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이 말했다.“마마, 서왕께서 말씀하시길 폐하는 말을 잘 타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합니다.”“마구 시합을 조직하는 이유도 다른 비빈들이 폐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가요?”봉구안은 담담히 대꾸했다.“항제가 좋아하는 건 말을 잘 타는 영비야. 아무나 말을 탄다고 좋아하진 않아.”“마마, 소인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왜 이걸 조직하는 건가요?”“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거지.”봉구안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연상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 역시 귀비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다.영소전.황제가 황후궁에서 아침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귀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간사한 년!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폐하께서 나를 벌하시고 자기 궁에 폐하를 불러들이기까지 한 거야!”춘화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황후를 진정시키기 위함인 것 같아요. 황후가 조검의 일로 또 마마를 압박하면 큰일이니까요.”“폐하께서 가장 신경 쓰시는 분은 마마밖에 없어요.”하지만 귀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산적 사건을 밝혀내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지?”“금인장? 난 언제든 다시 회수해 올 수 있어.”“그럼요, 마마.”춘화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황후는 금인장을 가져갔지만 그걸 사용하는 법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금인장으로 마구 시합 같은 이상한 걸 조직하죠.”귀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자녕궁.태후는 화분 곁가지들을 자르며 속으로 불만을 삭혔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황상은 능연을 처벌하고 안쓰러워서 그날로 영소전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가셨잖아. 이런 처벌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그렇게 하루도 못 참아? 황당하긴!”계 상궁은 안쓰러운 얼굴로 태후를 위로했다.“마마, 이 일로 화를 내실 건 없어요. 폐하께서 어제 영소전에 머무르시긴 했지만 아침에 영화궁을 방문하여 황후마마와 식사
영화궁봉구안의 금족령이 풀렸지만 아침 문안을 오지 않는 비빈들은 여전히 많았다.아프다는 건 핑계고 귀비 사람들인 것은 분명했다.내실에서 연상은 봉구안의 머리를 다듬어주며 불만을 터뜨렸다.“마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빈마저 아프다고 출석하지 않다니. 설마 벌써 마마의 은혜를 잊은 걸까요?”“전에는 마마를 대신해서 궁중 법규를 베끼겠다고 하더니 한순간의 변덕일 줄은 몰랐네요!”봉구안은 후궁 장부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이익을 따라가는 건 사람의 본능이야.”대청.봉구안이 상석에 앉고 몇몇 비빈들이 양측에 앉아 있었다.그들은 일제이 일어서서 황후에게 문안을 올렸다.“만수무강하십시오, 황후마마.”“다들 앉거라.”봉구안은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엄격한 선별을 거쳐 후궁의 자리를 꿰찬 여인들이라 하나같이 용모가 출중했다.안타깝게도 황제는 귀비에게만 눈이 멀어 이 많은 여인들이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으니 후궁에 원망의 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마구 시합을 할까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거라.”봉구안의 말이 끝나자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와의 시선을 피했다.한참 후, 현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에둘러 말했다.“신첩은 워낙 몸이 허약하여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격한 운동은 못할 것 같습니다. 몸만 건강했어도 참여하고 싶은데 안타깝네요.”현비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황후가 당연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말을 타는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연상아, 현비의 이름을 기입하거라.”현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봤고 피식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봉구안은 웃음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녕비였다.자리에서 일어선 녕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빼주세요. 신첩은 어릴 때부터 자고로 여자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검을 휘두르고 말 위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사내들
영소전.소식을 들은 귀비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황후는 정녕 미친 거야? 감히 날 마구 시합에 끌어들여?”“설마 금인장 가져갔다고 자기 마음대로 후궁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최근에는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황제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당장에 황후를 찾아갔을 것이다.마구 시합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은 귀비뿐이 아니었다.아침 조회가 끝난 후, 비빈들은 한자리에 모여 불만을 토로했다.“마구 시합을 대체 왜 하는 겁니까? 황후마마는 참 이상해요. 이상한 일만 만드는 것 같아요.”“황후께서 아무리 잘 포장해도 난 싫어요. 지금은 선조 시기도 아니고 오늘날의 남제는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들이 성을 지키는 상황은 오지도 않을 거라고요.”“권력 좀 잡았다고 뭐라도 하려는 거겠지요. 