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과 맞붙은 사내는 붉은색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느끼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봉구안의 주먹에 밀려 곧 다칠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큰소리로 외쳤다.“소환! 형님이야! 인사하려던 것뿐인데 진짜 주먹을 휘두를 건 없잖아!”봉구안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형님인데?”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용서를 빌었다.“알겠네, 알겠네, 형님, 네가 형님이야!”봉구안은 그제야 주먹을 거두었다.이윽고 큰손을 휘둘러 문을 닫았다.봉구안은 그들과 구면이었다.그녀는 송려를 묶은 끈은 풀어주고 입에 문 천도 빼주었다.송려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환,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이 자가 먼저 비겁하게 내 뒤를 밟은 거야. 그러다가 내 손에 잡힌 것이고.” 붉은색 금포를 입은 남자는 다짜고짜 창가에 자리 잡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귀한 집 도령 모습 그대로였다.아무도 그가 최고 재벌의 아들 강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강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투덜거렸다.“내가 비겁하다고? 소환, 네가 나한테 붙인 녀석이 비겁한 거야.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살아도 우리가 널 탓한 적 있어? 저번에 편지 한 통 보냈다고 내가 대신 사람도 찾고 뒷조사까지 했는데, 그 여자도 내가 찾았는데 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숨기기까지 했잖아!”송려도 간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강림 말이 맞아. 소환, 돌아왔으면 우리한테 편지 한 통은 했어야지. 그동안 강림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묘비까지 세웠어. 해마다 우리를 불러 모아 제사상까지 차렸어서 다들 자네가 죽은 줄 안단 말이야.”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묘비?”창가에 앉아 있던 강림은 멋쩍게 코를 어루만졌다.봉구안도 그들과 따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할게. 확실히 자네들의 도움이 컸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가 제대로 한 끼 대접하지. 하지만 오늘 밤은 송 신의와 긴히
소욱은 평소 승마장을 즐겨 찾았다. 하지만 비빈들의 승마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그런데 태후가 직접 청을 건넬 줄이야.“폐하께서 나랏일로 바빠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요즘 들어 저희 두 사람에 관한 불화설이 많이 돌고 있어 후궁 내부 안전을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저와 얘기를 나눠보지 않겠습니까?”...승마장.태후는 말을 타고 있는 비빈들을 보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그녀들은 총애를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폐하, 폐하께서는 승마에 능하시니 비빈들의 부족점이 무엇인지 한번 봐주시겠나이까?”소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저만치에서 말을 끌고 걸어오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보잘것없는 솜씨지요.”태후는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황제의 이토록 매정한 태도에 뭇 비빈들이 또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황후의 진심이 안타까울 뿐.봉구안은 말을 관리인에게 넘겨준 뒤 태후와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신첩, 태후마마와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로 말했다.“어서 일어나게. 황후, 궁중 승마경기라니, 참시하고 좋네. 수고 많았어.”“수고야 당연히 해야지요.”소욱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의 말투에는 비아냥거림이 잔뜩 배어있었다.이 인원으로 무슨 경기를 치른단 말인가?“그냥 시작하게. 봐야 할 상주서가 산더미처럼 쌓였어.”봉구안은 느긋했다.“자매님들이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시작하지요.”궁인들은 경기장에 천수막을 쳤다.자리에 앉은 뒤 태후가 봉구안에게 물었다.“황후, 저들과 함께 겨루는 게 아니었나?”봉구안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예.”태후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쉽게 되었군. 내 기억에 황후의 승마 실력이 아주 훌륭했던 걸로 아는데.”승마장에 오를 준비를 하던 비빈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폐하께서 드디어 우리를 봐주셨네! 긴장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해 두는 건데.”“시작했어, 시작했어!”비빈들은 일제히 말을 타
귀비는 도청자처럼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전에는 얼마나 많은 소문이 들려오든, 황제가 며칠 동안 영소전을 찾지 않든, 그녀는 황제가 가빈에게 마음을 줄 리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가빈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이야...귀비는 그늘에 서서 두 주먹을 꽉 움켜잡은 채 심장이 쿵쾅거렸다.황제는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그는 그대로 자리를 뜨지 않으면 가빈을 물러나라고 명령할 것이다.하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빈이 아직 저 자리에 서 있다니...“마마, 바람이 차갑습니다. 영소전으로 돌아가시지요?”춘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귀비는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이대로 가다간 고삐가 풀리고 말 것이다.귀비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가빈이 말을 타는 모습이 정녕 영비와 닮았단 말이냐!”