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흔들림 없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폐하, 신첩이 마음이 앞서 심기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정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벌로 영화궁에서 반성하고 있을 것이니 폐하의 시중을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소욱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것은 아니군.”“가마를 준비하거라. 영소전으로 간다.”황제가 돌아간 후, 연상은 다리에 힘이 풀러 풀썩 주저앉았다.“마마, 겁나 죽는 줄 알았습니다.”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는 강빈을 매정하게 내치셨는데 이로서 우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네요.”“게다가 폐하와 황귀비, 강빈 모두 적이 되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봉구안은 실패라고 생각되지 않았다.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강빈은 황귀비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니 만약 폐하께서 강빈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승은을 주었을 것이다.”“예? 그럼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 강빈을 폐하의 침전으로 보냈단 말씀인가요?”연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설마 마마,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죠?”봉구안이 말했다.“싸움에서 이기려면 인내심이 필요해. 적이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마마, 소인은 아둔해서 잘 모르겠사옵니다.”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폐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약속을 미루기 전에 먼저 실수를 유도하는 거지. 잘못이 폐하께 있는 한, 주동권은 우리한테 있어.”“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네요.”연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죽어서 말했다.“3일 안에 폐하는 다시 강빈의 처소를 찾을 거야. 이번에는 약속을 번복하시지 않을 거니까 두고 봐.”연상은 그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그 폭군이?’깊은 밤, 봉구안은 잠이 오지 않았다.자신과 두 번이나 맞붙었던 호위가 사실은 황제였다니. 게다가 황제는 천수독이 온몸에 퍼진 상태라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일반 호위무사라면 절대 간
강빈은 놀랍기도 하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나갔다.금빛 찬란한 상자들을 보자 그녀는 조금 전의 불쾌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옆에 있던 시종이 말했다.“마마, 폐하께서는 영화궁을 떠난 후에 영소전에 잠깐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마 황귀비께서 폐하께 뭐라고 말씀하시어 보상을 하사하신 것 같아요. 황귀비께 고마움을 표해야겠어요!”강빈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시는 건 황귀비마마뿐이야. 그분은 황후랑 달라!”황후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다시 분노가 솟구쳤다.‘황후, 복수할 거야!’한편, 자진궁.대전 안은 삭막하게 고요했다.그날 밤.사내는 짜증을 못참고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소욱은 옷섶을 풀어헤친 채, 침상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영화궁에서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잠이 오지 않았다.‘뭔가 이상해! 난 분명 황후의 시종들을 곤장을 쳐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어.’‘그런데 어쩌다가 황후한테 말렸지?’아마 그녀가 강빈의 아버지와 형제들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사실 확인을 위해 서신의 필적까지 감정하면서 영화궁에 온 목적은 완전히 잊은 채, 황후에게 끌려다닌 것 같았다.그 뒤로 대화가 끝나기까지 그는 황후가 자진궁에 허락도 없이 비빈을 들여보낸 것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황후가 만약 진심으로 강빈을 위로할 생각이었다면 일찌감치 그를 찾아와서 상의했어야 했다. 하지만 먼저 저지르고 궁지에 몰리자 강빈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위기에서 빠져나갔다.아무리 생각해도 황후가 그의 실수를 유도한 게 분명했다.‘젠장!’소욱은 짜증스럽게 침대를 내렸다.소리를 들은 유사양이 안으로 들어와 촛불을 켰다.“폐하, 어디 나가시려고요?”소욱은 유사양을 보자 오늘 있었던 일들이 또 떠올라서 홧김에 발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유사양은 겁에 질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폐하, 소인이 뭘 잘못했는지 말씀만 해주시면 저절로 벌을 받겠습니다. 소인 때문에 폐하의 옥
황귀비는 제 귀를 의심했다.조검이 계속해서 말했다.“유 태감이 마마께 기다리지 말라고 전하셨으니 사실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강빈의 처소에서 저녁을 드시고 계신답니다.”황귀비는 갑자기 불쾌감이 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리 저녁을 같이 하더라도 어차피 황제는 강빈을 품어주지 않을 것이다.‘이런 일로 당황하지 말자. 난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귀비야!’황제가 강빈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뭇 비빈들은 충격에 빠졌다.가장 분개한 건 단연 녕비였다. 그녀는 홧김에 찻잔을 집어던졌다.“강빈이 입궁한지 얼마나 된다고! 왜 걔가 나보다 먼저 승은을 입는다는 것이냐!”그녀의 시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는 어쩌면 강빈의 부친인 강 장군이 전장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여 격려 차 가신 걸 수도 있어요.”녕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렸다.“고모 말이 정말 맞는 걸까? 황후가 뒤에서 강빈을 밀어주고 있다는 말 말이야.”시종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마마, 그건 저도 모르겠사옵니다.”“하지만 황후께서는 아직 출입금지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로 강빈을 돕겠어요?”녕비는 이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황후가 정말 대단한 수완을 가진 지략가라면 자신이 아닌 강빈을 밀어준 것이 이상했다.그녀는 후궁에 황제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자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가장 신이 난 사람은 당연히 비빈 강씨였다.입궁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황제가 그녀의 처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폐하, 이것 좀 드셔보십시요. 진주삼계탕인데 폐하가 오신다고 하여 신첩이 직접 만든 겁니다.”“폐하는 매일 정무가 바쁘시니 피로에 좋은 차도 준비했어요!”“폐하…”소욱은 참다못해 젓가락을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강빈을 보며 말했다.“강빈,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밥만 먹는 법이야.”강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소곳이 사과했다.“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신첩은 단지 너무 기뻐서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그녀의 쉴새없는 말에
