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직접 말을 타는 횟수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보통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곧 훈련이 끝나갈 무렵 서왕이 승마장을 찾았다.“소인,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보통 서왕은 늘 황제와 함께였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살폈지만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저밖에 없습니다.”서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더니 저만치에서 승마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빈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서왕이 인사를 마치면 지나갈 줄 알았으나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마마께서 수고가 많으신데 필요하시다면 소인이 폐하를 승마장까지 모셔 오겠사옵니다.”연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왕을 바라보았다. 서왕은 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고 평소처럼 한결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필요 없네.”봉구안은 단칼에 거절했고 서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서왕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보아하니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네요. 죄송합니다.”“그래.”봉구안은 늘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서왕은 떠나기 전 한마디 보탰다.“소인은 마마께서 소원대로 폐하와 사랑의 결실을 보길 바라옵니다.”봉구안은 의아했다.미쳤나?그녀가 총애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자녕궁.녕비는 평온을 되찾았는지 태후와 함께 예배하고 있었다.태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불주를 세며 말했다.“수완아, 너도 전에 승마를 익혔던 것 같은데 왜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거냐?”녕비는 마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고모님, 저는 황후마마를 따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경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폐하께서도 가빈을 눈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가빈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며칠 전에 이미 승은을 입었겠지요. 궁에 떠도는 소문은 멍청한 자들이나 믿지 저는 믿지 않사옵니다.”태후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쉬운 말
며칠간의 훈련 후 마구 경기가 예정대로 열렸다.관람석에는 황제가 가운데, 태후가 그의 오른쪽에, 나머지 사람들이 그 아래에 차례로 앉았다.서왕은 온화한 모습으로 감탄했다.“궁중에서 처음으로 마구 경기를 하는데 황후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말하면서 그는 자주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소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 발견했다.“처음이긴 하다. 봉씨 집안의 역대 황후와 비교해도 유례가 없구나.”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후를 향한 황제의 불만을 알아챘다.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해 태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칭찬했다.“황후는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마구 경기도 분명 독창적일 것입니다.”소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태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서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말없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다른 비빈들은 마구에는 관심이 없고 황제와 가까이 있고 싶은 목적뿐이었지만 같은 관람석에 있어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경기에 앞서 참가자들은 각자 천막에서 승마복과 보호대를 착용했다.가빈은 옷을 입은 후 황후의 천막으로 달려갔다.“황후마마, 우리가 같은 편일 줄은 몰랐습니다. 빈첩은 귀비의 마술이 너무 좋아서 아무도 귀비를 제압할 수 없을까 걱정했는데...”봉구안이 문득 그녀의 말을 끊었다.“등나무 갑옷을 벗거라.”“네?”가빈은 멍해졌다.황후가 왜 갑자기 등나무 갑옷을 벗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황후의 말에 따랐다.전장에서 쓰는 등나무 갑옷이 온몸을 감싸고 있지만 마구에서는 말을 타고 공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등나무 갑옷은 몸통만 보호할 수 있었다.가빈의 등나무 갑옷에서는 특별한 냄새가 났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을 정도였다.봉구안은 선천적으로 좋은 후각을 가지고 있어 가빈이 가까이 오자 냄새를 맡았다.게다가 그녀는 일 년 내내 행군하며 이 냄새에 매우 민감했다.이것은 설란향이다.말이 설란향을 맡으면 이상하게 흥분하고 불안해져서 발광을