춘하는 감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가빈마마는 단지 이 순간에만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것뿐이옵니다. 절대 마마님의 매력을 능가할 리 없사옵니다.”귀비는 사실만 듣고 싶었다.춘하는 귀비를 모시기 전부터 궁일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영비를 실물로 영접했었다.“아뢰온데 소인이 보기에 가빈마마는 말을 타실 때에만 영비마마와 좀 닮았사옵니다...”귀비는 순간 눈빛이 복잡해졌다.황제가 영비를 이토록 잊지 못하고 있을 줄이야....관람석.가빈은 여전히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폐하, 꿈에 영비마마께서 오늘 신첩을 응원하겠다고 하셨나이다. 신첩도 이 일이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조금 전 신첩이 공연할 때 갑자기 신이 돕는 듯한 기분이 들었나이다. 마치 영비마마와 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달까요...”소욱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다년간 그를 모시던 유사양도 황제가 영비를 그리워하는 건지 가빈이 한 말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가빈이 말을 마치자 소욱이 물었다.“능상비설, 홀로 익힌 것인가?”가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귀비는 비록 말을 다룰 줄 아나 이미 오랫동안 말에 올라타지 않았다.황제에게 보여주기 전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궁에서 유일하게 승마를 연습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승마장이었다.“뭐라? 우리 마마님께서 들어가지 못하신다고?”춘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승마장 관리인 주제에 귀비를 막다니!승마장 입구.관리인은 난감한 나머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귀비마마, 이건 소인의 뜻이 아니라 상전에서 내린 명령이라 감히 어길 수 없나이다!”귀비는 표정이 싸늘했다.이 후궁에 그녀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 있다고?아직 귀비가 직접 나설 상황은 아니었다.춘하가 대놓고 따져 물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는데 왜 오늘 안된다는 겁니까? 누가 내린 결정이에요?”관리인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황후마마십니다. 황후마마께서 승마장 말과 복장이 제한되어 있으니 경기에 참석한 마마들만 드나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황후마마의 허락이 있어야만...”“어딜 감히!”귀비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봉장미 그년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황후마마도 여러분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내리신 명령입니다. 귀비마마, 소인도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니 그만 나무라세요. 황후마마의 허락 없이는 절대, 혹여나...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소인이 직접 열어 드리겠사옵니다!”황후의 미움도 살 수 없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라면 더더욱 미움을 살 수 없었다....영화궁.유사양이 직접 찾아왔다.“황후마마,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셨사옵니다.”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마마, 귀비마마께서 폐하를 찾아가신 게 틀림없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필을 내려놓고 베개에 기댔다.그녀는 아주 덤덤했고 느긋한 말투로 명령했다.“환복.”두 시간 뒤.황제의 서재.봉구안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를 발견했다. 귀비는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녀린 모습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귀비는 봉구안의 말을 차갑게 무시한 채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폐하, 신첩의 승마 실력을 아시지 않사옵니까.”소욱의 봉구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껏 싸늘해졌다.“귀비의 승마 실력은 아주 훌륭해. 황후, 걱정이 지나쳤소.” 봉구안은 되레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귀비는 선발전에 참가할 필요가 없겠네. 10일 뒤 경기장에서 보지.”귀비는 불만이 가득했다.그녀가 승마를 다시 훈련하는 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함이지 경기를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폐하, 신첩은 이를 원치 않사옵니다!”봉구안의 태도는 견결했다.“그럼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이...”귀비는 화가 나도 반박할 용기가 없어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황제의 서재 밖.연상은 황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갔다.“마마, 괜찮으셔요?”봉구안은 태연했다.“승마경기 선수 이름표에 귀비의 이름까지 넣어.”연상은 깜짝 놀랐다.“마마,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귀비가 이를 받아들이다니요!”바로 그때 귀비도 뒤따라 나왔다.그녀는 봉구안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황후마마, 나중에 만나 뵙겠습니다!”그녀가 경기에 참가하게 되면 나머지 비빈들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봉구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귀비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황제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 그래도 꽉 잡아야 할 것이야.”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난 널 가지고 노는 것뿐인데 이 정도로 득의양양해지다니?”봉구안은 무표정으로 공격을 때려 박았다.“네가 벌인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마. 그리고, 내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은 남들도 손에 넣을 수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떴다.귀비는 싸늘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봉장미, 얼마나 나댈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황제의 총애만 받으려던 참이었고 황제의 명대로 함부로 나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지금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차라리 승마경기를 빌어