심야의 자진궁.예리한 화살이 문틀에 날아와서 박혔다.순식간에 금위군이 출동했다.“자객이다!”내전.소욱은 비단 잠옷으로 갈아입고 흑발을 그대로 풀어헤친 채 침상에 앉아 느긋하게 물었다.“밖이 왜 이리 소란스럽느냐?”유사양은 두 손으로 화살과 그 위에 붙은 쪽지를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내밀었다.“폐하, 자객이 이걸 남기고 갔습니다.”소욱은 손을 뻗어 쪽지를 확인했다.[내일 밤 해시에 화청궁에서 폐하의 독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소욱의 동공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곧이어 그 쪽지는 그의 손에서 산산이 가루가 되었다.“감히 다시 올 생각을 하다니.”상대는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쪽지를 대범하게 자진궁에 보낸 것이 분명했다.유사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군을 바라보았다.‘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설마 그날 밤 그 자객?’다음 날 저녁, 화청궁.그림자 호위들은 냉궁 근처에 잠복하고 자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해시 일각이 되자 궁녀 복장을 한 여자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곧 달려들어 그녀를 포위했다.이상한 건 자객이 그들을 보고도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봉구안은 태연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무사들을 바라보았다.제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예상했던 결과였다.‘고작 인원수가 이게 다라니. 날 무시해?’봉구안은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냈다.호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신호를 보냈다.“다 같이 달려들어!”슉!곧이어 공기를 가르는 아찔한 소리와 함께 봉구안이 잡은 채찍이 뱀처럼 허공을 갈랐다.채찍은 정확히 한 호위의 복부를 가격했다.그녀는 상대에게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손목의 힘을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채찍을 휘둘렀다.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주변에 십여 명의 호위가 쓰러졌다.실력이 황궁에서도 알아주는 그들이었지만 채찍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그녀의 보법은 안정적이고도 빨랐으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채찍이 춤을 추듯이 흐느적거리며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슉!채찍
봉구안은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여봐라!”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위무사들이 안으로 달려들어왔다.“자객을 잡아라!”호위무사들이 덮쳐오자 봉구안은 무릎을 뻗어 소욱의 아랫도리를 공격했다.소욱은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강자의 대결에서 방심하는 쪽이 지는 법이다.그가 잠깐 틈을 준 사이에 봉구안은 그의 속박에서 풀려나 바지에 동인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슉!호위무사들은 제왕의 난처한 순간을 보지 않으려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그 짧은 순간에 소욱은 바지를 잡으려고 손을 풀었고 그로 인해 봉구안은 완전히 그의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남겨 속박에서 풀려난 뒤, 호위들이 멍하니 정신을 못 추는 틈을 타 창밖으로 뛰쳐나갔다.그녀의 동작은 물 흐르듯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도주에 실패했을 것이다.호위들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방 안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았다.소욱은 긴 팔을 뻗어 책상을 잡고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맸다.그리고 자객이 사라진 방향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저 여인을 보는 즉시 죽여라!”군왕의 허리띠를 풀은 발칙한 여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자신의 독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오로지 그녀를 죽이고 싶은 생각만 있었다.정신을 차린 호위들은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하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봉구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화청궁.소욱은 의자에 앉아 자객이 남기고 간 채찍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호위들은 그의 앞에서 바짝 긴장한 자세로 용서를 빌었다.“폐하, 소인들이 무능하여 자객을 잡지 못하였습니다!”제왕의 분노는 가끔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하지만 주변에 풍기는 살기는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소욱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호위들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각자 곤장 50대씩 맞거라.”곤장 50대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반 곤죽이 돼 있을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연상이 허리띠를 가리키며 물었다.“마마,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그녀는 대체 뭘 하고 다녔기에 고결한 황후가 남자의 허리띠를 들고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감히 의문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봉구안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허리띠를 탁자에 내려놓고 한참을 노려보았다.당연히 이걸 남겨둘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폭군을 위해 독을 치료해 줘야 하는데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큰일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황제의 흉금이 그렇게까지 옹졸하진 않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일단은 숨겨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번에 독을 치료하러 갈 때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연상이 무심코 물었다.“마마, 이 허리띠의 주인은 누구인가요?”“폐하야.”순간 연상의 두 눈이 당황함으로 동그랗게 떠졌다.“마마, 밤에 나가서 폐하의 허리띠를 훔쳐 온 건가요?”봉구안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 허리띠는 어쩌다 보니 잡아당긴 거야.”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황제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다니! 대체 우리 마마는….’자진궁.소욱은 침대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다.머릿속에는 온통 그 자객의 모습만 떠올랐다.‘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니!’그는 괘씸하다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절대 쉽게 도망치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다음 날.조정에서 황제는 폭노했고 대신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힘겹게 해산 시기까지 버틴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평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황후께서 후궁들에게 골고루 총애를 나눠주라고 폐하를 압박하였다던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것 같군.”“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황귀비 한 사람만 총애하지 않았나.”황제의 서
