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의 훈련 후 마구 경기가 예정대로 열렸다.관람석에는 황제가 가운데, 태후가 그의 오른쪽에, 나머지 사람들이 그 아래에 차례로 앉았다.서왕은 온화한 모습으로 감탄했다.“궁중에서 처음으로 마구 경기를 하는데 황후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말하면서 그는 자주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소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 발견했다.“처음이긴 하다. 봉씨 집안의 역대 황후와 비교해도 유례가 없구나.”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후를 향한 황제의 불만을 알아챘다.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해 태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칭찬했다.“황후는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마구 경기도 분명 독창적일 것입니다.”소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태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서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말없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다른 비빈들은 마구에는 관심이 없고 황제와 가까이 있고 싶은 목적뿐이었지만 같은 관람석에 있어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경기에 앞서 참가자들은 각자 천막에서 승마복과 보호대를 착용했다.가빈은 옷을 입은 후 황후의 천막으로 달려갔다.“황후마마, 우리가 같은 편일 줄은 몰랐습니다. 빈첩은 귀비의 마술이 너무 좋아서 아무도 귀비를 제압할 수 없을까 걱정했는데...”봉구안이 문득 그녀의 말을 끊었다.“등나무 갑옷을 벗거라.”“네?”가빈은 멍해졌다.황후가 왜 갑자기 등나무 갑옷을 벗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황후의 말에 따랐다.전장에서 쓰는 등나무 갑옷이 온몸을 감싸고 있지만 마구에서는 말을 타고 공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등나무 갑옷은 몸통만 보호할 수 있었다.가빈의 등나무 갑옷에서는 특별한 냄새가 났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을 정도였다.봉구안은 선천적으로 좋은 후각을 가지고 있어 가빈이 가까이 오자 냄새를 맡았다.게다가 그녀는 일 년 내내 행군하며 이 냄새에 매우 민감했다.이것은 설란향이다.말이 설란향을 맡으면 이상하게 흥분하고 불안해져서 발광을
마구 경기가 시작되자 참가한 비빈들이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입장했다.그 모습을 보던 태후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역시 젊음이 좋구나. 하나같이 평소와는 달리 궁궐의 비빈이라기보다는 여장군 같구나.”계 상궁이 허리 숙여 맞장구를 쳤다.“모의 천하 태후마마와 현명하신 폐하가 계신 궁이니 자연히 좋은 기운이 넘치지요.”소욱은 경기장을 훑어보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희열을 가리기 어렵다.“어마마마께서 농담도 잘하십니다. 근 백 년 동안 남제는 여장군을 배출한 적이 없습니다.”서왕이 잔을 들고 말했다.“황제 복택이 남제 대지를 비추어 비옥한 땅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올 것입니다. 조만간 남제에서도 여장군이 나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남제를 위해 땅을 개척하고 중원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소욱은 술잔을 들고 서왕과 허공을 사이에 두고 건배했다.두둥...징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두 편은 서로 다른 색깔의 승마복을 입고 출전하는데 파란색은 귀비편, 검은색은 봉구안편이었다.한 사람씩 말을 타고 있는 그녀들의 손에 마구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경기장 양 끝에 골문을 하나씩 두고 골문 옆에 서서 점수를 따는 궁인들이 붉은 깃발을 손에 든 채 상대 골문에 공을 넣으면 깃발을 꽂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결국, 깃발이 많은 쪽이 승자다.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가빈은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그녀는 마구 막대기로 공을 제어하여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쳤다.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한 번만 골문에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걸리기에 십상이었다.가빈은 마음이 급해지자 두 다리로 말을 꽉 잡고 재빨리 뛰쳐나와 공을 쫓았다.그러자 장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막아라!”가빈의 동작은 매우 빨랐는데 몇 개의 연타를 날린 끝에 공이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골대에 진입했다.궁인이 붉은 기를 들었다.1점!가빈과 같은 편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주먹을 쥔 가빈은 한껏 들뜬
번번이 득점하던 귀비는 말을 타고 봉구안의 곁을 지나가다가 멈추었다.“황후마마, 마마 편에는 아무도 싸울 수 없습니까?”봉구안은 안색이 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귀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도발했다.“저는 황후마마께서 가빈이 총애를 다투게 하고 폐하의 총애를 나누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봉장미, 참 무능한 황후마마시네요. 가빈을 키우느라 애썼는데 결국 제 발에 밟혀 일어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곧 제 발 앞에 엎드려 제발 살려달라고 할 것입니다. 마마 어머니께서 그랬던 것처럼...”봉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귀비는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를 발견하고는 오히려 득의만면했다.“왜 그러십니까? 설마 모르시는 겁니까?”