봉구안은 직접 말을 타는 횟수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보통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곧 훈련이 끝나갈 무렵 서왕이 승마장을 찾았다.“소인,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보통 서왕은 늘 황제와 함께였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살폈지만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저밖에 없습니다.”서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더니 저만치에서 승마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빈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서왕이 인사를 마치면 지나갈 줄 알았으나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마마께서 수고가 많으신데 필요하시다면 소인이 폐하를 승마장까지 모셔 오겠사옵니다.”연상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왕을 바라보았다. 서왕은 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고 평소처럼 한결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필요 없네.”봉구안은 단칼에 거절했고 서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서왕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보아하니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네요. 죄송합니다.”“그래.”봉구안은 늘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서왕은 떠나기 전 한마디 보탰다.“소인은 마마께서 소원대로 폐하와 사랑의 결실을 보길 바라옵니다.”봉구안은 의아했다.미쳤나?그녀가 총애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자녕궁.녕비는 평온을 되찾았는지 태후와 함께 예배하고 있었다.태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불주를 세며 말했다.“수완아, 너도 전에 승마를 익혔던 것 같은데 왜 경기에 참가하지 않는 거냐?”녕비는 마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고모님, 저는 황후마마를 따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경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폐하께서도 가빈을 눈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가빈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며칠 전에 이미 승은을 입었겠지요. 궁에 떠도는 소문은 멍청한 자들이나 믿지 저는 믿지 않사옵니다.”태후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아쉬운 말
며칠간의 훈련 후 마구 경기가 예정대로 열렸다.관람석에는 황제가 가운데, 태후가 그의 오른쪽에, 나머지 사람들이 그 아래에 차례로 앉았다.서왕은 온화한 모습으로 감탄했다.“궁중에서 처음으로 마구 경기를 하는데 황후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말하면서 그는 자주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소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 발견했다.“처음이긴 하다. 봉씨 집안의 역대 황후와 비교해도 유례가 없구나.”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후를 향한 황제의 불만을 알아챘다.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해 태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칭찬했다.“황후는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마구 경기도 분명 독창적일 것입니다.”소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태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서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말없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다른 비빈들은 마구에는 관심이 없고 황제와 가까이 있고 싶은 목적뿐이었지만 같은 관람석에 있어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경기에 앞서 참가자들은 각자 천막에서 승마복과 보호대를 착용했다.가빈은 옷을 입은 후 황후의 천막으로 달려갔다.“황후마마, 우리가 같은 편일 줄은 몰랐습니다. 빈첩은 귀비의 마술이 너무 좋아서 아무도 귀비를 제압할 수 없을까 걱정했는데...”봉구안이 문득 그녀의 말을 끊었다.“등나무 갑옷을 벗거라.”“네?”가빈은 멍해졌다.황후가 왜 갑자기 등나무 갑옷을 벗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황후의 말에 따랐다.전장에서 쓰는 등나무 갑옷이 온몸을 감싸고 있지만 마구에서는 말을 타고 공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등나무 갑옷은 몸통만 보호할 수 있었다.가빈의 등나무 갑옷에서는 특별한 냄새가 났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을 정도였다.봉구안은 선천적으로 좋은 후각을 가지고 있어 가빈이 가까이 오자 냄새를 맡았다.게다가 그녀는 일 년 내내 행군하며 이 냄새에 매우 민감했다.이것은 설란향이다.말이 설란향을 맡으면 이상하게 흥분하고 불안해져서 발광을