우리만 고생이네요. 마구시합이 대체 운영이나 될지 두고 보겠어요.”한편, 녕비는 자녕궁을 찾아가서 일러바쳤다.“고모, 황후가 오늘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아시나요? 그 여자가 글쎄 우리 가문의 교양에 의문을 제기했다니깐요? 고모마저 무시하는 거잖아요!”태후 역시 마구 시합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미 후궁 일에 손을 떼기로 했고 황후와 귀비의 겨루기를 지켜보기로 한 이상, 황후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조카딸인 녕비를 조금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계 상궁, 이따가 영화궁에 가서 녕비는 나와 함께 불경을 드려야 하니 마구 훈련을 할 시간이 없다고 전해라.”녕비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감사합니다, 고모!”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내 조카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당연히 도와야지. 다만 명심해. 대놓고 황후를 적대하진 말거라. 누가 뭐래도 후궁의 안주인은 황후야.”“예, 고모.”황제의 측근은 궁 곳곳에 퍼져 있었다.산적 사건이 끝난 후로 소욱은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시켰다.그래서 녕비와 그녀의 대화를 포함해 아침에 있었던 일도 자연히 그의
황제의 서재에 도착한 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국무 때문에 바쁘니 간단히 말하거라.”마장 훈련에 두 명만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그는 황후가 말을 안 듣는 비빈들 때문에 자신에게 부탁하려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귀비의 두통약이 다 떨어져갈 때가 됐네요. 그래서 약을 가져왔습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약을 전해주자고 여기까지 왔다고?’사내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지난번에는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말을 마친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서 그 의원을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마침 우연히 의원이 경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거짓말인지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거 참 우연이로군.”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그런데 왜 바로 영소전으로 가져가지 않고 짐한테 온 거지?”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산적 사건 때문에 귀비와 신첩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신첩이 주는 거라고 하면 귀비가 먹지 않을 것 같아서요.”소욱은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마구 시합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비빈들이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참는다고?“약은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봉구안이 떠난 뒤, 유사양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황후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단순히 약만 전하러 온 거라니.그가 알기로 현재 두 명만 마구 훈련에 참석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은 골골거리는 현비인 걸로 알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이 참석해 주지 않으면 마구 시합을 대체 어떻게 조직하려고 그럴까?소욱은 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의원에 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영소전에 보내거라.”유사양은 공손히 물러났다.귀비
비빈들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궁인이 말했다.“황후께서는 태의를 보내 몸이 편찮으신 마마들을 치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몸이 아픈 분은 치료를 하고 일부러 아프다고 마장 훈련을 거부한 분은 궁중 법규 베껴 쓰기 50번에 곤장 다섯 대를 친다고 하셨습니다!”비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태의들이 분분히 나서서 비빈들의 진맥을 했다.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각자 곤장을 맞았고 궁중 법규까지 베껴야 했다.녕비는 태후의 비호가 있었기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억울해하는 비빈들도 있었다.“귀비는요? 귀비마마도 오늘 마장에 안 나갔다고 들었는데요! 황후께서는 왜 귀비마마는 가만히 두시는 건가요?”전달하러 온 궁인이 공손히 답했다.“아마 지금쯤, 영소전에도 명이 내려졌을 겁니다.”“뭐라고요? 황후께서 귀비의 곤장을 친다고요?”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영소전.형장 궁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이닥쳤다.“귀비마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춘화는 귀비의 앞을 막고 필사적으로 버텼다.“무례하다! 귀비마마께 형벌이라니! 아무리 황후라 하여도 위에 폐하가 계시는데! 폐하께서 우리 마마를 얼마나 아끼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귀비마마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폐하께서 너희를 처벌하실 거다!”귀비 역시 황후가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형장의 궁인들도 난감했다.“마마, 소인들도 시키는 일을 할 뿐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냥 시늉만 할 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황후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귀비는 싸늘한 얼굴로 태감을 불렀다.“폐하를 모셔오너라! 이 황궁에서 누구 말이 우선인지 한번 두고 보자꾸나!”장신궁.이번에는 주변에 호위들이 없었다.