마구 경기가 시작되자 참가한 비빈들이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입장했다.그 모습을 보던 태후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역시 젊음이 좋구나. 하나같이 평소와는 달리 궁궐의 비빈이라기보다는 여장군 같구나.”계 상궁이 허리 숙여 맞장구를 쳤다.“모의 천하 태후마마와 현명하신 폐하가 계신 궁이니 자연히 좋은 기운이 넘치지요.”소욱은 경기장을 훑어보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희열을 가리기 어렵다.“어마마마께서 농담도 잘하십니다. 근 백 년 동안 남제는 여장군을 배출한 적이 없습니다.”서왕이 잔을 들고 말했다.“황제 복택이 남제 대지를 비추어 비옥한 땅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올 것입니다. 조만간 남제에서도 여장군이 나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남제를 위해 땅을 개척하고 중원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소욱은 술잔을 들고 서왕과 허공을 사이에 두고 건배했다.두둥...징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두 편은 서로 다른 색깔의 승마복을 입고 출전하는데 파란색은 귀비편, 검은색은 봉구안편이었다.한 사람씩 말을 타고 있는 그녀들의 손에 마구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경기장 양 끝에 골문을 하나씩 두고 골문 옆에 서서 점수를 따는 궁인들이 붉은 깃발을 손에 든 채 상대 골문에 공을 넣으면 깃발을 꽂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결국, 깃발이 많은 쪽이 승자다.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가빈은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그녀는 마구 막대기로 공을 제어하여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쳤다.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한 번만 골문에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걸리기에 십상이었다.가빈은 마음이 급해지자 두 다리로 말을 꽉 잡고 재빨리 뛰쳐나와 공을 쫓았다.그러자 장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막아라!”가빈의 동작은 매우 빨랐는데 몇 개의 연타를 날린 끝에 공이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골대에 진입했다.궁인이 붉은 기를 들었다.1점!가빈과 같은 편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주먹을 쥔 가빈은 한껏 들뜬
번번이 득점하던 귀비는 말을 타고 봉구안의 곁을 지나가다가 멈추었다.“황후마마, 마마 편에는 아무도 싸울 수 없습니까?”봉구안은 안색이 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귀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도발했다.“저는 황후마마께서 가빈이 총애를 다투게 하고 폐하의 총애를 나누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봉장미, 참 무능한 황후마마시네요. 가빈을 키우느라 애썼는데 결국 제 발에 밟혀 일어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곧 제 발 앞에 엎드려 제발 살려달라고 할 것입니다. 마마 어머니께서 그랬던 것처럼...”봉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귀비는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를 발견하고는 오히려 득의만면했다.“왜 그러십니까? 설마 모르시는 겁니까?”“황후마마가 납치된 후 봉부인께서 저를 만나보려 하셨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무릎을 꿇고 저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것조차도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황후마마보다 훨씬 멋지지 않습니까?”봉구안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귀비는 먼 곳을 바라보며 냉소했다.“마마의 어리석음이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마마의 어머니는 저에게 절을 몇 번 하고 저의 놀림을 당하면 황후 마마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총애를 받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딸을 질투해 사람을 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를 의심하다니요. 허, 저에게 놀림을 당해도 쌉니다!”귀비는 여전히 그녀가 산적을 시켜 사람을 납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봉씨 집안의 사람들이 증거가 없는 것을 확신하고 매우 환하게 웃었다.봉구안의 눈에는 웃음기가 감돌더니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후반전이 재미있을 것이다.”...관중석.태후는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이나 자녕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빈이 왜 저러는 거지? 이렇게 쉽게 귀비에게 제압당했다고?’후반전이 시작되자 서왕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귀비마마꼐서는 파죽지세입니다. 경기장 전체에서 마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승
관중석에서 많은 비빈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그들은 귀비와 가빈의 공 다툼이 치열하다고 생각하여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결과가 어떨지 보려고 하였다.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발광한 줄은 아무도 몰랐다.순간 몇 마디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귀비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낙마할 때까지 몇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말을 제어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넘어지는 순간 그녀는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아래는 모두 날카로운 돌들이니 그녀의 얼굴은...그녀는 애써 자신의 얼굴을 감싸려고 했지만 땅에 떨어져 몇 번 뒹구는 바람에 여전히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났다.순간 왼팔에서 찰칵 소리가 나더니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악.”귀비는 아파서 소리쳤다.‘내 얼굴, 내 팔!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가빈이 넘어져야 하는데 왜 나까지... 아파! 누가 나를 해치려 하는 거야? 내 몸에는 분명히 설란향이 조금 있을 뿐인데 왜 내 말도 함께 발광하는 거지?’관중석.소욱이 벌떡 일어서자 태후도 뒤늦게 깨닫고 뒤따라 일어섰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계 상궁은 태후를 부축하며 대답했다.“귀비마마인 것 같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태후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했지만 체면상 조금도 나타내지 못했다.태후가 황제를 향해 돌아서서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황제도 이미 서둘러 관중석에서 내려온 것을 보았다.서왕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폐하가 그렇게 중시하는 것을 부러워했다.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어머, 가빈 마마도 이상합니다!”그제야 가빈이 심하게 흔들리는 말을 힘겹게 조종하는 것을 보았다. 귀비가 떨어졌을 때 가빈은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았는데 더욱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살려주세요.”그녀는 고삐를 힘껏 잡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말이 갑자기 흥분해서 그녀는