마구 경기가 시작되자 참가한 비빈들이 승마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입장했다.그 모습을 보던 태후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역시 젊음이 좋구나. 하나같이 평소와는 달리 궁궐의 비빈이라기보다는 여장군 같구나.”계 상궁이 허리 숙여 맞장구를 쳤다.“모의 천하 태후마마와 현명하신 폐하가 계신 궁이니 자연히 좋은 기운이 넘치지요.”소욱은 경기장을 훑어보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희열을 가리기 어렵다.“어마마마께서 농담도 잘하십니다. 근 백 년 동안 남제는 여장군을 배출한 적이 없습니다.”서왕이 잔을 들고 말했다.“황제 복택이 남제 대지를 비추어 비옥한 땅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올 것입니다. 조만간 남제에서도 여장군이 나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남제를 위해 땅을 개척하고 중원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소욱은 술잔을 들고 서왕과 허공을 사이에 두고 건배했다.두둥...징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두 편은 서로 다른 색깔의 승마복을 입고 출전하는데 파란색은 귀비편, 검은색은 봉구안편이었다.한 사람씩 말을 타고 있는 그녀들의 손에 마구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경기장 양 끝에 골문을 하나씩 두고 골문 옆에 서서 점수를 따는 궁인들이 붉은 깃발을 손에 든 채 상대 골문에 공을 넣으면 깃발을 꽂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결국, 깃발이 많은 쪽이 승자다.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가빈은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그녀는 마구 막대기로 공을 제어하여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쳤다.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한 번만 골문에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걸리기에 십상이었다.가빈은 마음이 급해지자 두 다리로 말을 꽉 잡고 재빨리 뛰쳐나와 공을 쫓았다.그러자 장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막아라!”가빈의 동작은 매우 빨랐는데 몇 개의 연타를 날린 끝에 공이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골대에 진입했다.궁인이 붉은 기를 들었다.1점!가빈과 같은 편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주먹을 쥔 가빈은 한껏 들뜬
월래객잔.봉구안은 월래객잔에서 정원아를을 만났다.그녀는 몸이 쇠약해 침상에 누워 있었고, 두 명의 동문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부관장님…” 정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차선아가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눕혔다.“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라.”정원아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을 지나 봉구안에게 닿았다.“절 구한 게 당신이군요.”그녀는 지난밤 몸이 약해 의식이 흐릿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만약 이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방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그래서 소욱과 강림 등은 모두 방 밖에 있었다.강림은 팔짱을 끼고 소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뭐요?”태창성의 수비군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걸 보니, 보통의 강호 인물은 아닐 것이었다.소욱은 그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 방 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한편, 옆에서 진한길은 황제의 건강이 몹시 걱정되었다.황제는 어젯밤 사건을 심문한 데 이어 지금은 봉구안을 따라 객잔까지 왔다.잠시도 쉬지 않고 있으니, 어찌 견딜 수 있을까?방 안.봉구안은 정원아에게 물었다.“널 납치한 게 누구냐, 기억하느냐?”정원아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구부정한 허리의 노파였어요. 겉모습은 평범했어요.”“그 노파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봉구안은 계속 물었다.“그녀는… 저를 이용해 무공을 익히려 했어요. 무슨 사악한 무공인지 모르겠지만, 제 원기를 어지럽혀 내공을 잃게 했어요.”정원아는 단단히 찌푸린 미간을 풀지 못하며 차선아를 바라보았다.“부관장님, 반드시 그 노파를 잡아야 해요. 그녀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까 봐 두렵습니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당연한 일이다.”봉구안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노파에게 갇혀 있던 장소는 기억하느냐?”정원아는 고개를 저었다.“기억나지 않아요. 그날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
소욱은 어젯밤 내내 사건을 조사하며 심문하느라 피곤했지만, 봉구안을 볼 생각에 몸이 가뿐해지는 듯했다.그러나 그녀의 방에 도착한 순간, 봉구안과 차선아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봉구안은 차선아를 밀쳐내며 서둘러 해명했다.“오해예요.”사실 오해는 아니었다.다만 일이 성사되지 않았고,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에게 다가가 날카롭고 냉정한 눈빛으로 차선아를 노려보며 물었다.“너, 방금 뭘 하려 했느냐.”너무 직설적인 질문이라 상대방의 체면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겠지만, 차선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다.하지만 굳이 이 남자에게 해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이건 저와 소환 간의 일입니다.”즉,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는 뜻이었다.소욱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여자는 내가 간섭한다.”그는 봉구안을 향해 책망하듯 물었다.“저 자가 너를 농락하려 했는데 왜 밀어내지 않았느냐?”만약 자신이 제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입을 맞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이 여자는 왜 여자들에게 그리도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인지!봉구안은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밀어내려고 했는데, 그때 당신이 들어왔어요.”차선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소환이 왜 이 남자에게 굳이 해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내가 다가가서 입을 맞춘 걸 왜 농락이라 표현하지?’어젯밤 그녀는 이미 소환과 이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새로 사귄 친구인가 보구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친구로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차선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가볍게 절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전진파의 부관장 차선아입니다. 당신은?”소욱은 차갑게 대꾸했다.“소이라 한다.”그는