폭군이 경계를 푼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매복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봉구안은 미리 변장을 하고 내전으로 들어갔다.소욱은 침상에 다리를 틀고 앉아 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귀비는 문밖을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태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마마, 유 태감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서는… 낮에 많이 피곤하시어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다 합니다.”춘화는 크게 놀랐다.“귀비마마께서 곤장을 맞을 상황이라는 건 말씀 안 드렸어?”그들은 당연히 귀비가 그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귀비는 태감을 죽일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멍청한 자식!’중요한 상황에 황제가 오지 않았으니 형장의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국엔 앞으로 나섰다.“귀비마마, 실례하겠습니다.”그들이 다가오자 춘화가 앙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무례하다! 어딜 감히!”반 시진 후.귀비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다.춘화가 다가오자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폐하는? 오신대?”춘화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자진궁 유 태감까지 나섰는데 안 된대요. 어쩌면 정말 피곤하셨을 수도 있어요.”귀비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내일, 내일 폐하를 불러 황후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보여줘야겠어!”비록 진짜로 곤장을 맞지는 않았지만 그들 앞에 엎드려 있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다.사실상, 소욱은 장신궁에서 치료를 받고 자시가 넘어서야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유사양은 다급히 와서 사실을 고했다.“폐하, 영소전에 큰일이 났습니다.”“황후께서 하명하시어 귀비마마께서 곤장 다섯 대를 맞았습니다. 귀비께서는 직전에 폐하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폐하께서 안 계시니 소인도 황후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소욱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다음 날 아침.영화궁.궁인들이 봉구안의 처소를 찾았다.“마마, 폐하께서 지금 당장 영소전으로 들라 하셨습니다.”연상은 황후의 머리를 빗겨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제 귀비가 곤장을 맞은 것 때문에 그러나 봐요.”“마나, 폐하께서 그렇게 귀비를 총애하시는데 이대로 가셨다가 무슨 일이
귀비는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황제 앞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모습은 어디가고 황후 앞에서는 도발적인 눈빛을 드러냈다. “신첩이 늦어 사죄드리옵니다. 황제께서 신첩을 너무 아끼셔서 이제야 겨우 보내주셨사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을 지은 채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폐하께는 내가 자네를 잘 챙길 터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게. ”그녀는 일부러 챙긴다는 단어를 콕 집어 얘기했다.그러자 귀비는 겁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황후마마, 혹시 잊으신 겁니까? 폐하께선 금일 오전 황후마마더러 덕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쉬이 벌을 내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러고는 갑자기 황후마마를 스쳐 지나가 정자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온통 그녀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었다.뭇 비빈들은 귀비의 행동을 보고 따라 배워 자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둘씩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황후는 그저 그녀들더러 승마장에 와서 연습하라고만 했을 뿐, 그 어떤 수준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연상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마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 다들 승마하러 온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러 온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덤덤한 눈빛으로 저만치에서 승마를 연습하고 있는 가빈을 발견했다.“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법이야. 그걸 누가 잡느냐에 달린 문제지.”게다가 그녀가 이번 승마경기를 주최한 목적은 그들이 아니라 귀비를 위해서였다. 승마장은 아주 넓었기에 승마뿐만 아니라 휴식할 수 있는 시원한 터도 마련되어 있었다.승마를 즐기지 않는 그녀들은 귀비를 선두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오로지 가빈과 현비만 승마 연습에 집중했다.이런 상황은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봉구안은 낮에 승마장에 있다가 저녁이 되면 황제의 해독을 책임지러 장신궁으로 향했다.그는 매일 상주서를 처리한 후에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봉구안은 일부러 그를 속였으나 침구를