‘헉!’귀비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마비산도 없이 꿰맨다고? 이 돌팔이 의사가 나를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인가! 그리고 주혼산은 뭐야! 두질약이라니... 설마 봉장미 짓인가! 그래, 분명 봉장미가 나를 해치려는 것이야!’태의는 무릎을 꿇고 황제께 여쭈었다.“폐하, 봉합하지 않으면 귀비 마마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위험합니다.”소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시선을 귀비에게로 향했다.“꿰매!”“아니 됩니다! 폐하...”귀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는데 눈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그 주치의인 노태의가 다른 태의들에게 분부하였다.“마마를 누르거라.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태의가 바늘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귀비는 비명을 질렀다.“오지 마! 악...”이내 천막 안은 처참한 비명으로 가득 찼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이 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퍼졌다.태후는 봉구안의 천막에서 그녀가 얼마나 다쳤는지 살피고 있었는데 귀비의 비명을 듣고 마음이 후련해지며 능연 저 천한 년에게도 오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황후, 푹 쉬거라. 난 가빈을 보러 가야겠다.”“네. 마마.”봉구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태후를 떠나보낸 연상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마마, 아슬아슬했습니다. 가빈을 구하러 가셨을 때 소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봉구안의 목에 난 그 흉터는 바로 가빈이 혼란 속에서 할퀸 것이다.다행히 피부만 살짝 까졌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마마, 마구는...”연상은 한껏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약에 담갔던 건데 따로 처리 안 해도 되겠습니까?”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다.”감히 약에 담갔다는 건 들키는 게 두렵지 않다는 뜻이다.봉구안의 모든 계획은 연상에게 세부 사항을 밝힌 적이 없다.그렇다. 연상은 말이 미리 손을 본 마구 냄새를 맡으면 방금 귀비의 말처럼 광분하게 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기도 모
태의들이 귀비의 상처를 꿰매고 있는 동안 소욱은 바로 옆 천막에서 봉구안을 불렀다.안에는 유사양 한 사람만 시중을 들고 있어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귀비가 중상을 입어 마구 경기가 중단되었으니 주최자인 황후는 아마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봉구안은 궁례를 올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말했다.“신첩,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소욱은 온몸에 한기를 머금은 듯했는데 화창한 봄날인데도 한겨울의 추위가 느껴졌다.그 옆에 서 있는 유사양은 숨을 죽이고 눈도 감히 치켜뜨지 못했다.옆 장막에서는 이따금 귀비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고 제왕은 침울한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무릎을 꿇거라!”그의 목소리는 화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두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봉구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치마를 들어 올리고 침착하게 무릎을 꿇었다.주인이 무릎을 꿇었으니 연상도 황급히 따라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죽일 듯한 황제의 눈빛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소욱의 눈빛은 절대 녹지 않을 빙산처럼 차갑고, 그 위에 천둥이 먹구름이 가득한 것 같았다.“귀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의 책임을 묻겠다고 짐이 말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소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신첩은 확실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폐하의 벌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그냥 단순한 낙마가 아닙니다. 만약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턱!소욱은 손을 들어 책상을 ‘탁’ 내리치더니 두 눈에 노기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단순한 낙마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경기 전에 가빈이 신첩을 찾아왔었는데 그때 가빈의 등나무 갑옷에서 특별한 향기가 났습니다. 신첩은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평범한 연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마구 경기가 시작된 후 신첩은 계속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계속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득점하자 엉뚱한 생각을 멈추고 경기에 임할 수밖에