“황후마마가 납치된 후 봉부인께서 저를 만나보려 하셨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무릎을 꿇고 저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것조차도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황후마마보다 훨씬 멋지지 않습니까?”봉구안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귀비는 먼 곳을 바라보며 냉소했다.“마마의 어리석음이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마마의 어머니는 저에게 절을 몇 번 하고 저의 놀림을 당하면 황후 마마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총애를 받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딸을 질투해 사람을 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를 의심하다니요. 허, 저에게 놀림을 당해도 쌉니다!”귀비는 여전히 그녀가 산적을 시켜 사람을 납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봉씨 집안의 사람들이 증거가 없는 것을 확신하고 매우 환하게 웃었다.봉구안의 눈에는 웃음기가 감돌더니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후반전이 재미있을 것이다.”...관중석.태후는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이나 자녕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빈이 왜 저러는 거지? 이렇게 쉽게 귀비에게 제압당했다고?’후반전이 시작되자 서왕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귀비마마꼐서는 파죽지세입니다. 경기장 전체에서 마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승
관중석에서 많은 비빈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그들은 귀비와 가빈의 공 다툼이 치열하다고 생각하여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결과가 어떨지 보려고 하였다.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발광한 줄은 아무도 몰랐다.순간 몇 마디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귀비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낙마할 때까지 몇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말을 제어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넘어지는 순간 그녀는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아래는 모두 날카로운 돌들이니 그녀의 얼굴은...그녀는 애써 자신의 얼굴을 감싸려고 했지만 땅에 떨어져 몇 번 뒹구는 바람에 여전히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났다.순간 왼팔에서 찰칵 소리가 나더니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악.”귀비는 아파서 소리쳤다.‘내 얼굴, 내 팔!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가빈이 넘어져야 하는데 왜 나까지... 아파! 누가 나를 해치려 하는 거야? 내 몸에는 분명히 설란향이 조금 있을 뿐인데 왜 내 말도 함께 발광하는 거지?’관중석.소욱이 벌떡 일어서자 태후도 뒤늦게 깨닫고 뒤따라 일어섰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계 상궁은 태후를 부축하며 대답했다.“귀비마마인 것 같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태후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했지만 체면상 조금도 나타내지 못했다.태후가 황제를 향해 돌아서서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황제도 이미 서둘러 관중석에서 내려온 것을 보았다.서왕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폐하가 그렇게 중시하는 것을 부러워했다.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어머, 가빈 마마도 이상합니다!”그제야 가빈이 심하게 흔들리는 말을 힘겹게 조종하는 것을 보았다. 귀비가 떨어졌을 때 가빈은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았는데 더욱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살려주세요.”그녀는 고삐를 힘껏 잡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말이 갑자기 흥분해서 그녀는
‘헉!’귀비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마비산도 없이 꿰맨다고? 이 돌팔이 의사가 나를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인가! 그리고 주혼산은 뭐야! 두질약이라니... 설마 봉장미 짓인가! 그래, 분명 봉장미가 나를 해치려는 것이야!’태의는 무릎을 꿇고 황제께 여쭈었다.“폐하, 봉합하지 않으면 귀비 마마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위험합니다.”소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시선을 귀비에게로 향했다.“꿰매!”“아니 됩니다! 폐하...”귀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는데 눈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그 주치의인 노태의가 다른 태의들에게 분부하였다.“마마를 누르거라.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태의가 바늘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귀비는 비명을 질렀다.“오지 마! 악...”이내 천막 안은 처참한 비명으로 가득 찼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이 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퍼졌다.태후는 봉구안의 천막에서 그녀가 얼마나 다쳤는지 살피고 있었는데 귀비의 비명을 듣고 마음이 후련해지며 능연 저 천한 년에게도 오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황후, 푹 쉬거라. 난 가빈을 보러 가야겠다.”“네. 마마.”봉구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태후를 떠나보낸 연상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마마, 아슬아슬했습니다. 가빈을 구하러 가셨을 때 소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봉구안의 목에 난 그 흉터는 바로 가빈이 혼란 속에서 할퀸 것이다.다행히 피부만 살짝 까졌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마마, 마구는...”연상은 한껏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약에 담갔던 건데 따로 처리 안 해도 되겠습니까?”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다.”감히 약에 담갔다는 건 들키는 게 두렵지 않다는 뜻이다.봉구안의 모든 계획은 연상에게 세부 사항을 밝힌 적이 없다.그렇다. 연상은 말이 미리 손을 본 마구 냄새를 맡으면 방금 귀비의 말처럼 광분하게 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기도 모
