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비빈들이 달려 나갔을 때 황제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그녀들은 후회막급이었다.게으름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황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그녀들이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사람들이 떠나고 오직 귀비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그녀는 그들처럼 사랑에 목마르지 않았다.황제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었다.가빈은 입이 근질거려 하루빨리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이윽고 소문은 퍼지고 퍼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뭇 비빈들의 질투심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독수공방할 바엔 차라리 승마장에서 기회를 엿보는 게 낫지.이튿날, 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뭇 비빈들은 승마장에 도착했다.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황제는 승마장에 찾아오지 않았다.사람들은 또다시 힘이 빠졌다.“가빈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처럼 폐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누가 그래요?”“맞아요. 폐하께서 매일 승마장에 찾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냥 평소처럼 수다나 떨죠.”인파를 뚫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폐하께서 승마장을 찾는 횟수는 그래도 궁을 찾는 횟수보다 많겠죠.”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긴. 전에 폐하께서 궁을 찾으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협박하신 탓이잖아요. 그뒤로 단 한 번도... 휴, 그냥 연습에 집중하죠. 그럼 언젠가 폐하께서 찾아오실 겁니다.”갑자기 그들 뒤로 누군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지금 다들 승마를 쉬운 일로 여기는 겁니까?”고개를 돌려보니 내내 태후의 뒤를 따르는 녕비였다.그녀가 이곳엔 무슨 일로?녕비는 그녀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우선 훈련복부터 누구나 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빈은 훈련복을 입게 되면 가슴이 작은 게 들통날 테니 폐하께선 곧바로 흥미를 잃게 되실 겁니다.”놀림을 당한 장빈은 자격지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녕비가 말을
춘하는 귀비의 친구라 아주 똑똑했다.그녀는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황후께선 마마가 승마장에 나타나는 게 두려우신 겁니다. 폐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마마만 보게 되실 테니까요.”귀비는 득의양양한 기분이 들었다.“내가 가지 않아도 폐하께선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야.”하지만 매일 아침 일찍 승마장을 뛰어다녔더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며칠 뒤.봉구안은 관리인을 찾았다.관리인은 낮은 목소리로 몰래 말했다.“마마, 요즘 들어 다들 능상비설을 연습하고 있는데 마마님 분부대로 어려움에 봉착하면 약간씩 가르침을 주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빈마마께서 타고난 재능으로 빨리 익히셨는데 그만큼 많은 노력도 기울이셨습니다. 늦은 밤마다 몰래 찾아오셔서 연습하고 돌아가셨습니다.”봉구안은 알겠다며 손짓으로 그를 돌려보냈다.연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마마, 가빈마마께서 정말 귀비마마를 자극할 수 있을까요?”봉구안은 손에 든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일타쌍피. 그 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해, 바로 추측이지.”...깊은 밤.영소전.귀비는 약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폐하께서 오늘 밤도 자진궁에 드셨어?”춘하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마마. 소인이 알아보았는데 폐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상주서를 확인하고 나면 자진궁에 드나드신다고 합니다.”귀비는 눈빛이 싸늘해졌다.“상주서 확인을 마쳐도 자정은 넘지 않을 텐데.”춘하도 오래전부터 의아했지만 귀비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그러게요. 폐하께서 왜 이토록 빨리 일을 마친 거죠? 혹시... 혹시 피곤하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쾅!귀비는 다짜고짜 발로 춘하의 가슴을 걷어찼다.“네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해!”춘하는 뒤로 넘어지더니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귀비는 자리에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폐하께서 밤마다 어디로 가시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그녀는 뭔가 수상쩍은 기분이
봉구안과 맞붙은 사내는 붉은색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느끼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봉구안의 주먹에 밀려 곧 다칠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큰소리로 외쳤다.“소환! 형님이야! 인사하려던 것뿐인데 진짜 주먹을 휘두를 건 없잖아!”봉구안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형님인데?”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용서를 빌었다.“알겠네, 알겠네, 형님, 네가 형님이야!”봉구안은 그제야 주먹을 거두었다.이윽고 큰손을 휘둘러 문을 닫았다.봉구안은 그들과 구면이었다.그녀는 송려를 묶은 끈은 풀어주고 입에 문 천도 빼주었다.송려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환,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이 자가 먼저 비겁하게 내 뒤를 밟은 거야. 그러다가 내 손에 잡힌 것이고.” 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다짜고짜 창가에 자리 잡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귀한 집 도령 모습 그대로였다.아무도 그가 최고 재벌의 아들 강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강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투덜거렸다.“내가 비겁하다고? 소환, 네가 나한테 붙인 녀석이 비겁한 거야.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살아도 우리가 널 탓한 적 있어? 저번에 편지 한 통 보냈다고 내가 대신 사람도 찾고 뒷조사까지 했는데, 그 여자도 내가 찾았는데 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숨기기까지 했잖아!”송려도 간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강림 말이 맞아. 소환, 돌아왔으면 우리한테 편지 한 통은 했어야지. 그동안 강림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묘비까지 세웠어. 해마다 우리를 불러 모아 제사상까지 차렸어서 다들 자네가 죽은 줄 안단 말이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묘비?”창가에 앉아 있던 강림은 멋쩍게 코를 어루만졌다.봉구안도 그들과 따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할게. 확실히 자네들의 도움이 컸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가 제대로 한 끼 대접하지. 하지만 오늘 밤은 송 신의와 긴히