황제의 추궁에 봉구안은 입이 벌어졌다.“신첩은 누가 가빈에게 손을 썼는지 찾아내려고 했습니다.”소욱은 눈빛이 싸늘해졌다.“계속 말해보거라.”“신첩은 확실히 숨긴 것이 있습니다. 가빈의 등나무 갑옷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배후의 사람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반전에서 신첩은 마구를 본 게 아니라 경기장 안팎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빈의 말이 놀랄 것을 예상였기에 신첩이 바로 구할 수 있었지만 귀비가 말에서 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빈틈없는 봉구안의 설명을 들으며 소욱은 그녀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가빈으로 모험했다고 믿었고 또 이래야만 봉구안의 비열한 계략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당시 그녀가 두통약을 써서 그더러 사랑을 균등하게 나눠줘야 한다고 협박할 때처럼 말이다...하지만 그 역시도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황후가 잔인한 수단을 쓰는 것보다 거짓말로 황제를 속이는 것이 더 싫었던 그는 진실을 듣기 위해 봉구안을 심문했다.점점 얼굴이 창백해지는 봉구안을 보며 소욱은 그제야 분부했다.“태의를 불러오너라.”곧 옆 천막에 있던 태의가 와서 봉구안의 어깨를 치료해주었다.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으나 봉구안의 눈빛은 한껏 어두워졌다.아니나 다를까 의심이 많은 폭군은 쉽게 듣는 고백보다 괴롭힘을 받은 후 털어놓는 말을 더 믿었다.곧 유사양이 가져온 가빈의 등나무 갑옷을 검사하던 태의가 아뢰었다.“폐하, 이 등나무 갑옷에는 확실히 설란향이 있습니다.”소욱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즉시 명령을 내렸다.“귀비의 등나무 갑옷도 가져오너라.”태의가 살펴본 후 아뢰었다.“폐하, 귀비의 등나무 갑옷에도 설란향이 조금 있습니다.”소욱은 눈썹을 찡그렸다.“설란향은 짐이 사람을 시켜 조사할 것이다. 황후의 두통약에 주혼산이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건지 설명하거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주혼산... 그건 무엇입니까? 그 약은 떠돌이 의사가 준 것인데 신첩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소욱은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
광화사 밖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는 그림자 호위가 봉구안을 지키려 대기하고 있었다.그림자 호위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광화사만 주목하고 있었고 은칠만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황후께서 변장을 하시고 서여국 폐하와 야밤에 은밀한 밀회...”그가 쓴 내용을 본 은삼이 주먹을 그의 머리에 꽂았다.“밀회는 무슨 밀회야!”순식간에 은칠의 정수리가 볼록하게 부어올랐다.“왜 셋째 형님도 저한테 그러십니까?”은삼은 또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둘째 형님이 왜 널 잘 지켜보라고 했는지 알겠어! 은칠, 전에는 몰랐는데 너 소설 쓰는 재주가 있다? 너 마마께서 곤란해 지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폐하와 마마 사이를 이간질하려고!”은칠이 울먹이며 말했다.“다들 저만 괴롭혀요! 폐하께 고발할 거예요!”그는 눈물을 머금고 한마디 덧붙였다.[은삼이 보고서를 쓰는 것을 방해하며 사실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은삼은 뒷골이 땡기는 기분이었다.“쉿! 누가 오고 있어!”은사가 낮게 말했다.시위대가 야간 교대를 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한 시위가 황제가 있는 절당으로 아침을 가지고 갔다.모신 상궁이 밖으로 나오자 시위가 조심스레 물었다.“모 상궁님, 폐하께서는 밤새 잘 주무셨나요?”모신이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그래.”시위가 또 물었다.“그럼 어제 밤에 방문하신 귀빈은…”그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렸고 모신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절당 안.모신은 아침을 식탁에 차리고 은침으로 독을 검사했다.반찬에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황제에게 식사하라 전했다.식탁에 마주앉은 황제가 물었다.“그자는 무사히 나갔고?”모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어젯밤 소인이 광화사 밖까지 바래다드렸습니다.”황제는 죽 한숟가락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이틀 전, 봉구안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는 숙연 대인
광화사.마차에서 내린 서여국 황제는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따라온 호위들 중에 몇몇 안 보던 얼굴이 있었다.아마 조여란이 보낸 자들일 것이다.서여국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하고 앞으로 걸었다. 황금색 용포가 햇살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방에 도착하자 문을 잠근 상궁 모신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광화사가 좀 이상합니다.”불상 앞에 마주선 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이곳은 짐을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다.”승려는 진작에 바뀌었을 것이다.승상의 영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 황궁 서재.숙연은 상소문을 읽고 있는 조여란에게로 다가가 직접 포도를 입에 넣어주었다.조여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런 거 하지 마.”이제 나이도 있는데 지금도 소녀처럼 구는 숙연이 못마땅했다.숙연은 허리를 숙이고 조여란의 목을 끌어안고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뭘 겁내. 어차피 이 황궁과 서여국 전체가 우리의 것이 되었는데.”조여란은 굳은 표정으로 상소문에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아직 부족해. 그 여인이 살아 있는 한, 황제는 여전히 그 여인이야.”“만약 너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국정 감사만 맡기지 않았겠지.”“내가 보기에…”“뭐 의심 가는 거라도 있어?”숙연은 예쁘장한 얼굴로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조여란은 그녀의 턱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폐하의 몸 상태가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야.”