태의들이 귀비의 상처를 꿰매고 있는 동안 소욱은 바로 옆 천막에서 봉구안을 불렀다.안에는 유사양 한 사람만 시중을 들고 있어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귀비가 중상을 입어 마구 경기가 중단되었으니 주최자인 황후는 아마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봉구안은 궁례를 올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말했다.“신첩,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소욱은 온몸에 한기를 머금은 듯했는데 화창한 봄날인데도 한겨울의 추위가 느껴졌다.그 옆에 서 있는 유사양은 숨을 죽이고 눈도 감히 치켜뜨지 못했다.옆 장막에서는 이따금 귀비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고 제왕은 침울한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무릎을 꿇거라!”그의 목소리는 화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두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봉구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치마를 들어 올리고 침착하게 무릎을 꿇었다.주인이 무릎을 꿇었으니 연상도 황급히 따라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죽일 듯한 황제의 눈빛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소욱의 눈빛은 절대 녹지 않을 빙산처럼 차갑고, 그 위에 천둥이 먹구름이 가득한 것 같았다.“귀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의 책임을 묻겠다고 짐이 말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소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신첩은 확실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폐하의 벌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그냥 단순한 낙마가 아닙니다. 만약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턱!소욱은 손을 들어 책상을 ‘탁’ 내리치더니 두 눈에 노기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단순한 낙마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경기 전에 가빈이 신첩을 찾아왔었는데 그때 가빈의 등나무 갑옷에서 특별한 향기가 났습니다. 신첩은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평범한 연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마구 경기가 시작된 후 신첩은 계속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계속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득점하자 엉뚱한 생각을 멈추고 경기에 임할 수밖에
황제의 추궁에 봉구안은 입이 벌어졌다.“신첩은 누가 가빈에게 손을 썼는지 찾아내려고 했습니다.”소욱은 눈빛이 싸늘해졌다.“계속 말해보거라.”“신첩은 확실히 숨긴 것이 있습니다. 가빈의 등나무 갑옷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배후의 사람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반전에서 신첩은 마구를 본 게 아니라 경기장 안팎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빈의 말이 놀랄 것을 예상였기에 신첩이 바로 구할 수 있었지만 귀비가 말에서 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빈틈없는 봉구안의 설명을 들으며 소욱은 그녀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가빈으로 모험했다고 믿었고 또 이래야만 봉구안의 비열한 계략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당시 그녀가 두통약을 써서 그더러 사랑을 균등하게 나눠줘야 한다고 협박할 때처럼 말이다...하지만 그 역시도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황후가 잔인한 수단을 쓰는 것보다 거짓말로 황제를 속이는 것이 더 싫었던 그는 진실을 듣기 위해 봉구안을 심문했다.점점 얼굴이 창백해지는 봉구안을 보며 소욱은 그제야 분부했다.“태의를 불러오너라.”곧 옆 천막에 있던 태의가 와서 봉구안의 어깨를 치료해주었다.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으나 봉구안의 눈빛은 한껏 어두워졌다.아니나 다를까 의심이 많은 폭군은 쉽게 듣는 고백보다 괴롭힘을 받은 후 털어놓는 말을 더 믿었다.곧 유사양이 가져온 가빈의 등나무 갑옷을 검사하던 태의가 아뢰었다.“폐하, 이 등나무 갑옷에는 확실히 설란향이 있습니다.”소욱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즉시 명령을 내렸다.“귀비의 등나무 갑옷도 가져오너라.”태의가 살펴본 후 아뢰었다.“폐하, 귀비의 등나무 갑옷에도 설란향이 조금 있습니다.”소욱은 눈썹을 찡그렸다.“설란향은 짐이 사람을 시켜 조사할 것이다. 황후의 두통약에 주혼산이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건지 설명하거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주혼산... 그건 무엇입니까? 그 약은 떠돌이 의사가 준 것인데 신첩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소욱은