승마장 동쪽, 황제와 서왕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지 나란히 서 있었다.현비는 곧바로 가빈더러 인사를 건네라고 귀띔했다.두 사람은 함께 황제 앞으로 가 부드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신첩,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서왕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소인, 두 마마님께 인사드리옵니다.”부드러운 눈빛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게 보였다.소욱의 시선은 조금 전 말을 타고 달리던 황후로부터 두 사람에게로 옮겨졌다.“일어나게.”현비는 말 없이 그의 뒤로 물러섰다.가빈은 신이 나서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붙잡으려고 했다.“폐하, 말을 타러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서왕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참하고 다정한 현비마마와 귀엽고 발랄한 가빈마마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다니, 역시 폐하께선 복이 많으십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부러워? 그럼 내일 당장 식을 올려주지.”서왕은 곧바로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이윽고 그는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런데 후궁 마마들 전부 승마 연습하러 오셨다고 들었는데 왜 두 분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까?”소욱의 표정은 덤덤했다.황후가 협박하지 않았다면 후궁들은 절대 이곳까지 찾아와 승마 연습할 리 없었을 것이다.이번 승마 경기는 절대 성공리에 벌어질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말을 잘 다루는 선수가 필요한 법이다.봉구안은 말에 올라탄 뒤로 곧바로 침착을 되찾았다. 부드러움 속에 흥분이 뒤섞인 채 단번에 저만치까지 달려 나갔다.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도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껏 말을 타는 것이었다.“이랴!”말은 응원에 힘입은 듯 더욱 빨리 달렸다.두 시간 뒤.해빛이 구름층을 뚫고 숲을 비추었다.봉구안은 말과 함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말은 자리에 서 있고 봉구안은 잔디밭 위에 누운 채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다른
월래객잔.봉구안은 월래객잔에서 정원아를을 만났다.그녀는 몸이 쇠약해 침상에 누워 있었고, 두 명의 동문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부관장님…” 정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차선아가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눕혔다.“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라.”정원아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을 지나 봉구안에게 닿았다.“절 구한 게 당신이군요.”그녀는 지난밤 몸이 약해 의식이 흐릿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만약 이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방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그래서 소욱과 강림 등은 모두 방 밖에 있었다.강림은 팔짱을 끼고 소욱을 살피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뭐요?”태창성의 수비군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걸 보니, 보통의 강호 인물은 아닐 것이었다.소욱은 그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 방 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한편, 옆에서 진한길은 황제의 건강이 몹시 걱정되었다.황제는 어젯밤 사건을 심문한 데 이어 지금은 봉구안을 따라 객잔까지 왔다.잠시도 쉬지 않고 있으니, 어찌 견딜 수 있을까?방 안.봉구안은 정원아에게 물었다.“널 납치한 게 누구냐, 기억하느냐?”정원아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구부정한 허리의 노파였어요. 겉모습은 평범했어요.”“그 노파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봉구안은 계속 물었다.“그녀는… 저를 이용해 무공을 익히려 했어요. 무슨 사악한 무공인지 모르겠지만, 제 원기를 어지럽혀 내공을 잃게 했어요.”정원아는 단단히 찌푸린 미간을 풀지 못하며 차선아를 바라보았다.“부관장님, 반드시 그 노파를 잡아야 해요. 그녀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까 봐 두렵습니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당연한 일이다.”봉구안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노파에게 갇혀 있던 장소는 기억하느냐?”정원아는 고개를 저었다.“기억나지 않아요. 그날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
소욱은 어젯밤 내내 사건을 조사하며 심문하느라 피곤했지만, 봉구안을 볼 생각에 몸이 가뿐해지는 듯했다.그러나 그녀의 방에 도착한 순간, 봉구안과 차선아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봉구안은 차선아를 밀쳐내며 서둘러 해명했다.“오해예요.”사실 오해는 아니었다.다만 일이 성사되지 않았고,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에게 다가가 날카롭고 냉정한 눈빛으로 차선아를 노려보며 물었다.“너, 방금 뭘 하려 했느냐.”너무 직설적인 질문이라 상대방의 체면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겠지만, 차선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다.하지만 굳이 이 남자에게 해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이건 저와 소환 간의 일입니다.”즉,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는 뜻이었다.소욱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여자는 내가 간섭한다.”그는 봉구안을 향해 책망하듯 물었다.“저 자가 너를 농락하려 했는데 왜 밀어내지 않았느냐?”만약 자신이 제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입을 맞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이 여자는 왜 여자들에게 그리도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인지!봉구안은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밀어내려고 했는데, 그때 당신이 들어왔어요.”차선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소환이 왜 이 남자에게 굳이 해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게다가 내가 다가가서 입을 맞춘 걸 왜 농락이라 표현하지?’어젯밤 그녀는 이미 소환과 이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새로 사귄 친구인가 보구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친구로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차선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가볍게 절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전진파의 부관장 차선아입니다. 당신은?”소욱은 차갑게 대꾸했다.“소이라 한다.”그는