은육을 통해 몰래 지원군을 요청한 건 소욱의 지시였다.그 이유는 두 가지.첫째, 봉구안 때문이다.이 무자비한 투기장의 방식으로 봐선, 봉구안이 이기더라도 쉽게 투기장을 벗어날 수 없을 게 뻔했다.둘째, 백성들을 위해서였다.투기장의 잔혹함과 잔인함을 목격한 뒤로 소욱은 이미 결심했다. 이곳을 없애겠다고.이런 삐뚤어진 풍조를 방치한다면, 이는 곧 방조와 다름없으니까.태창의 수비대는 현재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은육이 가지고 명패는 알아볼 수 있었다.해당 명패를 소지한 자는 지방 관리를 감찰하고, 지역 수비대를 지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은육이 이끌고 온 수비대는 약 3만 명.수비대의 장수인 백효지는 장창을 손에 쥔 채 분노에 차 소리쳤다.“전원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명령을 거역하는 자, 즉시 처단한다!”그리하여 병사 절반은 투기장의 관중을 포위하고, 나머지 절반은 투기장을 봉쇄하며 내부 인원을 체포하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이 상황을 보자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은육은 명패를 소지한 사람으로 가장하며, 소욱 일행을 군중에서 떼어내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다.소욱은 짙은 자주색과 검은색이 섞인 평복 차림이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옷 같았지만, 고급스러운 소재가 그의 품격을 감추지 못했다.백효지는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소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게다가 명패를 들고 있던 사람은 극히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틀림없이 자신의 호위무사를 대신 자신에게 보냈을 터였다.수비대장인 백효지는 그제야 다가와 소욱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이곳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먼저 역관으로 가셔서 편히 쉬십시오!”소욱은 곁눈질로 봉구안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걸을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대부분 가벼운 외상이었고,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습니다.”소욱은 다시 은육에게 명령
봉구안이 시합에 오르기 전, 이미 도주 경로를 치밀하게 계획해 둔 상태였다.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체력으로는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걸.이런 식의 연속적인 시합은 애초에 공정이라 할 수 없었다.그래서 처음부터 그녀는 마지막까지 링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이전까지의 시합은 단지 관중들이 그녀에게 돈을 걸게 만들고, 결국 투기장이 정원아를 풀어놓게끔 압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강림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진파의 무리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속으로는 원망했다.‘소환, 이 녀석!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나한테 말이라도 좀 해줘야지!’그러나 봉구안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가 혼자서 정원아를 납치한다면, 투기장의 모든 시선은 자신에게만 집중될 것이다.하지만 동료가 끼어들면, 동료가 많아질수록 함께 도망칠 가능성은 줄어들 뿐이었다.이 사실을 차선아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칼을 뽑아 추격에 나섰다.“뻔뻔한 도둑놈아! 우리 전진파 제자를 돌려놔!”강림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그렇구나! 저 녀석이 그 꽃 도둑놈이었어! 나도 속은 거야!”봉구안은 정원아를 품에 안고 투기장을 빠져나왔다.밖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여기저기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그러나 그 빛은 금세 커졌고, 가까이서 확인하니 그것은 모두 투기장 경비병들이었다.그들은 이미 빠르게 모여들어 횃불을 높이 들고 그녀를 에워쌌다.안쪽에서는 또 다른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었다.봉구안은 눈을 번뜩이며 재빠르게 정원아를 뒤쫓아 나온 차선아에게 넘겼다.그리고 우상의 머리도 함께 건넸다.“가! 내가 뒤를 막을게!”그녀는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더 멀리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차선아는 눈빛이 흔들렸다.하지만 이 순간의 봉구안은 예전의 소환과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상황이 급박했기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차선아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정원아를 데리고 떠났다.전진파의 제자들