소욱은 평소 승마장을 즐겨 찾았다. 하지만 비빈들의 승마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그런데 태후가 직접 청을 건넬 줄이야.“폐하께서 나랏일로 바빠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요즘 들어 저희 두 사람에 관한 불화설이 많이 돌고 있어 후궁 내부 안전을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저와 얘기를 나눠보지 않겠습니까?”...승마장.태후는 말을 타고 있는 비빈들을 보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그녀들은 총애를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폐하, 폐하께서는 승마에 능하시니 비빈들의 부족점이 무엇인지 한번 봐주시겠나이까?”소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저만치에서 말을 끌고 걸어오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보잘것없는 솜씨지요.”태후는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황제의 이토록 매정한 태도에 뭇 비빈들이 또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황후의 진심이 안타까울 뿐.봉구안은 말을 관리인에게 넘겨준 뒤 태후와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신첩, 태후마마와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로 말했다.“어서 일어나게. 황후, 궁중 승마경기라니, 참시하고 좋네. 수고 많았어.”“수고야 당연히 해야지요.”소욱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의 말투에는 비아냥거림이 잔뜩 배어있었다.이 인원으로 무슨 경기를 치른단 말인가?“그냥 시작하게. 봐야 할 상주서가 산더미처럼 쌓였어.”봉구안은 느긋했다.“자매님들이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시작하지요.”궁인들은 경기장에 천수막을 쳤다.자리에 앉은 뒤 태후가 봉구안에게 물었다.“황후, 저들과 함께 겨루는 게 아니었나?”봉구안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예.”태후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쉽게 되었군. 내 기억에 황후의 승마 실력이 아주 훌륭했던 걸로 아는데.”승마장에 오를 준비를 하던 비빈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폐하께서 드디어 우리를 봐주셨네! 긴장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해 두는 건데.”“시작했어, 시작했어!”비빈들은 일제히 말을 타
귀비는 도청자처럼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전에는 얼마나 많은 소문이 들려오든, 황제가 며칠 동안 영소전을 찾지 않든, 그녀는 황제가 가빈에게 마음을 줄 리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가빈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이야...귀비는 그늘에 서서 두 주먹을 꽉 움켜잡은 채 심장이 쿵쾅거렸다.황제는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그는 그대로 자리를 뜨지 않으면 가빈을 물러나라고 명령할 것이다.하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빈이 아직 저 자리에 서 있다니...“마마, 바람이 차갑습니다. 영소전으로 돌아가시지요?”춘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귀비는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이대로 가다간 고삐가 풀리고 말 것이다.귀비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가빈이 말을 타는 모습이 정녕 영비와 닮았단 말이냐!”춘하는 감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가빈마마는 단지 이 순간에만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것뿐이옵니다. 절대 마마님의 매력을 능가할 리 없사옵니다.”귀비는 사실만 듣고 싶었다.춘하는 귀비를 모시기 전부터 궁일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영비를 실물로 영접했었다.“아뢰온데 소인이 보기에 가빈마마는 말을 타실 때에만 영비마마와 좀 닮았사옵니다...”귀비는 순간 눈빛이 복잡해졌다.황제가 영비를 이토록 잊지 못하고 있을 줄이야....관람석.가빈은 여전히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폐하, 꿈에 영비마마께서 오늘 신첩을 응원하겠다고 하셨나이다. 신첩도 이 일이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조금 전 신첩이 공연할 때 갑자기 신이 돕는 듯한 기분이 들었나이다. 마치 영비마마와 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달까요...”소욱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다년간 그를 모시던 유사양도 황제가 영비를 그리워하는 건지 가빈이 한 말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가빈이 말을 마치자 소욱이 물었다.“능상비설, 홀로 익힌 것인가?”가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귀비는 비록 말을 다룰 줄 아나 이미 오랫동안 말에 올라타지 않았다.황제에게 보여주기 전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궁에서 유일하게 승마를 연습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승마장이었다.“뭐라? 우리 마마님께서 들어가지 못하신다고?”춘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승마장 관리인 주제에 귀비를 막다니!승마장 입구.관리인은 난감한 나머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귀비마마, 이건 소인의 뜻이 아니라 상전에서 내린 명령이라 감히 어길 수 없나이다!”귀비는 표정이 싸늘했다.이 후궁에 그녀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 있다고?아직 귀비가 직접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춘하가 대놓고 따져 물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는데 왜 오늘 안된다는 겁니까? 누가 내린 결정이에요?”관리인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황후마마십니다. 황후마마께서 승마장 말과 복장이 제한되어 있으니 경기에 참석한 마마들만 드나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황후마마의 허락이 있어야만...”“어딜 감히!”