은육을 통해 몰래 지원군을 요청한 건 소욱의 지시였다.그 이유는 두 가지.첫째, 봉구안 때문이다.이 무자비한 투기장의 방식으로 봐선, 봉구안이 이기더라도 쉽게 투기장을 벗어날 수 없을 게 뻔했다.둘째, 백성들을 위해서였다.투기장의 잔혹함과 잔인함을 목격한 뒤로 소욱은 이미 결심했다. 이곳을 없애겠다고.이런 삐뚤어진 풍조를 방치한다면, 이는 곧 방조와 다름없으니까.태창의 수비대는 현재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은육이 가지고 명패는 알아볼 수 있었다.해당 명패를 소지한 자는 지방 관리를 감찰하고, 지역 수비대를 지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은육이 이끌고 온 수비대는 약 3만 명.수비대의 장수인 백효지는 장창을 손에 쥔 채 분노에 차 소리쳤다.“전원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명령을 거역하는 자, 즉시 처단한다!”그리하여 병사 절반은 투기장의 관중을 포위하고, 나머지 절반은 투기장을 봉쇄하며 내부 인원을 체포하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이 상황을 보자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은육은 명패를 소지한 사람으로 가장하며, 소욱 일행을 군중에서 떼어내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다.소욱은 짙은 자주색과 검은색이 섞인 평복 차림이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옷 같았지만, 고급스러운 소재가 그의 품격을 감추지 못했다.백효지는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소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게다가 명패를 들고 있던 사람은 극히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틀림없이 자신의 호위무사를 대신 자신에게 보냈을 터였다.수비대장인 백효지는 그제야 다가와 소욱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이곳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먼저 역관으로 가셔서 편히 쉬십시오!”소욱은 곁눈질로 봉구안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걸을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대부분 가벼운 외상이었고,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습니다.”소욱은 다시 은육에게 명령
봉구안이 시합에 오르기 전, 이미 도주 경로를 치밀하게 계획해 둔 상태였다.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체력으로는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걸.이런 식의 연속적인 시합은 애초에 공정이라 할 수 없었다.그래서 처음부터 그녀는 마지막까지 링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이전까지의 시합은 단지 관중들이 그녀에게 돈을 걸게 만들고, 결국 투기장이 정원아를 풀어놓게끔 압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강림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진파의 무리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속으로는 원망했다.‘소환, 이 녀석!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나한테 말이라도 좀 해줘야지!’그러나 봉구안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가 혼자서 정원아를 납치한다면, 투기장의 모든 시선은 자신에게만 집중될 것이다.하지만 동료가 끼어들면, 동료가 많아질수록 함께 도망칠 가능성은 줄어들 뿐이었다.이 사실을 차선아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칼을 뽑아 추격에 나섰다.“뻔뻔한 도둑놈아! 우리 전진파 제자를 돌려놔!”강림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그렇구나! 저 녀석이 그 꽃 도둑놈이었어! 나도 속은 거야!”봉구안은 정원아를 품에 안고 투기장을 빠져나왔다.밖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여기저기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그러나 그 빛은 금세 커졌고, 가까이서 확인하니 그것은 모두 투기장 경비병들이었다.그들은 이미 빠르게 모여들어 횃불을 높이 들고 그녀를 에워쌌다.안쪽에서는 또 다른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었다.봉구안은 눈을 번뜩이며 재빠르게 정원아를 뒤쫓아 나온 차선아에게 넘겼다.그리고 우상의 머리도 함께 건넸다.“가! 내가 뒤를 막을게!”그녀는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더 멀리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차선아는 눈빛이 흔들렸다.하지만 이 순간의 봉구안은 예전의 소환과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상황이 급박했기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차선아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정원아를 데리고 떠났다.전진파의 제자들