천막 안에는 서왕의 따뜻한 배려와 달리 오직 책임만 묻는 황제가 있었다.“이 자갈들을 봤느냐? 귀비는 바로 이 자갈들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마구 시합은 황후가 주최한 건데 잔디밭에 어떻게 이런 남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이 나타났느냐?”이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모습을 보이며 봉구안은 공수하며 사죄했다.“폐하, 신첩의 불찰입니다.”소욱의 표정은 더 냉랭해졌다.“불찰이든 의도적이든 황후는 이 일과 연관이 없기를 바란다.”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마구 시합을 신첩이 주관했기 때문에 신첩은 이 시합에 아무런 차질이 없기를 누구보다 더 바랐습니다. 귀비와 가빈이 상처를 입으면 신첩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확실히 그렇다. 귀비와 오랜 원한이 있으니 해칠 수 있다고 쳐도 가빈은...하지만 봉구안이 일부러 가빈을 이용해 사람들의 시선을 끈 후 실제로 귀비를 해칠 가능성도 있었다.어쨌든 가빈은 구원되었고, 가빈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봉구안의 모습을 소욱은 똑똑히 보았다.소욱은 쌀쌀하게 물었다.“그러고 보니 짐은 황후가 다른 말에 뛰어오를 수 있는 줄도 몰랐다.”의심에 가득 찬 소욱의 말을 들은 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신첩은 승마에 능합니다. 말 등에서 뛸 수 있는 것은 균형적 감각과 담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또 사람을 살리겠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소욱은 여전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매서운 눈빛에는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마구 시합에서 사고가 난 것은 황후의 책임이다. 짐이 열흘 시간을 주겠으니 범인을 밝혀내거라.”봉구안은 침착하게 임무를 받았다.“네. 폐하.”...다른 편.아파서 참기 어려웠던 귀비는 불과 반 시진밖에 안 된 사이에 이미 세 번이나 기절했다.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태의는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귀비가 기절한 틈을 타 빠르게 처리했다.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귀비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깨어났고 춘하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땀을 닦아주었다.“
서여국 황궁.봉구안이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동안, 정희는 그녀를 향해 마지막 발악을 쏟아냈다.“봉구안! 너 같은 년은 평생 아이도 못 낳을 거야!”그러나 봉구안의 발걸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리고…슥… 쾅!칼이 내려치며 단칼에 머리가 날아갔다.유영의 머리는 바닥을 굴러 대전의 문 앞에서 멈췄다.죽은 그녀의 눈은 여전히 황좌를 바라보고 있었다.끝까지 손에 넣지 못한 권좌를 원망하며.정희는 그 광경을 보고 몸이 얼어붙었다.“아니야…! 어머니!!”그녀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쳤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똑같은 운명이었다.“나는 잘못한 게 없어! 제발…! 모두 내 어머니 혼자서 저지른 일이란 말이야!”다급한 애원에도, 칼은 흔들림 없이 내려졌다.슥…붉은 피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그녀의 눈은 끝내 감기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그렇게… 두 개의 머리가 황궁 앞에 나란히 놓였다.……서여국 국경.서여국 국경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소주와 정국의 대군은 이미 출병 준비를 마친 후였다.늦은 밤, 정찰병이 급히 보고를 올렸다.“장군님! 서여국 황제가 승하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심어둔 가짜 숙연이 탄로 나서 처형을 당했습니다!”“게다가, 우리 내통자들도 모두 발각되어 처형되었습니다!”소주와 정국의 장군들은 당혹스러웠다.“가짜 숙연이 죽었다고?!”황제가 죽었다면 혼란을 틈타 쉽게 서여국을 점령할 수 있어야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상관없다.“어차피 황제가 죽었다면, 서여국을 공격할 최적의 기회다!”소주의 장군이 결정을 내리려던 찰나… 또 다른 정찰병이 급히 달려왔다.“장군님! 서여국 군을 이끄는 자는… 남제 황후인 맹 소장군이라고 합니다!”순간, 장막 안이 조용해졌다.“뭐?!”장군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왜 서여국에 있지?!”“말도 안 돼! 남제 황후가 어떻게 서여국 군을 지휘한단 말이냐!”정찰병이 숨을
봉구안에게 서여국은 결코 남제만큼 가까운 나라가 아니었다.그녀는 남제에서 태어나 자랐고, 남제의 군인이었다.그녀의 가족, 친구, 그리고 모든 삶이 남제에 있었다.지금 그녀는 남제의 황후였다.만약 그녀가 혼자라면, 서여국에 남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제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그녀의 남편, 그녀의 스승과 사모님, 그리고 봉장미…하지만 서여국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외가가 이 나라에서 피를 이어왔고, 공적으로는 서여국 같은 나라가 필요했다.지금의 세상에서, 서여국은 여성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그 나라가 사라진다면, 앞으로 어떤 희망도 없을 것이다.더욱이, 소국인 소주와 정국이 북연과 손잡고 서여국을 나눠 가지게 된다면, 남제의 서경에도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서여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 하지만 황위는 절대 맡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하루속히 서여국에서 새로운 군주가 될 자를 찾거라.”오양련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아가… 네가 어찌…”옆에 있던 호원아는 서둘러 오양련의 팔을 붙잡았다.그런 뒤,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봉구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오양련의 예상대로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여국 곳곳에서 야심가들이 움직였다.누구도 이 혼란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권력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세력이 물밑에서 충돌하고 있었다.상인들은 이미 정국과 소주가 서여국을 침공할 것이라 예상하며 전쟁 준비로 분주했고, 백성들은 황제가 떠난 혼란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바로 정희였다.서여국 황궁 대전 앞.정희와 그녀의 어머니, 유영은 손과 발이 묶인 채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녀는 두려웠다.죽고 싶지 않았다.독을 마셨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어머니가 황제가 될 것이고, 그 후에는 해독제를 받아 건강