영화궁봉구안이 한창 저녁을 들고 있을 때, 최 상궁이 보신탕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강빈 마마께서 보내신 보신탕입니다. 꼭 드셔보시라고 하더군요.”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식탁을 가리켰다.“저기 두거라.”최 상궁이 나간 뒤, 연상은 재빨리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조금 전 올라온 탕에서 적수관음이라는 독이 발견되었고 봉구안도 황궁에 들어온 뒤로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먹기 전에 독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확인 결과, 은침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봉구안은 숟가락으로 탕을 떠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적수관음의 독을 해독하는 약이 들었군.”“해독약이요? 마마, 설마 강빈이….”봉구안은 담담히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뻔하지. 사람 시켜서 독을 넣은 사람이 강빈이야.”“예? 그런데 왜….”“애증이 분명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그렇지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강빈의 성격은 그녀가 알던 옛 지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다.“마마, 매수당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급할 건 없어. 영화궁의 구멍이 어디 한둘이겠니.”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최근 궁 안에 자객을 잡는다고 외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그래.”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겼다. 다음 번 해독 과정은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상화전.강빈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병풍을 바라보았다.시종이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왔다.“마마, 해독약은 보신탕에 섞어 보내드렸으니 황후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강빈은 찻잔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다.“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을 황후가 알고 있었다니.”돌아오기 전, 유사양은 그녀에게 전에 황후가 황제에게 간언드리며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바라고 자존심 다 버리고 황귀비 앞에서 아양을 떤다고만 생각했었지.”“사실
조검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황귀비에게 전했고 황귀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후궁들에게는 매달 녹봉이 나오고는 있지만 평소에 하인들에게 포상을 주고 안팎으로 인맥을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비빈들의 뇌물을 잃는다면 크나큰 손해였다.“서 대인 말고 또 누가 영화궁에 뇌물을 보냈는지 알아오거라.”그날 밤, 황제는 서 귀인의 처소를 방문했다.서 귀인은 직접 황제의 반찬 시중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폐하, 어서 드시지요.”소욱은 심드렁하게 수저를 들었다.오늘 밤이 자객과 약속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하지만 지난번에 하마터면 그에게 잡힐 뻔했기에 그녀가 화청궁에 다시 방문할지는 미지수였다.“폐하….”서 귀인은 황제의 국그릇을 챙겨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뭇 여자들과 식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꼈던 참이었고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국그릇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올린 국에는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다른 비빈들은 폐하와의 한끼 식사에 만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황제가 절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이었다.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서 귀인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그녀는 젊은 황제의 준수한 얼굴을 취한 듯 올려다보았다.곧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자신의 처소에 묵도록 만들 것이다.하지만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다.“이만 자진궁으로 돌아가자.”소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 귀인은 조급해졌다.“폐하! 신첩이… 신첩이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노래만 듣고 가시지요.”소욱은 짜증스럽게 서 귀인을 노려보며 말
서왕은 곧장 완부옥이 원하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서왕부에서 일하는 여종이었다.그는 방 밖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한 시진 후.안에서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들렸다.이내 문이 열리고, 여종이 조심스레 나왔다.서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대야, 그 안에는 새빨간 핏물이 가득했다.서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부인은 괜찮느냐?”정충을 해독하려면 사람과 동침하는 것이 전부일 터.그런데, 이 많은 피는 대체…?여종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부인께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소첩은 부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서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이 여종은… 어디까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정말로 목욕만 시킨 것이냐?”여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서왕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완부옥이 ‘여자를 데려오라’고 했던 말이… 해독과는 다른 의미였던 것인가?