우상이 죽었다.그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광란 속으로 빠져들었다.방금 전까지 망설이던 이들조차 연이어 소환에게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강림은 온통 혼란스러웠다.이겼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그러곤 멍하니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 소환은 방금까지만 해도 발밑에 깔려 있지 않았나?”멀지 않은 곳에서 차선아가 중얼거렸다.“살인사. 소환이 상대의 살인사를 썼어.”이미 의식을 차린 방민이 입을 열었다.“그뿐만이 아니야. 철선권도 썼어!”그래.그게 핵심이었다.살인사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철선권은 살인사와 함께 사용해야지만 제대로 쓰일 수 있다.게다가 이미 사람들에게 노출된 살인사라면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었다.그리고 소환은 그 기회를 노렸던 것이었다.차선아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자신이라면 결코 시합 중에 상대의 기술을 관찰하고 복제하여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는 바로 그 유명한 말이 떠오르게 했다.타산지석, 나에게도 쓸 수 있는 돌이 될 수 있다.그리고 남의 창은 나의 검이 될 수 있다.철창이 천천히 내려왔다.소환은 그 안에서 우뚝 서 있었다.한 손에는 우상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곧은 소나무 같았고, 꺾이지 않는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마치 험난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능소화 같았다.어려움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꽃처럼 말이다.사람들은 환호했지만, 소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철창이 완전히 내려오고, 문이 열리자 소환은 우상의 옷을 찢어 그의 머리를 감쌌다.그리고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미인을 내놔. 내가 이겼잖아.”사회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이토록 무서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방금 전의 시합을, 관객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는 또렷하게 보았다.우상은 뛰어난 무술을 가졌고, 몰래 갑옷을 착용하여 칼과 창조차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소환은 정
우상은 봉구안의 신념을 한 걸음씩 부수기 시작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소환, 넌 세상의 악인을 다 없애고 싶다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야.”“너는 이 지하 투기장이 존재하는 걸 조정이 정말 모를 거라 믿어? 여기 관할하는 관리 중에서 이걸 묵인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느냐? 왜 그럴까?”“그들은 돈과 권력을 원하니까, 그리고 치적을 쌓고 싶으니까.”“그럼 넌? 넌 또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너 우리를 다 반짝이는 너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라고 생각하지? 우리를 이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영웅이라 칭송하기를 바라는 거겠지.”“하지만 내가 묻겠다.”“그렇게 말하는 정의란 도대체 뭐냐? 악인은 또 누구냐?”“내가 악인이라면, 죄악을 방조하는 조정은 악인이 아니겠냐?”“그래, 넌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사람 마음속의 악념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내가 너한테 알려주지. 악념이 존재하는 한, 죄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너 따위 필부가 뭔데 사람 본성을 상대로 싸운다는 거냐?”“넌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선행을 해본 적 있다.”“예를 들면,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산토끼를 살려준 적도 있지.”“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냐?”“악념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 칠정육욕 아래 완벽한 인간이란 없단다.”“소환,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해. 그건 정의가 아니야…”철창 밖, 차선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소환, 제발 이겨야 해!’강림은 돈주머니를 단단히 움켜쥐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제발, 소환만 무사하면 십 년 동안 뭐든 다 망해도 상관없어!’소환에게 돈을 건 관중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우상에게 짓밟힐 위기였고, 사람들은 소리쳤다.“내가 쟤한테 돈을 걸었으면 안 됐어!”“야, 네가 이기라고 했잖아! 빨리 일어나라고!”“야, 이기든 지든 너무 보기 안 좋잖아!”“잠깐… 뭐야? 무슨 일이
우상이 철창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집 마당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시합장으로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철창 문이 닫히고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소환, 저것들 봐라. 니가 이길 거라 믿는 사람이 있긴 한 거지?”봉구안은 냉정한 얼굴로 대답을 삼켰다.그 순간, 철창이 천천히 끌어올려졌다. 땅에서 떨어진 철창은 하늘 중간쯤에 멈췄다.그 후에도 우상은 움직이지 않았다.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설교하듯 말했다.“소환, 넌 여전하구나. 아직도 저렇게 젊은 혈기로 설쳐대다니.”“이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되잖아.”“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아나? 네가 원하는 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잖아. 너는 이 기회를 틈타 정원아란 계집을 구하려는 거겠지.”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둘이 철창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관중들에겐 들리지 않았다.우상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걱정 마라. 내가 굳이 이걸 폭로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싸움이 뭐가 재밌겠어? 반 시진 동안, 내가 쓰러지든지, 아니면 네가 죽든지... 난 이곳에서 너와 끝장을 볼 거야.”