남제 황궁.소욱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그는 억지로 상서문을 끝까지 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는 발걸음을 영화궁으로 옮겼다.유사양이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그는 황제의 얼굴을 살피며 황제가 국사로 인해 걱정하는 줄 알았고, 눈치껏 내전의 궁녀들을 물렸다.소욱은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침묵했다.만약 자신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서여국으로 가서 그녀를 데려왔을 터였다…서여국 황궁.봉구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한쪽은 남제 황후로서의 신분. 그리고 다른 한쪽은 황실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 서여국.그녀는 알고 있었다.자신은 남제 황후였다.그런 그녀가 서여국에 남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서여국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적국이 눈앞에 닥친 이 시점에서, 그녀가 어머니를 데리고 떠난다면…서여국은 버텨낼 수 있을까?그녀의 마음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였다.편전 안, 오양련과 호원아가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전각 밖에서도 수많은 대신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새 황제 폐하를 모십니다!”봉구안은 깊은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일단 모두 일어나거라.”“이런 식으로 나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요하지 말거라.”그러나 호원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서여국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지목하신 황위 계승자는 마마이십니다! 만약 마마께서 떠나신다면, 서여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될 것입니다!”봉구안은 단호하게 말했다.“서여국이 지금까지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 한 사람의 공이 아니다. 백성들이, 그리고 신하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 역시 자네들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호원아는 굴하지 않았다.“폐하께서 돌아가시고, 군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적국은 확실한 준비를 하고
유영은 궁 안이 혼란에 휩싸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정희에게 달려갔다.“너희 이모는 어떻게 됐느냐!”정희는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폐하께서… 승하하셨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그 여자, 분명 어젯밤에 이미 죽지 않았던가.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정희는 급히 본론을 꺼냈다.“어머니! 침궁에 누군가 침입했어요! 그들이 저를 기절시켰어요! 빨리 금군을 보내서 그들을 잡아야 해요!”정희는 전각에서 깨어났을 때, 많은 병사들의 발소리와 내전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란만을 감지했다.누가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내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본능적으로 도망쳐 도움을 요청하려 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유영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황제가 어젯밤 죽었고,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속은 것이 아니었다!그렇다면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던 것이다.그녀를 속여 방심하게 만들려는 계략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흥! 감히 날 속이려 들어?”황제가 완전히 죽었다면, 이제 누가 그녀가 ‘숙연’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한편, 봉 부인이 서여국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차가운 시신뿐이었다.봉구안은 이미 대신들을 다른 전각으로 보냈고, 침궁에는 모신 상궁만이 남아 있었다.모신 상궁은 봉 부인의 곁을 조용히 지키며, 쓰러질 듯 흔들리는 그녀를 부축했다.“대인… 적어도 황제 폐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대인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후회 없이 떠나셨을 것입니다.”봉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녀는 말없이 흐느꼈다.비록 늦게서야 자매의 인연을 되찾았지만, 가족 간의 정은 타고난 것이며, 피 속에 새겨진 유대였다.피붙이의 죽음은,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강인한 가면을 무너뜨렸다.쿵!그녀는 힘없이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얼어붙은