“어쩌면 몰래 신의를 찾아서 아무도 모르게 치료를 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숙연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렇다는 건 우릴 의심한다는 소리 아니야?”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몰래 병치료를 하려 했을 리 없었다.조여란이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눈치챘다고 해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어.”“광화사 안팎에 모두 내 사람들이거든. 숙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태상황이 분노한 고함을 질렀다.“미친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짐은 네 아비이자 북연의 황제란 말이다!”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현임 황제는 병부에 눈이 멀어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태상황이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것을 걱정해서 사내들은 그에게 근력을 무력화시키는 약을 먹였다.나이가 든 태상황은 결국 숫자에 밀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는 곧 떠나려는 신임 황제를 보고 곧 있으면 이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처음으로 당황했다.“아니… 아니 된다!”신임 황제는 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병부, 내놓으실 거지요?”분노한 태상황이 포효했다.“하늘이 북연을 멸하려는 게구나!”신임 황제가 음침한 눈을 하고 말했다.“아바마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병부, 내놓으실 거죠?”태상황의 몸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병부를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밤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이런 치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하물며 그는 북연의 황제였다.태상황은 굴욕의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그래, 알았다!”일각이 지난 후.신임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병부를 들고 동화대를 떠났다.마차에 오른 그는 동화대 정문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짐의 아바마마도 역시 정상인이었군.”동화대.태상황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깔린 비빈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불과 몇 달 사이에 그는 열 살은 더 늙은 것 같았다.그는 후회막심하여 검을 들고 자결을 택하려 했다.병부를 내놓으면 북연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 자신의 결백을 위해 결국 내놓고 말았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었다.챙그랑!검이 바닥에 떨어졌다.결국 그는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그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하늘과 조상님들이 보우하여 협공 작전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상황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창밖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서여국.봉구
북연.궁밖의 동화대는 황가에서 건설한 작은 행궁이었다. 압박에 의해 퇴위한 태상황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상 구금이나 다름없었고 안팎에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내실, 태상황은 근엄한 자세로 상석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불효자식인 신임 황제가 있었다.황제는 강압적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상황도 화가 난 상태였다.“남제를 협공한다고? 네가 북연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태상황은 과거에 마음이 약해져서 이 불효자식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신임 황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병부때문이었다.그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마치 이 문제만 해결하면 천하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아바마마, 곧 거사가 성사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온 천하가 북연에 귀속되는 광경을 보게 되실 겁니다. 북연이 천하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남제는 멸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병부를 내어주시지요!”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어리석은 놈! 넌 미친 게 틀림없어!”“남제는 하루아침에 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짐은 이 일에 동의할 수 없다!”인내심이 바닥난 신임 황제는 태상황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아바마마, 왜 아들을 이리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짐도 대국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아바마마께선 나이가 드셨고 북연은 더 이상 아바마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전장에 패배한 기록이 없던 북연이 아바마마의 손에서 연속 남제에 패했습니다.”패배한 전장을 언급하자 태상황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뒤통수를 갈기며 호통쳤다.“그걸 말이라고! 이 후레자식이! 네가 아니었으면 북연은 삼십만 대군을 잃지 않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남제가 화룡을 접촉할 일도 없고 화룡을 제작해낼 일도 없었어!”“북연의 지금 상황은 다 네가 초래한 거야!”뒤통수를 맞은 신임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