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강렬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그리고 욕조 안,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완부옥이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그러나 서왕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촉촉한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였다.“무슨 일이세요? 제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보였다.서왕은 차갑게 말했다.“대체 여종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완부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저… 저를 도와 몸 속 독들을 빼달라고 했을 뿐이예요.”서왕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정충의 모충이 죽으면, 즉시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이를 막으려면, 온몸의 혈을 돌려 독을 모두 빼내야만 했다.하지만 이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그게 전부냐?”완부옥은 피식 웃었다.“아니면 뭐가 더 있어야 하죠?
“콱!”완부옥의 바늘이 서왕의 몸을 찌르는 순간, 그의 몸속에 있던 정충이 폭발하였다. 곧바로 서왕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서왕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치 몇 달 동안 짓눌려 있던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정충이… 드디어 사라졌다.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독이 이렇게 쉽게…그러나 바로 그때, 눈앞에서 완부옥이 마른 낙엽처럼 휘청이더니 앞으로 쓰러졌다.서왕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방금 전까지 멀쩡하지 않았던가?그녀를 내려다보니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 사이로 아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제야 서왕은 깨달았다. 부작용이었다.정충을 심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몸에도 ‘모충’을 함께 심어야 한다.그런데 이제 그의 몸속에 있던 ‘자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서왕은 정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목숨에 지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는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유화! 어의를 불러...”“그럴 필요 없어요.”서왕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완부옥이 힘겹게 그를 저지했다.여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그냥… 저를 눕혀 주세요.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서왕은 마지못해 그녀의 뜻을 따랐다.완부옥은 자리에 눕자,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그녀는 서왕을 올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옷 안 입으셨어요? 저를 유혹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장막 밖으로 나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주워들었다. 한 겹 한 겹 옷을 입는 손길이 빠르면서도 능숙했지만,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그가 옷을 정리하는 동안, 완부옥은 아픈 감각을 잊으려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과거를 떠올렸다.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어머니
유영은 서여국 사신 자격으로 입궁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다.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외출 중이었고,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궁인들은 즉시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궁 안.황후가 부재한 궁에서는 녕비가 후궁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었다.“서여국 사신이 찾아왔다고?”소식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녀는 후궁의 일만 맡을 뿐, 국사에는 개입한 적이 없었다.‘이런 큰 상황을 내가 처리할 수는 없어.’ “당장 서왕 전화를 모셔오거라!”그녀는 최근 며칠간 겨우 여유를 찾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사신이 찾아오다니.또다시 궁중 연회를 준비하고 사신을 접대해야 한단 말인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이럴 때 황후가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이 궁궐이란 곳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서왕 역시 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는 직접 나서서 유영을 접견했다.유영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그럼에도 서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즉시 사람을 보내 실종된 사신단을 찾도록 명령했다.그제야 유영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신들은 이미 이른 새벽에 성을 빠져나갔으며, 빠르게 말을 달려 이제는 황성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아났다는 사실을 말이다.……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서왕부완부옥은 대문 앞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걸음을 멈추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그 단아하고 정숙하던 여인이 정말 완부옥이 맞단 말인가?"전하~”완부옥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마치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요녀와도 같았다.방심한 순간, 그녀에게 푹 빠져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서왕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더군다나 그는 정충에 걸려 있었기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하지만 완부옥은 더욱 매혹적인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숙연과 관련된 진실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소욱 역시 국사를 돌봐야 했기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갈라섰다.황성그날, 유영 모녀는 사신 자격으로 황성에 도착했다.객잔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다음 날, 뜻밖의 사건을 맞닥뜨렸다.이른 아침, 정희가 황급히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어머니! 어머니!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유영은 눈을 크게 떴다.그들과 함께 온 사신단에는 남제의 대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유영은 급히 숙소 곳곳을 살폈다.그러나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마주하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정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어머니, 혹시 우리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간 건 아닐까요?”