서여국 황궁.“폐하! 소주와 정국이 서여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어찌 우리를 두고 떠나려 하십니까!”“폐하, 부디 기운을 내십시오! 서여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쾌차하셔야 합니다!”“폐하, 신이 무능하여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너무 늦었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마지막으로 알려주십시오. 저 유영이 정말 숙연 대인이십니까?”침상 위, 황제의 두 눈은 깊게 패이고, 입술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하얀 옷자락은 마치 수의처럼 느껴졌고, 그녀의 몸에서는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유영… 저 자는 숙연이 아니다. 저 자가… 서여국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황제는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온 힘이 빠진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느다란 목이 휘청이며 들썩였다.마치 몸속의 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몸짓이었다.대신들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폐하,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결코 그 가짜 숙연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그래! 그 자를 당장 처단해야 합니다! 폐하를 속이고,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그 죄는 만 번을 죽어도 모자랍니다!”하지만 황제의 숨은 점점 희미해졌다.생기가 사라져 가는 눈동자가 신하들을 훑었고, 끝내 봉구안에게 닿았다.침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 조용히 서 있던 봉구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과도 같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차갑고도 깊었다.그러나 황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오갔다.말 한마디 없어도, 서로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전해지는 듯했다.그때, 모신 상궁이 나섰다.“대신들께서는 이미 진실을 아셨으니, 어서 대전으로 가셔서 그 가짜 숙연을 단죄해 주십시오!”“하지만 폐하께서…”모신 상궁의 목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남제 황후께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서여국까지 오신 것은 중요한 국사를 논하기 위함입니다.”“부디 잠시라도 황제 폐하와
서여국 황궁.유영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놓으라고! 난 황제의 친동생이야! 언니를 만나야 해! 너희, 언니를 해치려는 거지?!”“대신들이여, 어서 저들을 막아라!”“이들은 절대 선한 의도가 아니다!”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설령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있어야 도울 수 있는 법.사대 장군이 군권을 틀어쥔 데다가, 남제의 황후까지 이곳에 있다.이들과 맞선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더군다나, 이 새 황제가 정말 정통성이 있는지도 미지수였다.만약 그녀가 진짜 숙연이 아니라면?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어 역적을 돕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유영의 고함이 대전 안을 가득 메웠지만, 봉구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호 장군, 대전을 지켜라.”“나머지 세 장군은 각각 궁문을 지키고, 누구도 들고날 수 없게 하라.”“타국 첩자가 혼란을 틈타 침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비할 것이다.”“모 상궁은 몇몇 중신들을 데리고 나와 함께 폐하를 뵈러 가야겠다.”“명 받들겠습니다!”호원아와 모신이 즉시 응답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무백관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여기는 서여국인데, 어째서 남제의 황후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것인가?더군다나, 호원아와 모신은 어쩌면 저리도 봉구안의 말을 따르는 것인가?봉구안이 걸음을 옮기자 유영은 필사적으로 외쳤다.“나도 갈 거야! 언니를 만나야 해!”“난 서여국의 공주란 말이야!”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어떻게든 이 속박에서 벗어나 먼저 황제를 죽여야 했다.어디서 잘못된 걸까?어젯밤, 분명 숙천설의 숨결을 확인했을 때, 한 점의 기척도 없었다.태의 또한 맥을 짚어보았고, 완전히 죽었다고 단언했다.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영은 이를 갈며 후회했다.어젯밤, 황제의 시신에 몇 번 더 칼을 꽂았어야 했다고.호원아는 냉정한 눈빛으로 봉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곧바로 유영을 내려
용좌에 앉은 유영은 봉구안의 발언으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오해가 있었나 보구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여국의 내정 문제다. 남제는…”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황제 폐하를 만나야겠습니다.”유영은 어딘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미 말했지 않느냐? 황제께서는 이미 승하하셨다. 발상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질까 우려해서 외부에 알리지 않은 것 뿐. 못 믿겠다면 침전에 가 보거라. 황제께서는 이미 관에 들어가 계시니...”“뭐라고요!” 모신 상궁이 크게 외치며 흥분했다.유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척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여봐라, 나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일이 너무 급작스럽고 내우외환이 해결되지 않아 쉽게 말할 수 없었다.”“이제 모신이라는 반역자가 스스로 드러났으니, 황제께서도 하늘에서야 비로소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것이다.”“흐윽… 언니…”유영은 눈물을 흘리자 대신들도 울음을 터트렸다.“황제 폐하!”모신 상궁은 황제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믿을 수 없어 온몸이 떨렸고,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마마! 유영의 뜻대로 되게 놔두어선 안 됩니다!”서여국의 왕좌를 그 가짜 숙연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유영은 손을 휘저으며 봉구안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내 즉위식이다. 