그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웃음을 지은 순간, 손에 힘을 모아 공격을 날렸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우상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오… 좀 실력이 늘었네?”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이번엔 번개같이 빠르고 맹렬했다.봉구안이 또 한 번 피했지만, 이번엔 처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우상은 여전히 웃었다.“보아하니, 실력이 꽤 늘었구먼.”그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싸움을 시작했다.관중석은 숨을 죽인 채 철창을 응시했다.봉구안은 우상을 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떠올렸다.그녀의 분노가 타올랐다. 주먹을 꽉 쥐며 공격에 나섰다.그러나, 그녀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자, 아파한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강림은 멍하니 우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평범하게 생긴 남자, 군중 속에 섞이면 금세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남자를…“무림맹이 처음 설립될 당시, 강호에 세 명의 악귀가 나타났는데, 우상이 바로 그들 중 우두머리였소.”“그들은 소림의 속가 제자로, 방화와 약탈, 강탈, 살인을 일삼으며 악행을 저질렀지. 무림맹은 이 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숭화산에서의 결전을 벌였소.”“그 전투에서 무림맹은 합심하여 두 명의 악귀를 처치했지만, 우상의 무공은 너무 강해서 그만 도망치고 말았소.”“소환은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상은 동방세의 신부를 납치했소…”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강림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몸이 오싹해졌다.평소 장난스럽고 가벼운 그의 태도와는 달리, 그는 잠시 멈칫하며 목이 메인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놈은 동방세의 부인을 토막으로 나눠서 매일 한 조각씩 보냈었소. 그 일로 동방세는 거의 미쳐버릴 뻔하였소.”“나중에 소환이 우상을 찾아내 결투를 벌였지만,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그 싸움에서 소환이 패배했다는 것만 알려졌소.”“소환은 원래도 부맹주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싸움 이후로는 아예 무림맹을 떠나버렸소.”“그 후 몇 년 동안 동방세는 계속 우상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여기서 저 놈을 보게 될 줄이야.”강림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 시절 겨우 열몇 살의 어린 소년으로, 무공도 대단치 않았고, 고작 곁에서 한마디 거들며 허세나 부리던 아이에 불과했다.그러나 우상의 잔혹함은 그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었다.동방세의 부인의 죽음은 지금도 무림맹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그것은 분명히 소환의 가슴 속 깊이 박힌 한 가시일 터였다.강림은 지금이라도 소환과 함께 우상을 죽이고 싶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소욱의 마음도 무거워졌다.그는 봉구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모든 풍류와 연애는 그녀가 겪은 수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함을 쳤다.“보여줘! 보여주라고!”“제기랄, 우리 이렇게 많이 네 승리에 돈을 걸었는데 네가 기권하면 우린 다 쫄딱 망한다고!”“정원아를 어서 끌어내! 나도 그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싶으니 말이야!”봉구안의 한 마디가 사람들을 불안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사회자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조용, 조용! 다들 조용하시오!”“여러분에게 보장하겠소. 정원아는 분명 살아 있으니 어서 진정하시오…”봉구안은 단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정원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저는 경기를 포기하겠습니다.”그녀가 두 판을 연달아 이긴 후, 그녀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포기한다면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셈이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정원아를 끌어내라!”“맞아, 안 그러면 우린 돈 돌려달라고 할 거야!”천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사회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그는 슬며시 자리를 떠나 비밀문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다.“좋소. 우리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정원아를 먼저 데리고 나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하셨소.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다만, 여러분들은 추가로 돈을 더 걸어야 할 것이오!”관중들은 일제히 환호했다.“좋아!”전진파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었다.그들 또한 정원아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곳에서 다시 철창 하나가 내려왔다.이번 철창은 조금 작았다.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힘없이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철창이 땅에 닿자, 전진파의 제자들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원아! 정원아!”“사매님!”희미하게 정신이 든 정원아가 눈을 떴다.“다행이다, 부관장님! 사매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사회자는 봉구안을 향해 물었다.“어떻소?”그는 곧바로 신호를 보내 철창을 다시 올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