귀비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봉장미 그년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황후마마도 여러분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내리신 명령입니다. 귀비마마, 소인도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니 그만 나무라세요. 황후마마의 허락 없이는 절대, 혹여나...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소인이 직접 열어 드리겠사옵니다!”황후의 미움도 살 수 없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라면 더더욱 미움을 살 수 없었다....영화궁.유사양이 직접 찾아왔다.“황후마마,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셨사옵니다.”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마마, 귀비마마께서 폐하를 찾아가신 게 틀림없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필을 내려놓고 베개에 기댔다.그녀는 아주 덤덤했고 느긋한 말투로 명령했다.“환복.”두 시간 뒤.황제의 서재.봉구안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를 발견했다. 귀비는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녀린 모습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귀비는 봉구안의 말을 차갑게 무시한 채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폐하, 신첩의 승마 실력을 아시지 않사옵니까.”소욱의 봉구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껏 싸늘해졌다.“귀비의 승마 실력은 아주 훌륭해. 황후, 걱정이 지나쳤소.” 봉구안은 되레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귀비는 선발전에 참가할 필요가 없겠네. 10일 뒤 경기장에서 보지.”귀비는 불만이 가득했다.그녀가 승마를 다시 훈련하는 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함이지 경기를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폐하, 신첩은 이를 원치 않사옵니다!”봉구안의 태도는 견결했다.“그럼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이...”귀비는 화가 나도 반박할 용기가 없어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황제의 서재 밖.연상은 황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갔다.“마마, 괜찮으셔요?”봉구안은 태연했다.“승마경기 선수 이름표에 귀비의 이름까지 넣어.”연상은 깜짝 놀랐다.“마마,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귀비가 이를 받아들이다니요!”바로 그때 귀비도 뒤따라 나왔다.그녀는 봉구안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황후마마, 나중에 만나 뵙겠습니다!”그녀가 경기에 참가하게 되면 나머지 비빈들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봉구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귀비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황제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 그래도 꽉 잡아야 할 것이야.”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난 널 가지고 노는 것뿐인데 이 정도로 득의양양해지다니?”봉구안은 무표정으로 공격을 때려 박았다.“네가 벌인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마. 그리고, 내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은 남들도 손에 넣을 수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떴다.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봉장미, 얼마나 나댈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황제의 총애만 받으려던 참이었고 황제의 명대로 함부로 나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지금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차라리 승마경기를 빌어
봉구안은 직접 말을 타는 횟수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보통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곧 훈련이 끝나갈 무렵 서왕이 승마장을 찾았다.“소인,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보통 서왕은 늘 황제와 함께였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살폈지만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저밖에 없습니다.”서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더니 저만치에서 승마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빈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서왕이 인사를 마치면 지나갈 줄 알았으나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마마께서 수고가 많으신데 필요하시다면 소인이 폐하를 승마장까지 모셔 오겠사옵니다.”연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왕을 바라보았다. 서왕은 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고 평소처럼 한결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필요 없네.”봉구안은 단칼에 거절했고 서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서왕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보아하니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네요. 죄송합니다.”“그래.”봉구안은 늘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서왕은 떠나기 전 한마디 보탰다.“소인은 마마께서 소원대로 폐하와 사랑의 결실을 보길 바라옵니다.”봉구안은 의아했다.미쳤나?그녀가 총애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자녕궁.녕비는 평온을 되찾았는지 태후와 함께 예배하고 있었다.태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불주를 세며 말했다.“수완아, 너도 전에 승마를 익혔던 것 같은데 왜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거냐?”녕비는 마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고모님, 저는 황후마마를 따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경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폐하께서도 가빈을 눈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가빈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며칠 전에 이미 승은을 입었겠지요. 궁에 떠도는 소문은 멍청한 자들이나 믿지 저는 믿지 않사옵니다.”태후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쉬운 말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