모신이 사람을 데리고 와 소란을 피우는 것은 분명히 왕좌를 노리는 행위다. 남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니더냐?”그녀는 곧 모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지만, 봉구안이 먼저 호원아에게 말했다.“호 장군, 더 말할 필요 없는 듯합니다. 저 가짜 숙연을 체포하고 황제 폐하를 구하십시오!”호원아는 성격이 단호한 인물이었다.“유영은 가짜 숙연이다. 여봐라! 지금 당장 체포하라!”호원아는 서여국의 네 대장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장군이었고, 금군을 통솔하고 있었다.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금군은 바로 용좌로 돌격했다.유영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서여국의 문무 대신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모신 상궁은 황제 곁에서 오래 머물렀고, 황제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한 말이라면 틀릴 리가 없었다.그러나 이 숙연이라 불리는 인물은 황제의 친동생이 아닌가…잠시 동안, 사람들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모신 상궁은 숙연의 신분이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숙연은 모신 상궁을 역모로 몰아세웠다. 양쪽 모두 서로의 말을 부정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봉구안이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어째서 황제께 직접 여쭙지 않는가?” 이 말이 떨어지자, 유영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내 언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너희 같은 역적들이 황제를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여봐라! 저들을 당장 체포하지 못하겠느냐!” “누구든 함부로 움직이면 상대하겠소!” 대장군 호원아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봉구안과 모신 상궁을 감쌌다. 유영은 호원아를 꾸짖었다. “호 장군, 너마저 역모를 꾸미려는 건가!”“너희가 진상을 몰라 속은 것을 생각해 이번 한 번만 용서하겠다. 즉시 내 편에 서서 역적을 체포하라!” 그러나 호원아는 단호히 말했다. “그 누구를 벌하든지 황제의 결정에 따라야 마땅하다. 숙연, 황제는 어디에 있는가?” 유영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황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눈가에 억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좋다, 내가 말해주겠다! 황제 폐하는… 어젯밤에 이미 승하하셨다!” 그 말에 모든 대신들이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황제 폐하…!” 모신 상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어, 황제께서 어찌…” 그녀는 황망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마, 황제께서 정말… 정말로 돌아가신 걸까요?” 봉구안은 살기를 띤 냉정한 눈빛으로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유영은 성급히 높은 단상에 올라가 용좌에 앉았다. 그녀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교만
서여국 황궁.유영은 태연히 황제를 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궁녀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고, 누구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황제가 입을 열어 도움을 요청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 유영은 황제에게 혼수약을 먹여 혼미한 상태로 만들었다.유영은 태연했지만, 정희는 그와 달리 몹시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시선을 고정하지 못했다.황제를 침전으로 모신 뒤, 모든 궁인을 물러가게 한 후 정희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이렇게 해도 정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까요?”유영은 침상 위 황제를 내려다보며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곧 죽게 될 황제의 자리는 이제 내 것이야. 내가 서여국 전체를 장악하면, 아무도 나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정희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얼마 전, 암살자들이 교외 저택에 침입해 황제의 호위를 죽이고 신분을 위장한 뒤 황제와 함께 궁으로 들어온 일이 떠올랐다.지금 그 암살자들은 이미 궁궐 안으로 들어와 그녀들의 곁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어머니가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과연 자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어머니, 정말 너무 큰일이에요… 저는 무서워요.”정희의 목소리가 떨렸다.유영은 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우리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만약 그들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너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다.”정희는 입술을 깨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유영은 침상 위 황제를 천천히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를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그리고 그녀는 번거로운 모신 상궁에 대해서도 덧붙였다.“전하거라. 모신 상궁이 황제를 궁 밖에 가둬 반역을 꾀했다고... 즉시 그 자를 잡아 처단하라!”궁 밖.모신 상궁의 수배령이 곳곳에 나붙었다.봉구안은 모신 상궁과 봉부인을 데리고 잠시 몸을 숨겼다.한 객잔 안에서, 모신 상궁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황제가 유영의 손에 넘어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