유영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럴 리 없다.”서여국과 남제는 동맹을 맺은 나라였다.남제가 사신단을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관청에 가야겠다. 당장 신고하러 가자.”관청관청의 아전은 유영 모녀를 이당으로 안내했다.이당은 심문을 벌이는 대당과 달리, 관리가 일반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사적인 곳이기에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했다.관원들은 유영이 서여국의 특사라고 하자, 급히 응대하면서도 속으로 의아해했다.‘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한 적이 없는데…?’관청 측은 그녀에게 국서와 통관 문서를 제출해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그러자 유영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제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죠! 국서와 문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서여국에서 출발할 때, 대신들이 국서를 잃어버릴까 염려해 그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보관했던 것이다.이 순간, 유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혹시… 그들이 서여국을 위협하려는 간첩이었던 건 아닐까?’관청 측은 그녀가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자 즉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 일은 상부에
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야말로 원래 유씨 가문의 장녀, 유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추측일 뿐, 완벽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녀의 가설은 ‘압명’이라는 미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이제야 나이가 맞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황제는 봉 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너야말로 내 여동생이다. 유씨 부부는 너를 ‘대신 희생될 아이’로 삼아 유녕의 신분을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매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다.”봉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남제로 돌아가면, 저는 이 사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입니다.”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봉 부인이 남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불안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때, 봉구안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와 함께 남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여국에 남으시겠습니까?”봉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등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남제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봉구안이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만약 정말 자신이 숙연이라면?그렇다면 서여국 황제는 그녀의 친언니였다.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였다.그녀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이후에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을 터였다.황제는 묵묵히 봉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간절했다.그녀에게 있어 봉 부인은 이미 숙연이었다.이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려온 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
봉 부인은 충격에 휩싸였다.자신이 서여국 황제의 여동생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분명 그녀는 부모님의 친딸이었다.마을의 이웃과 친척들, 모두가 증언할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켜보지 않았던가.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한 장의 그림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유씨 가문의 가족 초상이었다.“이 그림을 보면, 어머니께서는 외조부모님과 닮지 않았습니다.”봉 부인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만약 내가 친딸이 아니라면, 부모님은 왜 나를 키운 것일까?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은 분명 유영의 것이 아니었던가?’혼란스러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그때, 봉구안이 황제를 한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유씨 부부는 첫째 딸을 낳고 그 아이를 ‘유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녕은 태어나자마자 몸이 허약했고, 밤마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악귀에 씌였다’며, 원혼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봉 부인은 이 이야기에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이야기는 들었어. 부모님께서도 내게 말씀하신 적 있지. 나는 마을의 산파에게 받아졌고, 부모님의 친딸이라고 했어. 어릴 적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녔다고도 들었지.”봉구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맞습니다. 유씨 부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손을 쓰지 못했죠. 그러던 중, 마을의 한 무당이 아이의 병은 평범한 약으로는 낫지 않는다고 했다 합니다. 다른 생명을 바쳐 아이의 명을 대신해야 한다고요…”봉 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런 미신을 믿었다는 거니?”“네. 당시 조부모님께서는 절박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유녕’이라는 이름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요. 그때 조부모님께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외조부께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며, 새로운 벼
