.”영비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곧 평온을 되찾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알겠사옵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그녀는 황제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밖에서 진한길이 문을 두드렸다.“폐하, 소신이 아뢸 일이 있습니다!”…“감옥에서 실종되었다고? 아니면 탈옥한 것이냐?”소욱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어둡고 날카로웠다.진한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마도… 탈옥한 것 같사옵니다.”어쨌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소욱의 눈은 더욱 차가워졌다.“이 일은 당분간 황후에
소욱은 확신하고 있었다.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다.그는 결코 영비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아무리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리 없었다.하지만, 영비에게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그가 황위에 오를 때 그녀는 전력을 다해 그를 도왔다.그런 그녀가 어찌 이런 어마어마한 거짓을 꾸며낼 수 있겠는가?영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 속엔 깨진 슬픔이 가득했다.“폐하께서 기억 못 하셔도 괜찮사옵니다.”“그날 밤의 일은 본디 하나의 실수였사옵니다.”“소첩은 그것을 잊을 것이옵고, 폐하께서도 잊으시어 그것이 황후마마와 폐하 사이의 가시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소욱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좁아진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모용란, 그간의 십 수 년의 정을 봐서라도, 거짓으로 나를 속이지 마라. 그 아이가 정말로 나의 아이란 말이냐?”영비는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욱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기분이었다.주먹을 꽉 쥐었다.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한참 침묵 끝에, 그는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이 일은, 절대 황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랐다.“소첩은 비록 황후마마와 오래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마마께서 폐하와 소첩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사실 그날 밤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저희 사이는 깨끗하고 명백하옵니다.”소욱은 턱을 단단히 다물고, 얼굴에는 엄한 표정이 가득했다.그날 밤의 일이라면, 그는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영비를 물리고 난 뒤, 말없이 앉아 있었다.책상 위의 상소문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술이 사람을 망치는구나!’“여봐라 거기 있느냐.”“신 진한길, 여기 있사옵니다!”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조사해 보면 반드시 무언가 드러날 것이다.
소욱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방금 태황태후의 말은 그조차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영비가 유산을 했다니!?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그때 가빈이 입이 간지러웠던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태황태후마마, 영비마마께서 유산을 하셨던 적이 있사옵니까? 왜 첩은 그런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까?”그 외의 후궁들 또한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태황태후는 영비의 손을 붙잡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이야 황상이 출정한 후에 벌어진 일이니라.”“그때 영비는 병중에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잉태한 줄도 몰랐었지.”“그저….”그 말을 하며 태황태후는 일부러 태후를 흘깃 쳐다보았다.태후는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녀는 태황태후의 책망 어린 눈길을 피하며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번졌다.영비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바로 간접적으로 그 아이를 해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당시 태후가 어의들을 막아 세우지만 않았다면, 영비가 유산이라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 일은 태후가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다.황제가 이를 알게 되면, 그가 이 어미를 더욱 미워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하지만, 결국 종이는 불을 덮지 못하는 법. 이 비밀도 드러나기 시작했다.소욱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 있었다.그 틈을 타 봉구안은 그의 손을 놓았다.봉구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멀리 연극무대를 바라보았다.지금 펼쳐지는 이 장면이 무대 위의 연극보다 훨씬 흥미로워 보였다.이 자리에서 소욱이 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괜히 말을 덧붙이다가는 자신이 영비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둘러싼 비밀까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은 늘 그랬듯, 오늘 일은 오늘 해결하는 법이라 믿었다.만수궁의 연극이 끝나자마자, 그는 봉구안을 강제로 끌어내어
만수궁.태황태후는 영비에 대한 애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그녀는 의도적으로 영비를 자신 곁 자리에 앉히고, 온갖 말을 다 하며 그녀를 챙겼다.“어젯밤은 잘 잤느냐?”영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세월이 고요히 흐르는 듯한 은은한 우아함을 풍겼다.다른 후궁들은 그 광경을 보며 시기와 질투의 눈길을 보내며, 더 이상 연극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태후 역시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대극이 시작되기 전, 태황태후는 조용히 모든 이들에게 말했다.“영비가 궁에 돌아온 일, 모두 알겠지만... 오늘 나는 옛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그 말에, 그녀는 태후를 바라보았다.“옛날, 영비가 병이 깊어 치료를 받지 못해 급히 장례를 치르다 죽음에 이를 뻔하였다.”“나는 영비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고 의심하였고, 그 시체를 바꿔서 확인하였다.”“다행히 하늘의 은혜로 영비는 살아있었지… 다만 숨결이 너무 약해 죽었다 판단한 것이었어.”모든 후궁들은 놀라긴 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시체는 최소한 3일을 두고 확인한다’는 규칙이 생긴 것이었다.태황태후는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어의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 비록 살아있긴 했으나, 숨이 약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네. 그래서 나는 그때 의심했던 것이었어. 궁 안에 영비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숨기고, 영비를 옥양산에 있는 절로 보내 회복될 때까지 지내게 했던 것이었어.”모두 서로를 보며 눈치를 챘다.태황태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몇 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황제가 영비를 너무 아끼고 있었으니, 그런 사실을 바로 황제에게 알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궁 안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눈치껏’ 행동해야 했다.위에 있는 이가 하는 말에 따라, 그저 따라 말할 뿐이었다.그래서 모두 영비의 귀궁을 축하하였다.태후는 속으로 마음이 불편했다.태황태후가 말한 ‘영비를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