우상이 죽었다.그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광란 속으로 빠져들었다.방금 전까지 망설이던 이들조차 연이어 소환에게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강림은 온통 혼란스러웠다.이겼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그러곤 멍하니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 소환은 방금까지만 해도 발밑에 깔려 있지 않았나?”멀지 않은 곳에서 차선아가 중얼거렸다.“살인사. 소환이 상대의 살인사를 썼어.”이미 의식을 차린 방민이 입을 열었다.“그뿐만이 아니야. 철선권도 썼어!”그래.그게 핵심이었다.살인사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철선권은 살인사와 함께 사용해야지만 제대로 쓰일 수 있다.게다가 이미 사람들에게 노출된 살인사라면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었다.그리고 소환은 그 기회를 노렸던 것이었다.차선아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자신이라면 결코 시합 중에 상대의 기술을 관찰하고 복제하여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는 바로 그 유명한 말이 떠오르게 했다.타산지석, 나에게도 쓸 수 있는 돌이 될 수 있다.그리고 남의 창은 나의 검이 될 수 있다.철창이 천천히 내려왔다.소환은 그 안에서 우뚝 서 있었다.한 손에는 우상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곧은 소나무 같았고, 꺾이지 않는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마치 험난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능소화 같았다.어려움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꽃처럼 말이다.사람들은 환호했지만, 소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철창이 완전히 내려오고, 문이 열리자 소환은 우상의 옷을 찢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그리고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미인을 내놔. 내가 이겼잖아.”사회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이토록 무서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방금 전의 시합을, 관객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는 또렷하게 보았다.우상은 뛰어난 무술을 가졌고, 몰래 갑옷을 착용하여 칼과 창조차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소환은 정
우상은 봉구안의 신념을 한 걸음씩 부수기 시작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소환, 넌 세상의 악인을 다 없애고 싶다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야.”“너는 이 지하 투기장이 존재하는 걸 조정이 정말 모를 거라 믿어? 여기 관할하는 관리 중에서 이걸 묵인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느냐? 왜 그럴까?”“그들은 돈과 권력을 원하니까, 그리고 치적을 쌓고 싶으니까.”“그럼 넌? 넌 또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너 우리를 다 반짝이는 너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라고 생각하지? 우리를 이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영웅이라 칭송하기를 바라는 거겠지.”“하지만 내가 묻겠다.”“그렇게 말하는 정의란 도대체 뭐냐? 악인은 또 누구냐?”“내가 악인이라면, 죄악을 방조하는 조정은 악인이 아니겠냐?”“그래, 넌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사람 마음속의 악념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내가 너한테 알려주지. 악념이 존재하는 한, 죄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너 따위 필부가 뭔데 사람 본성을 상대로 싸운다는 거냐?”“넌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선행을 해본 적 있다.”“예를 들면,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산토끼를 살려준 적도 있지.”“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냐?”“악념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 칠정육욕 아래 완벽한 인간이란 없단다.”“소환,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해. 그건 정의가 아니야…”철창 밖, 차선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소환, 제발 이겨야 해!’강림은 돈주머니를 단단히 움켜쥐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제발, 소환만 무사하면 십 년 동안 뭐든 다 망해도 상관없어!’소환에게 돈을 건 관중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우상에게 짓밟힐 위기였고, 사람들은 소리쳤다.“내가 쟤한테 돈을 걸었으면 안 됐어!”“야, 네가 이기라고 했잖아! 빨리 일어나라고!”“야, 이기든 지든 너무 보기 안 좋잖아!”“잠깐… 뭐야? 무슨 일이
우상이 철창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집 마당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시합장으로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철창 문이 닫히고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소환, 저것들 봐라. 니가 이길 거라 믿는 사람이 있긴 한 거지?”봉구안은 냉정한 얼굴로 대답을 삼켰다.그 순간, 철창이 천천히 끌어올려졌다. 땅에서 떨어진 철창은 하늘 중간쯤에 멈췄다.그 후에도 우상은 움직이지 않았다.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설교하듯 말했다.“소환, 넌 여전하구나. 아직도 저렇게 젊은 혈기로 설쳐대다니.”“이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되잖아.”“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아나? 네가 원하는 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잖아. 너는 이 기회를 틈타 정원아란 계집을 구하려는 거겠지.”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둘이 철창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관중들에겐 들리지 않았다.우상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걱정 마라. 내가 굳이 이걸 폭로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싸움이 뭐가 재밌겠어? 반 시진 동안, 내가 쓰러지든지, 아니면 네가 죽든지... 난 이곳에서 너와 끝장을 볼 거야.”