침전 안.황제는 용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그때 정희가 방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이모님, 어디 가시려고요?”황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방의 수로를 점검하러 가는 길이다.”정희는 황제의 팔을 붙잡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이모님은 정말 백성을 위해 헌신하시네요!”“세상에 이모님처럼 성실한 군주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요, 아까 남제 황후를 봤어요. 그 자가 왜 여기에 온 거죠?”황제는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남제 황후는 황제와 함께 변장하고 각지를 돌며 민심을 살피고 있다. 서여국에도 방문해 두 나라의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온 것이다.”“아, 그렇군요.”정희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황제 폐하도 같이 온 건가요?”그녀는 이모의 건강보다는 남제 황제의 행방에 더 관심을 보였다.그러나 정희는 알아채지 못했다.황제의 입술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그때 모신 상궁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황제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황제는 정희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며 떠나기 전 당부했다.“너와 네 어머니는 궁에서 잘 머물며, 내일 남제로 출발할 준비를 하거라.”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뒷모습을 배웅했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났다.‘이모님은 황제가 왔는지 안 왔는지 말도 안 해 주고 그냥 가버리시다니!’그녀는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남제 황후가 서여국에 왔다는 말을 듣자, 유영의 얼굴이 굳어졌다.“그 여자가 여길 왜 왔지? 혹시 언니를 찾으러 온 건가?”정희는 어머니의 팔을 꼭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머니, 그들 모녀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출사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이번 사절단 파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제 혼인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서여국의 황실 상인이 되어 각국의 교역로를 장악할 기회이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딸이 드물게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 유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맞아. 지금 그런 작은
서여국 황제의 침전 “다들 물러가거라.” 황제는 신하들에게 명령한 뒤, 모신 상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봉구안을 들여라.” 잠시 후, 봉구안이 침전으로 들어섰다. 몸에 꼭 맞는 청색 협소포를 걸친 그녀는 냉정한 기운이 감도는 단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손짓으로 궁녀들과 내관들을 물리쳤다. 모신 상궁만이 남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봉구안은 곧장 침상에 누운 황제를 향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봉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침상 위 황제를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황제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고,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봉구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황제께서 숙연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가 그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황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어머니는 내 부친과 많이 닮…콜록”그러나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갑작스러운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모신 상궁이 급히 앞으로 나서 황제의 등을 받쳐 주었다. 황제는 손수건을 입에 가져다 댔고,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황제는 겨우 숨을 가다듬고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황후… 이리 와 보거라.” 그러나 봉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신 상궁이 다급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황후 마마, 황제 폐하는 마마의 이모님이십니다!” 그 말에 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머니가 숙연이라는 것은 그녀도 의심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확신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미 무언가를 알아낸 것일까? 황제는 힘겹게 손을 들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할 말이 있다.” 봉구안은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
봉 부인은 절망에 빠졌다.모신 상궁이 봉 부인이 의자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봉 부인, 괜찮으십니까?”유영 또한 놀란 척하며 다가왔다.“모신, 어서 어의를 불러! 갑자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시잖아!”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가 도착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봉 부인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깊은 혼란과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한편, 정희는 어머니 곁에서 봉 부인을 노려보았다.그녀의 눈빛 속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감히 입이라도 놀려 봐!’하지만, 설령 황제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결국 자신과 어머니야말로 황제의 진짜 혈육이었다.이 늙은 여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봉 부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만 저는 남제로 돌아가겠습니다.”모신 상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황제 폐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유영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황제께서 왜 모신을 직접 보냈을까?’그녀는 황제가 봉 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 그녀의 의심은 사라졌다.황제는 봉 부인의 부탁을 쉽게 허락했다.봉 부인의 출궁 날.유영은 그녀를 직접 배웅했다.이별의 순간, 유영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가시는 길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방금 전 편전에서, 제가 한 말이 너무 심했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평생을 함께한 자매 아닌가요?”그러나 봉 부인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유영아, 스스로를 잘 돌보고, 이 곳에서도 잘 지내렴.”그녀는 단 한마디만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유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서늘했다.‘잘 돌보아야 하는 건 네 쪽이겠지.’서여국 황제의 침전.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오양련이 그녀 곁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 폐하, 틀림없습니다. 봉