그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웃음을 지은 순간, 손에 힘을 모아 공격을 날렸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우상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오… 좀 실력이 늘었네?”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이번엔 번개같이 빠르고 맹렬했다.봉구안이 또 한 번 피했지만, 이번엔 처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우상은 여전히 웃었다.“보아하니, 실력이 꽤 늘었구먼.”그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싸움을 시작했다.관중석은 숨을 죽인 채 철창을 응시했다.봉구안은 우상을 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떠올렸다.그녀의 분노가 타올랐다. 주먹을 꽉 쥐며 공격에 나섰다.그러나, 그녀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자, 아파한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강림은 멍하니 우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평범하게 생긴 남자, 군중 속에 섞이면 금세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남자를…“무림맹이 처음 설립될 당시, 강호에 세 명의 악귀가 나타났는데, 우상이 바로 그들 중 우두머리였소.”“그들은 소림의 속가 제자로, 방화와 약탈, 강탈, 살인을 일삼으며 악행을 저질렀지. 무림맹은 이 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숭화산에서의 결전을 벌였소.”“그 전투에서 무림맹은 합심하여 두 명의 악귀를 처치했지만, 우상의 무공은 너무 강해서 그만 도망치고 말았소.”“소환은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상은 동방세의 신부를 납치했소…”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강림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몸이 오싹해졌다.평소 장난스럽고 가벼운 그의 태도와는 달리, 그는 잠시 멈칫하며 목이 메인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놈은 동방세의 부인을 토막으로 나눠서 매일 한 조각씩 보냈었소. 그 일로 동방세는 거의 미쳐버릴 뻔하였소.”“나중에 소환이 우상을 찾아내 결투를 벌였지만,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그 싸움에서 소환이 패배했다는 것만 알려졌소.”“소환은 원래도 부맹주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싸움 이후로는 아예 무림맹을 떠나버렸소.”“그 후 몇 년 동안 동방세는 계속 우상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여기서 저 놈을 보게 될 줄이야.”강림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 시절 겨우 열몇 살의 어린 소년으로, 무공도 대단치 않았고, 고작 곁에서 한마디 거들며 허세나 부리던 아이에 불과했다.그러나 우상의 잔혹함은 그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었다.동방세의 부인의 죽음은 지금도 무림맹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그것은 분명히 소환의 가슴 속 깊이 박힌 한 가시일 터였다.강림은 지금이라도 소환과 함께 우상을 죽이고 싶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소욱의 마음도 무거워졌다.그는 봉구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모든 풍류와 연애는 그녀가 겪은 수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함을 쳤다.“보여줘! 보여주라고!”“제기랄, 우리 이렇게 많이 네 승리에 돈을 걸었는데 네가 기권하면 우린 다 쫄딱 망한다고!”“정원아를 어서 끌어내! 나도 그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싶으니 말이야!”봉구안의 한 마디가 사람들을 불안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사회자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조용, 조용! 다들 조용하시오!”“여러분에게 보장하겠소. 정원아는 분명 살아 있으니 어서 진정하시오…”봉구안은 단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정원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저는 경기를 포기하겠습니다.”그녀가 두 판을 연달아 이긴 후, 그녀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포기한다면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셈이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정원아를 끌어내라!”“맞아, 안 그러면 우린 돈 돌려달라고 할 거야!”천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사회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그는 슬며시 자리를 떠나 비밀문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다.“좋소. 우리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정원아를 먼저 데리고 나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하셨소.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다만, 여러분들은 추가로 돈을 더 걸어야 할 것이오!”관중들은 일제히 환호했다.“좋아!”전진파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었다.그들 또한 정원아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곳에서 다시 철창 하나가 내려왔다.이번 철창은 조금 작았다.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힘없이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철창이 땅에 닿자, 전진파의 제자들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원아! 정원아!”“사매님!”희미하게 정신이 든 정원아가 눈을 떴다.“다행이다, 부관장님! 사매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사회자는 봉구안을 향해 물었다.“어떻소?”그는 곧바로 신호를 보내 철창을 다시 올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